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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권마-415화 (415/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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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5화 5장. 악연은 끝없이 이어진다(3)

부르르!

비단 몸을 떤 것은 지하 공동뿐만이 아니었다. 상한천의 몸도 경련을 일으켰다. 온몸의 털이란 털이 모조리 일어서고, 살갗 위로 닭살이 돋아났다.

어둠 속에서 붉은 안광 두 개가 일렁였다.

교주인 척관혈의 눈빛이었다.

그의 말이 이어졌다.

“무슨 일이냐? 한천.”

척관혈의 음성이 상한천의 머릿속에서 들려왔다. 불문의 혜광심어처럼 마음으로 직접 전해지는 마령진음(魔靈眞音)이었다.

상한천이 부복한 채 대답했다.

“교주님께 윤허를 받고 싶은 것이 있어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무엇이냐?”

“호교원을 움직이고 싶습니다.”

“호교원?”

척관혈의 반문에 지하 공동을 가득 채운 거대한 마기가 일렁여 상한천의 몸을 죄었다. 순간 상한천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호, 호교원의 힘이 필요합니다.”

“이유는?”

“권마에 당한 피해가 극심합니다. 그리고 일부 인사들이 제 뜻대로 움직이지 않고 있습니다.”

“너의 뜻은 곧 나의 의지. 누가 감히 나의 명을 거역하는 것이냐?”

“신화전주 남현소가 제 명을 거역하고 멋대로 병력을 소집했습니다.”

“남현소가?”

“예! 그는 독단적으로 병력을 소집해 권마를 치려 했습니다.”

“결과는?”

“남 전주의 소식이 끊겼습니다.”

“실패했다는 뜻이군.”

“…….”

상한천은 대답하지 않았다. 굳이 대답하지 않았어도 그의 뜻은 척관혈에게 전해졌다.

츠으으!

지하 공동을 채운 마기가 마치 폭풍처럼 일렁였다. 척관혈이 분노했다는 증거였다.

“한천.”

“말씀하십시오.”

“위강휘에게 내 말을 전하라. 네 뜻이 곧 내 의지라고.”

“감사합니다. 교주님!”

쿵!

척관혈이 다시 한 번 힘차게 바닥에 머리를 찧었다.

위강휘의 별호는 유령마제(幽靈魔帝), 호교원의 신임 원주였다.

전대 호교원주였던 북명마제(北溟魔帝) 화무의가 성녀인 음유경과 내통하다가 척살을 당한 이후 새롭게 호교원의 수장이 된 자였다.

상한천보다 배분이 높은 데다가 성격 또한 제멋대로여서 상한천의 입김이 잘 통하지 않았다.

그는 호교원을 움직이고 싶으면 교주의 명을 받아 오라는 말만 하고는 은둔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런 그를 움직이려면 반드시 척관혈의 허락이 필요했다.

“한천.”

“말씀하십시오.”

“서둘러라. 나의 출관이 머지않았으니. 그 전에 최소 무림맹까지는 병탄해야 할 것이다.”

“존명!”

상한천이 힘차게 외치며 다시 한 번 이마를 바닥에 찧었다. 청강석으로 만든 바닥이 그의 피로 붉게 물들었다.

“그만 물러가라. 더 이상 이곳에 있다가는 너의 똑똑한 두뇌가 모조리 타 버릴 테니까.”

“알겠습니다. 그럼 다시 출관할 때까지 부디 몸 보중하십시오.”

상한천이 척관혈에게 깊이 허리를 숙인 후 조심스럽게 물러났다. 마치 어둠에 떠밀리듯 그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권마라…….”

때로는 단지 상대의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꺼림칙한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권마라는 별호가 그랬다.

단지 그 별호를 듣는 것만으로도 적개심이 들고, 강렬한 투쟁심이 들끓었다. 그만큼 자극이 된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권마 담호는 분명 대단한 고수였고, 마교에 큰 타격을 주는 골치 아픈 존재였지만 척관혈이 출관하면 문제될 것이 없었다.

그가 익힌 천포마공(天包魔功)은 인간으로서 마신의 힘을 행사하게 해 주는 천고의 마공.

천포마공 앞에서는 중원의 그 어떤 신공절학도 무의미해질 뿐이다. 권마 담호가 제아무리 대단하다고 하더라도 그가 익힌 천포마공 앞에서는 보름달 앞의 반딧불처럼 빛을 잃고 만다.

문제는 권마가 아니라 다른 곳에 있었다.

척관혈이 나직한 목소리로 누군가를 불렀다.

“멸왕.”

“예! 교주님.”

순간 누군가 대답과 함께 유령처럼 홀연히 나타났다.

마치 눈처럼 새하얀 장포를 입고 있는 사내였다. 어깨엔 하얀 여우털로 만든 목도리를 걸친 사내는 눈동자마저 하얘서 마치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듯한 느낌을 주었다.

사내의 이름은 노군상, 별호는 백익멸왕(白翼滅王).

흑익사왕 진도휘와 더불어 교주를 지근거리에서 보좌하는 흑백사자 중 백사자가 그의 신분이었다.

얼굴이 어느 정도 알려져 있는 진도휘와 달리 그의 모든 것은 철저하게 어둠의 장막에 가려져 있었다. 그의 진면목을 아는 이는 교주인 척관혈과 진도휘 정도였다.

척관혈이 물었다.

“놈은?”

“죄송합니다.”

“아직도 못 찾았단 말인가?”

“워낙 은밀하게 숨어서 시간이 걸리고 있습니다. 허나 단서를 거의 찾았으니 머지않아 찾아낼 수 있을 겁니다.”

“서둘러라.”

“존명!”

대답과 함께 노군상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혼자 남은 척관혈의 시선이 어둠으로 가득 찬 지하 공동 천장으로 향했다.

“흐흐! 늙은이 조금만 더 기다려라.”

그가 이빨을 뿌득 갈았다. 그러다 어둠이 출렁였다.

벌써 수십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그는 아직도 잊지 않고 있었다. 그날의 수치스러운 기억을. 아비가 죽는 것을 숨어서 지켜봐야 했던 그 치욕의 순간을 말이다.

그가 물었다.

―살고 싶으냐?

그리고 그날의 자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그날 그 장소로 되돌아갈 수 있다면 고개를 끄덕이는 자신의 목을 날려 버릴 것이다.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 흐으!”

순간 그의 눈이 광기로 물들어가며 엄청난 마기를 폭사했다.

쿠우우!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마기에 지하 공동이 비명을 내질렀다.

***

“아미타불! 왜 이리도 천기가 불안하단 말인가?”

광천이 어둠에 잠긴 하늘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하늘이 온통 먹장구름으로 덮여 있었다. 별들은 빛을 잃었고, 커다란 보름달마저 구름의 장막에 갇혀 보이지 않았다.

그가 소림사의 방장이 된 지 벌써 이십여 년이 넘었지만, 이렇게 천기가 불안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천기가 혼란스러웠다.

“이럴 때 무량 사조께서 살아 계셨더라면 얼마나 큰 의지가 되었을까? 그분의 부재가 못내 아쉽구나.”

광천은 몇 해 전 급작스럽게 성불한 무량신승(無量神僧)을 떠올렸다. 해가 지날수록 무량신승의 부재가 크게 느껴졌다.

“아미타불! 아미타불! 대자대비한 세존이시여, 부디 소림을 굽어살피옵소서.”

“방장님.”

그때 갑자기 밖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와 광천의 상념을 깨웠다.

“누군가?”

“소승 율천입니다.”

“들어오너라.”

광천의 허락이 떨어지자 문을 열고 중년의 승려가 들어왔다. 그는 일대제자 중 한 명인 율천이었다.

“그래, 어떻게 되었느냐?”

“죄송합니다. 찾지 못했습니다.”

“허!”

율천의 대답에 광천의 표정이 침중해졌다. 그에 율천의 표정 역시 어두워졌다.

“소승이 불민해 방장님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습니다.”

“아니다. 그게 어떻게 네 탓이겠느냐?”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십시오.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 곧 광해 사숙을 찾아낼 수 있을 겁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광해가 그렇게 말없이 사라질 아이가 아니거늘.”

광천이 나직이 한숨을 토해 냈다.

광해가 홀연히 사라진 지 벌써 여러 날이었다.

처음엔 그가 사라진 것조차 몰랐다. 광천이 워낙 바빴기도 했지만, 애초부터 광해와 그다지 좋은 사이가 아닌 것도 한몫했다.

광해는 광천의 정책에 비판적인 입장이었다. 광천이 무림맹을 끌어들인 것도, 소림사 지근거리에 공간을 내준 것도 탐탁지 않아 했다. 그 때문에 광천과 많은 의견 충돌을 일으켰다.

광해가 하는 말이 다 소림사를 위해서 하는 말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듣고 싶은 이야기만 들어도 시간이 모자란 것이 인간의 마음이었다.

광천도 그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스스로는 수양이 깊다고 생각했지만, 거듭되는 광해의 고언과 의견 충돌은 그를 지치게 만들었고, 결과적으로는 그를 외면하게 만들었다.

광천은 오랫동안 광해를 찾지 않았고, 근래 들어서야 그가 홀연히 실종되었음을 알아차렸다.

명색이 소림사의 장로인 광해였다. 광해의 실종은 광천에게 큰 충격을 안겨 줬다.

그는 광해의 실종 사실을 알자마자 율천을 불러 찾게 했다. 그나마 소림사 내에서 율천이 가장 세속적이면서도 추적에 능했기 때문이다.

“반드시 광해를 찾아야 한다. 아무리 그가 나와 사이가 좋지 않다고 하나 이렇게 오랫동안 연락도 없이 은거할 사람이 아니다. 분명 무슨 일이 생긴 게야.”

“방장님.”

“그의 흔적을 역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게. 접촉한 사람들, 연통을 주고받은 사람과 행적까지 하나 남김없이 다시 점검해 보게나.”

“그리하겠습니다.”

“물러가게.”

“그럼 좋은 결과를 들고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율천이 공손히 고개를 숙인 채 물러났다.

다시 혼자가 된 광천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

“무림맹을 숭산에 들인 것이 실수였던가?”

대의를 위해 무림맹을 숭산에 들였다. 숭산에 터전을 잡은 무림맹은 확장일로를 걷고 있었지만, 그 이후 소림사는 조용할 날이 없었다.

무림의 태두를 자처하기에 어쩔 수 없이 결정한 사항이었지만, 요즘 들어서는 조금씩 후회가 되는 광천이었다.

광 자 배의 장로들이야 세속에 대한 욕심이 거의 없기에 문제가 될 일이 없었지만, 일대제자나 이대제자 중에서는 세속의 명예를 탐하는 자들이 하나둘씩 나오고 있었다.

그들은 불문의 수행자라기보다는 세속의 무인 같은 행동을 많이 보였다. 무림맹의 무인들과 자주 접촉하면서 알게 모르게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이다.

“아미타불! 아미타불! 업보로구나. 업보야.”

이 모든 것이 자신의 결정으로 인해 발생한 일이었다. 처음엔 모래알처럼 작게 느껴졌지만, 지금은 커다란 바위가 가슴을 짓누르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 후로도 광천의 한숨은 한참 동안이나 이어졌다.

***

“형?”

“쉿! 조용.”

남궁선휘가 자신을 부르는 남궁영휘를 조용히시킨 채 전방을 바라봤다. 그의 시선이 멈춘 곳에는 담호가 눈을 감고 운기를 하고 있었다.

처음에 방진보가 담호를 데리고 이곳에 나타났을 때 얼마나 놀랐는지 몰랐다. 혈인이 된 채 전신 곳곳에 끔찍한 상처가 가득한 담호의 모습은 시체나 다름없이 보였다.

하지만 담호의 눈빛은 여전히 형형했고, 그 지독한 상처를 입고도 아프다는 말 한마디, 신음 한 번 흘리지 않았다.

마치 그 정도의 상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한 태도는 남궁선휘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남궁세가라는 안전한 울타리 안에서만 안주하던 그에게 담호란 존재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든 것이 충격의 연속이었다.

츠으으!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담호의 어깨 위로 짙은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핏빛 아지랑이가 짙어질수록 창백하던 담호의 얼굴에도 서서히 혈색이 돌아오고 있었다.

‘상처 입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진정한 무인이 될 수 없어. 피를 보는 것이 두려워서 몸을 사리는 순간 무인의 가치는 사라지는 거야.’

남궁선휘가 주먹을 꽉 쥐었다.

이제야 남궁세가가 왜 담호에게 그리 처참하게 당했는지 알 것 같았다. 지켜야 할 것이 많은 남궁세가는 타인에게는 쉽게 상처를 주면서 정작 자신들은 상처를 받는 것을 두려워했다.

남들의 눈에는 절대강자로 보일지 몰랐지만, 남궁세가는 절대강자가 아니었다. 담호를 기준으로 본다면 말이다.

한쪽은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져 부딪쳤고, 다른 한쪽은 몸을 사리며 상처를 입지 않으려 했다. 애초부터 마음가짐 자체가 달랐으니, 결과도 이미 정해져 있던 것이다.

남궁선휘가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질근 깨물었다.

그의 눈앞에서 운공을 하고 있는 괴물은 남궁세가를 몰락케 한 주범이자, 본을 받고 배울 만한 선생(先生)이었다.

‘반드시 당신의 모든 것을 훔쳐 배우겠다. 그래서 남궁세가를 다시 부흥시키겠다.’

남궁선휘가 남궁영휘의 조그만 손을 힘껏 움켜잡았다.

“형!”

“우리 최선을 다하자.”

“응!”

이유도 모르면서 남궁영휘가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였다.

쿠우우!

갑자기 강력한 기파가 일대를 휩쓸고 지나갔다.

동심원 모양으로 퍼져 나가는 기파에 먼지가 자욱하게 일어났다.

담호가 깨어나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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