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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권마-414화 (41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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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4화 5장. 악연은 끝없이 이어진다(2)

원설화는 은소청을 향해 똑바로 걸어왔다. 이미 은소청을 알고 있다는 반증이었다.

은소청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녀 역시 원설화를 알아봤기 때문이다. 그녀들은 아주 오래전에 만난 적이 있었다.

당시 은소청은 아직 어린 소녀였고, 원설화도 이렇게 존재감이 두드러지던 시기가 아니었다. 하지만 워낙 그녀들의 존재감 자체가 강렬하다 보니 서로를 인상 깊게 바라보고 안면을 텄었다.

먼저 입을 연 이는 원설화였다.

“은가보의 은소청 맞지?”

“맞아요. 아직 기억하고 있네요? 언니!”

“어찌 기억하지 못할까? 은가보의 무남독녀를.”

원설화가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어여쁜 얼굴만큼이나 화사한 미소였지만, 은소청은 왠지 모를 한기를 느끼고 몸을 떨었다.

“여긴 어떻게 온 거야? 호남성에 들어오기 쉽지 않았을 텐데. 신교와 거래라도 하기 위해 온 거야?”

“잊으셨나 보네요. 본래 은가보는 호남성에 적을 두고 있다는 걸. 전 집으로 돌아온 거예요.”

“아! 그랬지.”

마치 이제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는 듯이 원설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녀의 반응은 너무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은소청은 속아 넘어가지 않았다.

‘숨소리 하나, 눈웃음 하나까지도 모두 꾸며진 것. 절대로 저 겉모습에 넘어가서는 안 돼.’

상인은 조그만 물건을 하나 팔기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이용한다. 눈웃음이나 미소, 유혹하는 몸짓은 기본 중의 기본이었다. 보는 사람은 자연스러운 행동으로 받아들이지만, 그 모든 것이 사실은 고도로 계산된 행위였다.

은소청도 상인으로 기반을 닦았기에 그런 사실을 잘 알았고, 할 줄도 알았다. 하지만 원설화처럼 저렇게 자연스럽게 모든 행동에 녹여 낼 수는 없었다.

“오랜만에 돌아오는 거겠네. 내가 이곳에 들어온 이후에는 통 은가보의 상단을 보지 못했으니까.”

“네!”

원설화의 시선이 은소청의 등 뒤에 줄지어 서 있는 짐수레를 향했다.

“뭘 싣고 왔어?”

“암염이에요.”

“그렇지 않아도 악양에 소금이 많이 모자라는데 돈 좀 벌겠네.”

“그러면 좋겠네요.”

“앞으로 잘 부탁할게.”

“뭘요?”

“동생도 알다시피 우리 신화상단도 이제 이곳 호남성에 둥지를 틀었거든. 은가보가 원주인인 셈이니 당연히 객인 우리가 양해를 구해야지.”

원설화의 화사한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반대로 은소청의 얼굴은 더욱 딱딱하게 굳었다. 원설화의 말이 자신을 놀리는 거라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마교가 완전히 장악한 호남성이었다. 때문에 호남성 전통의 강자였던 은가보의 영향력은 예전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형편없이 쪼그라든 상태였다. 그런 은가보에 마교를 등에 업은 신화상단이 허락을 받는다고 말을 하는 것 자체가 기만하는 행위와 다름없었다.

은소청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고, 원설화는 그런 은소청을 보며 더욱 짙은 미소를 지었다.

은소청은 울컥 치밀어 오르는 화를 억누르며 애써 태연하게 말했다.

“신화상단이 호남성에 둥지를 틀겠다면야 저희야 대환영이죠. 천하제일상단이 들어오면 자연 시장이 확대되지 않겠어요. 저희는 신화상단이 흘린 조그만 콩고물이면 충분해요.”

“호호! 겸손하긴. 어쨌거나 허락한 걸로 알게. 고마워!”

“아니에요.”

원설화의 눈이 초승달처럼 휘어졌다.

남자만 서열을 만들고 우위를 점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었다. 여인들에게도 그런 본능은 있었고, 원설화는 유독 그런 성향이 강했다.

한때 맹렬한 기세로 신화상단에 도전했던 은가보를 발밑에 둠으로써 그녀는 스스로의 위치를 확인했다. 은소청보다 월등히 높은 곳에 자리한 자신의 자리를.

한동안 우월감을 즐기던 원설화의 시선이 문득 은소청 등 뒤에 서 있는 초연운을 향했다. 그에 초연운이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

“그쪽은?”

“은가보의 조일경이라고 합니다.”

초연운이 태연한 표정으로 가명을 말했다. 어차피 살짝 변장을 했기에 본래의 얼굴을 들킬 걱정도 없었다.

원설화는 그런 초연운의 모습을 유심히 바라봤다.

“왜 그러십니까?”

“아니에요. 내가 아는 어떤 사람과 닮은 것 같은데, 착각이었나 보네요.”

초연운의 태연한 표정과 물음에 원설화가 살짝 고개를 저었다.

원설화는 은소청의 등 뒤에 보이는 호상단의 사람들을 하나하나 바라봤다. 상인의 기본은 관찰과 분석이었고, 원설화는 그 모든 것이 습관이 되어 있었다.

장진명을 비롯한 결사대는 태연하게 행동했다. 처음엔 호상단으로 위장하는 것이 어색했지만, 오랫동안 동행하다 보니 많이 자연스러워진 것이다.

원설화는 별 이상한 것을 느끼지 못했는지 이내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은소청에게 말했다.

“그럼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왔으니 자유를 만끽해. 원래 고향이 가장 좋은 거잖아.”

“고마워요, 언니.”

“그럼 난 이만 가 볼게. 본단에 들어가 봐야 해서 말이야.”

원설화는 대놓고 마교의 본단으로 들어간다는 말을 했다. 그만큼 더 이상 숨길 것도, 감출 이유도 없다는 뜻이었다. 그 정도로 그녀의 자신감은 최고조에 달한 상태였다.

원설화가 뒤돌아 일행들에게 합류했다.

“출발해요.”

“예!”

일행이 대답과 함께 자리를 떴다.

“아가씨!”

어느 정도 멀어지자 신화상단의 내당주 조관서가 그녀의 곁으로 다가왔다. 한빙수사(寒氷修士)라는 별호를 가지고 있을 만큼 그는 차가운 이성과 뛰어난 두뇌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원설화의 표정이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눈치챘다.

“무슨 일 있습니까? 아가씨.”

“조 당주.”

“말씀하십시오.”

“은가보에 사람을 붙여요.”

“감시하란 말씀이십니까?”

“맞아요.”

“알겠습니다.”

조관서는 구차하게 이유를 묻는 실수를 범하지 않았다.

비록 나이는 그리 많지 않지만 원설화는 오랫동안 상계에서 잔뼈가 굵었다. 강호로 따지면 산전수전 다 경험한 노무인(老武人)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그녀가 이상하다고 말하면 반드시 이상한 일이 발생했다. 미리 대비를 해서 나쁠 것이 없었다.

원설화의 눈이 칼날처럼 날카롭게 빛났다.

‘호상단의 무인이라고.’

그녀는 은소청의 등 뒤에 도열해 있던 일부 무인들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들은 최대한 자연스럽게 행동했지만 원설화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일반적인 강호인들과 호상단의 무인은 다르다.

강호인들은 대부분 타인의 눈치를 보지 않는다. 강자가 모든 것을 가지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스스로가 조금이라도 강하다고 생각한다면 당연히 타인의 눈치를 보지 않게 된다. 그런 생각이 자연스럽게 행동으로 표출되기 마련이었다.

반면 호상단의 무인들은 달랐다.

그들은 일종의 보표로 돈을 받고 무력을 상단에 파는 사람들이었다. 돈에 고용된 자들이기에 자연 행동거지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고, 스스로를 낮추는 경향이 있었다.

그들은 특히 고용주 앞에서 각별히 조심했고, 자신을 내세우는 우를 범하지도 않았다. 적어도 원설화가 아는 대부분의 호상단 무인들은 그런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은소청의 등 뒤에 도열해 있던 호상단 무인들의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할 수 있었다.

‘그들은 결코 단순한 호상단이 아니야.’

상인의 감이 그렇게 속삭여 주고 있었다. 이제까지 그녀의 감이 틀렸던 적은 단 한 번밖에 없었다.

‘권마.’

그릇의 크기를 처음부터 잘못 가늠했기에 타초경사의 우를 범했다. 그녀는 담호를 자신의 치마폭에 휘감을 수 있을 거라 자신했지만, 뜻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모든 것이 처음에 제대로 그의 그릇을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동안 그녀는 많은 성장을 했다. 이젠 두 번 다시 그런 실수를 범하지 않을 것이다.

원설화가 문득 뒤를 돌아봤다. 저 멀리 자신을 바라보는 은소청과 호상단이 보였다.

‘분명 의심하고 있어.’

은소청이 조그만 주먹을 꽉 쥐었다.

그녀는 방금 전 원설화의 눈빛을 떠올렸다. 단순히 여인의 감 때문이 아니었다. 원설화는 짧은 순간 호상단의 면면을 파악한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은소청이 이끄는 호상단이 일반적인 호상단의 무인들과 다름을 느꼈음이 분명했다.

“왜 그래?”

심각한 은소청의 표정에 덩달아 초연운의 얼굴도 굳었다.

“조심해야겠어요.”

“이미 조심하고 있잖아.”

“원설화가 의심을 하고 있는 것이 분명해요.”

“그럴 리가…… 확실해?”

“확실해요.”

은소청이 한순간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하자 초연운의 눈빛 또한 심각하게 변했다.

방금 전까지도 그는 원설화의 눈을 속여 넘겼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은 장진명과 다른 결사대 역시 마찬가지였다.

“모두 고생했다. 앞으로도 그렇게 행동하면 된다.”

장진명은 태연하게 행동한 결사대를 치하하고 있었다. 결사대 역시 미소를 지으며 장진명의 칭찬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휴우!”

초연운이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뱉었다.

***

마교의 본단은 옛 무림맹의 터에 세워졌다.

마교의 총본산답게 본단의 규모는 어마어마했다. 거대한 전각군이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이어졌고, 높다란 벽은 거대한 성을 연상케 했다.

이곳을 차지하기까지 수십 년의 세월과 절치부심, 그리고 희생이 필요했다. 때문에 마교의 무인들이 본단에 가지는 자부심이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다.

궁궐의 구중심처 못지않게 마교의 본단 역시 복잡한 구조로 이뤄져 있었다.

원로들이 모여 있는 호교원.

군사인 상한천의 거처인 군사부.

핵심 전력이 자리하고 있는 내원.

그 외에도 수많은 단체들이 본단의 한 자리를 차지한 채 거대한 성을 이루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깊은 곳에 교주인 척관혈의 거처가 존재했다.

사람의 키보다 몇 배는 더 높고 두꺼운 담벼락으로 둘러싸인 비밀의 대지. 밖에서는 절대 안을 들여다볼 수도 없고, 허락받지 못한 자는 절대 들어올 수 없는 금역이 바로 척관혈의 거처였다.

교주의 거처에 들어갈 자격을 가진 이는 겨우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중 한 명이 바로 군사인 상한천이었다.

상한천은 언제 어느 때고 자유롭게 교주의 거처에 들 수 있는 자격을 갖추고 있었다.

교주의 거처인 교주전에 들어온 상한천은 옷매무새를 단정하게 한 후 크게 숨을 들이켰다.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지고한 신분을 가진 그였지만, 교주인 척관혈과 대면할 때면 언제나 긴장이 되었다.

척관혈은 그에게 신이었다.

무너진 마교를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었던 것도 척관혈이라는 신이 굳건히 자리를 지켜 줬기 때문이었다. 그가 없었다면 지금의 마교도 존재할 수 없었다.

커다란 철문이 그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교주전으로 통하는 입구였다.

거대한 철문 앞에는 흔한 경비 무사가 존재하지 않았다.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교주전으로 통하는 이 거대한 철문은 인간의 힘으로 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오직 기관의 힘을 이용해서만 열 수 있는 거대한 철문 덕에 외곽을 지키는 경비 무사는 필요하지 않았다.

상한천이 철문을 향해 말했다.

“교주님, 저 한천입니다.”

그그긍!

순간 거대한 철문이 둔중한 소리와 함께 서서히 열렸다.

철문 너머 어둠이 잠식한 복도가 보였다. 마치 지옥으로 통하는 통로처럼 끝없이 지하를 향해 이어져 있었다. 복도 벽 양쪽에 걸려 있는 횃불이 아니었다면 칠흑 같은 어둠에 자신의 손조차 구별하지 못할 정도였다.

상한천은 크게 숨을 들이쉰 후 통로로 걸음을 옮겼다. 횃불을 따라 한참을 걸었다. 이러다가 정말 지옥 끝에 도달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복도는 끝없이 이어졌다.

한참을 걸은 후에야 상한천은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칠흑 같은 어둠이 채우고 있는 그곳은 거대한 지하 공동이었다. 지하 공동에 도착하자마자 상한천의 얼굴이 경직됐다. 갑자기 숨이 턱 막혀 왔기 때문이다.

마기(魔氣)가 거대한 지하 공동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마치 먹이를 탐하는 아귀처럼 마기는 빛을 잠식한 채 일렁이고 있었다.

세상의 어둠을 모두 집약한 그 공간 중앙에 한 남자가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그를 본 순간 상한천이 무릎을 꿇으며 외쳤다.

“소신 상한천이 만마(萬魔)의 종주를 뵙습니다.”

쿵쿵!

상한천이 청강석으로 된 바닥에 이마를 찧었다. 살이 찢어지고 피가 흘러나왔지만 상한천은 감히 아프다는 표정 하나 짓지 않았다.

그의 앞에 있는 이는 바로 만마의 종주이자 마교의 교주인 척관혈이었다. 그리고 지하 공동을 가득 채운 마기는 바로 그의 몸에서 발산되는 것이었다.

인간의 몸이 수용할 수 있는 한계를 뛰어넘는 엄청난 마기를 몸에 품은 자.

이미 마신지경(魔神之境)에 도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이가 바로 그의 주군이자 마교의 교주였다.

감히 그를 마주 보는 것만으로도 몸이 떨려 오고 머릿속이 하얘질 정도로 척관혈은 강대한 마기를 발산하고 있었다.

척관혈의 형상은 어둠에 가려져 희미하게만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존재감은 지하 공동 전체를 장악하고 있었다. 그 거대한 존재감 앞에 상한천은 자신이 개미가 된 듯한 기분을 느꼈다.

“한천.”

마침내 척관혈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쿠르르!

그 순간 거대한 지하 공동이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비명을 토해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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