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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9화 8장. 혈란의 시대가 열리다(3)
어둠 속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소리의 주인은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분명 수풀 안쪽에 누군가 있었다. 담호의 곁에 있던 방진보가 잠시 고개를 갸웃하더니 앞으로 나섰다.
“형, 잠시만요.”
그는 곧장 수풀 쪽으로 다가갔다.
“괜찮아! 우린 너희를 헤치지 않을 거야.”
방진보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부드러웠다. 그는 미소를 지은 채 수풀을 계속해서 바라보았다. 그는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렸다.
잠시 후 수풀이 흔들리면서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무척이나 고생을 한 듯 꾀죄죄한 몰골의 소년들이었다.
형으로 보이는 아이는 이제 겨우 열서너 살 정도 되어 보였고, 동생으로 보이는 아이는 갓 열 살을 넘겨 보였다.
형으로 보이는 소년은 동생을 등 뒤로 감춘 채 경계의 눈빛으로 담호와 방진보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들의 눈빛에 담긴 적대감에 방진보가 살짝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초라한 몰골을 보니 고생을 많이 해서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희들은 누구니?”
방진보의 물음에도 형제는 입을 꾹 다문 채 대답을 하지 않았다. 형은 여전히 방진보와 담호를 경계하고 있었다. 하지만 동생의 눈은 방금 전 방진보가 만든 음식에 고정되어 있었다.
꼴깍!
마른침 삼키는 소리가 천둥처럼 울려 퍼졌다. 그러자 동생이 얼굴을 붉히며 형의 등에 숨었다.
방진보가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아, 배고픈 모양이구나. 아직 음식이 남았는데 좀 먹을래?”
“우린 거지가 아니에요.”
“네!”
형과 동생이 동시에 각자 다른 대답을 내놨다.
“너?”
형이 고개를 돌려 동생을 노려봤다. 그러자 동생의 고개가 움츠러들었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여전히 음식에 고정되어 있었다.
“배고파, 형!”
“너?”
“벌써 이틀을 굶었잖아. 난 진짜 배고파, 형!”
동생의 말에 잔뜩 치켜 올라갔던 형의 눈썹이 아래로 축 쳐졌다.
꼬르륵!
그의 배 속에서도 허기진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괜찮아! 음식이 남으니까 좀 나눠 줄게. 이리 와!”
방진보는 형제의 자존심이 상하지 않게 돌려 말하며 둘을 자리로 이끌었다. 형제는 못 이기는 척 그를 따랐다.
방진보는 형제들에게 남은 음식을 한 그릇씩 떠 줬다. 그러자 동생은 허겁지겁 먹었고, 형은 그래도 일말의 의심이 남아 있는 눈빛으로 조금씩 떠먹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형의 눈이 크게 떠지며 동생처럼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얼마나 오래 굶었는지 순식간에 그릇의 바닥이 드러났다. 방진보는 솥을 박박 긁어 남은 음식을 모두 형제들에게 주었다.
일단 배 속에 기름진 음식이 들어가자 그나마 유지하고 있던 이성마저 모조리 날아갔다. 그들은 더 이상 담호와 방진보를 신경 쓰지 않고 음식을 먹었다.
“체하겠다. 천천히 먹어.”
방진보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형제를 바라봤다. 하지만 형제는 아랑곳하지 않고 음식에만 집중했다.
방진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담호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 순간 담호는 입을 굳게 다문 채 소년들을 무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담호는 소년들이 음식을 다 먹길 기다려 입을 열었다.
“남궁세가냐?”
“…….”
순간 소년들의 얼굴이 얼음처럼 굳었다. 그들의 눈동자는 마치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형은 급히 동생을 등 뒤로 숨기며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꺼내 들었다.
“마교인가? 여기까지 추적해 오다니 실로 지독하구나.”
형의 얼굴엔 살기가 피어올랐다. 하지만 미숙한 무인의 살기는 담호는커녕 방진보에게도 두려움을 주지 못했다.
손발은 덜덜 떨리고 있었고, 얼굴엔 두려운 빛이 가득했다. 애송이 티를 벗지 못한 모습이었다. 그런 주제에 동생을 지키려고 등 뒤로 필사적으로 숨기는 모습은 높게 평가해 줄 만했다.
방진보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남궁세가가 왜?”
“가증스럽구나. 본가를 멸문시킨 주제에 가증스러운 표정을 짓다니. 설마 우리가 먹은 음식에 독을 탄 것은 아니겠지?”
“남궁세가가 멸문해?”
“다 알면서 왜 모르는 척을 하는가? 무공을 익힌 자는 물론이고, 익히지 않은 여자와 어린아이들까지 무차별적으로 학살해 놓고.”
어느새 형의 눈에는 눈물방울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그에 방진보가 더욱 당황했다.
황산의 패왕채에 있느라 남궁세가 소식은 까마득하게 몰랐다. 그래도 어느 정도는 남궁세가가 버틸 수 있을 거라 생각했기에 놀라움은 더욱 컸다.
담호의 눈빛이 깊이 가라앉았다. 그 역시 남궁세가가 벌써 멸문한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형은 검으로 담호와 방진보를 위협했다.
“우리 형제는 마교에 수치를 당하느니 차라리 목숨을 끊고 말겠다.”
“우리는 마교가 아닌데.”
“거짓말하지 마라. 우리가 그런 거짓말을 믿을 줄 아느냐?”
“정말인데.”
방진보가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검을 들고 있는 형의 자세는 어딘지 모르게 어설펐다. 무공을 익힌 것은 분명하지만, 아직 실전을 경험하지 못한 어린아이의 모습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제압할 수 있었지만, 방진보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겁을 잔뜩 집어먹은 아이들을 상대로 무공을 펼칠 수는 없었다.
그는 어떻게 하든 대화로 아이들을 설득하려 했다. 하지만 아이들이 워낙 경계하고 있어 그의 말이 통하지 않았다.
그때 담호가 입을 열었다.
“내 이름은 담호다.”
“…….”
순간 일대의 공기가 차갑게 식었다.
형이 눈을 끔뻑거렸다. 자신이 환청을 들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뭐, 뭐라고?”
“무림맹에서 남궁창을 죽인 이가 바로 나다.”
“저, 정말?”
“남궁수도 죽이고, 검왕대도 내 손으로 죽였지.”
“이 원수!”
“그래도 마교도는 아니야.”
담호의 대답에 형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런 두 사람의 모습에 방진보가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도대체 형은…….’
모든 것이 엉망이었다. 도대체 이 상황을 어떻게 수습할 것인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주, 죽이겠다. 당신 때문에 남궁세가가 무너졌어. 당신만 아니었어도…….”
“누가 그런 말을 하더냐?”
“모두가 그랬어. 당신 때문에 가주님과 주요 전력이 모두 죽어서 본가의 힘이 크게 약화되었다고. 그래서 마교에 멸문을 당하는 거라고.”
“잘못 알고 있군.”
“뭐, 뭐가 말이냐?”
“남궁세가가 멸문한 것은 오롯이 남궁세가가 약하기 때문이야.”
“거짓말하지 마라. 남궁세가는 강해! 안휘성의 패자란 말이야. 당신 때문에 전력만 약화되지 않았으면 절대로 그렇게 허무하게 무너지지 않았을 거야.”
“가정은 많지. 이러지 않았다면, 저랬다면……. 그런 건 아무런 의미도 없어.”
“이익!”
“그래서 억울한가?”
담호의 무심한 말이 형제의 가슴에 큰 상처를 남겼다. 그들의 눈에 금세 눈물이 그렁거렸다.
“소가주도, 장로님들도, 형들도 모두 죽었어. 모두 죽었다고. 그럼 나는 누굴 원망해야 해?
“나약한 너 자신을.”
“이익!”
“어리광 부리지 마라. 무가의 무인이라는 것은 나이의 많고 적음에 상관없이 언제든 생사를 오갈 수 있는 거니까.”
“그, 그건…….”
“힘이 약하면 짓밟히고 무너지는 것이고, 강하면 모든 것을 누리는 거야. 남궁세가도 다를 것 없어. 네가 남궁세가에서 누린 그 모든 혜택은 남궁세가가 다른 문파를 짓밟으면서 빼앗은 것들이야. 그런 주제에 너 혼자만 피해자인 척, 약자인 척하지 마.”
담호로서는 드물게 길게 말을 했다. 하지만 그의 말은 비수처럼 사정없이 형제의 가슴을 후벼 팠다.
형은 할 말을 잃었고, 동생은 큰 눈을 끔뻑거리며 담호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방진보가 새삼스러운 눈으로 담호를 바라봤다. 담호의 성격에 이 정도로 말해 주는 것도 상당한 배려에 속했기 때문이다.
급기야 형의 눈에 고여 있던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는 담호가 싫었다. 원망스러웠다.
가문의 구성원들은 둘 이상만 모이면 담호를 욕하고 저주했다. 그 때문에 철옹성 같던 남궁세가가 이렇게 흔들리는 거라고.
형 역시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담호를 싫어하고 미워했다. 하지만 막상 담호의 이야기를 들으니 이제까지 가지고 있던 가치관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형이 이를 악물었다. 동생이 그런 형의 손을 꽉 잡으며 올려다봤다.
“형?”
“괜찮아! 괜찮을 거야. 어떤 일이 있어도 너는 내가 보호할 테니까.”
“응!”
동생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형이 담호를 바라보는 눈에 더욱 힘을 주었다.
“당신은 나를 죽일 건가요?”
말투가 바뀌었다. 조금은 기가 꺾인 모습이었다.
“내가 왜 너를 죽일 거라 생각하지?”
“남궁세가와 당신은 불공대천지 원수니까요.”
“남궁세가는 그렇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에게 남궁세가는 그 정도로 대단한 곳이 아니야.”
“크윽!”
담호의 대답에 형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반박할 수가 없었다. 실제로 그랬으니까.
가주가 담호에게 큰 상처를 입고 돌아와 죽었고, 검왕대를 비롯한 수많은 전력들이 박살 나고 무너졌다.
적어도 담호에게 남궁세가가 큰 위협이 되지 못하는 것은 확실했다. 하물며 마교에 남궁세가가 멸문당한 지금은 더욱 그랬다.
남궁세가를 장악한 마교는 실로 지독했다. 그들은 남궁세가의 생존자 마지막 한 명까지 찾아내어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들을 피해 이곳까지 도주한 것도 기적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넓고 넓은 안휘성에서 하필 담호와 조우하게 된 것은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몰랐다.
그의 아비는 남궁세가의 장로 중 한 명이었다. 그는 남궁세가의 장서각(藏書閣)을 책임지는 각주였다. 장서각은 남궁세가의 온갖 무서를 모아 둔 곳이었다.
남궁세가가 무너지기 직전 아비는 그와 동생을 탈출시키며 말했다.
―반드시 영휘를 지켜야 한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약속해다오.
형이 동생을 바라보았다.
동생의 이름은 남궁영휘였다.
어린 시절부터 몸이 약해 남궁세가의 무공을 일초반식도 익히지 못했을 정도였다. 반면 형인 그는 무공에 제법 재능이 있어 어느 정도까지 익힐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자신의 재능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그저 남들보다 조금 더 나을 뿐이지, 남궁세가의 부흥을 책임질 재목은 되지 못했다. 그 사실을 알기에 마교에 쫓기는 현실이 더욱 괴롭고 무서웠다.
‘과연 내가 끝까지 영휘를 지킬 수 있을까? 아니, 나약한 생각을 하면 안 돼. 반드시 지켜야 돼. 내 영혼을 바쳐서라도.’
그가 담호를 바라봤다.
어둠을 등지고 앉은 괴물 같은 사내.
그 한 명 때문에 천하의 남궁세가가 흔들렸고, 그 때문에 마교에 손쉽게 함락되고 말았다. 그의 입장에선 원수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하지만 지금의 자신에게 그가 필요했다.
“제 이름은 남궁선휘입니다.”
“그래서?”
“저희를 지켜 주십시오.”
형, 남궁선휘의 말에 담호가 그를 빤히 바라봤다. 그에 남궁선휘의 얼굴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강호의 절정고수도 정면으로 받기 힘든 것이 담호의 눈빛이었다. 아직 어린 소년에 불과한 남궁선휘가 담호의 눈빛을 마주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담호의 무심한 두 눈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남궁선휘는 심장이 멎고 눈알이 터져 나갈 것 같았다. 그래도 남궁선휘는 담호의 눈빛을 피하지 않았다.
“영휘는 남궁세가의 마지막 희망입니다. 그를 지켜야 합니다.”
“내가 왜?”
“당신은 남궁세가에 빚이 있지 않습니까?”
“빚?”
“네!”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
남궁선휘가 입술을 힘껏 깨물었다.
자신도 억지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가 기댈 수 있는 것은 담호밖에 없었다. 그래서 더욱 뻔뻔해지기로 했다.
“전 그렇게 생각해요. 당신은 빚이 있어요. 그게 아니라면 우리를 버려도 좋아요.”
담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남궁선휘의 등 뒤에 숨어 있는 남궁영휘에게 향했다.
여전히 겁먹은 얼굴이었다. 한편으로는 담호를 향한 숨길 수 없는 호기심이 담겨 있기도 했다.
담호가 남궁영휘의 눈을 한참이나 바라볼 때였다.
“이쪽이다.”
“놈들의 흔적이 이곳으로 이어졌다.”
“저기 불빛이 보인다.”
갑자기 형제가 나타난 방향에서 시끄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남궁선휘의 안색이 싹 변했다.
“마교예요. 그들이 저희를 추적해 왔어요. 어서 피해야 해요.”
그들 형제를 추적하기 위해 동원된 마교의 무인들만 십여 명이 넘었다. 형제들의 무공 수위를 감안할 때 과한 전력이었다. 그만큼 마교에서는 남궁세가의 마지막 씨까지 확실히 제거할 작정이었다.
그 순간 담호가 몸을 일으켰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남궁영휘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너.”
“예?”
“내 사부와 닮았군.”
“제가요?”
남궁영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담호가 목소리가 들린 어둠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남궁영휘는 그런 담호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담호의 눈빛이 어둠 속에서 일렁이고 있었다.
남궁영휘는 학도사의 재목이었다. 현소 진인과 닮은 눈빛이 그 사실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그 조그만 머릿속에 무엇이 들었는지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타다닥!
불빛을 보고 마교의 고수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거세게 타오르는 불속을 향해 뛰어드는 부나방처럼. 그리고 담호는 그들을 집어삼키는 거대한 불길이 되었다.
콰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