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0
410화 4장. 폭풍 앞에 홀로 서다(1)
고설천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담호의 예상대로 그는 은밀한 곳에 은신한 채 담호를 향해 활을 겨누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섣불리 시위를 놓지 못하고 있었다.
담호는 파괴자였다.
그의 주먹이 닿는 모든 것들이 부서지고 있었다. 인간의 형상이, 무기가 본래의 모습을 잃고 으스러졌다.
“정말 대단하구나. 권마라는 별호가 거짓된 것이 아니었어.”
그의 주먹에 혈광류의 궁수들 수십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들 모두 고설천이 심혈을 기울여 키운 이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죽음이 아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들을 제물로 담호의 진정한 전력과 허실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평범한 방법으로는 절대 담호를 죽일 수 없다. 특히 지금과 같은 난전이라면 말이다.
담호는 근접전에 강했다.
특히 지금과 같은 난전에 특화되어 있었다. 그의 방원 삼 장은 죽음의 대지나 다름없었다.
담호를 상대하려면 그와 비슷한 수준의 무공을 익히거나, 동등한 수준의 무력을 갖춘 무인이 필요했다. 그 외 수준이 떨어지는 자들로는 절대 담호를 막을 수 없었다.
“그래도 상처를 입힐 수는 있지.”
고설천이 히죽 웃었다.
어차피 저들로 담호를 어찌할 수 있을 거라고는 믿지 않았다. 저들의 목적은 딱 하나, 담호의 힘을 소비시키고 조금이라도 상처를 입히는 용도였다.
저들의 무력으로 그렇게 큰 상처를 입히기는 힘들 것이다. 하지만 손톱만 한 자상, 조그만 찰과상 같은 것들이 쌓이다 보면 알게 모르게 체력을 갉아먹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눈치챌 때쯤이면 모든 것이 끝날 것이다.
고설천이 시위에 먹인 화살을 거둬들였다. 이곳은 그의 전장이 아니었다. 그의 전장은 조금 더 깊은 곳, 훨씬 유리한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
“지금 무어라 했느냐?”
“안휘성으로 전력이 빠져나갔다고 했습니다. 십삼지파 중 하나인 혈광류의 중요 전력도 안휘성으로 이동한 상황입니다.”
“고설천이 움직였다 이 말인가?”
“그렇습니다.”
“결국 이자가…….”
흑익사왕 진도휘의 눈에 짙은 살기가 떠올랐다.
그는 남현소에게 분명 경고했다.
담호를 건들지 말라고. 그런데 남현소는 그의 경고를 무시하고 십삼지파 중 하나인 혈광류까지 끌어들였다. 명백히 그를 무시한 처사였다.
“그런데…….”
분노하는 진도휘를 보며 부하가 머뭇거렸다.
“또 무엇이냐?”
“요 군장께서 아직 귀환하지 않으셨습니다.”
“요사란이?”
진도휘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십삼지파까지는 이해할 수 있다. 어차피 그들은 마교의 본류가 아닌 지류에 불과했으니까. 그들은 맹목적인 충성심보다는 이해득실에 의해 움직이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요사란은 마교의 사대군장 중 한 명이었다.
마교의 본류이자 교주의 충성스러운 수하였다. 그런 그녀가 남현소 때문에 귀환하지 않고 안휘성에 묶여 있다는 사실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녀가 왜?”
마룡혈포가 그의 분노를 대변하기라도 하듯이 크게 펄럭였다.
이유야 어쨌거나 요사란은 안휘성에 남아 있어서는 안 됐다. 그녀는 벌써 본단에 귀환했어야 했다.
진도휘가 몸을 일으켰다.
그가 향한 곳은 바로 군사 상한천의 거처였다.
상한천이 의뭉스러운 눈빛으로 진도휘를 바라봤다.
진도휘를 비롯한 흑백사자는 교주 직속이었다. 그들은 교주의 명 외에는 누구의 말도 듣지 않는다. 때문에 상한천도 그들을 대함에 있어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여기엔 어인 일이시오?”
“자네에게 알려 줄 것이 있어 왔다네.”
“말해 보시구려.”
“남 전주 일이네.”
“남궁세가를 멸하러 보낸 남현소 말이오?”
“그렇다네. 그가 아무래도 큰 문제를 일으킬 것 같네.”
상한천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가 아는 진도휘는 결코 허튼소리를 할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진도휘는 상한천에게 남현소가 담호를 노리고 있음을 말했다. 그러자 상한천의 눈빛이 깊이 침잠됐다.
“흑익사왕의 경고가 오히려 그의 가슴에 불을 질렀구려.”
“미안하네. 그럴 의도는 아니었네.”
진도휘가 자신의 경솔함을 사과했다. 그에 상한천의 표정이 조금은 누그러졌다.
자존심이 하늘을 찌르는 진도휘가 이렇게까지 사과를 하는데 그가 날을 세울 필요는 없었다.
“아니외다. 누구도 남 전주가 그리 반응할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오.”
“어떻게 할까?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남현소를 잡아올까?”
“당장 안휘성으로 달려간다 해도 최소 닷새 이상이 걸릴 거요. 이미 늦었소이다.”
“그럼 이대로 남 전주가 일을 저지르는 것을 지켜본단 말인가?”
“어쩔 수 없잖소이까? 지금 물리적으로 그를 제재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니까. 대신 그가 돌아오면 반드시 엄벌에 처하겠소.”
“그가 살아 돌아온다는 것은 권마를 죽였다는 뜻일 터. 그런데도 엄벌에 처하겠다는 것인가?”
“공과 과는 별개의 문제외다. 상급자의 명을 듣지 않는 하급자의 존재는 본교의 규율을 흩트릴 뿐이오. 그가 권마를 죽이고 돌아오더라도 나는 최고형을 내릴 것이오.”
“어떤?”
“천쇄금혼형(千碎禁魂刑)에 처하겠소.”
“으음!”
상한천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진도휘가 고개를 끄덕였다.
천쇄금혼형은 마교에서 가장 혹독한 형벌 중 하나였다. 마교의 중죄인이나 대역죄인만이 이 형벌을 받았다.
천쇄금혼형을 집행하기로 마음먹었다는 사실 자체가 상한천이 극도로 화가 났다는 증거였다.
평상시 거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상한천이지만, 한 번 화가 나면 무서울 정도로 비정한 면모를 드러내곤 했다. 설령 그 대상이 자신의 심복이나 마교의 충신일지라도 예외가 없었다.
진도휘의 시선이 상한천의 앞에 있는 자단목 탁자를 향했다. 정확히는 탁자 위에 올려진 수많은 문서들이었다.
“무언가?”
“호북성 전역에서 보내오는 정보외다.”
“고생하는군.”
“당연히 해야 할 일이오. 고생이랄 것도 없소.”
무심히 말했지만 그의 속은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남현소의 무모함과 만용이 그가 그리고 있는 계획을 어그러트리고 있었다.
***
뚝뚝!
담호의 주먹을 타고 흐른 선혈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선혈은 대지를 붉게 물들였다.
그의 등 뒤로 까마귀가 죽음을 노래하고 있었다.
하늘이 보이지 않을 만큼 새까맣게 몰려든 까마귀들은 때아닌 포식에 연신 기분 나쁜 울음을 토해 내고 있었다.
영혼을 밑바닥에서부터 갉아먹는 듯한 소름 끼치는 울음소리에도 담호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그가 걸어온 혈로에 남은 것은 누군가의 죽음뿐이었다.
시신이 산처럼 쌓이고, 그들이 흘린 피가 강이 되어 흘렀다.
차마 두 눈 뜨고 보기 힘든 목불인견의 참상이 펼쳐져 있었다. 그 모든 것이 담호 단 일인에 의해 일어난 참극이었다.
그들은 모두 천라지망에 동원된 안휘성의 무인들이었다. 남궁세가의 위세가 성할 때는 그들의 편에 섰으며, 마교가 주도권을 잡게 되자 다시 마교에 빌붙은 이들이었다.
그들에게 정의나 자존심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힘 있는 자에게 빌붙어서 영화를 누리는 것에만 관심을 두었다. 만일 그들이 조금이라도 강호의 미래를 생각했다면 절대 천라지망에 참여하지 않았을 것이다.
때문에 담호는 그들을 죽인 것에 어떤 죄책감도 갖지 않았다.
어차피 죽이지 않으면 죽는 곳이 강호였다. 스스로 결정한 행위에 책임을 지는 것도 자신이었다.
그들은 담호를 죽이기 위해 칼을 겨눴고, 담호는 살기 위해 그들에게 주먹을 겨눴다.
그 결과가 이것이었다.
담호는 걸음을 옮겼다.
아직 그를 옭아매고 있는 살기의 그물은 건재했다.
저들은 단지 마교에 협력하고 있는 문파들의 무인들일 뿐이다. 마교의 진정한 전력은 아직 소모되지 않았다.
이제부터가 진정한 싸움이었다.
저들이 원하는 싸움도 이제부터였다.
그들은 이미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촘촘하기 그지없는 살기의 그물이 그 사실을 말해 주고 있었다.
담호의 눈빛이 더욱 깊이 침잠됐다.
그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아무리 강하더라도 혼자서는 천라지망에 동원된 모든 무인들을 죽일 수 없다는 것을. 끝없는 싸움에 내공은 점차 고갈되어 갈 것이고, 자잘한 상처들이 모여 체력은 바닥으로 떨어질 것이다.
그게 저들이 원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그들의 의도대로 담호의 몸에는 자잘한 상처가 수도 없이 생겨났고, 체력도 조금씩 떨어지고 있었다.
이대로 가면 분명 저들이 원하는 대로 될 것이다. 담호가 그들의 의도대로 움직인다면 말이다.
팟!
갑자기 담호가 대지를 박찼다.
이제까지와 달리 앞으로 달리기 시작한 것이다.
쾅!
아름드리나무가 박살 났다. 그 뒤에 숨어 있던 마교의 무인이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뒤로 나가떨어졌다.
그의 전신은 커다란 바위에 부딪친 것처럼 처참하게 짓이겨져 있었다.
“그르륵!”
그가 피거품을 피워 올리는가 싶더니 그대로 절명했다.
그는 숨이 끊어질 때까지도 몰랐다. 자신이 어떻게 죽는 것인지. 담호가 무슨 수법으로 공격한 것인지.
충보였다.
성벽을 부수기 위해 만들어진 충차처럼 오직 일직선으로 전진하는 보법.
천하에서 가장 단순하면서도 엄청난 파괴력을 가진 보법.
파성추와 합쳐질 때 가장 위력이 극대화되는 그 보법을 담호는 경신술처럼 펼치고 있었다.
파앙!
담호가 충보를 펼칠 때마다 그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모든 것이 부서졌다.
커다란 바위도, 아름드리나무도, 은신해 숨어 있던 사람들도.
“뭐, 뭐야?”
“피해!”
곳곳에 은신해 있던 마교의 무인들이 놀라서 메뚜기처럼 사방으로 튀었다. 하지만 그들이 채 반도 벗어나기 전에 담호라는 이름의 폭풍이 들이닥쳤다.
콰앙!
“크엑!”
“컥!”
수십여 명의 무인들이 벼락에 맞은 것처럼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팔다리가 기괴하게 꺾이고, 목이 모로 돌아갔다. 바닥에 떨어졌을 때 그들의 몸에 산 자의 생기는 이미 존재하지 않았다.
콰콰콰!
담호가 지나간 곳에 일직선의 길이 생겨났다. 그 길에 수많은 죽음이 쌓였다.
“저, 악마 같은 놈!”
“제기랄! 화살을 날려.”
은신한 채 빈틈만 노리던 혈광류의 궁사들에게도 담호라는 악몽이 들이닥쳤다.
쉬쉬쉭!
수십 대의 화살이 담호에게 쏘아졌다.
순간 담호의 전신에 검은 기류가 폭풍처럼 휘돌았다. 폭마경이었다.
충보에 파성추, 거기에 폭마경까지 더해졌다.
담호의 모습은 사라지고, 검은 폭풍만이 남았다.
궁사들이 쏜 화살은 검은 폭풍에 휩쓸려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궁사의 가장 치명적인 무기가 순식간에 무력화되었다.
그들에겐 더 이상 담호를 공격할 무기가 존재하지 않았다. 무방비 상태의 그들에게 담호가 직격했다.
콰아앙!
숲이 흔들렸다.
만찬을 즐기던 까마귀들이 일제히 날아올라 하늘을 새까맣게 뒤덮었다. 짐승들은 눈을 뒤집은 채 산길을 질주했다.
담호가 발사하는 살기를, 숲에 내린 죽음의 냄새를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었다. 그들은 필사적으로 담호가 있는 곳에서 멀어지기 위해 달리고, 또 날았다.
두두두!
숲이 흔들리고 있었다.
담호란 폭풍이 만들어 낸 진동이었다.
그 불길한 진동은 천라지망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이들의 심령을 불길하게 자극했다.
“도대체?”
푸확!
그 순간 담호가 수풀을 헤치고 나타났다.
폭풍처럼 휘도는 검은 폭강에 가려 담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모두가 보았다.
담호의 차가운 눈빛을, 검게 일렁이는 검은 눈빛을.
분명 보이지 않아야 정상인데, 이상하게 또렷하게 보였다.
그 눈빛이 가슴에 박히는 순간 어둠이 찾아왔다.
후두둑!
수십 구의 시신이 담호의 등 뒤로 떨어졌다.
남현소의 명을 받고 대기하던 신화전의 고수 수십이 그렇게 허무하게 목숨을 잃었다.
“뒤, 뒤쫓아!”
“놈을 막아야 해!”
뒤늦게 담호를 쫓기 위해 일대에 있던 무인들이 달려왔지만, 이미 담호의 모습은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그곳은 천라지망의 중심이 되는 이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안 돼!”
누군가의 비명 같은 음성이 허무하게 흩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