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1
421화 7장. 성의를 다해 손님을 맞이한다(3)
“헤! 정말 끝내준다. 화산대숙수라고 하더니 정말 대단하네.”
“아! 그게…….”
“더 없어?”
“여기 있어요.”
“고마워!”
방진보가 음식을 덜어 주자 녹수빙이 싱긋 미소를 지었다. 남궁선휘는 그런 녹수빙의 미소에 넋을 빼앗겼다.
녹수빙은 마치 처음부터 동행이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담호 일행에 합류했다.
남궁 형제에 녹수빙까지 더해지자 방진보도 해야 할 음식의 양이 덩달아 늘어났다. 그래도 방진보는 싫다는 표정 하나 짓지 않고 음식을 했다.
“정말 맛있어. 이런 맛은 처음이야.”
녹수빙은 부지런히 젓가락을 놀리며 연신 감탄사를 내뱉었다. 방진보는 그런 녹수빙을 신기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강호의 여인들이 감정 표현이 확실한 것이 사실이었지만, 녹수빙처럼 감정이 풍부한 여인은 또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녹수빙처럼 아름다우면서 강한 무력을 소유한 여인이 감정마저 풍부하자 그야말로 매력이 폭발했다.
남궁선휘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녹수빙을 바라보는 것이 그 증거였다. 하지만 담호와 방진보는 그런 녹수빙의 매력에도 별반 감정의 변화를 느끼지 못했다.
담호야 원래부터 감정의 변화가 없었고, 방진보의 가슴에도 오직 은소청만이 가득해서 다른 이가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었다. 때문에 녹수빙이 아무리 매력적이어도 그저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갔지만, 아직 어린 남궁선휘는 거의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잘 먹었습니다.”
마침내 식사를 끝낸 녹수빙이 그릇을 내려놓았다. 그녀의 그릇은 그야말로 깨끗이 비워져 있었다. 그리고 얼굴엔 행복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해맑은 모습이 여느 소녀들과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누가 이 여자가 사신성의 일인인 환상선자라고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방진보는 그렇게 생각하며 그릇과 젓가락을 수거했다. 그러자 곁에 있던 남궁영휘가 잽싸게 말했다.
“형, 설거지는 제가 할게요.”
“그럴래?”
“네! 맡겨 주세요.”
남궁영휘가 힘차게 대답했다.
그는 마치 친형처럼 방진보를 따르고 있었다. 해맑은 모습이 도저히 가문을 잃은 아이처럼 보이지 않았다.
방진보는 그런 남궁영휘가 철없다 생각했다. 그래서 오히려 더 불쌍하게 생각되고 마음이 가는 것도 사실이었다.
남궁영휘는 설거지 거리를 가지고 근처의 개울가로 달려갔다. 남궁영휘는 콧노래까지 흥얼거리고 있었다.
문득 방진보의 시선이 개울 한쪽에 있는 커다란 바위를 향했다. 마치 산성처럼 우뚝 선 바위 위에 담호가 앉아 있었다. 검은 피풍의가 바위 위를 덮고 있었다.
하오문의 분타주 서일명이 담호에게 잘 보이려 선물한 옷이었다. 검은 피풍의 안에는 질 좋은 가죽으로 만든 검은 무복이 있었는데, 예전 담호가 강호에 처음 나왔을 때 구해 입은 가죽옷과 비슷했다.
담호는 바위 위에 앉은 채 설거지를 하는 남궁영휘를 무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누가 봐도 남궁 형제와 선을 딱 그은 모습이었다.
방진보는 그런 담호의 모습에 살짝 아쉬움을 느꼈다.
“형도 저 아이들에게 조금이라도 정을 주면 좋을 텐데.”
한쪽에서는 어느새 남궁선휘가 검술을 수련하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녹수빙에게 온통 시선을 빼앗긴 듯한 모습이었는데, 명문가의 자제답게 금방 이성을 회복한 듯했다.
남궁선휘는 남궁세가를 부흥시켜야 한다는 사명을 잊지 않았다. 그는 금방 녹수빙에 대한 생각을 떨쳐 버리고 검에만 몰두했다.
그들이 있는 곳은 이름 모를 한 야산 근처 개울가였다.
담호와 방진보에게 노숙은 일상처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남궁 형제도 처음과 달리 이젠 무척이나 익숙해진 상태였다. 그리고 녹수빙 역시 강호의 여협답게 노숙을 부담스러워하지 않았다.
해는 어느새 서산 너머로 사라졌고, 칠흑 같은 어둠이 찾아왔다. 모닥불 근처를 제외하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짙은 어둠이 사위를 잠식했다.
그 속에서 일행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눴다.
녹수빙은 궁금한 것이 무척 많은 듯했다. 그녀는 방진보에게 쉴 새 없이 질문했고, 방진보는 성심껏 대답했다. 그리고 남궁선휘의 시선은 녹수빙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남궁영휘는 조용히 모닥불 가를 빠져나왔다. 그가 향한 곳은 바로 담호가 앉아 있는 커다란 바위였다.
담호는 여전히 처음과 똑같은 모습으로 바위 위에 앉아 있었다. 남궁영휘는 그런 담호의 모습이 바위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고집스레 꾹 다문 입술과 어떤 일에도 절대 흔들리지 않을 것 같은 눈동자, 그리고 철벽 같은 분위기가 천 년의 세월을 굳건히 견뎌 온 거암 같았다.
남궁 형제가 담호와 합류한 지 벌써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이렇게 남궁영휘가 홀로 담호에게 접근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저…….”
남궁영휘가 조심스럽게 입을 뗄 때였다. 바위처럼 꼼작도 하지 않던 담호가 고개를 돌려 남궁영휘를 바라봤다.
순간 남궁영휘가 움찔했다. 하지만 담호의 시선을 피하진 않았다. 지금까지 함께하면서 처음 보이는 강단 있는 모습이었다.
그간 남궁영휘는 늘 철없거나, 순진한 모습만 보였었다. 하지만 지금 담호를 바라보는 남궁영휘의 눈빛은 그런 것들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남궁영휘가 조그만 입술을 열었다.
“곁에 앉아도 돼요?”
담호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남궁영휘가 커다란 바위 위를 낑낑거리며 기어 올라갔다. 그리고 담호의 곁에 앉았다.
“아!”
순간 남궁영휘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담호가 앉은 바위가 아니면 볼 수 없는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기 때문이다. 칠흑 같은 어둠 너머 아스라하게 빛나는 불빛들이 보였다. 아마도 야산 너머에 있는 마을일 것이다. 그리고 고개를 들자 어두운 하늘을 빛내고 있는 별의 바다가 보였다.
그 환상적인 모습에 남궁영휘는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
그 순간 담호가 입을 열었다.
“한 걸음만 옮길 용기가 있으면 세상이 다르게 보인다.”
많은 의미가 담긴 말에 남궁영휘가 담호를 바라봤다. 그런 남궁영휘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알고…… 계셨어요?”
담호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남궁영휘가 고개를 푹 숙였다.
한참 동안이나 그렇게 있던 남궁영휘가 저 멀리 모닥불 가에 앉아 있는 남궁선휘를 바라보았다.
남들이 모두 휴식을 취하고 있는 시간에도 남궁선휘는 남궁세가를 부흥시켜야 한다는 과도한 부담감에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 형을 버티게 하는 것은 남궁세가를 다시 부흥시켜야 한다는 사명감과 저를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이에요. 그것들이 없으면 형은 무너질 거예요.”
“그래서 계속 너를 죽이겠다는 거냐?”
“…….”
담호의 말에 남궁영휘가 입술을 질겅 깨물었다. 갈등 어린 그의 모습은 이제까지 순진하게만 보였던 모습과는 백팔십도 달랐다.
담호는 알고 있었다. 남궁영휘가 형 남궁선휘 때문에 자신을 죽이고 있다는 사실을.
지금 당장의 자질은 남궁선휘가 더 뛰어날지 모른다. 실제로 남궁영휘의 체력이나 자질은 그보다 떨어졌으니까. 하지만 남궁영휘는 뛰어난 두뇌를 가지고 있었다.
남궁세가의 방대한 무학을 모두 머리에 담을 정도면 보통 뛰어난 두뇌가 아니었다. 천재라고 불러도 부족함이 없었다. 그런 이라면 자신의 부족한 재능을 보완할 방법을 찾을 수도 있었다.
실제로도 그랬다. 남궁영휘는 방법을 찾아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궁영휘는 순진한 모습만 보여 줬다. 그 모든 것이 형 남궁선휘 때문이었다.
남궁영휘가 두각을 나타내는 순간 남궁선휘를 버티게 만든 두 개의 큰 기둥 중 하나가 무너지고 말 것이다.
“중요한 것은 네 마음과 의지다. 형은 아무런 상관이 없어.”
“형은 무너질 거예요.”
“그렇게 네 형을 못 믿으면서 어찌 함께 다니는 것이냐?”
“그건…….”
“앞에 선 자의 마음을 우습게 보지 말거라. 네 눈엔 어찌 보일지 모르지만 너를 지키기 위해 온갖 세파를 앞장서 막아 온 네 형이다.”
“…….”
“너는 너의 형을 조금 더 믿을 필요가 있다. 대화는 내가 아닌 너의 형과 해야 한다.”
그 말을 끝으로 담호는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이미 할 말은 충분히 했다. 받아들이는 것은 남궁영휘의 몫이었다.
흔히들 머리가 뛰어난 자들은 모든 것을 자신의 기준으로만 생각하는 버릇이 있다. 머리가 너무 뛰어나기에 한 번 계산하는 것만으로도 견적이 나오고, 그래서 지레짐작으로 한계를 정하는 버릇이 들기 쉬웠다.
남궁영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자신만의 기준으로 형인 남궁선휘를 제단하고 있었다. 천재들이 흔히 겪는 시행착오 같은 것이었다.
아무리 옆에 있는 사람이 말해 줘도 소용없었다.
스스로가 깨달아야 했다.
담호는 더 이상 남궁영휘를 신경 쓰지 않았다. 대신 그의 시선은 모닥불 가에 앉아 있는 녹수빙을 향했다.
한참 방진보와 신나게 대화를 이끌어 가던 그녀가 담호의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렸다. 눈빛이 마주치자 그녀가 손을 크게 흔들었다.
활짝 웃는 그녀의 표정이 불빛이 받아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담호는 말없이 그녀를 바라봤다.
***
악양으로 한 대의 마차가 들어서고 있었다.
네 필의 말이 끌고 있다는 것을 제외하면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한 마차였다. 하지만 마차가 악양에 들어서는 순간 수많은 고수들이 은밀히 따라붙었다.
그들은 마차의 앞길에 방해물이 될 만한 모든 것을 치웠다. 사람, 말, 수레와 같은 방해물이 소리도 없이 치워지면서 탄탄대로가 열렸다.
마차는 그 사이를 질주했다. 덕분에 악양에 들어선 순간부터 마교의 본단까지 도착하는 데 걸린 시간은 겨우 반각밖에 되지 않았다.
본단 정문 앞에는 안에 들어가기 위해 기다리는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워낙 신분 확인이 철저하게 이루어져서 새벽부터 기다려도 저녁까지도 못 들어가는 사람이 허다했다.
그나마 그들이 들어갈 수 있는 통로도 거대한 정문 옆에 있는 조그만 쪽문에 불과했다. 정문을 통과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소수에 불과했고 줄을 선 자들에겐 그럴 만한 자격이 주어지지 않았다. 이곳에 있는 자들 중 지역 유지가 아닌 자 없고, 유력자 가문의 사람도 다수 섞여 있었는데도 말이다. 하지만 누구 한 명 지루하단 표정 짓지 않고 줄을 선 채 자신의 차례를 기다렸다.
그만큼 악양에서 마교의 위세는 대단했다. 그 어느 누구도 감히 도전할 엄두를 내지 못할 만큼 말이다.
그때였다.
끼기긱!
갑자기 본단의 정문이 둔중한 소리와 함께 열렸다. 그에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정문을 향했다.
“뭐야?”
“정문이 열린 건가? 누가 오기에…….”
두두두!
그 순간 거친 발굽 소리와 함께 사두마차가 순식간에 정문을 통과해 사라졌다.
정문에 서 있던 사람들이 눈을 끔뻑거렸다. 너무나 순식간에 이뤄진 일이라 마차 안에 누가 있는지 확인조차 못 했기 때문이다.
마차가 들어가자마자 언제 열렸냐는 듯이 거대한 정문이 굳게 닫혔다.
정문을 통과한 마차는 그 어떤 검문도 없이 그대로 군사부까지 내달렸다. 군사부 앞에는 상한천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나와 있었다.
마침내 마차가 멈춰서고 문이 열렸다. 그리고 붉은 면사의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눈가에 희미한 주름이 있긴 했지만 그래도 그녀의 미모를 가리지는 못했다.
미부의 뒤를 따라 추레한 노인이 내렸다. 하지만 상한천을 비롯한 대부분 사람들의 시선은 미부에게 집중되어 노인에겐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상한천이 앞으로 나서며 포권을 취했다.
“어서 오십시오, 마모님.”
“군사!”
“악양 본단에는 처음이시지요. 환영합니다.”
“고마워요. 역시 군사군요. 그 짧은 기간에 이만한 본단을 마련하다니.”
붉은 면사의 여인이 감탄했다는 듯한 표정으로 면사를 걷어 냈다. 그러자 눈부시게 아름다운 본모습이 드러났다.
그녀는 바로 마교의 마모인 단운향이었다. 드디어 그녀가 오랜 여정 끝에 악양 본단에 도착한 것이다.
상한천은 내심 그녀의 미모에 감탄하면서도 흔들리지 않는 표정으로 말했다.
“어디 저 혼자만의 공이겠습니까? 모두의 염원이 움직인 결과이지요.”
“아니에요. 군사의 공은 모두가 알고 있어요.”
“그보다 상처는 어떻습니까? 권마에게 심하게 다쳤다고 들었는데.”
“혈노가 잘 보살펴 줘서 나았어요.”
단운향이 슬쩍 뒤를 돌아봤다. 그제야 상한천의 시선이 그녀의 등 뒤에 있는 노인을 향했다.
도무지 나이를 짐작할 수 없을 만큼 얼굴 가득 패인 주름살과 곳곳에 피어난 검버섯. 주름살에 파묻힌 눈엔 진물이 가득했고, 몸 전체를 가리는 허름한 장포 사이로 드러난 두 손에도 고목의 껍질을 연상시키는 주름살이 가득했다.
순간 상한천의 미간에 살짝 골이 패였다.
‘혈노!’
단운향의 심복인 혈노였다.
마교의 포교 조직인 중천을 이끄는 자였고, 단운향의 가장 큰 후원자이기도 했다. 그가 있기에 단운향이 성녀의 길을 포기하고 마모가 되었어도 마교 내부의 지지 기반은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다.
혈노는 분명 마교의 충신이었고, 단운향의 든든한 후원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혈노를 바라보는 상한천의 눈빛은 그리 호의적이지 않았다.
‘속을 알 수 없는 늙은 괴물.’
상한천 자신도 타인에게 괴물이라 불리는 존재였다. 교주를 대신해 마교라는 거대 단체를 실질적으로 이끌어 가기 위해서는 철저하게 계산적이어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속내를 철저히 숨기고, 타인의 생각을 읽어야 했다.
오랜 훈련 끝에 상한천은 그런 습관을 몸에 들일 수 있었다. 덕분에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상대의 사고를 자연스럽게 읽을 수 있게 되었다.
마교뿐 아니라 천하의 그 어느 누구도 본질을 꿰뚫어 보는 그의 눈을 피하지 못했다. 단 두 사람만 빼고는 말이다.
그 첫 번째가 교주인 척관혈이었고, 두 번째가 놀랍게도 혈노였다.
혈노는 상한천보다 더욱 단단한 마음의 벽을 쌓고 있었다. 때문에 천하의 상한천조차 그의 속내를 꿰뚫어 보는 것은 불가능했다. 더군다나 혈노가 이끄는 중천은 그의 명령이 통하지 않았다.
상한천은 속내를 읽을 수 없는 혈노를 그리 신뢰하지 않았다. 하지만 단운향의 믿음이 워낙 굳건하다 보니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상한천과 눈이 마주치자 혈노가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예의를 차린 정중한 몸짓이었지만 그마저도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하지만 상한천은 애써 태연한 표정으로 단운향을 바라봤다.
“그렇지 않아도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교주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수하들이 모시고 갈 겁니다.”
“군사께서는 같이 가시지 않나요?”
“저는 이곳에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일?”
“예! 손님을 맞이할 예정이라서 준비할 것이 많습니다.”
상한천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차가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