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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권마-401화 (40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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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1화 1장. 지키려는 자, 빼앗으려는 자……(1)

“휴우!”

초연운이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커다란 마차의 지붕 위에 몸을 싣고 있었다. 그가 타고 있는 마차 앞뒤로 서너 대의 마차가 여정을 함께하고 있었다.

제일 선두에 선 사내가 들고 있는 깃발에는 ‘은가보’라는 세 글자가 선명하게 적혀 있었다.

고개를 앞쪽으로 돌리자 마부석에 조용히 앉아 있는 은소청의 모습이 보였다.

“제기랄!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은소청은 원래 여기 있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다. 그녀가 원래 있을 곳은 안전한 소림사 경내였다. 그런 그녀가 상단의 무인들과 상인들을 모조리 이끌고 나온 것은 바로 무림맹주인 남천산 때문이었다.

젊은 무인들의 열광적인 호응을 이끌어내어 결사대를 조직하는 것은 성공했지만, 문제는 결사대를 어떻게 마교의 본단이 있는 호남성 악양(岳陽)으로 침투시키느냐였다.

마교가 장악한 이후 호남성과 악양 백성들의 민심은 급속히 마교로 쏠렸다. 백성들 중 상당수가 마교를 신교라 부르며 믿고 의지하는 것이다.

그들은 기꺼이 마교의 눈과 귀가 되어 주었다. 평범한 방법으로는 그들의 눈을 피해 악양으로 접근할 수 없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은가보를 비롯해 수많은 상단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제아무리 마교가 호남성을 비롯해 중원 남부를 장악하고, 외부 무인들의 출입을 금한다고 하지만, 일반 백성들과 상인들까지 모조리 막을 수는 없었다.

특히 상인들의 상행은 무척 중요했다.

그들에겐 천하제일상단인 신화상단이 존재했지만, 신화상단 하나만으로 그 넓은 지역 모두를 관할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때문에 상단에 한해서만큼은 훨씬 자유롭게 상행을 할 수 있게 했다.

그래서 남천산과 무림맹의 수뇌부들은 상단을 이용하기로 했다. 상단에 결사대의 무인들을 은밀히 합류시키는 것이다.

은가보 역시 그래서 선택됐다. 더군다나 은가보의 원래 거점은 바로 호남성이었다. 호남성으로 들어갈 명분도 충분했고, 더군다나 은가보의 무남독녀인 은소청이 동행한다면 의심의 눈길을 피하기도 쉬웠다.

그게 은소청이 초연운 등과 동행하게 된 이유였다.

초연운의 한숨 소리를 들었는지 은소청이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그러다 땅 꺼지겠어요.”

“꺼지라지! 마차가 땅에 빠지면 억지로 악양에 가지 않아도 되니까.”

“그렇게 저랑 함께 가는 게 싫어요?”

“응!”

“왜요?”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진보한테 혼날 테니까.”

“겨우 그런 이유예요?”

“그게 얼마나 무서운 일인데. 네가 상처라도 입게 되면 진보가 나한테 음식을 더 안 해 줄 거 아냐?”

“에효!”

은소청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지만 싫은 표정은 아니었다. 말은 저렇게 하지만, 실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그가 얼마나 노심초사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남천산에게 처음 이 제안을 받았을 때만 하더라도 그녀 역시 무척이나 곤혹스러웠다. 하지만 결사대를 무사히 호남성 악양으로 들여보내기 위해선 자신들의 도움이 간절히 필요하다는 말에 어쩔 수 없이 수락하고 말았다.

그녀가 이끄는 상단에는 초연운 말고도 십여 명의 결사대가 더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은 상단의 보표나 일꾼 등으로 위장을 한 채 동행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모습은 너무 부자연스러웠다. 의기가 하늘을 찌른다고 하지만, 그들 대부분은 강호 경험이 그리 많지 않은 애송이 무인들이었다. 딴에는 조심스럽게 행동한다고 하는데, 그 모습이 오히려 더욱 눈에 띄었다.

“조금 더 자연스럽게 행동하십시오. 그렇게 경직된 채 움직이면 모두가 알아볼 겁니다.”

보다 못한 은가보의 상인들이 그들이 조금 더 자연스럽게 움직일 수 있도록 조언을 했다.

“휴우!”

그 모습을 본 초연운이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장년의 무인이 초연운이 앉아 있는 마차의 지붕 위로 가볍게 뛰어올라 왔다.

“무슨 한숨을 그리도 내쉬는가?”

옅은 미소를 지은 채 초연운을 바라보는 이는 바로 천인대적검 장진명이었다. 그가 바로 초연운이 포함되어 있는 결사대의 책임자였다.

장진명은 수십 년 전에 이미 엄청난 위명을 날렸던 고수였다. 천인대적검이라는 별호도 그때 얻은 것이었다.

당시 장진명은 청무곡(靑霧谷)이라는 계곡에서 이십여 명의 무인들과 함께 고립되었는데, 동료들을 모조리 후퇴시키고 홀로 마교의 무인들과 맞서 싸웠다.

얼마나 많은 이들을 죽이고, 또 얼마나 많은 무인들을 다치게 했는지 몰랐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그의 주위에 살아 있는 자는 존재하지 않았고, 추적해 왔던 마교 무인들의 시체만 수북이 쌓여 있었다.

실제로 그가 천 명을 모두 죽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최소 세 자리 수 이상의 무인이 그의 손에 죽었고, 이로 인해 그는 천인대적검이라는 어마어마한 별호를 얻을 수 있었다.

“선배님!”

초연운이 급히 몸을 일으켰다.

“아! 편히 앉아 있게. 굳이 자네를 불편하게 만들려는 의도는 아니니까.”

“아닙니다.”

장진명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초연운은 자세를 똑바로 했다. 그런 초연운의 모습에 장진명이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편하게 초연운의 맞은편에 앉았다.

“괜찮은가?”

“괜찮습니다.”

“걱정이 많은 것 같던데.”

“걱정이 아예 없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도 그렇군. 그럼 왜 생각을 바꿨는지 물어봐도 되겠는가?”

“예?”

“애당초 자네는 결사대에 참여하는 것을 거절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왜 이제 와서 결사대에 참여하려는 것인가?”

장진명의 눈빛은 시퍼렇게 벼려진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그의 눈빛을 마주 보고 있자니 두 눈을 칼로 후벼 파는 것 같은 통증이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초연운은 그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친구들이 가기 때문입니다.”

“친구들? 소천과 청운, 해소월 소저를 말하는 건가?”

“…….”

“어떻게 알았냐는 표정이군. 오해 말게. 자네들에게 조금이라도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금방 알 수 있는 사실이니까.”

“저희에게 그 정도로 관심이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자네들에게 관심을 안 가지면 누구에게 가지겠는가? 누가 뭐래도 자네들이 다음 강호를 이끌어 갈 최고의 기재들인데. 이렇게 난세에 자네들처럼 의기가 드높은 젊은 기재들이 나타난 것은 강호의 큰 흥복임이 분명하네.”

“그렇게 높이 평가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자네는 충분히 칭찬받을 자격이 있어. 진심일세.”

“감사합니다.”

초연운이 고개를 꾸벅 숙이자 장진명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날카롭게 빛났다. 하지만 초연운은 고개를 숙이고 있느라 그 모습을 보지 못했다.

초연운이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장진명의 눈빛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원래의 빛으로 돌아가 있었다.

“자네는 강호의 큰 재산일세. 부디 과욕이나 서툰 공명심 때문에 몸이 상하는 일이 없으면 좋겠네.”

“하하!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이미 대가를 치렀거든요.”

탕탕!

초연운이 크게 웃으며 자신의 의족을 두들겼다. 그러자 둔탁한 쇳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보통 사람은 신체의 한 부분이 훼손당하면 정신적으로 위축되기 마련이었다. 특히 신체의 균형에 누구보다 민감한 무인들일수록 받는 정신적인 타격은 더욱 크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지금 초연운의 모습 어디에도 그런 기색은 찾아볼 수 없었다. 장진명이 초연운을 높게 평가하는 부분이었다.

그가 초연운의 어깨를 두들기며 말했다.

“자네와 같은 친구들은 강호의 큰 기둥으로 성장하기 마련이지. 말년에 자네와 같은 젊은 기재의 성장을 지켜볼 수 있다니, 이번 강호행은 여러 가지로 의미가 있군.”

“선배님을 실망시키지 않아야 할 텐데 걱정입니다.”

“실망이라니, 가당치도 않네.”

“세상일은 모르는 거니까요.”

“하긴! 한 치 앞도 모르는 게 세상사지. 마치 흙탕물을 헤쳐 나가는 것처럼 고되고 힘들어.”

“그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뭐가 말인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고, 어떤 것이 진실인지 알 수 없을 때 말입니다.”

초연운의 말이 의외였는지 장진명이 잠시 침묵을 지킨 채 심유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너무나 깊은 눈빛, 그 안에서 어떤 감정의 편린을 읽는 것은 불가능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말이다. 하지만 초연운은 달랐다. 그는 장진명의 눈빛 깊은 곳에 숨겨진 작은 일렁임을 놓치지 않았다.

한참 후 장진명이 입을 열었다.

“그럴 때는 단 한 가지 방법밖에 없네.”

“그게 뭡니까?”

“선배를 믿고 따르게. 일차 정마대전 때 우리도 그렇게 했네. 그리고 자네도 알다시피 결과도 무척 좋았지. 내가 아는 한 그게 가장 좋은 방법이라네.”

“그렇습니까?”

“선배(先輩), 먼저 배우고 경험한 자일세. 먼저 경험한 자의 가르침과 자취는 무척이나 훌륭한 자산이네. 기꺼이 믿고 따라도 좋을 만큼.”

“그럼 저도 선배님을 믿고 따르면 되겠군요?”

“그렇다네!”

“그런데 말입니다, 혹시 먼저 경험한 분의 가르침이 잘못된 결과를 낳으면 어떻게 합니까?”

초연운의 말에 담긴 가시를 느꼈는지 장진명의 눈동자에 생긴 일렁임이 더욱 커졌다.

장진명이 감정의 소요를 감추기라도 하듯 고개를 흔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일은 절대 없을 걸세. 그러니 믿고 따르게.”

갑자기 눈높이가 달라졌기에 초연운은 장진명을 올려다봐야 했다. 그 때문에 초연운은 더 이상 장진명의 눈을 볼 수 없었다.

‘믿고 따르라?’

초연운은 그만큼 무서운 말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가 믿는 이는 세상에 그리 많지 않았고, 장진명은 그에게 그런 믿음을 받을 만큼 깊게 알거나 오랜 사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장진명은 마차 지붕에서 훌쩍 뛰어내려 제자리로 돌아갔고, 초연운은 그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봤다.

***

요사란은 술잔을 홀짝였다.

그녀가 있는 곳은 남궁세가가 있는 합비에서 그리 멀지 않은 서성(舒城)의 한 객잔이었다.

요사란의 앞에는 심복인 주천이 근심스러운 표정을 한 채 마주 앉아 있었다. 요사란이 술잔을 입에 털어 넣으며 말했다.

“그렇게 똥 마려운 강아지 같은 표정을 계속하고 있을 거면 어서 자리에서 일어나는 게 좋을 거야. 술맛 떨어지니까.”

“제 심정이 똥 마려운 강아지 같아서 그런 겁니다.”

“뭐야?”

“남궁세가의 일이 끝났으니 어서 본단으로 넘어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기서 더 늦었다가는 교주님께 치도곤을 당할 겁니다.”

“까짓것 치도곤 당하지.”

“군장님!”

“아직 멀었어. 이 정도로는 혈향이 지워지지 않아.”

요사란의 말에 주천이 흠칫했다.

남들은 혈륜마녀라는 이명으로 그녀를 부르며 두려워하지만, 주천은 안다. 실제로는 그녀가 피를 보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만일 신교를 수호해야 하는 입장이 아니었다면 그녀는 피를 보는 것을 최대한 자제했을 것이다. 하지만 신교의 군장이라는 신분은 자의로 벗어던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일단 군장이 된 자는 좋든, 싫든 피를 봐야 했다. 신교를 지키는 자의 의무란 그런 것이었다. 죽기 전에는 피의 숙명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요사란은 군장으로서의 책무에 충실했고, 그 덕에 피에 미친 마녀라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실제로 그녀는 이제 피에 익숙해져서 사람을 죽이는 데 무감각해졌다.

“그래도 그 아이 만났을 때가 재밌었어.”

“그 아이라면 녹림의 그…….”

“그래! 황혜령.”

요사란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겉모습만 보면 이십 대로 보이지만, 요사란의 나이는 그보다 몇 배는 더 많았다. 황혜령은 그런 그녀를 보며 언니라고 불렀다.

처음부터 그녀의 진정한 정체를 알았다면 그렇게 부르지 못했을 테지만, 그래도 요사란에겐 신선한 경험이었다. 그래서 더욱 기억에 남았다.

“앞으로 또 그런 만남이 있을지.”

“이 시기만 지나가면 또 그런 날이 오지 않겠습니까?”

“그럴까?”

요사란의 물음에 주천은 대답할 수 없었다. 스스로 말해 놓고도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강호 무림과 신교는 영원히 합쳐질 수 없는 사이였다. 어느 한쪽이 흥하면, 다른 한쪽은 반드시 쇠하게 되어 있었다. 황혜령이 속해 있는 녹림의 사정도 그와 다르지 않았다.

이전처럼 사이좋은 사이로 다시 만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주천은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속내를 감추고 조용히 술잔을 들었다.

요사란 역시 더 이상 묻지 않고 조용히 술을 마셨다. 그렇게 두 사람의 앞에 쌓인 술병이 점차 늘어 갈 때였다.

“군장님!”

갑자기 객잔의 문을 열고 누군가 나타났다.

요사란이 미간을 찌푸리며 나타난 자를 바라봤다. 회색 옷을 입은 이십 대 후반의 무인이었다. 그가 요사란 앞에 부복했다.

“누구냐?”

“저는 신화전주님의 전령입니다.”

“남현소?”

“그렇습니다. 남 전주님이 요 군장님을 찾아 모셔 오라고 명하셨습니다.”

“왜?”

“저도 자세한 것은 모릅니다. 단지 이 말만 전하라 하셨습니다. 빚을 갚을 때라고.”

“빚?”

요사란의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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