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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권마-402화 (402/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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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2화 1장. 지키려는 자, 빼앗으려는 자……(2)

남궁선휘가 입술을 힘껏 깨물었다. 살점이 뜯겨 나가며 피가 흘러나왔다. 그러자 혼미해지던 정신이 다시 돌아오며 시야가 밝아졌다.

그의 앞에 두 마리 말이 걸어가고 있었다. 담호가 타고 있는 흑귀와 방진보와 남궁영휘가 함께 타고 있는 말이었다.

담호와 합류하고 사흘 동안 그는 쉬지 않고 걸었다. 그 덕에 발바닥의 살점이 다 찢겨 나가고 물집이 잡혔다. 한 걸음, 한 걸음 걷는 것이 고역이었고, 고통의 연속이었다. 그래도 남궁선휘는 힘들단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악착같이 담호의 뒤를 따라붙었다.

방진보와 남궁영휘가 그런 남궁선휘를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이미 몇 번이나 말에 태워 주겠다고 말했지만 남궁선휘는 거절했다.

“저는 괜찮아요. 영휘만 태워 주세요.”

방진보는 그의 눈에 담긴 진심과 열망을 읽었기에 더 이상 권할 수 없었다. 보다 못한 남궁영휘가 형과 함께 걷겠다고 했지만, 그 역시 남궁선휘가 거절했다.

남궁선휘가 스스로의 의지로 선택한 고행이었다. 이렇게 한다고 해서 반드시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거라는 장담은 없었지만, 그래도 이 정도 힘든 것도 참지 못하면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애써 참았다.

몰락한 가문의 자손은 참으로 고달픈 법이었다. 남궁세가처럼 한 지역의 패자로 군림했던 가문은 더욱 그랬다. 빛이 강하면 그만큼 어둠도 큰 법이다. 누리던 영화가 컸기에 감당해야 할 상실감과 굴욕도 컸다.

남궁선휘는 애써 포기하고 싶은 마음을 눌렀다.

‘참아라. 남궁선휘. 이 정도도 참지 못하고 어떻게 동생을 지킬 수 있겠는가?’

남궁선휘는 약해져 가는 마음을 다잡았다. 하지만 걸어가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눈동자는 몽롱하게 변했고, 다리에도 힘이 풀렸다. 머릿속은 새하얗게 변한 지 오래였다.

이제 그를 움직이는 것은 굳건한 의지도 아니었고, 인내심도 아니었다. 그저 움직여야 한다는 본능뿐이었다.

“형!”

그가 정신을 다시 차린 것은 남궁영휘의 목소리 때문이었다.

“응?”

겨우 고개를 들어 주위를 돌아보니 어느 이름 모를 개울가였다. 그리고 자신은 개울가 넙적한 바위 위에 앉아 있었다.

“괜찮아? 형!”

“여긴?”

“오늘 노숙할 곳이래.”

“그래?”

남궁선휘가 깊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에 남궁영휘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형, 꼭 이렇게 해야 해? 난 형이 나 때문에 고생하는 걸 볼 수가 없어. 형도 말에 타자. 응?”

“그럴 수 없어.”

“형아?”

“너를 지키려면 난 더 강해져야 해.”

남궁선휘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남궁영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형!”

“네 머릿속에 본가의 모든 절학이 담겨 있다. 너만 무사하면 본가를 반드시 다시 부흥시킬 수 있어. 네가 죽으면 본가도 끝이야. 알고 있지?”

“응!”

남궁영휘가 애써 고개를 끄덕였다. 남궁선휘는 그런 남궁영휘에게 흐릿한 미소를 보여 주었다.

남궁영휘는 남궁세가에서 그리 큰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지닌바 재능이 무공을 익히기에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머리만큼은 가문의 기대를 한 몸에 받는 소가주 남궁무진에 못지않았다.

그는 한 번 본 것을 절대 잊어버리지 않는 뛰어난 두뇌의 소유자였다. 그런 그의 머릿속에는 남궁세가의 모든 절학이 담겨 있었다. 즉 그만 살아 있다면 남궁세가를 다시 부흥시키는 것이 꿈이 아니란 뜻이었다.

그게 남궁선휘가 남궁영휘를 반드시 지켜야 할 이유였다. 그 때문에 강해져야 했다.

“형은 괜찮아! 그러니까 너도 형 걱정하지 마. 알았지?”

“응!”

남궁영휘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남궁선휘는 그에게 흐릿한 미소를 보여 준 후 담호를 찾아 고개를 돌렸다.

담호는 인근의 바위에 앉아 있었다. 그는 말없이 흘러가는 개울물만 바라보고 있었다.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말 한마디 하지 않아도 그의 강함이 느껴졌다.

강자의 격이라고나 할까?

남궁선휘는 스스로의 무력에 자신이 있는 자는 결코 많은 말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담호를 보며 느끼고 있었다.

‘저 사람처럼 강해지고 싶어. 닮고 싶어.’

담호처럼 강해진다면 동생을 지키고 남궁세가를 다시 부흥시키는 것도 꿈이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의 능력으로 담호처럼 된다는 것이 얼마나 불가능한 것인지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의 무재는 남궁세가 내에서도 그리 뛰어난 것이 아니었다. 그 정도의 재능으로 담호처럼 되는 것은 언감생심 꿈도 못 꿀 일이었다.

‘그래도 최선을 다해 봐야지.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잖아.’

남궁선휘는 그렇게 다짐하며 이빨을 꽉 깨물었다.

“그렇게 이빨을 갈다가는 이가 하나도 남아나지 않겠다.”

그때 부드러운 목소리가 남궁선휘의 귓전에 울려 퍼졌다. 방진보였다. 어느새 그가 곁에 다가와 있었다.

“아, 형?”

“이것 좀 마셔 봐. 피로가 조금은 풀릴 거야.”

방진보가 손에 든 그릇을 내밀었다. 그릇 안에는 언제 우렸는지 모를 찻물이 담겨 있었다.

“감사해요.”

“감사는 무슨? 이거 마시면서 쉬고 있어. 금방 음식을 할 테니까.”

“저도 도울게요.”

“돕고 싶으면 일단 체력 먼저 회복해. 그 몸으로 날 돕는 건 무리니까.”

방진보가 남궁선휘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들겨 준 후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는 모닥불 근처에 자리를 잡은 채 음식을 만들기 시작했다.

혼자 남은 남궁선휘는 하는 수 없이 방진보가 준 차를 홀짝홀짝 마셨다. 따뜻한 차가 들어가자 몸이 뜨거워졌다. 근육이 이완되는 것이 묘하게 편안했다.

남궁선휘는 차의 효능에 깜짝 놀라 방진보를 바라봤다. 그 순간에도 방진보는 뚝딱뚝딱 요리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방진보의 얼굴엔 미소가 걸려 있었다. 요리를 만드는 것이 즐거워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그런 표정이었다. 그런 방진보의 모습은 남궁선휘에게 묘한 감흥을 안겨 주었다.

방진보가 그렇게 즐겁게 요리를 하는 것을 보자 남궁선휘는 가만 앉아 있을 수 없었다. 그는 차를 모두 입안에 훌훌 털어 넣어 버리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스릉!

남궁선휘는 검을 꺼내 들고 남궁세가의 검술을 펼치기 시작했다.

담호가 남궁선휘에게 시선을 준 것은 그로부터 한참 후였다. 남궁선휘의 전신은 어느새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하루 종일 걸은 후 무공을 익히는 그의 열의는 충분히 대단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남궁선휘의 성취가 단기간 안에 빠르게 높아질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남궁선휘에겐 중요한 것이 하나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깨닫기 전까지는 그저 의미 없는 몸놀림에 불과했다. 하지만 깨달음은 담호가 알려 줄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스스로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담호는 눈을 감았다.

남궁선휘가 보기엔 그저 무의미하게 휴식을 취하고 있는 것 같지만, 담호는 암혼심공(暗魂心功)을 운공하고 있었다.

독행류가 발전하는 만큼 암혼심공도 발전했다. 끝없이 진보한 암혼심공은 이제 단순히 좌공(座功)이나 행공(行功)의 수준을 넘어 숨 쉬는 것만큼 자연스러워졌다. 그 때문에 말을 타고 있을 때도, 휴식을 취할 때도, 숨을 쉴 때도 자연스럽게 운공이 되었다.

즉 일상이 운공의 연속인 것이다. 자연 담호의 몸 안에 내공이 쌓이는 속도 또한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그의 내공이 정확히 어느 정도인지는 타인은 절대 알 수 없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제 매화신단과 같은 영약이 크게 필요 없다는 것이다.

담호가 그렇게 운공을 하고 있을 때 방진보는 음식을 모두 완성시켰다.

“자. 다 됐다.”

“우와!”

남궁영휘가 방진보가 만들어 낸 음식을 보며 탄성을 내뱉었다. 아무것도 없는 개울가에서 순식간에 몇 가지 음식을 만들어 낸 방진보가 마치 신처럼 보였다.

“정말 대단해요.”

“뭘?”

방진보가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였다. 하지만 싫지는 않은 표정이었다. 남궁영휘의 선망 어린 눈빛이 조금은 부담스럽긴 했지만 말이다.

“자, 모두 식사하세요.”

방진보의 외침에 담호와 남궁선휘가 모닥불 가로 모여들었다. 방진보는 그들에게 각자 음식이 담긴 그릇을 나눠 주었다.

담호는 방진보가 만든 음식을 조금씩 꼭꼭 씹어 먹었다. 허기 때문에 허겁지겁 음식을 들던 남궁선휘가 그 광경을 보고는 젓가락질을 잠시 멈췄다.

담호의 행동을 유심히 바라보던 남궁선휘는 조심스럽게 젓가락을 놀리기 시작했다. 담호가 왜 저렇게 천천히 음식을 먹는지 모르지만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담호처럼 천천히 먹으면서 수십 번도 넘게 꼭꼭 씹어 먹었다. 배 속에선 공복을 호소하는데 천천히 먹으려니 너무 괴로웠다. 하지만 남궁선휘는 허겁지겁 먹고 싶은 욕망을 애써 억누르며 담호를 따라 했다.

“에휴!”

그 모습을 바라보던 방진보가 고개를 흔들었다.

남궁선휘의 마음은 알지만, 무작정 따라 한다고 해서 그 안에 담긴 비밀을 밝혀낼 수 있을 만큼 담호의 공부는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한 걸음씩, 차분히!”

“네?”

뜬금없는 방진보의 말에 남궁선휘가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방진보는 그런 남궁선휘에게 부드러운 미소를 보여 줬다.

“마음은 알지만 서두르지 마.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데 뛰려고 하면 넘어지기 마련이야. 할 수 있는 것부터 하나씩, 차근차근 하는 게 좋아.”

경험에서 우러나온 진심 어린 충고였다.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방진보 역시 요리 외길을 걸어온 장인이었다. 오행군자공이라는 무공을 익힌 것도 따지고 보면 요리 실력을 더욱 향상시키기 위한 한 방법이었다.

그런 경험이 있기에 방진보는 남궁선휘에게 따뜻한 눈빛을 보낼 수 있었다.

방진보의 눈빛을 받는 순간 남궁선휘는 가슴속 깊은 곳에서 무언가 울컥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크흑!”

갑자기 눈물이 났다.

남궁선휘는 소매로 눈물을 닦으며 젓가락질을 했다. 눈물이 밥에 섞여 들어갔다. 음식이 원래부터 짠 건지, 아니면 눈물 때문에 짠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어깨가 들썩였다. 방진보가 그런 남궁선휘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겼다.

“괜찮아! 다 괜찮아질 거야. 너 혼자 모든 짐을 떠안을 필요 없어.”

순간 억지로 참던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남궁선휘는 더 이상 밥을 먹지 못하고 그 자리에 엎어져 대성통곡을 했다. 남궁세가의 마지막 생존자라는 박탈감, 동생을 지켜야 한다는 의무감, 그리고 어떻게든 남궁세가를 다시 부흥시켜야 한다는 사명감이 커다란 바위가 되어 그의 조그만 두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그는 과도한 부담감에 숨이 막히기 일보 직전이었다. 하지만 방진보의 따스한 말이 그의 숨통을 터 주었다.

“형!”

남궁영휘가 남궁선휘에게 다가가려 하자 담호가 붙잡았다.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는 남궁영휘에게 담호가 고개를 저어 보였다.

지금은 서툰 위로 따윈 필요 없었다. 남궁선휘에게 필요한 것은 가슴에 생긴 응어리를 모두 풀어내는 것이었다.

그의 어깨를 짓누르고 발목을 붙잡는 모든 것을 벗어던지고 난 후에야 비로소 그는 미래를 향해 발을 내디딜 수 있을 것이다.

담호의 시선이 방진보를 향했다.

마냥 어리기만 했던 소년은 이제 다른 이의 슬픔을 진심으로 위로할 만큼 훌륭한 어른이 되었다. 담호는 그런 방진보의 성장이 그저 기꺼울 뿐이었다.

한참을 엎어져 울던 남궁선휘가 갑자기 몸을 일으켰다. 소매로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 낸 남궁선휘는 다시 젓가락질을 했다. 아무렇지 않게 음식을 꼭꼭 씹어 먹는 그의 표정은 한결 밝아져 있었다.

담호와 방진보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그러자 방진보가 멋쩍은 듯이 혀를 내밀었다. 담호는 그런 방진보를 향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어린 남궁영휘만이 급작스러운 형의 변화에 적응을 하지 못하고 남궁선휘와 방진보만 번갈아 바라볼 뿐이었다. 방진보가 그런 남궁영휘에게 말했다.

“우리도 밥 먹자.”

“네? 네!”

남궁영휘가 영문을 모른 채 젓가락질을 했다.

묘한 정적 속에서 일행은 그렇게 식사를 끝냈다.

모두의 식사가 끝나자 남궁선휘가 그릇을 수거하며 말했다.

“설거지는 제가 할게요.”

그는 방진보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개울로 달려갔다.

“형, 같이 가.”

남궁영휘가 그 뒤를 급히 따라갔다.

담호와 방진보는 제자리에 앉아 형제가 설거지를 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제 그들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수백 년 동안 안휘성을 지배해 온 거대한 가문의 보호도,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 주던 가문의 무인들도, 그리고 안휘성 곳곳에 거미줄처럼 뻗쳐 있던 엄청난 영향력도 이젠 더 이상 그들을 지켜 주지 못할 것이다.

이 험난한 강호에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이는 서로뿐이었다. 이른 시기에 홀로서기를 해야 하는 그들에게 섣부른 위로나 도움을 주는 것은 금물이었다.

방진보가 입을 열었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는 것 같아요. 부귀도 영화도, 그리고 사람도…….”

스쳐 가는 시간 속에서 수많은 것들이 명멸해 갔다.

강호란 곳에 영원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방진보는 오래전에 깨달았다. 그리고 저들 남궁 형제도 곧 그런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영원한 것은 오직 본신의 실력뿐이라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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