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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화 8장. 혈란의 시대가 열리다(4)
남현소가 서늘한 시선으로 남궁세가를 바라봤다.
남궁세가는 그야말로 철저히 파괴되었다. 수많은 전각군들이 불타거나 부서지고 온전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겨우 몇 개뿐이었다.
그나마 온전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전각으로 은밀히 모여드는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바로 마교의 교리를 전파하는 중천의 교도들이었다.
남현소 등이 이끄는 무력이 안휘성을 제압했으니, 이젠 저들이 안휘성에 마교의 교리를 전파할 차례였다.
마교가 그동안 새로이 정립한 교리는 무척이나 휘발성이 강해서 일반에 쉽게 전파됐다. 그런 면에서 남현소는 중천의 역할이 무척이나 컸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있었기에 무력으로 점거한 곳을 확실히 마교의 것으로 만들 수 있었다. 인정하기 싫었지만, 교리를 전파하는 중천의 역할은 그만큼 지대했다.
남현소는 중천을 지킬 최소한의 인원만을 남기고 본단으로 돌아갈 것을 결정했다. 그들의 역할은 마교의 적을 파괴하는 것이지, 점령한 곳을 수성하는 것이 아니었다.
같이 남궁세가를 공략했던 금마각과 혈륜마녀 요사란 등은 이미 이곳을 떠난 지 오래였다. 그리고 이젠 신화전 차례였다.
남궁세가 곳곳에 흩어져 있던 신화전의 무인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남현소는 수하들을 무척이나 엄격하게 다뤘다. 특히 규율을 엄격하게 적용해서 정해진 시간에 늦는 자를 결코 용서하지 않았다. 때문에 신화전의 무인들이 집합 시간에 늦는 경우는 절대 없었다.
남현소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분명 제 시간에 집합하라 명령을 내렸는데, 빈자리가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된 거지?”
자연 그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남궁세가의 생존자들을 추적하는 자들 중 몇 명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부관이 급히 대답했다. 잠시라도 망설이는 순간 목이 날아간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직도 생존자를 다 처리하지 못했단 말인가?”
“죄송합니다. 쥐새끼처럼 교묘하게 빠져나간 자들이 몇 명 있는데, 금방 처리하고 돌아올 겁니다.”
“흠!”
남현소가 팔짱을 낀 채 부관을 바라봤다. 그런 그의 얼굴은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마치 식사를 맛있게 하고나서 이빨 사이에 찌꺼기가 낀 것 같은 찝찝함 때문이었다.
“잠시만 기다리시면 곧 합류할 겁니다.”
부관이 땀을 뻘뻘 흘리며 그렇게 대답했다.
그 역시 마교 내에서 이름난 고수 중 한 명이었지만, 남현소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남현소는 그와 비교할 수 없는 고수인 데다가 직속상관이었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남현소의 눈치만 봤다.
그때였다.
“그들은 절대 돌아오지 못할 걸세.”
갑자기 차가운 음성이 그들의 뒤쪽에서 흘러나왔다.
남현소의 눈에 기광이 감돌았다. 목소리가 들려오기 전까지 그의 기척을 감지조차 못했기 때문이다.
그가 서서히 몸을 돌렸다. 그러자 마치 검은 날개로 온몸을 감싼 것 같은 모습의 괴인이 보였다.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꿈틀거리는 검은 날개는 바로 마룡혈포(魔龍血袍)였다.
“흑사자시구려.”
“오랜만이군, 남 전주.”
마룡혈포의 주인은 바로 흑익사왕 진도휘였다. 그의 등장에 남현소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예까지 따라오셨소이까?”
그의 얼굴엔 불쾌한 기색이 역력했다.
흑백사자는 교주의 좌우 날개라 할 수 있었다. 그들은 교주의 지근거리에서 보좌를 하며 눈과 귀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그 말은 곧 그들이 감시역이나 다름없다는 뜻이었다.
누구나 감시받는 것을 싫어한다. 특히 남현소처럼 강자일수록 타인에게 감시받고, 통제받는 상황을 끔찍이도 싫어할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진도휘를 대하는 그의 태도는 까칠할 수밖에 없었다.
진도휘의 눈빛이 깊이 가라앉았다. 자신을 대하는 남현소의 태도가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굳이 변명을 할 생각은 없었다. 남현소의 짐작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허! 교주께서는 그리도 우리를 못 믿는 겁니까?”
“말조심하도록. 그분은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확인하고 싶은 걸세.”
진도휘의 목소리가 차가워졌다. 순간 일대의 공기마저 싸늘히 식었다. 그의 가공할 공력에 남현소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와 자신 간의 격차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의 목소리가 절로 누그러들었다.
“알겠소! 그런데 왜 굳이 모습을 드러내신 것이오? 그냥 평상시처럼 몰래 살펴보시다가 은밀히 가시지 않고.”
“자네에게 알려 줄 사실이 있어서라네.”
“그게 무엇이오? 혹시 우리 아이들이 어찌 되었는지 알려 주려는 것이오.”
“그렇다네.”
“그렇다면 말해 보시구려. 우리 아이들이 왜 돌아오지 못하는 것이오?”
“그들은 권마에게 당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네.”
“권마?”
순간 남현소의 미간에 깊은 골이 패였다. 권마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갑자기 전신의 피가 싸늘히 식었기 때문이다.
진도휘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다네! 권마가 패왕채에 나타났네.”
“패왕채?”
“그래! 자네들의 뒤처리를 하느라 패왕채를 한참 토벌하고 있을 때 그가 나타났네.”
“그래서 어떻게 되었소?”
“어떻게 된 것 같나?”
“이기지는 못한 모양이구려.”
“맞네!”
“최선을 다했소?”
“글쎄!”
진도휘가 말끝을 흐렸다.
그에 남현소는 진도휘가 전력을 다하지 않았음을 직감했다.
“왜 전력을 다하지 않으셨소?”
“자신할 수 없었네!”
“자신?”
“그를 제압하려면 나 역시 모든 것을 걸어야 했거든.”
“그 정도였소?”
“그 정도의 남자라네. 권마라는 무인은.”
“으음!”
담호를 인정하는 듯한 진도휘의 말에 남현소의 얼굴이 더욱 딱딱하게 굳었다. 그가 아는 진도휘는 무척이나 광오해서 결코 다른 누군가를 쉽게 인정하는 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마교 내에서도 그가 인정하는 무인은 그리 많지 않았다. 기껏해야 사대군장이나 칠대마인, 그리고 내원의 수장들 정도였고, 그중에서도 사대군장을 가장 높이 평가했다.
“정리를 해 보자면 패왕채에 그가 나타났고, 남궁세가의 떨거지들을 추격하던 내 수하들과 부딪쳤을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구려.”
“내 생각은 그렇다네.”
“그래서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요? 수하들을 전부 이끌고 협공이라도 하라는 거요?”
“그 반대라네. 절대 그를 건들지 말라는 말을 하고 싶었네.”
“…….”
그렇지 않아도 굳어 있던 남현소의 얼굴에 커다란 균열이 갔다. 하지만 진도휘는 냉혹했다.
“이건 부탁이나 권유가 아니라 명령일세. 별도의 명이 있기 전까지는 절대 그와 격돌하지 말게.”
“무슨 뜻이오? 설마 이 남현소가 권마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오?”
“굳이 그와 불필요한 충돌을 할 필요가 없다는 뜻일세.”
진도휘의 설명에도 남현소는 굳은 표정을 풀지 못했다. 아니, 풀 수가 없었다. 이미 빈정이 상할 대로 상했기 때문이다.
마교의 서열상 흑백사자가 교주 바로 밑이라고 하지만, 그렇다고 마교의 모든 무인들에게 절대적으로 우위에 있는 것은 아니었다.
신화전의 전주인 남현소 정도가 되면 그 어떤 이도 결코 우습게 볼 수 없었다.
남현소가 진도휘를 노려봤다. 하지만 마룡혈포에 싸여 있는 진도휘의 표정을 읽을 수는 없었다.
“내 말 명심하게. 절대 그와 함부로 격돌하지 말게. 굳이 자네가 나서지 않아도 그는 그리 오래가지 않을 걸세. 그러니 굳이 전력을 낭비하지 말게.”
“…….”
“대답하게.”
“알겠소!”
남현소가 어쩔 수 없이 대답했다. 그의 표정이나 눈빛은 여전히 수긍하는 빛이 아니었다. 하지만 진도휘는 이 정도로 만족하기로 했다.
명을 내리긴 했지만, 신화전의 전주 정도 되면 완전히 강제하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진도휘의 몸을 휘감고 있는 마룡혈포가 더욱 거세게 일렁였다.
‘권마는 결코 즉흥적으로 상대할 수 있는 자가 아니야. 그를 사냥하려면 치밀한 계획과 많은 준비가 필요해.’
직접 손속을 나눠 보고 내린 결론이었다.
권마는 강했다.
무엇보다 젊었다.
젊다는 것은 큰 무기였다. 끝없는 체력과 무한한 투지를 발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진도휘 수준에 이른 고수들의 가장 큰 단점은 나이가 많다는 것이다. 그가 담호와 생사결을 내지 않은 것도 마찬가지 이유였다. 승부를 장담할 수 없기에 목숨을 거는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진도휘 정도 나이를 먹게 되면 확실하게 승부를 장담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결코 모험을 하지 않는다. 그가 움직이는 것은 최소 팔 할의 승산이 있을 때뿐이었다.
진도휘는 담호와 진정으로 모든 것을 놓고 싸웠을 때의 승산을 육 할 정도로 봤다. 자신의 우세였지만, 조그만 변수에도 언제든 뒤집힐 수 있는 애매한 수치였다. 그래서 그는 물러섰다.
“권마를 사냥하는 일은 군사와 의논한 후 빈틈없는 계획을 수립한 후 진행하겠네. 그러니 권마와 부딪치는 일이 없도록 최대한 주의하게나.”
“알겠소!”
“그럼 그렇게 알고 물러가지. 자네도 최대한 빨리 본단으로 귀환하게나.”
진도휘는 남현소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몸을 돌렸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남현소의 얼굴에 굴욕적인 표정이 그대로 드러났다. 하지만 진도휘는 그런 남현소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그대로 몸을 날려 사라져 갔다.
휘라락!
그의 몸을 덮고 있는 마룡혈포가 마치 커다란 검은 날개처럼 활짝 펴지는가 싶더니 이내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남현소는 진도휘가 사라진 방향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가 입을 연 것은 진도휘가 사라지고 나서도 한참이 지난 후였다.
“중오야.”
“예! 전주님.”
부관 유중오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아이들을 풀어라.”
“예?”
유중오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남현소를 바라봤다가 핏발선 눈동자와 귀기를 보고 급히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의 귀로 살기 어린 남현소의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당장 혈륜마녀를 찾아.”
“요 군장님 말씀입니까?”
“그래! 길치니까 그리 멀리 가지 못했을 거야. 그녀를 찾아서 내 말을 전해.”
“뭐, 뭐라고 말입니까?”
유중오가 자신도 모르게 물은 후 마른침을 꼴깍 삼키며 남현소를 바라봤다.
남현소의 눈에 어린 귀기가 더욱 짙어졌다.
“빚을 갚으라고.”
***
남궁선휘가 흘깃 곁눈질을 했다. 그의 은밀한 시선이 향한 곳 끝에는 바로 담호가 있었다.
담호는 흑귀를 탄 채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거칠게 헝클어진 검은 머리카락, 어둠처럼 검은 장포, 그리고 그를 태우고 있는 칠흑 같은 새까만 말.
그 모든 것이 실로 공포스럽게 느껴졌다.
부르르!
남궁선휘는 간밤에 보았던 광경을 떠올렸다.
그것은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났다.
그토록 무시무시한 기세를 발산하며 달려들던 흉포한 무인들이었다. 그들은 남궁세가의 무인들을 수없이 죽인 엄청난 고수들이었다. 그런 고수들이 그의 눈앞에서 피 떡이 되어 사방으로 핑핑 날아갔다. 그리고 두 번 다시 움직이지 못했다.
남궁선휘는 꿈을 꾸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만큼 그의 눈앞에서 일어난 일은 비현실적이었다.
마교의 무인들이 약한 것이 아니었다. 담호가 지나치게 강한 것이었다. 남궁선휘는 인간의 육체가 어디까지 강해질 수 있는지, 그 한계를 담호를 통해서 엿보았다고 생각했다.
‘가주께서 그에게 당한 것도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니었어. 저런 자를 어떻게 당한단 말이야?’
그에게 있어 담호는 끔찍한 악몽이었다.
같은 공간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숨이 턱턱 막혀 올 정도였다. 그래도 그는 담호 곁에 악착같이 붙어 있겠다고 생각했다.
남궁선휘가 방진보의 곁에 붙어 있는 남궁영휘를 바라봤다. 남궁영휘는 유독 방진보를 잘 따랐다.
무슨 생각인지 모르지만 담호는 남궁선휘 형제를 내치지 않았다. 그들에게 시선을 주지도 않았지만, 따라오는 것까지 말리지는 않았다. 그런 담호를 대신해 형제를 챙기는 이가 바로 방진보였다.
그가 말에서 내리며 말했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내가 걸어갈 테니 너희들은 내 말에 타.”
“정말요?”
남궁영휘가 반색을 했다.
말을 타고 있는 두 사람을 따르느라 지칠 대로 지쳐 있었기 때문이다. 방진보의 말에 올라타려던 남궁영휘가 갑자기 동작을 멈추고 남궁선휘를 바라봤다.
“형?”
“너는 타. 나는 안 탈 거야.”
남궁선휘가 입술을 질근 깨물었다.
“왜?”
남궁영휘가 커다란 눈을 끔뻑거렸다. 가문을 잃는 환란을 겪고도 그의 어린 동생은 순진무구한 티를 벗지 못했다. 자신은 그런 동생을 지켜야 했다.
“나는 강해져야 하니까.”
“무슨 말이야?”
“아무튼 나는 타지 않을 테니까 너는 타.”
“형?”
“얼른 타.”
“응!”
남궁선휘의 채근에 남궁영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에 탔다. 남궁선휘는 방진보를 대신해 말의 고삐를 잡았다.
“형, 괜찮다면 제가 끌게요.”
“그래!”
남궁선휘의 당돌한 기백에 방진보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의 강함의 비결을 모조리 훔쳐 내겠어. 그래서 남궁세가를 다시 부활시키겠어.’
남궁선휘는 지옥 끝까지라도 담호를 따라가겠다고 맹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