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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권마-411화 (41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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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1화 4장. 폭풍 앞에 홀로 서다(2)

조짐을 제일 먼저 느낀 이는 바로 산 중턱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던 고설천이었다.

“응?”

담호를 사냥하기 위해 특별히 준비한 화살을 점검하던 그가 모든 동작을 멈춘 채 전방을 노려보았다.

두두두!

발바닥을 통해 미세한 진동이 느껴졌다.

처음엔 착각인 줄 알았다. 하지만 진동은 순식간에 강해졌고, 폭풍 같은 기파가 그를 덮쳤다.

“설마 벌써?”

그의 계산대로라면 최소 이각 후에나 담호가 이곳을 지나갈 예정이었다. 행로 또한 이곳에서 백여 장이나 떨어진 산 아래 비탈길이어야 했다.

하지만 피부가 떨어져 나갈 만큼 강렬한 기파를 느끼는 순간 고설천은 무언가 잘못됐음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화살을 시위에 메겼다.

촉뿐만 아니라 화살대까지 만년한철로 만든 기물이었다. 촉과 화살대 전체에 미세한 흠이 소용돌이치며 파여 있어 파괴력을 몇 배나 배가시켰다.

천살궁(天殺弓)에 만년한철로 만든 화살.

그가 꺼낼 수 있는 최강의 패였다.

화살에 푸른 기운이 맺히는가 싶더니 또렷한 화살 형상을 만들어 냈다. 화살에 강기를 덧씌운 것이다.

쉬익!

강기를 씌운 화살이 순식간에 수풀을 꿰뚫고 사라졌다.

콰아앙!

수풀 너머에서 폭음이 터지고, 불길이 하늘로 치솟아 올랐다. 동시에 나뭇잎과 풀잎들이 일제히 하늘로 휩쓸려 올라갔다가 눈처럼 떨어져 내렸다.

순간 다 찢어진 검은 장포를 펄럭이며 담호가 튀어나왔다.

산발된 검은 머리카락과 그 사이로 빛나는 흉포한 검은 눈동자.

짐승의 살기가 폭포수처럼 고설천을 덮쳐 왔다.

궁강(弓罡)으로 저지하지 못한 담호의 미친 폭주가 그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미친!”

하지만 당혹스러운 마음과 달리 그의 몸은 이미 다음 화살을 날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쉬쉭!

연이어 두 대의 화살이 담호를 향해 날아갔다.

이번에는 궁강이 아닌 평범한 공격이었다. 담호가 고개를 좌우로 흔드는 것만으로 피할 수 있을 정도로.

두 대의 화살을 흘려보낸 담호가 고설천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파성추였다.

푸욱!

순간 담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등 뒤에서부터 가슴을 뚫고나온 화살 때문이었다.

방금 전 그가 흘려보낸 화살 중 한 대였다. 화살에 날개라도 달리지 않은 이상 선회해 등 뒤에서부터 그의 가슴을 꿰뚫는 것은 불가능했다. 평범한 공격이라면 말이다.

“흐흐! 이기어시(以氣御矢)다.”

쐐애액!

고설천의 말을 증명이라도 해 주듯 또 한 대의 화살이 허공을 선회해 담호의 머리로 떨어져 내렸다.

피하기엔 이미 늦었다.

담호가 허공을 향해 왼 손바닥을 활짝 펼쳤다.

푸욱!

화살이 그의 손바닥을 관통했다.

무서운 속도로 회전하는 화살은 뼈를 부러트리고, 살점까지 뜯어내며 전진했다. 화살이 관통하는 구멍은 점점 커져만 갔다.

이것이 바로 만년한철로 만든 화살의 위력이었다.

그 어떤 힘으로도 저지할 수 없고, 인간의 육신 따윈 두부처럼 파고들며 파괴한다.

결국 만년한철 화살은 담호의 손바닥에 커다란 구멍을 뚫은 후에야 힘을 잃고 바닥에 떨어졌다.

담호의 몸이 순간적으로 비틀거렸다. 고설천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다시 천살궁에 화살을 걸었다.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절호의 기회였다.

만년한철 화살이 담호의 머리를 노렸다. 하지만 쓰러질 줄 알았던 담호가 그대로 돌진해 왔다.

“크읏!”

고설천이 혈광류의 비전보법인 만영보(滿影步)를 펼치며 급히 뒤로 물러났다.

그와 같은 궁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어떠한 경우에도 최적의 자세로 활을 쏠 수 있는 운신이었다. 그리고 만영보는 그것을 가능하게 해 주는 최고의 보법이었다.

쉬쉬쉭!

연이어 세 대의 화살이 발사됐다. 세 대 모두 이기어시의 묘리를 담고 있었다.

모든 것을 불태우며 지상을 폭격하는 유성처럼 만년한철 화살이 담호의 사각으로 떨어져 내렸다. 담호가 어디로 피하든 이기어시는 그를 따라붙었다.

“끝이다.”

고설천이 궁지에 몰린 담호를 향해 강기가 형성된 화살을 날렸다.

쿠아아!

차원이 다른 위력의 공격이었다.

고설천의 얼굴에 득의 어린 미소가 떠올랐다.

비록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천하의 권마를 홀로 사냥하는 쾌거를 이루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쿠콰과광!

이기어시에 이어 강기가 어린 화살이 담호의 몸에 작렬했다. 폭발에 휩쓸린 담호의 형상이 산산이 찢겨 나갔다.

“잡았다!”

고설천이 자신도 모르게 큰 소리로 외치는 순간이었다.

슈우우!

공기가 출렁이더니 고설천 앞의 공간이 일그러졌다. 그리고 담호가 모습을 드러냈다.

“무슨?”

고설천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그의 상식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퍼엉!

담호의 주먹이 그의 복부에 작렬했다.

가죽 북 터지는 소리와 함께 고설천의 몸이 뒤로 튕겨져 나갔다. 그나마 호신강기를 끌어 올렸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이 한 번의 일격에 내장이 터져 나갈 뻔했다. 하지만 아직 안심하기는 일렀다. 담호가 무서운 속도로 따라붙었기 때문이다.

쩌어엉!

그 순간 공기의 결이 터져 나가면서 고설천의 고막에 충격이 가해졌다.

단공벽(斷空壁)이었다.

이명이 찾아오면서 몸의 균형이 무너졌다. 그런 그를 향해 담호의 주먹이 다시 한 번 날아오고 있었다.

고설천이 임기응변으로 천살궁으로 전면을 막았다. 하지만 담호의 주먹은 천살궁을 교묘히 피해 그의 가슴에 작렬했다.

터엉!

단양타였다.

“커흑!”

고설천이 피를 토하며 비틀거렸다.

가슴이 활짝 열리면서 일시적으로 무방비 상태가 되었다. 그사이 담호의 손바닥이 흡착되었다.

오지암파경(五指巖破勁)이 나선형의 경력을 발산했다.

쿠웅!

온몸으로 퍼져 나가는 경력에 고설천의 뼈마디가 제멋대로 놀았다. 그사이 담호가 그의 멱살을 틀어잡았다. 지천격이 들어간 것이다.

불길한 운명을 예감한 고설천이 마지막 기력을 끌어모아 외쳤다.

“아, 안 돼!”

그것이 그가 살아생전 마지막으로 뱉은 목소리였다.

쿠와앙!

그의 머리가 그대로 바닥에 처박혔다.

잘 익은 수박처럼 머리가 부서지고 골수와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머리를 잃은 채 대지에 거꾸로 처박힌 몸은 잠시 흔들거리다가 그대로 쓰러졌다.

그것이 마교 십삼지파의 하나인 혈광류의 수장 고설천의 최후였다.

그는 결코 이렇게 허무하게 죽을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담호를 상대함에 있어 결정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바로 담호가 어떤 무인인지 미처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후욱!”

츠으으!

거친 숨을 몰아쉬며 허리를 펴는 담호의 몸에서 핏빛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그가 이제까지 뒤집어쓴 피가 증발하면서 일어나는 현상이었다. 그만큼 담호의 몸에서는 강렬한 열기가 발산되고 있었다.

담호는 무심한 눈으로 고설천의 시신을 바라봤다.

고설천은 분명 대단한 고수였다.

그의 궁술은 담호가 처음 보는 어마어마한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이기어시는 담호조차 예상치 못한 절기였다. 만일 그가 조금만 더 평정심을 가졌다면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것은 담호가 됐을 것이다.

고설천의 실수는 담호에 대해 너무 몰랐다는 것이다.

담호는 갈가리 찢겨 바람에 흩날리는 검은 장포를 바라봤다. 고설천의 이기어시가 꿰뚫은 것은 담호가 아니라 그가 입고 있던 장포였다.

위기의 순간 담호는 장포로 고설천의 눈을 속이고, 충보에 이형환위의 묘리를 섞어 이기어시와 궁강을 피했다. 그 대가로 어깨에 큰 상처를 입었지만, 결국은 고설천을 죽일 수 있었다.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설령 그것이 죽음에 가까운 상처일지라도 담호는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고 승부를 걸 수 있다.

그게 담호라는 무인이었다.

그 어떤 상황이나 위기에서도 온몸을 내던져 부딪친다. 부딪치고, 또 부딪치고, 가장 위험한 사로에서 생로를 찾아내는 담호의 승부사적 기질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담호가 갑자기 가슴으로 손을 뻗었다. 가슴을 뚫고 튀어나온 화살이 잡혔다. 만년한철로 만든 화살이었다.

담호가 화살을 잡아 뽑자 미세한 홈에 뒤엉킨 살점이 같이 뜯겨져 나왔다. 등골을 타고 전율스러운 고통이 느껴졌다.

힘껏 깨문 입술 사이로 피가 터져 나왔다. 담호로서도 인내하기 힘든 통증이었다. 하지만 담호는 기어이 화살을 뽑아냈다.

화살에 딸려 나온 살점에서 시뻘건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담호는 미련 없이 화살을 버렸다.

화살을 뽑은 상처에서 엄청난 양의 피가 흘러나왔다. 담호는 옷소매를 찢어 상처에 쑤셔 박았다. 그러자 흘러나오는 피의 양이 조금씩 줄어들었다.

담호가 고설천의 시신을 뒤로하고 걸음을 옮겼다.

오른쪽 다리로 바닥을 찍고, 왼쪽 다리를 끌며…….

***

“동쪽이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놈이 믿을 수 없는 속도로 질주하고 있습니다.”

“잠혈문이 전멸했습니다.”

“궁사들이 전멸을…….”

“아! 혈궁사신이 놈에게 돌아가셨습니다.”

믿을 수 없는 소식이 속속 전해지고 있었다.

“이럴 수가!”

남현소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런 그의 얼굴엔 불신의 빛이 떠올라 있었다.

담호를 잡기 위해 펼친 천라지망이 완전히 무너졌다. 그보다 충격적인 것은 어렵게 초청해 온 혈궁사신 고설천이 담호에게 목숨을 잃었다는 것이다. 그와 함께 온 백여 명의 궁수들도.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피해였다.

남현소가 제아무리 마교의 중추인물이고, 교주의 신뢰를 듬뿍 받는 무인이라지만 이런 피해를 입히고도 무사할 수는 없었다.

그의 부릅뜬 눈에 핏발이 섰다. 금방이라도 선혈을 뚝뚝 흘릴 것 같은 모습이었다.

“흐흐! 흑익사왕이 충돌을 피하라고 말한 이유가 있었군.”

머리로는 납득했다.

지금까지 전해진 담호의 무력은 그의 예상을 뛰어넘는 파격, 그 자체였으니까. 흑익사왕 진도휘가 피하라고 이야기할 만했다.

하지만 가슴이 납득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데려온 수많은 수하들이 목숨을 잃었고, 가장 큰 전력이었던 고설천마저 죽었다. 이런 어마어마한 피해를 입고도 무기력하게 물러선다는 것은 그의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다.

그때 그의 곁으로 요사란이 다가왔다.

“계속할 건가?”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소.”

“천라지망이 무너졌어.”

“그래서 이대로 물러나자? 흥! 어림없소. 이 남현소, 단 한 번도 적을 두고 물러서거나 관망한 적은 없소. 게다가 내 수하들은 아직도 건재하오.”

남현소가 뒤를 돌아봤다.

그의 직속 부하들인 신화전 무인들이 도열해 있었다. 남궁세가를 멸문시키면서 이백여 명이 목숨을 잃었지만, 아직도 삼백여 명이 건재했다.

그들의 무력은 마교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로 엄청났다. 더군다나 이미 남궁세가마저 멸문시켰기에 사기가 최고조로 달해 있었다. 그들의 전신에서는 기이한 열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들 역시 곧 닥쳐올 피 튀기는 전투를 예감하고 몸이 반응하는 것이다.

그런 수하들을 두고 퇴각한다?

남현소의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다.

“하!”

그런 남현소의 모습에 요사란이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어떤 말로도 그의 결심을 돌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겁이 나면 요 군장은 물러나도 좋소.”

“나를 도발하는 건가?”

“허면?”

“빚을 갚기 전에는 물러날 수 없지.”

“흐흐! 그럴 줄 알았소.”

남현소가 음소를 흘렸다. 하지만 요사란은 웃을 수 없었다.

설마 그에게 진 빚이 이렇게 족쇄가 될 줄은 몰랐다.

권마가 두려운 게 아니라 이렇게 비겁하게 싸워야 한다는 사실이 싫었다.

마교에 몸을 담고 있지만 그녀는 스스로를 정정당당한 무인이라고 생각했다. 비록 손속이 잔혹하고 사정을 봐주지 않아 혈륜마녀라는 달갑지 않은 별호가 붙었을지언정 승부 앞에서 비겁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요사란이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어느새 저녁이 되어 있었다. 핏빛 노을이 지는 해를 마중하고 있었다.

지는 해를 등지고 누군가 그림자를 길게 드리우며 나타났다.

하늘을 붉게 물들인 노을만큼이나 피로 물든 남자였다.

요사란의 눈빛이 차갑게 빛났다.

“왔군.”

“권마.”

남현소가 으르렁거렸다.

핏빛 하늘을 등지고 나타난 남자는 바로 담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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