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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8화 8장. 혈란의 시대가 열리다(2)
남궁무진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그의 망막에는 거대한 화마에 집어삼켜진 남궁세가의 전경이 가득 들어오고 있었다.
그 어떤 혈란에도 무너지지 않고, 남궁 성을 쓰는 이들의 든든한 방패가 되어 주던 본가가 불타오르고 있었다.
남궁세가의 저항은 마교라는 거대한 파도에 흔적도 없이 휩쓸려 갔다. 수많은 무인들이 죽어 나갔고, 아직 살아 있는 자들도 이제 한계에 달해 있었다.
“이럴 수가! 어떻게 대남궁세가가……. 믿을 수 없어!”
그는 현실을 부정했다. 아니, 부정하고 싶었다. 하지만 코끝으로 훅 하고 들어오는 혈향이, 세가 내에서 울려 퍼지는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그가 보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게 현실이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 법이지. 남궁세가라고 영원할 거라 생각했다면 오산이지.”
그런 남궁무진을 보며 차갑게 쏘아붙이는 이가 있었다. 바로 요사란이었다.
남궁무진의 시선이 요사란을 향했다.
“마녀!”
“그럴지도 모르지.”
“내 죽어서도 마교를 영원히 저주할 것이다.”
“그러든지.”
요사란이 코웃음을 쳤다.
주르륵!
그 순간 남궁무진의 배를 비집고 선혈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마치 보이지 않는 날카로운 칼로 배를 가르듯 상처는 점점 더 커져 갔고, 피는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바닥에 고이는 핏속에는 잘려나간 내장조각이 섞여 있었다.
“크헉!”
남궁무진이 뒤늦게 고통스러운 신음성을 토해 냈다.
그는 진즉에 요사란에게 중상을 입었다. 그러나 초인적인 인내심과 뛰어난 내공으로 이제까지 버티고 서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마저도 이제 한계에 달했다.
요사란은 비틀거리는 남궁무진을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분명 천하에 보기 드문 뛰어난 재능의 소유자였다. 아마 그에게 시간이 더 주어졌다면 분명 상대하기 쉽지 않은 대적으로 자라났을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여기까지였다. 그의 죽음을 마지막으로 남궁세가는 소멸의 길을 걸을 것이다. 수십 년 전 마교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다른 것이 있다면 마교에는 척관혈이라는 천고의 기재가 살아남아 있어 극적으로 부활시켰다는 것이다. 그가 없었다면 제아무리 마교라도 오늘날의 성세를 다시 되찾지는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남궁세가에는 그런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철저히 발본색원하라. 남궁이라는 성을 쓰는 자들은 단 한 명도 남겨두지 말고 모조리 죽여라.”
신화전의 전주 남현소의 외침이 남궁세가에 울려 퍼졌다. 그의 명령에 마교의 무인들이 눈에 불을 밝히고 남궁세가를 뒤졌다.
“죽어랏!”
“챠앗!”
그들은 어린아이고, 여자고 할 것 없이 찾아내기만 하면 일단 죽였다.
“끄으으! 이 악마들! 너희들의 끝도 좋지 않을 것이다.”
“으아앙!”
사람들의 절규와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화마에 뒤섞여 울려 퍼졌다. 이미 이곳은 인세의 지옥이나 다름없었다.
요사란이 그 광경을 무심히 바라봤다.
‘이러니 신교가 마교로 불리는 것이겠지.’
말리고 싶지도 않았고, 그럴 수도 없었다.
너무나 오랜 세월 마교는 당하고 참아 왔다. 수십 년 동안 쌓인 분노는 너무 거대해서 분출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내부의 불만으로 남게 될 터였다.
쌓인 것은 풀어 줘야 했다.
그것이 오늘날까지 고난을 함께한 신도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였다.
요사란은 고개를 흔들며 걸음을 옮겼다.
남궁세가 밖으로 나가는 요사란을 보며 남현소가 말을 건넸다.
“벌써 가시려오?”
“이미 승부가 기울었는데 여기 남아 있어 뭐할까?”
“뜻밖이구려.”
“뭐가?”
“요 군장이라면 더 남아서 피를 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오.”
요사란의 별호가 혈륜마녀였다. 피의 수레바퀴를 그만큼 굴렸기에 얻은 별호였다. 아직도 마교 내에서 그녀의 별호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남현소는 그런 그녀의 본질이 사라지거나 변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내는 것이다.
요사란이 그에 피식 웃었다.
“그때는 젊었을 때고, 지금은 예전 같지 않아.”
“악양으로 바로 돌아가시려오?”
“그래야지.”
“부디 이번에는 헤매지 마시고 잘 찾아가시길 바라오.”
“그러지!”
요사란이 고개를 끄덕이며 불타는 정문을 건너 사라졌다. 남현소는 더 이상 요사란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그가 진행하는 피의 숙청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남궁 성을 쓰는 최후의 한 사람을 찾아내어 죽이기 전까지는 끝나도 끝난 것이 아니었다.
“모조리 죽여라!”
그의 외침이 불타는 남궁세가 내에 울려 퍼졌다.
그날 남궁세가는 주춧돌 하나 남기지 못하고 강호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남궁세가의 멸문 소식은 들불처럼 강호 전체로 번져 나갔다.
남궁세가가 지배하던 안휘성은 이제 완전히 마교의 손에 넘어갔다. 호남성, 강서성에 이어 안휘성까지 마교의 손에 넘어가면서 중원의 허리가 완전히 끊겼다.
바야흐로 난세가 도래하고 있었다.
***
“이제 어찌하려느냐?”
“절강성에 있는 장흥채(長興寨)로 가렵니다.”
담호의 물음에 황혜령이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제 그녀는 더 이상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비록 목이 상해 목소리가 갈라져 나오긴 했지만, 그래도 감정의 동요는 느껴지지 않았다.
“장흥채?”
“예! 그곳에 피신시킨 노약자들이 있어요. 일단 살아남은 자들을 데리고 그곳에 합류해서 녹림의 전력을 수습할 생각입니다.”
황혜령이 담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담호는 그녀를 보며 하룻밤 사이에도 사람이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어제의 그녀는 눈물 많은 소녀였다. 하지만 오늘의 그녀는 흔들리지 않는 눈빛을 가진 어른이 되어 있었다. 단 하루 만에 부쩍 성숙한 것이다.
“장흥채도 녹림십팔채에 속했던가?”
“아니요. 그곳은 그저 조그만 산채에 불과합니다.”
“왜 다른 녹림십팔채로 가지 않고?”
“그곳은 마교의 목표가 될 확률이 높아요. 무엇보다 아빠가 돌아가신 지금 거대 산채의 채주들이 제 말을 들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일단은 그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부터 녹림도들을 규합할 생각이에요.”
“…….”
“죄송해요, 오라버니. 이렇게 된 이상 마땅히 오라버니를 따라 화산으로 가는 게 맞는데, 제 마음이 그렇게 시키질 않네요. 제 능력이 부족해 아빠처럼 녹림도들을 전부 규합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힘이 닿는 한 그들을 위해서 살고 싶어요.”
담호가 황혜령을 빤히 바라봤다.
마냥 어리게만 보였던 여동생은 이제 어엿한 강호인이 되어 있었다. 이제 그녀는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그녀의 의지로 스스로 갈 길을 정했으니 존중해 줘야 했다.
“나에게 미안해할 필요 없다.”
“오라버니가 있어 얼마나 든든한지 몰라요. 하지만 언제까지 오라버니에게만 의지할 수는 없어요. 저에겐 이들 또한 가족이나 마찬가지예요. 저는 이들과 함께하겠어요.”
황혜령의 시선이 뒤쪽에 도열해 있는 녹림도들을 향했다.
아비인 황경문과 생사고락을 함께한 이들이었다. 마지막까지 황경문의 곁을 지킨 사람들이기도 했다. 황혜령에겐 그들이 친구요, 형제나 마찬가지였다.
담호는 말없이 황혜령과 녹림도들을 바라봤다.
이제 자신이 그들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홀로서기를 시작하는 어린 동생은 이제부터 온갖 고난에 직면할 것이다. 그 모든 것을 스스로의 힘으로 헤쳐 나가야 했다. 그리고 담호는 그 모습을 묵묵히 지켜볼 생각이었다.
그때 묵일광이 담호에게 다가와 말했다.
“아가씨는 제가 지키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형님.”
“그래!”
담호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황혜령을 향한 묵일광의 마음을 알기에 담호는 그를 믿었다. 매화신단을 복용한 후 묵일광은 단번에 자신을 가로막는 벽을 뚫었다. 이제 깨달음만 뒷받침된다면 황경문의 뒤를 잇는 녹림의 초고수가 될 것이다.
“부탁하마.”
“제 목숨을 바쳐 아가씨를 보필하겠습니다.”
묵일광이 커다란 주먹으로 자신의 가슴을 두들겼다.
그때 방진보가 황혜령에게 다가갔다.
“누나!”
“진보야!”
“힘들면 언제든 화산으로 와요. 화산의 문은 언제나 열려 있으니까.”
“너에겐 항상 고마울 뿐이야.”
황혜령이 방진보의 두 손을 잡았다. 방진보도 힘주어 그녀의 손을 잡았다.
이젠 정이 들 대로 들어 친남매나 마찬가지인 두 사람이었다. 그들은 그렇게 헤어짐을 아쉬워했다. 하지만 지금의 헤어짐이 영원한 이별이 아님을 알기에 서로의 손을 놓았다.
황혜령이 담호를 바라봤다.
“오라버니, 부디 조심하세요. 이곳에서 절강성으로 가는 길이야 마교가 아직 장악하지 못했지만, 오라버니가 돌아가시는 길은 분명 마교의 무인들이 득실할 거예요. 오라버니를 믿지만 그래도 부디 조심하고, 또 조심하세요.”
“그러마!”
황혜령이 담호를 가볍게 껴안으며 귀엣말로 속삭였다.
“그럼 먼저 갈게요, 오라버니.”
“잘 가거라.”
황혜령이 뒤돌아섰다. 그 뒤를 묵일광과 녹림의 무인들이 따랐다. 담호는 말없이 그들이 황산을 내려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방진보가 그런 담호의 곁으로 다가왔다.
담호는 아무렇지 않은데, 방진보의 눈엔 어느새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마침내 황혜령과 녹림의 무인들이 모습이 보이지 않자 담호가 입을 열었다.
“우리도 가자.”
“예!”
두 사람은 황혜령 등이 내려간 곳 반대편 길로 내려왔다.
황산 곳곳에선 아직도 혈향이 풍기고 있었다.
황경문과 녹림 무인들의 시신은 화장했지만, 마교 무인들의 시신은 고스란히 방치되어 있기 때문이다. 덕분에 까마귀와 산짐승들이 때아닌 포식을 하고 있었다.
방진보의 얼굴에 착잡한 빛이 떠올랐다.
지금 짐승의 밥이 되고 있는 자들 중에는 자신에게 죽은 이도 분명 있을 터였다.
그날 방진보는 처음으로 타인을 죽였다.
아직도 주도를 통해 느껴지던 그 감촉이 생생했다. 두 번 다시 떠올리기 싫을 만큼 느낌이 끔찍해서 아직도 진저리가 쳐질 정도였다.
‘요리를 할 때 쓸 주도를 하나 더 구해야겠어.’
인간을 죽인 주도로 요리를 할 수는 없었다.
방진보는 이제야 자신이 무인의 길에 들어섰음을 실감하고 있었다. 마교와의 싸움은 황혜령뿐만 아니라 방진보의 인생행로도 크게 바꿔 놓고 있었다.
“휴!”
자신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그의 얼굴에 결연한 표정이 떠올랐다.
스스로의 의지로 결정하였기에 되돌아갈 수도 없고, 물릴 수도 없었다. 어차피 앞으로 나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후회 따윈 어울리지 않았다.
방진보는 그렇게 다짐하며 걸음을 옮겼다.
황산 아래 도착해서 흑귀와 방진보가 타고 온 말을 찾았다. 다행히 흑귀와 방진보가 타고 온 말은 함께 있어 찾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다행이다.”
방진보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에 올랐다.
담호는 흑귀에 오르기 전에 앞서 목덜미를 두들겨 주었다.
푸르르!
흑귀가 투정을 부리기라도 하듯이 투레질을 했다. 담호는 그런 흑귀를 잠시 다독여 준 뒤 올라탔다.
“가자!”
“예!”
두 사람은 동시에 말을 달리기 시작했다.
흑귀는 그동안 뛰지 못한 한을 풀기라도 하듯 정말 미친 듯이 달렸다. 그 때문에 방진보는 흑귀를 따라잡느라 죽을 고생을 해야 했다.
덕분에 황산을 떠난 지 하루 만에 장강에 도착했다. 패왕채에 가기 위해 도강했던 바로 그곳이었다. 심지어는 장강을 건널 때 사용했던 쪽배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
두 사람은 말들을 쪽배에 태운 후 장강을 건넜다. 다행히 물결이 잔잔해서 강을 건너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장강 건너편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사위가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방진보가 담호를 올려다봤다.
“오늘은 노숙해야겠는데요.”
“음!”
담호가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방진보가 부지런히 움직이며 노숙할 준비를 했다.
마른 나뭇가지와 풀을 주워와 순식간에 불을 지피고 요리를 할 준비를 끝냈다.
그다음부터는 일사천리였다. 모닥불 위에 솥을 올리고, 금세 그럴싸한 요리를 만들어 냈다. 그사이 담호는 자리를 평평하게 골라 잘 준비를 끝마쳤다.
“형, 이제 드시면 돼요.”
“…….”
담호가 대답하지 않자 방진보가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담호는 모닥불 너머 어둠이 깊게 드리운 수풀을 바라보고 있었다.
“형?”
“나와!”
그 순간 담호의 차가운 목소리가 밤하늘에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