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0
420화 7장. 성의를 다해 손님을 맞이한다(2)
“흐음!”
초연운이 슬쩍 전각을 바라봤다.
장진명을 비롯한 결사대의 수뇌부들이 모여 있는 전각이었다. 설산도객 이설휘만 빠지고 나머지는 모두 저곳에 모여 있었다.
초연운은 천리지청술(千里地聽術)을 펼쳐 안에서 벌어지는 대화를 듣고자 했다. 하지만 전각을 중심으로 기막(氣膜)이 펼쳐져 음파가 나가는 것을 막고 있었다. 때문에 안에서 어떤 대화가 오가는지 하나도 알 수가 없었다.
‘기막을 펼치면서까지 지켜야 할 비밀이 있다는 건가?’
어차피 은가보에 모인 자들은 모두 결사대에 지원한 자들이었다. 같은 목적을 가지고 차출된 무인에게까지 지켜야 할 비밀이 무엇인지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였다.
“여기서 뭐하세요?”
한 줄기 청아한 음성이 들려왔다.
초연운이 고개를 돌리자 자줏빛 광목옷을 입은 여인이 보였다. 곱게 틀어 올린 삼단 같은 머리와 반월형 눈썹이 유난히도 아름다운 여인은 바로 해소월이었다.
초연운이 멋쩍은 표정으로 웃었다.
“그냥……!”
“기막에 막혀 있어 소용이 없을 거예요.”
“…….”
“저도 시도해 봤거든요.”
“제기랄!”
해소월의 말에 초연운이 그만 자신도 모르게 속내를 내뱉고 말았다. 해소월이 전각을 보며 중얼거렸다.
“무슨 비밀이 그렇게 많은지 모르겠어요.”
소림사에서 이곳까지의 거리는 천 리가 넘었다. 일반적으로 말을 달린다면 열흘 정도면 충분히 올 수 있는 거리였지만, 은밀히 움직였기에 그 두 배의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일면식이 없는 사이라도 이십여 일을 함께 움직인다면 정이 들 수밖에 없었고, 말문도 트일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해소월은 소보원과 꽤나 가까워졌다. 일차 정마대전 당시 소보원이 어떻게 결사대에 참여했고, 또 얼마나 처절한 싸움을 했는지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그녀와의 대화는 해소월에게 큰 도움이 됐다. 소보원은 특히 같은 여성인 해소월을 아껴서 많은 가르침을 베풀었다. 하지만 그녀와 대화를 하면 할수록 해소월은 알 수 없는 벽을 느꼈다.
보이진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고, 태산보다 높고 험준한 그 벽을.
소보원은 분명 무언가를 숨기고 있었다. 문제는 그것이 무엇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 역시 초연운처럼 전각 내의 대화를 은밀히 훔쳐 들으려고 했었다. 물론 그녀의 시도는 기막에 막혀 무위로 돌아가고 말았지만.
“대체 무얼 숨기는 걸까요? 초 대협은 짐작하고 있는 것이 있지 않아요?”
“아직 확실한 게 아니라서.”
초연운이 망설이자 해소월이 성큼 다가왔다.
“초 대협!”
“…….”
“저는 우리가 믿을 수 있는 동료라고 생각해요. 초 대협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요? 비밀을 말해 주세요. 저희도 한배를 탔잖아요.”
“휴우!”
해소월의 말에 초연운이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해소월이 한 걸음 더 다가왔다.
“담 대협이나 초 대협이 남에게 말 못 할 비밀을 알고 있다는 것은 이미 짐작하고 있어요. 그것이 무척이나 위험하다는 것도요. 그래서 모른 척하고 있었지만, 이젠 저희도 알아야 할 시기가 아닌가 싶네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해소월의 눈동자는 맑고 깊었다. 그런 그녀의 눈동자를 보는 순간 초연운은 더 이상 천사교에 대해 숨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휴우!”
“비밀은 반드시 지킬게요.”
“사실은…….”
결국 초연운은 자신이 알고 있는 진실을 말해 줬다. 마교 말고도 천사교가 존재하고, 그들의 진정한 목적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는 사실까지도 말이다.
해소월은 담담히 그 모든 이야기를 들었다. 초연운의 이야기가 모두 끝날 때까지도 그녀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천사교라…….”
진실이란 것은 얇은 천 뒤에 가려져 있는 송곳과 같았다. 철저하게 가려진 듯하지만 약간의 힘만 주어도 천을 뚫고 실체를 드러내기 마련이었다.
해소월은 삼 년 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은소청을 만나기 위해 강호에 나왔을 때 그녀는 정체 모를 자객들에게 습격을 받았었다.
그때의 사건이 촉매가 되어 무림맹이 만들어지는 계기가 됐었다. 당시에는 단순히 마교에 기습을 받았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와 다시 떠올려 보면 이상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중 가장 크게 의아했던 것이 마교가 굳이 해소월을 노릴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비록 해소월이 구무룡 중의 일인이라고 하지만 강호 대세에 영향을 끼칠 만큼 존재감이 큰 사람은 아니었다.
그런 해소월을 굳이 마교가 노려서 강호에 경각심을 가지게 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결국 천사교가 나를 이용해 무림맹이 창설되게 만든 것인가?’
그제야 모든 의문이 풀렸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은 그리 편치 않았다.
‘음지에서 무림맹과 마교의 충돌을 조장하는 제삼의 세력이라니. 이런 사실을 말해 봐야 누가 믿을까?’
결국 해소월이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제야 그녀는 초연운이 얼마나 노심초사했을지 알 수 있었다.
“고마워요. 진실을 말해 줘서.”
“오히려 늦게 말해 줘서 미안합니다. 알다시피 함부로 이야기할 수 없는 사실이라서.”
“이해해요.”
해소월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전각을 바라봤다.
“그러니까 저들 중 일부는 천사교와 연관이 있을지 모르는 분들이라는 거네요.”
“어쩌면 전부 다일 수도 있습니다.”
“휴우!”
해소월이 결국 무서운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진실은 숨을 쉬기 힘들 정도로 무거웠고 무서웠다.
“이 사실을 담 대협도 알고 계시나요?”
“물론입니다. 나에게 이 사실을 알려 준 사람이 바로 그입니다.”
“으음!”
“그는 이미 오래전부터 그들과 싸우고 있었습니다.”
“담 대협은 홀로 너무 큰 짐을 지고 있었군요. 허면 초 대협이 마음을 바꿔 굳이 합류한 것도 천사교 때문이겠군요.”
“뭐, 그런 셈입니다.”
“고맙습니다. 그 말밖에 드릴 말씀이 없네요.”
해소월의 말에 초연운이 쑥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내 전각을 바라봤다.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열리고 그들이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장진명을 필두로 소보원, 구의진 등이 줄줄이 밖으로 나왔다. 그들의 안색은 어딘지 모르게 경직되어 있었다. 하지만 초연운과 해소월을 보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자연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여기서 무슨 대화를 그리 하고 있는 겐가?”
“그냥 이것저것 상의할 게 있어서 말입니다.”
“그런가?”
초연운의 태연한 대답에 장진명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장진명의 눈은 그 어느 때보다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마치 속을 꿰뚫어 볼 것 같은 칼날 같은 눈빛에도 초연운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그것은 해소월도 마찬가지였다.
잠시 그들을 훑어보던 장진명이 이내 미소를 지었다.
“자네들이 사이가 좋은 모습을 보니 나도 기분이 좋군. 자네들이야말로 강호의 희망이자 최후의 보루가 아니던가?”
“말씀만으로도 감사할 뿐입니다.”
“말만이 아닐세. 실제로도 그렇게 생각하네.”
장진명이 눈도 깜빡하지 않고 그렇게 말했다.
초연운은 그런 장진명의 모습에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장진명은 단 한 번도 초연운에게 허점을 보이지 않았다.
상대는 노련한 여우였다. 산전수전 다 겪은 노장 앞에서 섣불리 감정을 드러내는 것만큼 위험한 일은 없었다. 때문에 초연운 역시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지 않으려 부단히 노력해야 했다.
그렇게 때아닌 신경전이 벌어지고 있을 때였다.
“오라버니.”
은소청이 갑자기 초연운을 부르며 빈객청 쪽으로 뛰어 들어왔다.
모두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은소청을 향했다.
은소청은 무척 다급한 표정이었다.
“무슨 일이야?”
“신화상단에서…….”
“신화상단?”
“네! 신화상단의 원설화 소저에게서 납품 요청이 왔어요.”
“그게 무슨 말이야?”
“이번에 우리가 가져온 암염을 마교에 대신 납품해 달라고 하네요.”
은소청의 말에 장진명과 소보원 등이 서로의 얼굴을 바라봤다. 은가보의 호상단이 싣고 온 암염은 어디까지나 장진명 등의 존재를 감추기 위한 위장 물품이었다. 때문에 어딘가에 납품해야겠다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먼젓번에 원설화를 만났을 때 스쳐 지나가는 말로 암염 이야기를 꺼냈는데, 설마 원설화가 마교에 대신 납품해 달라고 할 줄은 몰랐다.
“원래 그런 일이 흔한 거야?”
“절대요. 신화상단 정도 되는 거대상단이 그보다 못한 상단에 대신 납품해 달라고 하는 일은 없어요. 물론 지금은 특별히 예외적인 상황이긴 하지만.”
“예외라?”
“네! 신화상단이 마교의 외원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마교가 장악한 곳 이외의 상행이 막혔어요. 당연히 소금을 구하는 것도 쉽지 않아요.”
“흐음!”
초연운의 눈빛이 착 가라앉았다. 무언가 수상한 냄새가 났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암염을 납품해 달라니? 그렇다면 우리가 아무런 검문도 거치지 않고 마교로 입성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아닌가?”
목소리의 주인은 바로 장진명이었다.
전대 결사대의 무인들 중에서 그가 가장 연장자이면서 막강한 무력의 소유자였기에 은연중 일행의 수장 역할을 하고 있었다.
초연운과 해소월 등의 시선이 장진명을 향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들은 그대로네. 은가보의 호상단으로 위장하면 마교에 무혈입성 할 수 있을 것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의 목적을 이루기가 훨씬 수월해지지.”
“함정일지도 몰라요.”
은소청의 말에 장진명이 그녀를 노려봤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가?”
목소리에 한기가 담긴 것이 느껴졌다. 무공을 익히지 않은 은소청으로서는 감당하기 힘이 들었다.
자연 그녀의 얼굴이 핼쑥하게 질렸다.
“그, 그건…….”
그 순간 초연운이 자연스럽게 장진명과 은소청 사이로 끼어들었다. 그러자 은소청에게 가해지던 압력과 한기가 차단됐다.
은소청이 살짝 고개를 숙여 초연운에게 감사의 뜻을 표한 후 말을 이어 갔다.
“신화상단의 원 소저는 절대로 자신의 이득을 남에게 베풀어 주는 사람이 아니에요. 사정이 아무리 급하다고 해도요.”
“하지만 방금 전 자네 입으로 말하지 않았나? 다른 곳의 상행이 막혀 소금을 구하는 데 애를 먹고 있다고.”
“물론 그렇지만…….”
“소금은 일상생활에 반드시 필요한 물건이네. 하루라도 빠지면 큰 문제가 일어나지. 소금이 들어가지 않는 음식이 어디 있던가? 그러니 저들로서는 발등에 불이 떨어진 셈 아닌가?”
장진명의 목소리가 자연스럽게 높아졌다.
천인대적검이라 불리는 장진명이었다. 홀로 능히 천 명을 상대할 정도의 가공할 무인이 목소리를 높이자 자연 다른 사람들은 숨을 죽일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는 같은 전대 결사대의 무인들조차도 말이다.
장내에 정적이 찾아왔다.
“물론 자네들의 우려를 모르는 것은 아닐세. 적들의 함정이 아닐지 걱정도 되겠지. 허나 인생엔 언제나 꽃길만 펼쳐지지는 않네. 때로는 위험한 줄 알면서도 가시밭길을 선택해 가야 하는 게야. 물론 그 과정에서 적지 않은 희생도 치르겠지. 허나 그것이 강호의 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한 것이라면 그보다 영광스러운 희생이 어디 있겠나? 수십 년 전에도 그랬어. 모두가 위험하다고 만류했지. 허나 사신제의 인도하에 결사대는 마교의 본단을 기습했고, 결국 승리를 쟁취했지.”
장진명의 목소리엔 한 줄기 광기마저 담겨 있었다.
초연운의 눈빛이 살짝 변했다.
‘위험해!’
저런 류의 광기는 자신뿐 아니라 주변의 사람들까지 격한 감정의 격류에 휩쓸리게 만들어 버려 이성적인 생각을 할 수 없게 만들기 마련이었다.
더군다나 장진명 같은 절대고수가 발휘하는 광기라면 무공의 고수들조차 저항할 수 없게 만들어 버린다.
실제로 신진고수들 중 최고라 평가받는 해소월뿐만 아니라 소보원이나 구의진 같은 전대의 고수들까지도 장진명의 광기에 영향을 받고 있었다.
그의 광기에서 자유로운 이는 초연운과 그의 보호를 받는 은소청뿐이었다.
“희생 없이는 영광도 없네. 결사대에 자원한 자네들이라면 그런 사실을 더 잘 알 거야. 어차피 살고자 온 길이 아니잖은가? 결사대의 희생으로 반전의 기회를 잡을 수 있다면 그보다 더한 영광은 없네. 그렇지 않은가? 이건 절호의 기회일세. 이번에 놓치면 언제 또 이런 기회가 오겠는가?”
“…….”
장진명의 말이 끝나자 질식할 듯한 정적이 찾아왔다. 누구 한 명 섣불리 대답하지 못했다.
심지어는 초연운도 장진명의 말에 반박을 하지 못했다. 지금 이 순간 장진명에게 반박을 했다가는 싸우자는 말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장진명은 늘 정중한 모습만 보여 줬었다. 하지만 그것은 철저하게 계산된 모습일 뿐이었다.
“결사대를 소집하게. 이번 기회를 절대 놓쳐서는 안 되네.”
장진명이 쐐기를 박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