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권마-404화 (40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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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4화 2장. 신화와 전설의 조우(1)

안경(安慶)은 장강 본류에 위치한 도시였다. 장강이라는 거대한 수로를 배경으로 두었기에 수많은 배들이 이곳에 정박하거나 머물렀다. 그 덕에 오랜 세월 안경은 호황을 누려 왔다. 하지만 그것도 불과 얼마 전까지의 일이었다.

마교가 안휘성 일대를 장악하면서 드나드는 배의 숫자가 오분지 일 정도로 줄어들고, 무림인들의 발길이 뚝 끊기면서 안경의 오랜 호황도 끝이 났다.

안휘성의 지주였던 남궁세가와 그들을 돕던 수많은 문파의 몰락이 결정적이었다. 마교가 득세를 하면서 사람들의 씀씀이는 절반 이하로 줄어들었고, 무엇보다 외부에서 들어오는 사람들의 발길이 뚝 끊기면서 안경의 경제는 파탄이 났다.

사람들의 얼굴에선 생기가 사라졌고, 어두운 기색이 가득했다. 살판이 난 것은 마교로 전향한 백성들과 무인들뿐이었다.

거리 곳곳에서 마교를 포교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들은 사람들을 모아 놓고 마교의 교리를 가르쳤다. 개중에는 싫은 기색이 역력한 이들도 있었지만, 마교의 눈길을 의식해 대놓고 반발하지는 못했다.

덕분에 거리의 분위기는 무척이나 어두웠다.

안경에 들어서는 일단의 무리가 있었다. 말을 타고 있는 세 명의 남자와 도보로 그들의 뒤를 따르는 한 명의 소년.

바로 담호 일행이었다.

“이건 정말…….”

방진보가 거리를 둘러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안경은 예전에도 한 번 지나간 적이 있었던 곳이었다. 그때는 활기가 넘쳐흐르는 아주 멋진 도시였었다. 하지만 지금 모습에서 옛 영화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남궁선휘의 시선은 어느 한 곳에 고정되어 있었다. 포구 근처에 있는 폐허였다. 모든 것이 타고 재와 주춧돌만이 남은 처참한 모습의 폐허.

남궁선휘의 기억이 정확하다면 저곳은 남궁세가의 방계 무인인 남궁소명이 세운 무관이었다.

남궁소명은 방계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뛰어난 무재를 갖고 있었고, 무공의 성취 또한 남달랐다. 하지만 방계라는 신분상 남궁세가 내에서 그가 올라갈 수 있는 자리엔 한계가 있었다.

결국 남궁소명은 남궁세가를 나와 이곳 안경에 무관을 세웠다. 그가 세운 무관에서 남궁세가의 진신절학은 가르쳐 줄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무공의 기본은 꽤나 탄탄하게 닦아 주었기에 인기가 많았다.

남궁소명의 인품 또한 꽤나 훌륭한 편이어서 안경에서는 꽤나 유명 인사에 속했다.

남궁선휘도 몇 번 이곳에 온 적이 있었고, 그때마다 남궁소명은 그를 따뜻하게 맞아 주었다. 같은 남궁 성씨를 쓴다는 이유만으로도 말이다.

그런 남궁소명이 세운 무관이 폐허만 남긴 채 사라졌다. 남궁세가의 몰락이 현실로 다가오는 순간이었다.

“크흑!”

누군가 목을 조르는 것처럼 숨이 막혀 왔다. 전날 모든 것을 털어 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남은 앙금이 많은 모양이었다.

남궁선휘는 몇 번이나 크게 숨을 들이쉬고 나서야 본래의 안색을 되찾을 수 있었다.

‘후우! 후우! 침착하자, 남궁선휘. 이 정도로 흔들려서 무슨 큰일을 할 수 있단 말이냐?’

덕분에 빠른 속도로 평정심을 되찾을 수 있었지만, 그래도 흔들리는 눈빛을 보이고 싶지 않아 남궁선휘는 고개를 숙인 채 담호를 뒤쫓았다.

담호가 향한 곳은 포구 근처의 한 객잔이었다. 장강을 운행하는 배를 타기 위해 기다리는 손님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이었다.

담호 일행은 객잔 앞에 놓여 있는 빈 평상에 자리를 잡았다.

“어서 오세요, 손님.”

자리에 앉자마자 객잔 주인이 부리나케 달려왔다.

담호는 객잔 주인에게 간단한 요기를 주문한 후 주위를 둘러봤다. 주위에 있는 대부분의 손님이 남자였다. 이상하리만큼 여자가 보이지 않았지만, 담호는 의문을 갖지 않았다.

지금처럼 법도, 규율도 통하지 않는 시대에 가장 험한 꼴을 많이 당하는 이가 바로 여인과 아이였다. 제정신이 박힌 여인이라면 외출을 자제하는 것이 옳았다. 특히 마교가 완전히 장악한 곳이라면 더욱 그랬다.

사정이 그렇다 보니 여자가 보이지 않는 게 당연한 것이었다.

배를 타기 위해 기다리는 남자들의 얼굴에도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제아무리 건장한 성인 남성이라 할지라도 지금과 같은 난세엔 목숨을 보장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공기를 타고 그들의 불안한 감정이 그대로 전해지고 있었다.

방진보가 고개를 들어 담호를 올려다봤다.

“어딜 가나 이렇겠죠?”

담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비단 안경, 또한 안휘성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니었다. 귀주성에서 경험한 것처럼 천하 전체가 난세에 휩쓸리고 있었다.

힘이 없는 것이 죄악이 되는 그런 세상이 도래한 것이다. 이런 포악한 세상에서 힘이 없는 자들이 살아남는 것은 무척이나 지난한 일이었다.

남궁 형제는 손을 꽉 잡은 채 담호의 곁에 붙어 있었다. 그들 역시 이런 세상에서 믿을 수 있는 것은 담호와 같은 강자뿐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것이다.

그때였다.

“명존을 믿으라.”

“극락에 가고 싶다면 명존을 믿고 따르라. 신교의 문은 언제나 열려 있을지니.”

일단의 무리들이 객잔 앞을 지나가며 큰 소리로 외쳤다.

“제기랄! 저들이 또?”

“마교에 빌붙은 자들이다.”

몇몇 사람들이 그들을 보며 수군거렸다. 그런 그들의 얼굴에는 불쾌감과 두려운 기색이 범벅이 되어 있었다.

큰 소리로 마교를 믿으라 외치는 사람들은 그들과 같은 마을 주민들이었다. 그들은 마교가 남궁세가를 멸문시키고, 안휘성의 패권을 장악하자마자 가장 먼저 마교 편에 붙어 그들의 교리를 설파하고 다녔다.

오히려 마교보다 마교를 등에 업은 그들의 패악질이 더욱 심했다. 분명 오랫동안 알고 지내 온 사이인데도 마교를 믿으라 강요하고, 그렇지 않을 시 마교에 밀고해 고생을 하게 만들었다.

사정이 그렇다 보니 사람들은 마교보다 그들과 한패가 된 이들을 더욱 두려워하고 미워했다.

사람들은 고개를 숙여 그들의 시선을 피했다. 혹시 눈이라도 마주쳤다가 또 어떤 해코지를 당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다행히 그들은 객잔 앞에 있는 사람들에게 시선을 주지 않은 채 그냥 지나가는 듯했다. 그에 객잔의 손님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아무 일 없이 지나가는 것만으로도 그들에겐 감지덕지한 일이었다. 하지만 세상일이라는 것은 종종 이해하기 힘든 방향으로 흐르기도 했고, 하필 지금이 그 시점이었다.

마교의 교리를 설파하던 자들의 웅성거림이 갑자기 커졌다. 그들의 전면에 나타난 한 여인 때문이었다.

이제 삼십 대 후반에서 사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미부였다. 머리카락은 물론이고 눈썹에도 은은한 붉은 기가 흐르고, 깊은 두 눈에는 세상의 모든 고뇌가 담긴 듯 깊으면서도 신비로운 빛을 머금고 있었다.

더위가 절정에 달했음에도 목에는 은빛 여우 목도리를 두르고, 풍성한 털옷을 걸친 모습이 답답하기보다 오히려 그녀의 신비로움을 배가시키고 있었다.

마교의 교리를 설파하는 자들뿐만 아니라 객잔의 손님들까지도 넋을 잃고 그녀를 바라봤다.

중년 미부는 사뿐사뿐 걸음을 옮겨 객잔의 빈 평상에 앉았다. 그녀는 잠시 주위를 둘러보다가 객잔 주인에게 말했다.

“주인장, 여기 간단히 요기할 만한 음식하고, 술 한 병 가져오게.”

그녀의 음성엔 여인답지 않은 힘이 담겨 있었다. 그에 객잔 주인이 허리를 굽실거리며 대답했다.

“예!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음!”

미부가 고개를 끄덕일 때였다.

“잠깐!”

갑자기 거친 음성이 들려왔다. 미부가 고개를 돌리니 방금 전 지나쳐 왔던, 마교의 교리를 설파하던 자들이 그녀를 향해 우르르 몰려오고 있었다.

그녀가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냐?”

“어허! 말이 짧구나.”

“짧아?”

“그렇다. 이 어르신들이 누군지 알고 그렇게 말하는 것이냐?”

우두머리로 보이는 사십 대 장한이 앞으로 나섰다. 미부를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엔 탐욕의 빛이 담겨 있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미부가 아니었다.

“쯧! 술맛 떨어지게 하지 말고 물러가거라. 그것이 나의 자비일지니.”

“허! 누가 누구에게 자비를 말한단 말이냐? 이곳이 신교의 영역임을 모르는가? 이 장충은 영광스럽게도 신교의 교리를 설파하는 임무를 맡고 있다. 내 너에게도 신교의 교리를 배울 기회를 줄 테니 나를 따라오너라.”

“개가 사람 말을 하려니, 헛소리가 나오지. 당장 내 눈앞에서 꺼지거라.”

“이익!”

스스로를 장충이라고 밝힌 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미부의 말 한마디로 졸지에 개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가 동료들에게 버럭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 계집이 본교의 교리를 무시하는 것을 보았는가?”

“신교의 교리를 거부하는 자를 가만둘 수 없다.”

“당장 잡아가서 조사해야 한다.”

마교의 교리를 설파하던 자들이 분노해 목소리를 높였다. 마치 미친개처럼 광기를 발산하는 그들의 모습에 객잔의 손님들이 숨을 죽였다.

‘저놈들이 또 엉뚱한 사람을 잡아가려는군.’

‘다 제 음심을 채우려는 거지. 죽일 놈들!’

말은 그럴싸하게 하고 있었지만, 사실 장충 등이 미부의 미모에 혹해 저러는 거란 걸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 저런 방식으로 장충 등에게 잡혀간 여자의 수만 수십이 넘었다. 그렇게 잡혀간 여자들이 어떤 꼴을 당했는지 사람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장충이 여인의 고운 팔목을 힘껏 잡았다.

“순순히 따라오거라, 계집! 반항하면 험악한 꼴을 면치 못할 테니 고분고분 따라오는 게 좋을 게다.”

미부는 말이 없었다. 그 모습을 본 장충은 여인이 겁을 먹었다고 생각했다. 대부분의 여인들이 처음엔 거칠게 반항하다가도 막상 힘을 앞세우면 고분고분해지는 것을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흐흐! 역시 신교를 따르길 잘했어. 그렇지 않았다면 내 언제 이런 계집을 맛볼 수 있단 말이냐?’

한눈에 보기에도 극상의 미모를 지닌 여인이었다. 더군다나 중년의 완숙함까지 지니고 있었다.

마교를 따르기 전이었다면 감히 언감생심 엄두도 내지 못할 만큼 여인은 아름다웠다. 하지만 지금은 충분히 욕심을 내도 되는 상황이었다. 그의 배후엔 마교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장충이 미부에게 치근덕거리는 이유였다. 주위를 둘러보니 동료들도 그와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 짓도 한두 번 한 것이 아니었다. 벌써 수차례 손발을 맞춰 왔기에 서로의 눈빛만 봐도 어떤 행동을 해야 할지 알고 있었다. 그들은 벌써부터 아랫도리가 뻐근해지는 것을 느끼고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휴우!”

그 순간 중년의 미부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그녀의 눈빛은 깊이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침잠되어 있었다.

“아무리 역사가 돌고 도는 거라지만, 이런 것까지 어떻게 수십 년 전 그 모습 그대로 재현되는 건지.”

“무슨 말이냐? 수십 년 전이라니?”

“그때도 그랬다. 너처럼 마교를 등에 업고 온갖 패악질을 부리던 자들이 수도 없이 많았지.”

“그게 무슨?”

순간 미부가 고개를 들어 똑바로 장충을 바라봤다. 그녀의 눈빛을 정면으로 마주한 순간 장충은 그만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기묘한 느낌과 위화감이 그의 뇌리에 경종을 울리고 있었다.

“오랜만에 강호에 나왔기에 피를 보고 싶진 않았지만,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구나.”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거냐?”

장충이 두려움을 감추기 위해 오히려 큰 소리를 질렀다.

그 순간 미부가 뱅어처럼 하얀 손을 장충을 향해 뻗었다.

“커헉!”

갑자기 장충이 비명과 함께 혀를 내밀었다. 무형의 기운이 엄청난 압력으로 그의 목을 조여 왔기 때문이다.

“이봐! 왜 그러는가?”

“이게 무슨?”

곁에 있던 동료들이 갑작스러운 기사에 놀라 떠들었다.

그때 미부가 뻗은 손을 치켜 올렸다. 그러자 장충의 몸이 허공으로 둥실 떠올랐다.

그제야 사람들은 미부가 상상도 할 수 없는 고수임을 깨달았다. 저렇게 허공섭물의 묘리를 발휘해 인간의 몸을 움직이려면 내공이 인간의 한계를 초월해야 했다.

“크에에!”

장충이 허공에서 발버둥을 쳤다. 그런 그의 얼굴엔 이제 핏기마저 모두 사라졌다.

“요, 용서를…….”

“마교를 등에 업고 얼마나 많은 여인을 겁간했느냐? 또 얼마나 많은 이들을 죽였느냐? 한 번이라도 그들에게 자비를 베푼 적이 있더냐?”

장충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머리로 통하던 혈류가 모두 차단되었기 때문이다.

미부가 손목을 돌리는 시늉을 했다.

뿌드득!

순간 장충의 목이 홱 돌아가며 부러졌다. 장충은 혀를 길게 내민 채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즉사했다.

“으으!”

“이럴 수가!”

장충과 같이 패악질을 부리던 동료들이 그 끔찍한 광경에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마교를 등에 업어 기세가 등등했지만, 기본적으로 그들은 무공을 모르는 일반인들이었다.

미부의 시선이 그들을 향했다.

“너희들도 똑같다. 똑같이 살 자격이 없는 것들이지. 그러니 죽어라.”

“크엑!”

“컥!”

미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들이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잠시 몸부림을 치는가 싶더니 두 번 다시 움직이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담호의 눈빛이 깊이 침잠됐다.

‘심어살(心語殺).’

이른바 언령(言令)이라고 불리는…… 말하는 것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지고한 경지.

그저 뜬구름 잡듯 구전으로만 전해지던 전설의 공부가 그의 눈앞에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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