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6
406화 2장. 신화와 전설의 조우(3)
용화설의 실제 나이를 정확히 아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녀가 강호에 나왔을 때의 나이 역시 정확하지 않았고. 그녀가 강호에서 활동을 한 것은 벌써 수십 년도 전의 일이었다. 그렇게 본다면 그녀의 나이는 결코 적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그녀의 외모 어디에도 세월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분위기상 중년으로 보인다 뿐이지, 고운 얼굴에는 잡티 하나, 주름살 하나 존재하지 않았다. 강력한 내공으로 노화마저 억누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자신의 정체를 드러낸 용화설은 더 이상 기도를 숨기지 않았다. 그녀의 기도는 이제껏 담호가 만나 본 그 어떤 무인보다 묵직했다.
중심이 확실히 잡히지 않은 무인이라면 그녀의 기도에 노출된 것만으로 엄청난 무게에 짓눌려 숨이 턱 막힐 터였다.
하지만 담호는 일반적인 무인이 아니었다. 용화설의 정체에 놀랐을지언정 무게에 짓눌리지는 않았다.
담호의 눈은 수많은 세월을 살아온 용화설도 꿰뚫어 보기 힘들 정도로 깊이 가라앉아 있었다.
‘젊은 아이의 수양이 정말로 대단하구나.’
용화설은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담호는 용화설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빛이 오히려 부담스러울 정도였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서로를 바라봤다. 그들의 침묵에 공기마저 질식할 것처럼 착 가라앉았다.
먼저 입을 연 이는 바로 용화설이었다.
“먼저 이렇게 불쑥 찾아온 것을 사과하마. 뜻하지 않게 번잡스러운 일에 휘말리게 만들었으니.”
“…….”
“너를 보고 싶었다. 사신제 이후 강호 최고의 고수라고 불리는 너를.”
용화설의 음성은 무척이나 나직하면서 듣기 좋았다. 그러면서도 절대자의 위엄이 담겨 있었다. 보통은 그런 그녀의 분위기와 위엄에 짓눌리기 마련이지만 담호는 달랐다.
그가 불쑥 물었다.
“이관은?”
순간적으로 용화설의 얼굴에 어두운 빛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그녀는 침착하게 이내 본래의 신색을 회복했다.
“그를 알고 있느냐?”
“이관은 어디에 있지?”
“나 역시 그의 행방은 모른다.”
용화설의 담담한 대답에 담호의 눈빛이 더욱 깊이 가라앉았다. 그런 담호의 반응에 용화설은 그가 자신의 말을 믿지 않는단 사실을 알아차렸다.
용화설의 얼굴에 씁쓸한 빛이 떠올랐다.
“믿기 힘들겠지만 내 말은 사실이란다. 나 역시 애타게 그를 찾아 헤매고 있지만 아직 찾지 못했다.”
“…….”
“네가 믿든, 그렇지 않든 내 말은 사실이다.”
“그럼 왜 찾아온 거지?”
“너를 확인하기 위해서다. 몇 다리 건너 듣는 소문은 으레 과대 포장되기 마련이니까. 그래서 직접 눈으로 보고 확인해야 했다.”
용화설의 눈이 반짝 빛났다. 소녀처럼 빛나는 그녀의 눈동자 속에는 오랜 세월을 살아오고 지배한 자의 연륜과 세상을 꿰뚫어 보는 힘이 담겨 있었다.
담호는 말없이 용화설을 바라봤다. 그의 눈빛은 심해처럼 깊었고 태산처럼 무거웠다. 천하의 용화설도 부담스러울 정도로.
‘아깝구나.’
그녀는 내심 탄식을 토해 냈다.
천하에 다시없을 자였다.
이렇게 젊은 나이에 이런 엄청난 무위를 지닌 것도 전대미문의 일이었다. 천하의 사신제도 담호 나이 때에는 이 정도의 무위를 지니지 못했었다. 아마 그에게 시간만 조금 더 주어진다면 고금에 다시없을 무인으로 성장할 것이다.
‘시간만 주어진다면 말이지.’
불행히도 담호뿐 아니라 천하에 주어진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이 담호의 왼쪽 다리로 향했다. 순간 담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녀의 시선이 거슬렸기 때문이다.
“계속 그렇게 훔쳐볼 거면 그 눈알을 뽑아 주지.”
“미안하구나. 단지 안타까워서 그런다. 네가 더 완벽했다면, 그 다리만 멀쩡했다면…… 그랬다면 그를 막을 수 있는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있었을 텐데.”
“지금은 아니란 말인가?”
“너를 비하하는 게 아니다. 하지만 그 다리로는…… 그 불완전한 몸으로는 절대 그를 이길 수 없단다. 완벽하지 않으면 일말의 가능성도 없어.”
용화설의 음성엔 안타까움이 가득했다.
이곳에 찾아올 때까지만 하더라도 담호가 강호의 희망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담호의 몸 상태를 직접 보는 순간 그것이 얼마나 요원한 생각이었는지 알게 됐다.
고련을 통해 약점을 강점으로 바꾸고, 압도적인 위용으로 여타 무인들을 압도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반적인 무인들에게나 통용되는 것이었다. 그에게는 통하지 않을 터였다.
그녀가 아는 그는 천하에서 가장 완벽한 무인이었다.
이미 궁극의 완성을 이룬 자.
그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실낱같은 빈틈도 없어야 했다. 완전무결해야만 그나마 일말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었다.
“미안하구나. 애써 찾아와서 한다는 말이 이런 것이라서. 하지만 나의 절박한 마음을 네가 조금만 이해해 준다면 고맙겠구나.”
“내가 뭘 이해해야 한다는 거지?”
“그건…….”
“멋대로 찾아와서 헛소리를 지껄여 놓고 이해하길 바란다고? 개소리도 그 정도면 수준급이군.”
예상치 못한 담호의 독설에 용화설의 입술이 떡 벌어졌다.
이제까지 강호 활동을 하는 동안 그 누구도 감히 그녀에게 이런 말을 하지 못했다. 사신제라는 위대한 별호를 얻기 전에도 그녀는 강호 최정상의 고수였었고, 모두가 그녀의 눈치를 보기 바빴다. 그렇기에 그녀가 느끼는 충격의 강도는 실로 엄청났다.
그 순간 바람이 불어왔다.
칠흑 장포가 그의 몸을 따라 펄럭이며 왼쪽 다리가 드러났다.
“이 다리가 어때서? 다리를 조금 저니까, 완벽하지 못하니까 상대가 안 된다고? 진짜 목숨 걸고 싸워 본 적이 있나?”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이냐?”
“단 한 호흡 차이로 승부가 갈리고, 살점이 갈리고, 뼈가 부러지는 모든 것을 건 싸움을 해 본 적이 있냔 말이야?”
“…….”
“싸울 여건도 완벽해야 하고, 무공의 우위를 점해야 하고, 육체도 완벽해야 하고, 이제까지 그렇게 조건을 따져 가며 싸웠나? 그러니 그런 한가한 말이나 내뱉는 거겠지.”
담호의 목소리는 거칠었다. 평소 감정의 동요를 거의 내보이지 않는 담호로서는 이례적인 반응이었다.
담호의 눈동자에 포악한 빛이 떠올랐다.
“나는 그렇게 싸워 본 적이 없어. 상대가 감당할 수 없이 강하다고? 그래서 뭐 어쩌라고? 그래서 내가 더 강해질 때까지 숨어서 무공이나 닦을까? 이기면 살아남는 거고, 패하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면 그뿐이야.”
용화설은 담호의 분위기에 압도당했다.
이제껏 수많은 무인들을 만나 봤지만, 담호처럼 사람의 가슴을 불안하게 자극하는 무인은 처음이었다.
담호의 대화에서 그녀는 이유를 깨달았다.
‘이 아이는 정말 자신의 목숨 따윈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모양이구나.’
대저 경지에 이른 무인일수록 목숨에 연연하지 않을 것 같지만, 사실은 다르다. 이룬 것이 많기에 남겨진 미련 또한 많기 마련이었다.
사회적 지위, 재산, 명성, 그 외에도 수많은 것들이 발목을 잡는다. 그 모든 것을 초개처럼 내던지고 싸움에 온전히 목숨을 건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실제로 용화설 자신도 서왕모라는 별호에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고, 그 때문에 처신에 한껏 신경을 쓰고 있었다.
용화설이 나직이 한숨을 내쉬며 일어섰다.
“휴! 미안하구나. 내가 괜히 찾아왔구나.”
“…….”
“그래! 나 혼자 재단하고, 쓸데없이 고심했다. 내 기준으로 규격을 정하고 그에 딱 맞추려 했으니 너에게 혼이 나도 할 말이 없다. 하지만 마지막 이 말만은 꼭 해 주고 싶구나. 그는 마치 먹물과도 같아서 주위의 모든 것을 검게 오염시킨다. 가장 낮은 곳에서 한없이 자신을 낮추는 자, 혹여나 그런 자를 만나면 극히 조심하거라.”
“…….”
“그 이상은 제약이 걸려 말해 줄 수 없는 것이 그저 한이로구나. 부디 조심하고, 또 조심하거라. 어쩌면 너야말로 강호의 마지막 희망일지도 모르니.”
순간 용화설의 신형이 허공으로 둥실 떠올랐다.
마치 깃털처럼 허공으로 떠오른 그녀의 신형이 순식간에 허공을 가로질러 시야에서 사라졌다.
전설로만 전해지는 능공허도(凌空虛道)의 경공술이었다.
“으음!”
“아!”
용화설이 사라진 직후 곳곳에서 사람들이 신음성을 흘리며 깨어났다. 그들의 심령을 제어하던 주체가 사라지자 정신을 차리는 것이다.
“형?”
방진보가 정신을 차리자마자 담호를 향해 다가왔다. 그런 그의 얼굴엔 의혹의 빛이 가득했다.
“제가 왜 쓰러져 있던 거죠?”
“기억나지 않느냐?”
“뭐가요?”
방진보가 영문을 모르는 표정을 했다. 그런 방진보의 모습에서 담호는 방금 전의 기억이 완전히 사라졌음을 알아차렸다.
용화설은 단순히 언령으로 상대를 혼절시켰을 뿐 아니라 기억마저 지워 버렸다.
껍데기는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었지만, 그 알맹이는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무언가였다.
담호는 전신의 피가 싸늘히 식는 느낌을 받았다.
‘사신제!’
그 이름이 그를 옭아매고 있었다.
마치 운명처럼.
담호가 용화설과의 대화를 다시 한 번 떠올릴 때였다.
“저기다.”
“놈들이 본교의 포교자들을 죽였다.”
객잔 반대편 관도에서 마교의 무인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그들은 객잔 근처에 죽어 있는 신도들을 보고 눈에 불을 밝혔다.
그들의 분노가 공기를 타고 전해지고 있었다.
“형!”
방진보가 담호를 올려다봤다. 그 순간 담호가 그들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용화설이 불완전하다고 말한 그 다리로 담호는 적을 향했다. 그리고 그의 적에게 죽음을 내렸다.
***
“안경이오.”
남현소의 말에 요사란이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 그녀의 눈빛은 남현소에게 그 이상의 설명을 요구하고 있었다.
“권마가 안경에 있소.”
“확실한가?”
“그렇소! 안경을 장악했던 본교의 무인들이 모두 몰살을 당했다고 하오. 현재 안휘성에서 본교에 대항해 모두를 죽일 수 있는 단체나 문파는 존재하지 않소. 있다면 단 한 명, 권마뿐.”
“으음!”
남현소의 확언에 요사란이 나직한 침음성을 흘렸다.
그녀가 남현소의 부름을 받고 합류한 것은 불과 이틀 전이었다. 그동안 남현소는 사람을 풀어 담호의 행방을 추적하고 있었다.
요사란은 될 수 있으면 남현소가 담호의 행적을 찾지 못하길 빌었다. 하지만 그녀의 바람과 달리 남현소는 기어이 담호의 흔적을 찾아냈다. 무서운 집념이었다.
요사란이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할 생각이야?”
“천라지망을 펼치겠소.”
“천라지망? 정면 대결이 아니라?”
“정면대결로 놈을 상대하는 것은 그야말로 어리석은 일이오. 놈과 같은 자를 상대하려면 천하에서 가장 촘촘한 그물로 옭아맨 뒤 천천히 숨통을 조여 가야 하오.”
“으음!”
“내가 알아서 놈의 숨통을 조일 테니 요 군장께서는 결정적인 순간에만 나서 주시면 되오.”
“그렇게 하지.”
결국 요사란이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에 남현소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요사란이 내켜 하지 않는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요사란이 자신에게 진 빚이 그녀의 발목을 움켜잡고 있었다.
겨우 어린 계집의 목숨 하나 살려 준 대가로는 분에 넘치게 컸다. 남현소에겐 크나큰 행운이었다.
남현소는 즉각 수하들을 소집했다.
“지금부터 권마 사냥을 시작한다. 놈의 행로는?”
“안경에서 운마도강선을 탄 것으로 추정됩니다. 현재의 행로를 유지한다면 머지않아 잠산(潛山) 인근을 지날 겁니다.”
“잠산 인근에 있는 강호 문파는?”
“천부문(天府門)과 잠혈문(潛血門) 같은 소문파 두 개가 있습니다. 모두 일찌감치 저희 쪽으로 전향했습니다.”
“좋아! 놈들을 선봉으로 내세워.”
“하지만 그들 정도로는 권마를 막을 수 없습니다.”
“막지는 못하더라도 시간을 벌수는 있겠지. 놈들의 역할은 거기까지야.”
남현소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남궁세가를 멸문시킨 이후 안휘성의 수많은 문파들이 마교로 전향했다. 대부분이 이름조차 생소한 소문파들이었다.
규모도 크지 않고, 제자들도 많지 않았지만, 그래도 마교 입장에서는 이용하기 딱 좋았다.
남현소가 지도의 한 지점을 짚었다.
“여기로 놈을 몰아넣는다. 그리고 종지부를 찍는다. 그때까지 그물을 바짝 조여 놈의 힘을 빼 놓는다.”
“알겠습니다.”
“그는?”
“이미 도착하셨다 합니다.”
“그에게 준비되었으면 사냥을 시작하라고 전해.”
“존명!”
수하가 대답과 함께 물러났다.
남현소의 몸에서는 강렬한 투지가 발산되고 있었다.
요사란이 그런 남현소에게 말을 건넸다.
“그?”
“천하의 권마를 사냥하는 일이오. 숙련된 사냥꾼이 필요할 것 같아서 초빙했소.”
“사냥꾼? 설마?”
“흐흐! 천하의 권마를 사냥하는 일이라 하니 흔쾌히 응하더구려.”
“대단하군! 그를 데려오다니. 그런데 감당할 수 있겠는가?”
“무엇을 말이오?”
“흑익사왕의 명을 거역하는 것 아닌가? 후환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흥! 나는 그가 두렵지 않소.”
남현소가 코웃음을 쳤다.
요사란은 더 이상 그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무슨 말을 해도 듣지 않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권마란 말이지?”
신교 최대 최강의 적을 조만간 만나게 된다고 생각하니 몸이 다 떨려 왔다.
비록 예전에 비해 성질이 많이 죽었다고 하지만, 그녀의 본질은 신교의 사대군장 중 하나인 혈륜마녀였다.
신교를 위해서라도 권마는 반드시 제거해야 했다.
이제 그와 조우할 시간이 머지않았다.
천라지망의 끝에서 그녀는 담호와 만나게 될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