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권마-403화 (403/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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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3화 1장. 지키려는 자, 빼앗으려는 자……(3)

“아미타불! 아미타불!”

한동안 독경에 열중하던 광해가 불경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음이 심란해서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광해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그러자 조금은 차가운 바람이 불어와 그의 얼굴에 흐르는 땀을 식혔다.

어둠에 잠긴 소림사의 전경과 무림맹의 모습이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곳곳에 등불이 켜져 불야성을 방불케 했지만, 광해는 그 모습이 왠지 낯설게 느껴졌다.

얼마 전부터 그는 심마를 겪고 있었다. 불문의 무공을 익혀 마음의 공부가 누구보다 튼튼한 그가 심마를 겪는다는 사실 자체가 낯선 경험이었다. 소림사에 몸을 담은 이후 이랬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기에 더욱 당혹스러웠다.

광해가 눈을 지그시 감았다.

많은 이들이 심마의 이유를 알지 못하고 곤혹스러워하지만, 그는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아미타불! 천도왕이라니…….”

그의 심마가 시작된 것은 바로 천도왕 적경천이 나타난 직후였다. 정확히는 적경천을 직접 보고 난 후였다.

그 이후 광해는 원인 모를 심마에 시달렸다. 하지만 그 사실을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무림맹주인 남천산뿐만 아니라 소림의 방장인 광천, 그리고 주요 수뇌부들까지도 적경천의 존재를 믿고 의지하고 있었다.

천도왕이라는 별호에는 그만한 무게와 신뢰가 담겨 있었다. 소림사의 방장마저 믿고 따르게 할 만큼의. 그래서 자신의 심마에 대한 의문을 제기할 수 없었다.

심마는 날이 갈수록 커져만 갔고, 그의 마음을 조금씩 갉아먹고 있었다. 이제까지는 참고 견뎠지만 그마저 한계에 달했다.

“아미타불! 아미타불! 이럴 때 담 시주가 있었다면 믿고 의지했을 테데. 그가 이곳에 없는 것이 그저 아쉬울 뿐이로구나.”

광해는 얼마 전에 이곳을 떠난 담호를 떠올렸다.

담호는 그 오롯한 존재감으로 소림사와 무림맹의 모든 이들을 짓눌렀다. 그때는 다소 숨이 막히는 듯했지만, 돌이켜 보니 그래도 마음은 편했었다.

담호는 실로 믿고 의지할 만한 존재였다, 특히 지금처럼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난세에는. 하지만 지금 그는 이곳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더 아쉬웠다.

광해는 손에 들고 있던 염주를 목에 걸었다. 그런 그의 얼굴엔 결연한 빛이 떠올라 있었다.

“이렇게 혼자 생각한다고 해결되는 것은 없다. 의구심이 든다면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 그래, 지금은 생각할 때가 아니라 움직여야 할 때다.”

광해는 붉은 가사를 걸치지도 않고 회색 승복을 입은 채 밖으로 나갔다. 소림사의 산문을 벗어나 그가 향한 곳은 바로 무림맹이었다.

광해는 소림사의 장로였다. 때문에 그 어떤 검문이나 신분 확인 없이 무림맹에 들어갈 수 있었다.

무림맹에 도착해 그가 향한 곳은 바로 적경천의 거처였다. 전대 고인인 적경천의 신분을 감안해 그에겐 별도의 별채가 배정되었다.

별채로 가는 길은 생각보다 한적했다. 결사대를 비롯한 상당수의 무인들이 무림맹을 빠져나갔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광해는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적경천의 거처 근처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광해가 잠시 숨을 고르며 어떻게 할까 생각할 때였다.

삐걱!

별채의 문이 열리고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바로 적경천이었다. 순간 광해는 자신도 모르게 인근 담벼락 뒤에 몸을 숨겼다.

왜 그랬는지는 몰랐다. 그저 그 순간 몸이 먼저 움직였을 뿐이다. 광해는 담벼락 뒤에 몸을 숨긴 채 적경천을 바라봤다.

잠시 주위를 둘러보던 적경천은 이내 어느 한 방향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가끔씩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경계를 하는 모습이 꽤나 수상쩍게 보이는지라 광해는 숨을 죽인 채 그를 은밀히 미행했다.

‘내가 뭘 하는 건지?’

소림사의 장로인 자신이 선배 고인인 적경천을 미행한다는 사실이 왠지 우습게 느껴졌다. 하지만 이제 와서 그만두기엔 자신의 꼴이 너무 우스웠다.

적경천은 소림사를 나오자마자 소실봉 반대편을 향해 경공을 펼쳤다.

‘태실봉으로 가는 건가?’

태실봉은 소림사가 있는 소실봉 반대편에 있는 큰 봉우리였다. 얼핏 보면 완만해 보이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깎아지른 듯한 절벽과 기암이 가득해 무척이나 위험했다.

때문에 밝은 대낮에도 조심해서 산행할 정도다. 지금처럼 한밤에 은밀히 갈 만한 곳은 아니었다. 숭산에 익숙한 소림사의 승려들마저도 해가 떨어지면 태실봉에 출입을 하지 않았다.

광해의 눈에 의문의 빛이 떠올랐다. 궁금한 것이 많았지만, 그는 일단 눌러 참고 적경천을 끝까지 미행하기로 결심했다.

쉬이익!

적경천의 경공술은 대단했다.

그는 마치 바람을 가르듯 순식간에 태실봉으로 사라졌다. 광해는 그에 뒤질세라 전력을 다해 경공을 펼쳤다.

광해 역시 소림사에서 내로라하는 고수였다. 경공술 또한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자부했는데, 그런 실력으로도 적경천의 뒤를 따르는 것은 쉽지 않았다.

결국 그는 태실봉 중턱에서 적경천의 종적을 놓치고 말았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적경천의 흔적을 찾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광해는 포기하지 않고 적경천의 흔적을 끈질기게 추적했다.

‘도대체 어디로 사라진 거지?’

광해의 얼굴에 의문의 빛이 한가득이었다.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다시 그의 마음속에 경종을 울리고 있었다.

이쯤 했으니 돌아가자는 마음과 일단 미행을 시작했으니 끝을 보자는 마음이 충돌했다.

광해가 그렇게 마음속 깊은 곳에서 갈등을 겪고 있을 때였다.

“어떻게 되었는가?”

어두운 수풀 너머에서 누군가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로 적경천의 목소리였다. 순간 광해는 숨을 죽이고, 기척을 최대한 숨겼다. 그리고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향해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그렇게 십여 장을 전진하자 수풀 너머 마주 보고 있는 두 사람이 보였다.

한 사람은 그가 따라온 적경천이 맞았다. 하지만 그의 맞은편에 서 있는 사람은 도무지 정체를 짐작할 수 없었다. 마치 온몸이 희뿌연 안개에 휩싸인 듯 모호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몸도 흐릿하게 보였고, 얼굴은 뭉개져서 원래의 모습을 짐작할 수조차 없었다.

“예상대로 진행되어 가고 있습니다.”

대답을 하는 그의 음성엔 고저는 물론이고 그 어떤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런 음성은 처음이었기에 광해는 더욱 놀랐다.

‘대체 저자가 누구기에?’

전대의 기인인 적경천이 한밤중에 무림맹을 빠져나와 은밀히 만나는 존재. 당연히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광해는 기억을 더듬어 그와 같은 존재가 있는지 떠올리려 노력했다. 하지만 적어도 그의 기억 속에 이런 존재는 있지 않았다.

적경천은 형체가 흐릿한 존재를 보면서도 별다른 감정을 표하지 않았다. 마치 수없이 마주했던 사람처럼.

“교주께서는?”

“중원으로 향하셨다 합니다.”

“벌써?”

“예정보다 빨리 움직이게 되었다고 합니다.”

“흠! 그렇다면 이쪽도 서둘러야겠군.”

적경천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교주?’

순간 광해가 숨이 넘어갈 듯 놀랐다. 설마 적경천이 교주라는 단어를 언급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바스락!

얼마나 놀랐던지 그는 그만 몸을 움직이다가 주변의 나뭇가지를 밟고 말았다.

“누구냐?”

적경천이 노성과 함께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노려봤다. 안력을 끌어올리자 수풀 뒤에 숨어 있는 광해의 모습이 환히 보였다.

적경천의 얼굴에 당혹스러운 빛이 떠올랐다.

“이런! 광해구나.”

정체가 들통 난 것을 깨달은 광해는 몸을 일으켜 수풀 밖으로 나갔다.

“자네가 야밤에 이곳엔 어쩐 일인가?”

“그러는 선배님은 이곳에 어인 일이십니까? 저자는 또 누굽니까?”

“쯧!”

의문을 표하는 광해를 보고 적경천이 혀를 찼다. 설마 광해가 자신을 미행했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네의 호기심이 자네를 죽이는군.”

“그게 무슨?”

“때론 궁금한 것이 있어도 참을 줄 아는 것이 오래 사는 비결인데. 그런 간단한 사실도 알지 못하다니.”

“지금 나를 죽이겠다고 말하는 겁니까?”

“그렇다네!”

적경천이 주저 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런 적경천의 모습에 광해가 미간을 더욱 찌푸렸다. 적경천에게선 은은한 사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가 흘리는 사기는 천도왕이라는 별호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기운이었다. 그제야 광해는 자신이 이제까지 겪은 심마의 정체를 알 수 없었다. 그 자신도 느끼지 못한 사이 적경천의 은밀한 사기를 감지했던 것이 분명했다.

이제는 돌아가고 존재하지 않았지만, 그는 한때 소림 최고 배분이었던 무량신승에게 가르침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래서 불심이 더욱 깊어졌다. 본래 불심이 깊은 자일수록 삿된 기운에 민감하기 마련이었다.

‘그래서 그랬던 것인가?’

광해는 한시라도 빨리 소림사로 돌아가 광천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행동보다 적경천과 접촉한 자의 행동이 더욱 빨랐다.

쉬아악!

소리도 기척도 없이 음유한 경력이 날아왔다.

“헛!”

경력이 거의 코앞에 도착했을 때야 광해가 그 사실을 알아차리고 급히 백보신권을 펼쳤다.

콰앙!

음유한 경력과 백보신권이 부딪치며 폭음이 터져 나왔다.

“크윽!”

광해의 몸이 흔들리며 입가에 혈흔이 내비쳤다. 단 한 번의 격돌로 내상을 입은 것이다.

불리함을 깨닫자마자 광해는 망설이지 않고 몸을 날렸다.

접선했던 자가 광해를 쫓으려 하자 적경천이 손을 들어 그를 만류했다.

“추적할 필요 없네.”

“하지만…….”

“그를 처리할 자는 따로 있네.”

“혹시?”

“그래! 이번 기회에 그를 시험해 봐야지 않겠는가?”

“으음!”

적경천과 접선했던 존재가 침음성을 흘렸다. 그만큼 적경천이 언급한 ‘그’는 대단한 존재였다. 자신도 그의 손에서는 절대 살아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 만큼.

“여기까지가 광해의 운명이겠지.”

적경천의 무심한 시선이 광해가 사라진 곳을 향했다.

“헉헉!”

광해는 거친 숨을 토해 냈다.

그의 회색 승복은 곳곳이 찢겨져 나가 맨살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내상이 심상치 않았다. 그래도 그는 멈출 수가 없었다.

“이 사실을 어서 방장께 알려야 한다.”

그는 적경천이 주도해서 만든 결사대를 떠올렸다. 결사대에는 현 강호를 대표하는 젊은 기재들이 대거 포함되어 있었다. 혹시라도 적경천의 음모에 의해서 그들이 큰 화라도 입는다면 강호의 정기가 크게 꺾일 터였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그런 최악의 사태를 막아야 했다.

광해가 다시 힘을 내서 경공을 펼치려 할 때였다.

슈우우!

갑자기 엄청난 파공성과 함께 거대한 무언가 허공에서 떨어져 내렸다.

검고 거대한 그것은 커다란 폭음과 함께 광해의 앞에 우뚝 섰다.

“비켜랏!”

광해는 그의 정체를 가늠해 볼 여유도 없이 급히 반야장을 펼쳤다. 그러자 엄청난 기운이 해일처럼 밀려 나가 광해의 앞을 가로막아 선 존재에 작렬했다.

콰아앙!

굉음과 함께 엄청난 후폭풍이 사방을 휩쓸었다.

집채만 한 바위도 미세한 가루로 만드는 반야장이었다. 하지만 정작 반야장을 펼친 광해는 손목을 부여잡은 채 얼굴을 일그러트리고 있었다.

반야장을 펼친 손목이 탈골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앞을 막아선 것은 분명 사람이었다. 얼굴에 복면을 쓰고 있어 본래의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지만 분명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반야장을 펼친 손이 탈골되었다는 것은 그의 단단함이 상상을 초월한다는 뜻이었다.

“아미타불!”

광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쿵!

그가 둔중한 발소리와 함께 광해를 향해 다가왔다. 순간 광해는 거대한 산악이 움직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게 무슨?”

단지 한 걸음만 옮겼을 뿐인데 단 한 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는 거대한 역도가 느껴졌다.

“다, 당신은 누굽니까?”

상대는 광해의 물음에 답하지 않았다. 복면 사이로 드러난 눈동자 안에 폭풍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세상 모든 것을 파괴할 듯한 광포한 눈빛에 광해가 자신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단지 눈빛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머릿속이 새하얗게 타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흐엇!”

광해가 혼신의 공력을 끌어 올려 여래천수장(如來千手掌)을 펼쳤다. 그의 전 공력이 집약된 여래천수장이었다.

뒤를 생각하지 않고 전력을 다해 펼쳤다. 이 한 수에 그의 전 공력이 썰물처럼 빠져나갔을 정도였다. 그만큼 광해는 절실했다.

콰콰쾅!

상대는 그의 공격을 피하지 않았다.

석 자 두께의 철판도 뚫어 버릴 장력이 그의 가슴을 연신 강타했다. 하지만 옷과 복면이 찢어졌을 뿐 그는 단 한 걸음도 물러서거나 상처를 입지 않았다.

찢어진 복면 사이로 그의 본모습이 드러났다. 그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광해의 눈이 찢어질 듯 크게 떠졌다.

“다, 당신이 어떻게?”

저자는 절대 여기 있어서는 안 될 사람이었다.

그는…….

그 순간 그가 거대한 손을 뻗어 광해의 머리통을 통째로 붙잡았다. 그리고 송두리째 뽑았다.

뿌드득!

목뼈가 딸려 나오고, 근섬유가 힘없이 뜯겨 나갔다. 마치 무를 뽑듯 그는 너무 손쉽게 광해의 머리를 뽑았다.

그의 손에 들린 광해의 머리가 죽음을 인지하지 못하고 눈을 끔뻑거렸다. 그 순간 그가 손에 힘을 주었다.

콰직!

마치 수박이 부서지듯 광해의 머리가 터졌다.

그는 우뚝 선 채 머리를 잃은 광해의 시선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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