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권마-422화 (422/500)

 422

422화 8장. 사로(死路)에서 생로(生로)를 찾는다(1)

“저는 교주님께 가 보겠어요. 다시 나올 때까지 시간이 걸릴지 모르겠으니 그동안 혈노는 쉬고 계세요.”

“알겠습니다.”

단운향의 배려에 혈노가 고개를 숙여 감사의 뜻을 표했다. 단운향은 미소를 지으며 금역으로 향했다.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상한천이 혈노에게 말했다.

“숙소를 따로 준비해 놓았습니다.”

“아니오. 이 늙은이는 중천의 포교자들과 함께하고 싶소이다.”

“허나 그곳은 너무 누추한데…….”

“허허! 명존의 뜻을 세상에 전파하는 이들이 모인 곳인데 누추한들 무슨 상관이겠소이까. 오히려 이 늙은이는 그곳이 더 편하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되오이다.”

“알겠습니다. 정히 그렇다면야…….”

상한천이 개운치 않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혈노의 대답은 타당했지만 이상하게도 찜찜한 여운이 남았다. 혈노와의 대화는 늘 이랬다. 그래서 더욱 신경이 쓰였다.

상한천이 수하를 바라봤다.

“혈노를 중천에 안내해 드리거라.”

“존명!”

수하 두 명이 힘찬 대답과 함께 혈노를 안내했다. 상한천은 멀어지는 혈노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역시 입맛이 껄끄러웠지만, 어차피 혈노는 그가 어찌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혈노가 이끄는 중천은 상한천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이었다.

모든 것을 직접 통제해야 직성이 풀리는 상한천이었다. 그럼에도 그가 중천을 내버려 두는 것은 포교 조직이지, 무력 조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괜히 긁어 부스럼을 낼 필요는 없었다.

상한천은 대신 현안에 집중하기로 했다.

“손님을 맞으려면 부지런히 움직여야겠군.”

***

초연운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후우!”

곳곳에서 크게 숨을 들이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젊은 무인들이었다. 개중에는 꽤 많은 강호 경험을 해서 평정심을 유지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이 더욱 많았다. 그들의 얼굴엔 긴장의 빛이 역력했다.

몇몇 이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국 장진명은 결사대를 소집해서 은가보의 호상단으로 분하게 했다.

거기까지는 그래도 괜찮았다. 어차피 마교의 본단에 타격을 가하기 위해 소집된 결사대였으니까.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초연운이 벌게진 얼굴로 장진명에게 격렬히 항의했다.

“소청은 안 됩니다.”

“그녀가 반드시 참여해야 하네.”

“장 대협!”

“어쩔 수 없네. 그녀가 은가보의 실질적인 책임자가 아닌가? 그녀가 없다면 마교가 호상단을 들여보내 줄 것 같은가?”

“허나 소청은 일개 상인에 불과합니다. 그녀를 이용하는 것은 너무 가혹한 일입니다.”

“무림의 위기 앞에 어찌 상인과 무인을 구분하는가?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총력을 기울여야 하네.”

장진명이 준엄하게 꾸짖었다.

초연운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그가 어떤 말을 해도 장진명은 듣지 않았다. 오직 자신이 생각한 바로만 밀어붙이려 할 뿐이었다. 살다 살다가 이렇게 사방이 꽉 막힌 벽창호는 처음이었다.

초연운이 주위를 둘러봤다. 소보원과 구의진이 보였다. 소보원은 그나마 약간 미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구의진은 장진명과 똑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일차 정마대전 당시 우리가 이것저것 가리고 몸을 사렸다면 마교를 물리쳤을 것 같은가? 요즘 젊은 무인들은 몸을 너무 아끼는 경향이 있어. 그렇게 해서 어떻게 마교를 물리치겠다고.”

구의진은 오히려 추상같은 목소리로 젊은 기재들을 혼냈다. 그에 몇몇 기재들은 움찔하기도 했고, 어떤 이들은 오히려 투쟁심을 불태웠다.

“아미타불! 초 형이 참으시게나.”

“말을 한다고 해서 들을 분이 아니에요.”

결국 소천과 해소월이 초연운을 잡아끌고 나서야 장진명과의 대치가 끝이 났다.

두 사람에 의해 인적이 드문 곳으로 끌려나온 초연운이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도대체 남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으니. 다른 사람들은 어때?”

“그들은 오히려 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고 있다네.”

소천의 대답에 초연운의 얼굴이 더욱 벌겋게 달아올랐다. 해소월이 그런 초연운을 보며 말했다.

“분위기가 이미 한껏 달아올라서 누구의 말도 듣지 않을 거예요.”

“이미 대세가 넘어갔다는 뜻이군.”

“맞아요.”

해소월의 표정 또한 그리 밝지 않았다.

처음 결사대에 참여하기로 결정했을 때만 하더라도 분위기가 이렇지 않았다. 전대 결사대의 무인들은 젊은 무인들의 말을 무척이나 잘 들어 줬고, 무척이나 개방적인 성격으로 보였다. 하지만 그것은 해소월의 오산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전대 무인들은 점차 폐쇄적으로 변했다. 남의 말을 듣기보다 자신들의 의견대로 일이 진행되길 원하고, 그렇게 밀어붙이는 것이다.

그나마 소보원이 조금 다른 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일 뿐이었고, 다른 이들은 아예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해소월도 그 점이 못내 답답할 뿐이었다.

그때였다.

“연운!”

갑자기 차가운 목소리가 초연운의 귓전에 울려 퍼졌다.

고개를 돌리니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오연한 눈빛과 표정이 인상적인 남자였다. 그의 몸에서 발산되는 패도적인 기세가 초연운을 자극하고 있었다.

“남학?”

그는 바로 천뢰무객(天雷武客) 남학이었다. 그의 뒤로 무영신룡(無影神龍) 엄태천도 보이고 있었다.

두 사람의 등장에 초연운이 미간을 찌푸렸다.

예전부터 남학과 그의 사이는 그리 좋지 않았다. 그 때문에 충돌했었고, 초연운이 남학을 박살 냈었다.

그 충격으로 남학은 폐관에 들었었고, 그 후로 매우 오랫동안 강호에서 모습을 감췄었다.

남학이 다시 강호에 나온 것은 무림맹이 숭산으로 옮겼을 무렵이었다. 그 후부터 그는 무림맹 행사에 본격적으로 참여를 하면서 영향력을 늘려 갔다. 하지만 예전에 패했던 기억 때문인지 초연운과는 거리를 둔 채 데면데면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결사대를 처음 모집할 때도 남학은 제일 먼저 자원했고, 또 앞장서서 다른 젊은 무인들을 끌어들였다. 그렇게 끌어들인 이중 하나가 바로 무영신룡 엄태천이었다.

엄태천 역시 구무룡 중 한 명으로 남학과는 꽤나 친한 사이였다. 남학의 영향 때문인지 엄태천도 초연운과는 거리를 두고 있었다.

은가보에 합류한 이후에도 별다른 접촉이 없었던 두 사람이 나타나자 초연운의 표정이 구겨졌다.

“무슨 일이야?”

“이야기를 들었다.”

“무슨 이야기?”

“장 대협의 계획에 반대한다고. 사실인가?”

“그렇다면?”

“실망이다. 연운.”

“뭐야?”

“우리의 양어깨에 강호의 운명이 걸려 있다. 사소한 감정 따윈 당연히 접어 두고 함께 행동해야지 않느냐. 그런데 너는 의견이 다르다고 해서 분란을 일으키고 있다. 너희 행동은 우리의 사기를 떨어트릴 뿐, 하등의 도움도 되지 않고 있다.”

남학은 신랄하게 초연운을 비판했다.

그의 눈은 칼날처럼 날카로운 예기를 발산하고 있었다. 눈빛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초연운은 벌써 수십 번은 더 죽었을 것이다.

초연운의 눈빛 또한 사납게 변했다.

“사소한 감정이라고?”

“그렇다.”

“남학, 말조심해라.”

“뭐?”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놀리는 것 아니다.”

“감히!”

순간 남학이 자신도 모르게 기세를 방출했다. 그러자 폭풍 같은 기파가 일대를 휩쓸고 지나갔다.

초연운의 고개가 삐딱하게 됐다.

“왜, 지금 해보자는 거야?”

눈빛, 분위기, 그리고 공기가 변했다.

사람 좋던 얼굴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내면 깊숙한 곳에 숨겨 두었던 폭군의 기질이 슬그머니 얼굴을 내밀었다.

남학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초연운에게 당한 패배를 갚기 위해 삼 년을 절치부심했다. 폐관 수련을 통해 어느 정도 성취를 얻었고, 이제는 초연운과 겨뤄도 지지 않을 거라는 자신감도 생겼다. 하지만 막상 초연운과 대면하자 그런 자신감이 흔들렸다.

패배의 기억이 슬그머니 떠올랐다. 삼 년 동안 완전히 떨쳐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그는 그 잔향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초연운이 다리를 잘렸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무공이 예전 같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초연운과 마주하자 이상하게 꺼림칙한 마음이 들었다.

기세에서 밀리니 날카로운 빛을 발산하던 눈동자도 흔들렸다. 그는 주먹만 꽉 쥘 뿐 섣불리 덤벼들지 못했다.

그때 엄태천이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자자, 두 사람 모두 진정하시구려. 감정이 너무 격앙되었소. 조금만 이성적으로 생각합시다.”

엄태천의 무공 수위 또한 대단했지만 이미 감정이 상할 대로 상한 두 사람의 기세를 진정시키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러자 소천과 해소월까지 나섰다.

“아미타불!”

“두 사람 모두 진정하세요.”

두 사람까지 합세하자 초연운과 남학도 마냥 대치를 계속할 수는 없었다. 결국 두 사람이 공력을 풀며 한 걸음씩 물러섰다. 하지만 가슴에 남은 앙금까지 해소된 것은 아니었다.

“연운, 마지막으로 말하겠는데 부디 결사대의 발목을 잡지 마라. 너 때문에 결사대의 임무가 실패하면 내가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테니까.”

“너?”

남학은 초연운의 대답도 듣지 않고 그대로 몸을 돌려 성큼성큼 걸어갔다. 초연운이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멀어져 가는 남학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생각 같아서는 남학의 주둥이를 부수고 싶었지만, 이 이상 분란을 일으킬 수는 없었다.

엄태천이 초연운을 보며 말했다.

“자네가 이해하게. 남학도 다 잘해 보자고 하는 말이니까. 그는 이번 임무가 자신의 명예를 회복할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고 있네.”

“…….”

“굳이 그와 날을 세울 이유가 없잖은가? 정 마음이 내키지 않으면 그냥 뒤로 물러서 있게. 괜히 분란 일으킬 필요는 없지 않은가?”

“분란이라?”

“자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그렇게 보일 수도 있단 말일세.”

“그 다른 사람에는 자네도 속하나?”

“그건…….”

예상치 못한 초연운의 질문에 엄태천이 잠시 머뭇거렸다. 순간적이긴 하지만 그의 얼굴에 당혹스러운 빛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초연운은 그런 엄태천의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제기랄!”

초연운이 이를 꽉 깨물었다.

이미 대세가 저쪽으로 넘어간 것이 느껴졌다. 전대 결사대와 구무룡 중 둘이 호응하는 일이었다. 자신이 아무리 반대해도 기울어진 무게 추를 되돌릴 수는 없었다.

“나는 이번 임무에서 빠지겠다.”

초연운이 청천벽력 같은 선언을 했다.

***

수십 대의 수레에 암염이 가득 실렸다.

호남성에 들어올 때 싣고 온 것 말고도 은가보 내에 보관하고 있던 소금까지 박박 긁어서 수레에 실은 것이다.

“준비 다 되었으면 출발할게요.”

은소청이 호상단의 무인들로 분한 기재들을 향해 소리쳤다.

그녀의 외침을 신호로 호상단이 은가보를 나와 마교로 향했다.

“드디어!”

“시작이군.”

젊은 기재들의 얼굴에 결연한 빛이 떠올랐다.

특히 남학과 엄태천은 남다른 각오를 보이고 있었다. 그들은 젊은 기재들의 선두에 서서 이끌고 있었고, 장진명 등이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휴!”

은소청이 문득 한숨을 내쉬며 주위를 둘러봤다. 언제나 곁에서 투닥거리며 다투던 초연운이 보이지 않았다.

함께 있을 때는 맨날 말다툼해서 귀찮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그가 곁에 없자 큰 허전함이 느껴졌다.

초연운뿐만이 아니었다. 청운도 이번 임무에서 빠지겠다고 했다. 어차피 호상단을 호위하는 무인들의 수엔 한계가 있었기에 두 사람뿐만 아니라 상당수의 젊은 기재들이 빠졌다. 하지만 초연운이나 청운과 달리 자의로 빠진 것이 아니었기에 그들의 얼굴엔 아쉬움이 가득했다.

이번 결사대의 임무가 성공하면 강호사에 영원히 이름이 남게 될 것이다. 그 역사적인 순간을 함께할 수 없다는 것이 그들을 아쉽게 만들었다.

마침내 은가보의 문이 열리고 소금을 가득 실은 수레 행렬이 빠져나갔다. 그 선두에 은소청이 있었다. 은소청의 곁에는 해소월과 소천이 붙어 있었다.

“초 대협이 없다고 너무 위축되지 마요. 우리가 함께할 테니까.”

“고마워요, 언니.”

곁에서 위로하는 해소월의 말에 은소청이 감격했다.

그녀의 따뜻한 말 한마디가 은소청의 긴장된 심신을 조금은 편하게 만들었다. 해소월은 그런 은소청을 안쓰러운 시선으로 바라봤다.

따지고 보면 은소청이 이번 임무에 동원될 이유가 없었다. 본질적으로 은가보는 상단이지, 무림에 큰 비중을 둔 세력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대와 상황이 그녀를 이번 임무에서 발을 빼지 못하게 만들고 있었다.

은가보라는 거대한 상단의 소단주라고 하지만 그래도 아직 어린 소녀였다. 그 조그만 어깨에 짊어지기엔 너무나 가혹하면서도 무서운 상황이 기다리고 있었다.

초연운은 해소월에게 신신당부했다. 반드시 은소청만큼은 지켜 달라고. 그리고 해소월은 그에 응했다.

그때였다.

―모두 표정 관리 잘하도록 하라. 마교의 본단이다.

장진명의 나직한 목소리가 모두의 귓전에 울려 퍼졌다. 동시에 그 많은 사람들에게 전음을 보낸 것이다.

그의 내공이 얼마나 가공한지 보여 주는 대목이었다. 하지만 긴장한 젊은 기재들은 그런 사실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렇게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호상단은 마교의 정문에 도착했다.

“무림맹이 마교의 본단이 되다니.”

“이 간악한 놈들!”

옛 무림맹의 모습을 아직 기억하고 있는 무인들은 그 자리에 우뚝 선 마교의 본단을 보고 치를 떨었다.

악양에 있는 마교의 본단은 크게 세 구역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외당과 각종 하부 조직이 있는 외성, 내원을 비롯한 주력 조직이 있는 내성, 그리고 교주가 있는 금역.

금역이야 교주의 거처다 보니 외부의 출입이 철저히 금지되었고, 일반인들이 들어올 수 있는 한계는 외성이었다. 하지만 간혹 예외적인 상황도 있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상단이었다. 식량과 무기 같은 주요 물자를 보관하는 창고가 내성 안에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상단이 출입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내성에서는 워낙 엄중하게 감시를 받기에 감히 다른 생각은 품을 수조차 없었다.

때문에 무림맹 결사대에 있어서는 은가보의 호상단으로 분한 것이 좋은 선택이 되었다.

암염을 납품하기 위해서는 자연스럽게 내성에 들어가야 했고, 일단 내성에만 들어간다면 기회가 생길 테니까.

그때였다.

“왔네.”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낯익은 여인이 본단의 정문 쪽에서 걸어왔다. 그녀의 모습을 확인한 은소청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미소를 지으며 은소청을 향해 다가오는 여인은 바로 원설화였다.

“어서 와! 기다리고 있었어.”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