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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권마-405화 (405/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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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5화 2장. 신화와 전설의 조우(2)

정적이 내려앉았다.

눈앞에서 벌어진 충격적인 광경에 사람들은 숨을 참고, 입을 닫았다. 누구 한 명 숨소리 크게 내지 못했다.

그만큼 눈앞에서 벌어진 광경은 그들에게 충격을 넘어서는 거대한 공포를 선사했다.

미부의 말 한마디에 수십의 사람이 죽었고, 그들의 시신이 눈앞에 널브러져 있었다. 너무 충격적이어서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광경이었다.

술병을 들고 오려던 객잔 주인이 감히 움직일 생각을 하지 못하고 몸만 벌벌 떨었다. 하지만 누구도 그를 탓하지 않았다.

그 모습에 미부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쯧! 술은 다 마셨구나.”

이런 참극을 만들어 놓고도 멀쩡히 술을 마신다면 그 자체가 인간으로서 무언가 결여된 것일 터. 과하게 손을 쓰긴 했지만, 미부는 아직 인간이라는 자각을 잃지 않았다.

그때 미부의 눈에 담호가 보였다.

모두가 그녀를 공포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을 때 오직 그 혼자만이 심유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역시!”

순간 미부의 입가에 한 줄기 미소가 어렸다. 그런 미부의 모습에서 담호는 그녀가 자신을 알고 찾아왔다는 느낌을 받았다.

담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나를 찾아온 건가?”

“그래, 아이야! 나는 분명 너를 만나러 왔단다.”

미부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그에 담호가 몸을 일으켜 그녀를 향해 걸어갔다.

미부는 자리에 앉은 채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담호를 말없이 바라봤다. 순간적으로 그녀의 눈에 안타까운 빛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의 눈길이 향한 곳은 바로 담호의 왼쪽 다리였다. 조금씩 저는 왼쪽 다리가 유독 눈에 들어왔다.

‘아깝구나.’

그녀가 혀를 찼다.

무척이나 오랜만에 강호에 나왔지만 그녀는 담호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담호는 당금 강호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 중 한 명이었기 때문이다.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

살육의 화신.

그 외에도 수없이 많은 표현들이 담호를 지칭하고 있었다. 그중 긍정적인 것은 하나도 없었다. 모두가 부정적인 것들이었고, 개중에는 담호를 강호사가 시작된 이래 최고의 악인이라는 표현도 존재했다.

사정이 그렇다 보니 미부도 담호에게 관심을 안 가질 수 없었다. 아니, 그녀에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이유가 존재했다.

담호는 소문처럼 강해 보였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단단한 분위기, 눈빛, 그리고 자연스럽게 흘러나와 일대를 장악하는 포악한 기파가 담호가 얼마나 대단한 무인인지 자연스럽게 깨닫게 해 주었다.

담호는 분명 보기 드물 정도로 완성된 무인이었다. 그녀도 이만큼 완성된 무인은 근자에 처음 볼 정도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짝 절고 있는 그의 왼쪽 다리가 마음에 걸렸다.

미부는 그런 속내를 감춘 채 자신의 앞에 선 담호를 올려다봤다.

자신이 말 몇 마디로 수많은 사람을 죽인 광경을 보았음에도 담호의 눈빛엔 전혀 위축된 빛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맹렬한 투지가 들끓고 있는 것 같았다.

담호가 물었다.

“당신은 누구지?”

“그건 그리 중요하지 않단다. 네가 화산권마 담호라는 사실이 더 중요하지.”

미부의 말엔 묘한 설득력이 있었다.

담호는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미부를 바라봤다. 미부의 말처럼 그녀의 이름은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순간 강렬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담호는 자신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은 결코 그런 생각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모든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무심코 넘긴 사소한 것 하나가 전체 대국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상대방의 이름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마치 누군가 강제로 그런 생각을 주입한 것 같았다. 그리고 담호는 그런 생각을 주입한 자를 눈앞에 두고 보고 있었다.

담호의 깊은 눈동자에 파문이 번져 갔다.

일점(一點)에서 시작한 파랑은 순식간에 광포한 해일이 되어 일대를 휩쓸었다.

뚝!

그 순간 무언가 끊겼다.

그것은 담호와 미부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연결하고 있던 보이지 않은 선(線)이었다. 그리고 미부의 안색이 살짝 변했다.

‘이런!’

츄화학!

담호의 몸에서 강렬한 인력(引力)이 발생해 미부를 끌어당겼다. 순간적으로 미부의 몸이 담호를 향해 급속히 딸려 갔다.

“잠깐!”

미부가 급히 담호를 향해 외쳤다. 하지만 담호에겐 들리지 않았다.

말에는 힘이 있다.

이른바 언령(言令)이었다. 하지만 같은 말을 하더라도 사람마다 담기는 힘이 다르다.

대부분 사람들의 말에는 그다지 큰 힘이 담기지 않지만 기가 세거나 무공이 강한 사람들의 말에는 큰 힘이 담긴다. 그 힘은 타인의 마음에 영향을 주거나 다른 방향으로 흐르게 할 수 있었다.

미부처럼 심어살의 경지에 오른 고수라면 더 말할 필요 없었다. 미부는 담호에게 언령을 사용했다.

의도가 무엇이던 간에 담호의 의지를 그녀의 뜻대로 조종하려 했단 사실만으로도 선공을 가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담호는 누군가에 공격을 당하고도 반격할 이유를 찾거나, 참을 사람이 아니었다.

쾅!

파성추가 터졌다.

미부의 몸이 뒤로 훌훌 날아갔다. 하지만 그녀의 몸엔 상처 하나 없었다. 위기의 순간 손을 뻗어 담호의 공격을 완전히 상쇄시켰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의 등줄기엔 약간의 식은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약간이라도 반응이 늦었다면 이렇게 무사할 수 없었을 거란 사실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그만큼 담호의 일격은 강렬했다.

손바닥이 시큰거리고 있었다. 타인은 겨우 그 정도로 충격을 상쇄시켰다는 사실에 경악하겠지만, 정작 미부 자신은 이 정도의 충격이라도 느꼈다는 사실 자체에 놀라고 있었다.

인간의 한계를 벗어던진 지 오래인 그녀였다. 그녀가 이런 충격을 느끼는 것은 실로 오랜만의 일이었다. 그래서 더욱 신선하면서도 충격적으로 느껴졌다.

콰아아!

그 순간 담호의 이격이 들이닥쳤다.

풍압에 산발된 검은 머리카락이 사자의 갈기처럼 흩날렸다. 그 사이로 보이는 감정이 담기지 않은 검은 눈동자, 그리고 힘껏 움켜쥔 주먹.

마치 폭발하는 화산 같은 엄청난 힘이 느껴졌다. 분출된 거력은 그대로 미부에게 직격했다.

쿠와아앙!

순간 엄청난 충격파가 객잔을 덮쳤다. 객잔 전체가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흔들렸고, 앞에 깔아 두었던 평상들이 뒤집어져 사방으로 날아갔다. 평상에 앉아 있던 사람들도 수 장여를 날아가 객잔 벽에 부딪쳐 정신을 잃었다.

그중에서 아직 정신을 온전히 유지하고 있는 사람은 방진보와 남궁 형제뿐이었다. 남궁 형제도 방진보가 보호해 줬기에 망정이지, 그러지 않았다면 다른 이들처럼 볼썽사나운 모습으로 기절했을 것이다.

“으으!”

절로 이빨이 딱딱 부딪치고, 앓는 듯한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부릅떠진 두 눈에는 어느새 실핏줄이 가득 터져 있었다.

“말도 안 돼!”

남궁선휘가 고개를 내저었다.

이건 말이 안 됐다.

말이 안 되는 싸움이었다.

적어도 그의 상식으론 말이다.

쿠우우!

엄청난 기파가 휘몰아치고 있어 눈조차 뜨기 힘들었다. 하지만 눈을 감을 수 없었다.

남궁선휘의 직감이 속삭이고 있었다.

절대 이 싸움을 놓쳐서는 안 된다고.

그때 방진보의 나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잘 봐 둬야 해! 네 일생일대의 기연일 수도 있으니까.”

“네?”

“절대고수의 싸움이라는 것은 단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기준을 높이게 해. 무공에 대한 기준, 싸움에 대한 기준, 자신을 평가하는 기준, 그리고 무공을 바라보는 시선을 비약적으로 높아지게 만들어. 그것은 쉽게 만나기 힘든 기연이야.”

방진보의 설명에 남궁선휘가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조그만 주먹에 힘이 절로 들어갔다.

파아앙! 팡!

담호와 미부가 격돌할 때마다 연신 공기가 터져 나가고 있었다.

담호는 전진밖에 모르는 충차 같았다. 그의 돌진에 미부가 속수무책으로 뒤로 밀리고 있었다. 모르는 이가 봤다면 담호가 절대적으로 유리하고, 미부가 열세에 처해 있다고 볼 것이다. 하지만 방진보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정체 모를 미부는 분명 뒤로 밀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안색 어디서도 내상의 흔적이나 당황한 빛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녀는 물 같았다.

부드럽게 흐르면서 모든 것을 흘려 버리는 물.

담호의 강격(强擊)을 흘려 버리고, 휘돌게 하면서 그녀의 본신에 가해지는 타격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있었다.

마치 기예(技藝)가 궁극에 이르면 일상의 모든 몸놀림이 예술이 되는 것처럼, 그녀의 몸놀림 또한 유려한 선을 그리며 그 자체로 예술이 되고 있었다.

방진보는 단 한 번도 강호에 이런 고수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었다. 미부의 기예 앞에서는 그 어떤 고수들의 공격도 통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것은 담호의 공격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어떤 고수를 상대로도 절대적인 우위를 점하게 만들어 주던 파성추가 미부에겐 통하지 않았다.

미부는 파성추를 펼치면 발생하는 인력에 저항하지 않았다. 오히려 인력을 이용해 부드럽게 신형을 회전해 담호의 공격을 무력화시켰다.

공기의 결을 따라 부유하는 민들레 홀씨처럼 미부에게선 전혀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담호는 이렇게 싸우다가는 끝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가 아무리 무한대에 가까운 내공을 소유하고 있다지만, 그것은 눈앞에 있는 미부 역시 마찬가지였다.

일격, 일격에 엄청난 내공을 소모하는 그와 달리 미부에게선 내공의 소모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장기전으로 가면 담호가 불리해질 수밖에 없었다.

순간 담호의 눈빛이 변했다.

감정이 전혀 내비치지 않던 그의 눈동자가 짐승처럼 거칠고 사납게 변한 것이다.

쿠우우!

공기가 변했다.

마치 폭풍이 부는 것처럼 거칠게 일렁이는 공기가 살을 사납게 에어 왔다. 드디어 담호가 진심으로 싸우려는 것이다.

그때였다.

“이제 그만하자꾸나.”

미부가 갑자기 멈춰서며 뒷짐을 지었다. 어떤 적의도 없다는 것을 보여 주는 몸짓이었다.

하지만 미부의 화해 어린 몸짓에도 담호의 사나운 기파는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그 섬뜩한 모습에도 미부는 위축되지 않고 오히려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너를 먼저 자극한 것은 미안하다. 내가 진심으로 사과하마.”

“…….”

“너란 아이를 알고 싶었다. 원래 강호의 소문이라는 것은 부풀려서 전해지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너에 대한 소문은 오히려 부족한 면이 더욱 많구나.”

그래도 담호는 주먹에 응축된 공력을 풀지 않았다. 아니, 풀 수가 없었다. 암혼심공이 미친 듯이 요동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화산의 가장 무거운 심공과 마교의 패도적인 심공, 그리고 수많은 심공들이 결합되어 만들어진 암혼심공이었다.

때문에 암혼심공은 패도적이면서도 무거워 절대 쉽게 흔들리지 않았다. 그런 암혼심공이 요동치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미부에게서 흘러나오는 보이지 않는 기운이 자극적이면서도 거대하다는 뜻이었다.

미부는 전혀 적의를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녀의 기운은 담호를 계속해서 자극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담호는 이대로 싸움을 멈출 생각이 없었다. 이유가 어쨌든 상대가 먼저 걸어온 싸움이었기 때문이다.

투지가 전혀 사그라지지 않는 담호의 모습에 미부가 고개를 내저었다. 오랜 세월 산전수전 다 겪은 그녀의 기억 속 어디에도 담호처럼 투지로 똘똘 뭉친 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의 투지는 미부마저 질리게 만들기 충분했다.

“그만하자. 계속해도 상관없지만, 그렇게 되면 저 아이들이 싸움에 휘말릴 것이다. 그래도 좋으냐?”

그녀의 시선이 한쪽에 서 있는 방진보와 남궁 형제를 향했다. 그녀가 전력을 다하면 필연적으로 저들도 휩쓸릴 것이 분명했다. 그러면 그들의 생사를 장담할 수 없었다.

그제야 담호가 공력을 풀었다.

“당신…… 누구야?”

“그 전에…….”

미부가 주위를 둘러봤다.

정확히는 아직 서 있는 방진보와 남궁선휘 형제를 바라봤다.

“너희들이 들어 좋을 것 없는 이야기다. 너희들은 그냥 자는 것이 나을 것 같구나.”

미부의 말이 끝나는 순간 방진보와 남궁 형제는 그대로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순식간에 해일처럼 밀려온 수마에 집어삼켜진 것이다.

세 사람이 정신을 잃자 미부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담호를 바라봤다.

“내 이름은 용화설이다.”

“서왕모?”

“한때 그런 별호로 불린 적도 있었지.”

담호의 눈가가 살짝 경련을 일으켰다.

서왕모(西王母) 용화설.

사신제의 일원이자, 유일한 여인이었던 절대의 무인. 전대의 전설이자 신화가 그의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제야 그녀의 강함이 이해가 되었다.

그녀는 이미 수십 년 전에 절대의 반열에 들었던 무인이었다. 그동안 고련을 했다면 또 어떤 전인미답의 경지를 밟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담호는 용화설에게 위축되지 않았다. 그리고 용화설 역시 그런 담호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아직도 담호의 몸 안에서는 미증유의 거력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마치 분출하는 화산처럼 엄청난 파괴력을 내포한 기운이.

“휴! 장강의 뒤 물결이 앞 물결을 밀어낸다더니. 이건 뒤 물결 정도가 아니라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격랑이구나.”

용화설이 고개를 살짝 내저었다.

그녀가 이긴 싸움이 아니었다. 그녀는 그저 회피만 했을 뿐이다. 실제로 부딪쳤다면 누가 이겼을지 모른다.

무인 간의 싸움이라는 것은 그저 내공의 높고 낮음, 초식의 숙련도만으로 가늠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전심전력으로 싸우면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게 절대의 경지에 오른 무인들의 싸움이었다. 그리고 담호는 이미 절대의 경지를 밟고 있었다.

“너는 나와 대화할 자격이 충분하구나. 나는 너와 대화하고 싶다.”

전대의 전설이 새로이 떠오르는 신화에게 대화를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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