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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3화 8장. 사로(死路)에서 생로(生로)를 찾는다(2)
은소청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언니가 여긴 어떻게?”
“그래도 내가 중재를 하는 건데 직접 나와 봐야지.”
“하지만…….”
“소금은 제대로 싣고 왔어? 내가 굳이 확인해 보지 않아도 되겠지?”
“아, 네! 은가보 내에 있는 소금까지 모조리 꺼내 왔어요.”
“다행이네. 덕분에 내 체면이 살겠어. 고마워!”
“아, 아니에요. 어차피 거래니까요.”
“그래! 거래는 거래일 뿐이지.”
원설화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은소청의 등 뒤에 도열해 있는 수십 대의 짐수레를 바라봤다. 짐수레에는 소금이 가득 실려 있었고, 호상단의 무인들이 호위하고 있었다.
“보기만 해도 든든하네. 이렇게 많은 호상단을 대동하고 오다니.”
“신교와의 첫 거래니까요.”
“하긴! 창고에 물건을 넣고 대금을 받기 전까지는 온전히 은가보의 책임이지. 좋은 마음가짐이야. 소매는 분명 훌륭한 대상인으로 성장할 수 있을 거야.”
원설화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감사……해요.”
“부디 우리 오래오래 봤으면 좋겠네. 사이좋게 말이야.”
“그렇게 될 거예요.”
“그래! 그렇게 되겠지. 그럼 이제 안으로 들어갈까? 안에 있는 사람들을 너무 오래 기다리게 했네.”
“네!”
원설화가 정문을 지키고 있는 무사들에게 손을 살짝 흔들어보였다. 그러자 그 육중한 정문이 둔중한 소리와 함께 열렸다.
마치 거대한 괴물이 아가리를 열고 그들을 맞이하는 것 같았다.
은소청은 잠시 숨을 멈추고 마른침을 삼켰다. 보통 이상의 배포를 가진 그녀에게도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그것은 장진명과 같은 전대의 무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수십 년 전에 마교의 본단을 친 경험이 있는 그들에게도 이 순간만큼은 참기 힘든 긴장감을 선사하고 있었다.
‘그래도 저 아이로 인해 마교의 본단에 수월하게 들어갈 수 있어 다행이구나.’
일차 정마대전 때 그들이 마교의 본단에 침투하기 위해 기울인 노력과 희생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비단길을 걷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 모든 것이 은소청과 은가보 덕분이었다. 장진명은 눈앞에 있는 이 어린 소녀가 이렇게 큰 행운을 안겨 준 것에 감사했다.
장진명이 함께 온 전대의 결사대 무인들에게 전음을 날렸다.
―모두 준비 단단히 하도록. 내성에 들어간 그 순간 전광석화처럼 움직여 목표물을 처리해야 하니까. 숨 쉴 틈 없이 저들을 몰아치고 빠져나와야 하네. 어떤 희생이 있더라도 반드시 임무를 완수하게.
주요 목표는 역시 교주인 척관혈을 비롯한 마교의 수뇌부들이었다. 그동안의 정보활동을 통해 이미 그들의 거처와 행동 동선은 파악해 놓은 상태였다.
장진명의 전음에 전대 무인들이 표 나지 않게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숭산의 무림맹을 출발해 이곳까지 오는 동안 젊은 무인들과 부단히도 손발을 맞췄었기에 자신이 있었다.
문득 소보원이 주위를 둘러봤다.
그녀의 시야에 결의에 찬 젊은 무인들의 얼굴이 한가득 들어왔다.
의기로 빛나는 눈동자, 결의에 찬 얼굴이 그녀의 눈동자에 가득 박혔다.
‘미안하구나.’
그 빛나는 젊음과 의기에 못된 짓을 하는 것 같아 고개를 들 수 없었다. 하지만 소보원은 그런 속마음을 가슴속에 꾹꾹 눌러 담았다.
그사이 호상단은 외성을 통과하고 있었다. 곳곳에 마교의 무인들이 삼엄하게 경계를 서는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원설화와 함께 통과하는 호상단을 저지하는 이는 없었다.
오히려 원설화가 빨리 지나갈 수 있도록 알아서 문을 열어 주고 있었다. 덕분에 수월하게 내성까지 들어올 수 있었다.
“이쪽이야.”
원설화가 손가락으로 커다란 창고를 가리켰다. 어지간한 전각보다 더 커 보이는 창고가 스무 채나 보였다. 그 안에 있는 물자만 가지고도 마교 본단에 있는 무인들이 족히 반년 이상은 생활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으음!’
너무나 엄청난 규모의 창고와 비축 물자 앞에서 결사대에 참여한 젊은 무인들이 절로 침음성을 흘렸다.
“짐수레를 이쪽으로 옮겨요.”
원설화가 창고 중 하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그녀가 가리킨 창고는 스무 채의 창고 중 가장 규모가 컸다. 창고 앞에는 짐을 옮기려고 일꾼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은소청과 호상단은 창고를 향해 서서히 움직였다.
커다란 창고가 가까워질수록 해소월은 정체를 알 수 없는 불길한 예감에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그녀가 곁눈질로 소천을 바라봤다. 소천 역시 그녀와 비슷한 느낌을 받고 촉각을 잔뜩 곤두세우고 있었다.
그것은 장진명을 비롯한 전대 무인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 역시 알 수 없는 위화감을 느꼈다.
그때 원설화가 뒤돌아서며 은소청을 바라봤다.
“아까 내가 한 말 기억해?”
“무슨 말요?”
“오래 봤으면 좋겠다는 것 말이야.”
“예! 기억해요.”
“미안해!”
“뭐가요?”
은소청의 반문에 원설화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가며 눈이 섬뜩하게 빛났다.
그녀가 하얀 이를 드러내며 말했다.
“다 거짓말이었어. 난 너를 오래 보고 싶지 않아. 은가보도.”
“그게 무슨?”
“무슨 말이긴? 이런 말이지.”
원설화가 새하얀 손을 들었다.
끼기긱!
호상단을 둘러싼 창고의 문이 일제히 열렸다. 열린 문틈으로 도열해 있는 무인들이 보였다.
그 모습을 본 장진명이 외쳤다.
“함정이다.”
은소청은 그제야 방금 전까지 엄습했던 불길한 느낌의 실체를 깨달았다. 저들은 이미 만반의 준비를 한 채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창고 안에서 푸른 장포를 걸친 사십 대 초반의 장년인이 걸어 나왔다.
마치 평생 햇볕 한번 쬐지 못한 사람처럼 창백한 피부가 인상적인 장년인의 등장에 원설화가 고개를 숙였다.
장년인은 바로 마교의 군사인 상한천이었다. 그의 등장과 함께 창고 안에 숨어서 기다리고 있던 마교의 무인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상한천이 서늘한 눈빛으로 장진명 등을 바라봤다.
“서두르지 그러셨소. 덕분에 답답한 곳에서 꽤 오래 기다렸지 않소.”
“너는 상한천?”
장진명이 무서운 눈빛으로 상한천을 노려봤다.
“호! 나를 알고 계신 것을 보니 그쪽도 꽤나 연세가 있으신 것 같소이다.”
“내 이름은 장진명이다.”
“천인대적검?”
“그렇다. 내가 바로 천인대적검 장진명이다.”
장진명이 머리에 쓰고 있던 방립을 벗으며 사자후를 터트렸다. 그의 사자후를 신호로 호상단으로 위장하고 있던 이들이 거추장스러운 복장을 벗어 던졌다.
상한천의 눈에 은은한 살기가 어렸다.
“생각보다 더 거물이 행차하셨군. 설마 천인대적검이라니. 아직까지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다니 놀랍군.”
“마교 놈들이 눈을 시퍼렇게 뜨고 살아 있는데 내가 어찌 죽겠느냐?”
“잘됐구려. 당신에게 죽은 본교의 형제가 이루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데, 이번 기회에 그 복수를 해 줄 수 있겠구려.”
“흥! 가당치도 않은 소리. 이번 기회에 마교 군사의 목을 따게 되었으니 이 어찌 행운이라 하지 않을까?”
장진명의 눈빛이 일렁였다. 마치 귀화가 피어오르는 것 같은 눈동자 안에는 마교를 향한 증오심이 담겨 있었다.
스르릉!
그가 검을 뽑아 들며 외쳤다.
“내가 시간을 벌 테니 모두 각자의 임무를 죽음으로 완수하라.”
장진명은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상한천을 향해 쇄도해 갔다.
상한천은 마교의 두뇌나 다름없었다. 그를 죽인다면 마교는 방향을 잃고 표류하게 될 것이다.
타타탁!
장진명은 단 세 걸음 만에 공간을 단축해 상한천의 코앞까지 쇄도했다.
지이잉!
그의 검이 울었다.
천인대적검이라는 별호답게 그의 검공은 무서우리만큼 위력적이었다.
공기가 갈라지고, 강력한 바람이 상한천을 덮쳤다. 하지만 장진명이 일으킨 검풍은 상한천에게 미처 도달하기도 전에 맥이 탁 끊기고 말았다. 상한천의 곁에 있던 중년의 무인이 검을 휘둘러 상쇄시킨 것이다.
“천인대적검이라면 능히 이 몸의 상대가 될 만하지.”
그의 이름은 강위였다. 마교의 사대군장 중 하나인 섬전마검(閃電魔劍)이 바로 그의 별호였다.
쉬가악!
그의 검이 공간을 갈랐다.
카카캉!
장진명의 검과 강위의 검이 허공에서 부딪치며 불꽃이 튀었다. 장진명은 강위를 피해 상한천을 죽이려 했지만, 번번이 강위에 의해 진로가 막히고 말았다.
마교의 사대군장은 거저 얻은 것이 아니었다. 수많은 사투 끝에 쟁취한 명예로운 자리였다. 그만큼 강위의 무공은 무서웠다.
두 사람은 거의 호각으로 맞서 싸웠다.
그사이 결사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천랑객(天狼客) 구의진이 이끄는 조가 내성 안쪽으로 내달렸고, 소보원이 이끄는 조가 반대편으로 움직였다.
“놈들을 막아.”
“추적해!”
그들의 뒤를 마교의 무인들이 쫓았다.
상한천은 뒷짐을 진 채 그 모든 광경을 바라봤다.
“독 안에 들어온 쥐들이 아직도 상황 파악을 하지 못했나 보군.”
마교의 본단은 그가 심혈을 기울여 설계하고 만든 곳이었다. 마교인들에게는 더할 수 없이 안락한 둥지였지만, 그들의 적에게는 죽음의 함정으로 가득한 절망의 대지였다.
“와아아!”
“무림맹의 떨거지들을 죽여라.”
“감히 본교의 성전에 더러운 발을 들이다니,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
마교의 무인들이 분기탱천해 결사대를 추적했다.
마교의 본단에 가공할 살기가 넘실거리며 회오리쳤다.
“아아!”
엄청난 살기에 노출된 은소청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녀는 전장 한복판에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었다. 결사대 모두 제 코가 석 자인지라 누구 한 명 그녀에게 신경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은소청을 향해 걸어오는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바로 원설화였다.
“그러게 줄을 잘 섰어야지. 감히 호남성에 적을 둔 상단이 무림맹을 도와? 그렇게 본교가 우습게 보였나 보지?”
“그러는 당신이야말로 부끄럽지 않은가요? 마교 때문에 수많은 백성들이 고통을 받는 것이 보이지 않나요?”
“그들이 고통을 받는다고 누가 그러지? 악양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지 않았어? 그들의 얼굴에 고통스러운 빛이 조금이라도 있던가? 어차피 그들은 누가 악양을 차지하던 상관하지 않아. 왠지 알아? 누가 이곳을 지배하던 그들의 삶엔 큰 변화가 없긴 때문이야.”
“그건…….”
“그렇게 그들은 우리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고, 이곳은 우리의 확고한 영역이 되지. 물론 진정한 변화는 그 후부터 시작되겠지만.”
“이익!”
“물론 너는 그런 변화를 보지 못하게 될 거야. 아까도 말했지만 나는 동생을 그리 오래 보고 싶지 않거든.”
그 순간 원설화의 등 뒤에서 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이름은 윤사일이었다. 신화상단의 외당주이자 독심수라(毒心修羅)라는 별호를 갖고 있는 무인이었다.
독심수라라는 별호답게 그의 손속은 잔혹하기 그지없었다.
윤사일이 은소청을 향해 다가왔다. 그의 목적은 명백했다. 바로 은소청의 목숨을 빼앗는 것이었다.
은소청이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는 모습을 보며 원설화가 더욱 차가운 미소를 피워 올렸다.
“순순히 죽음을 받아들여라, 계집!”
윤사일이 은소청을 향해 달려들며 손바닥을 활짝 펼쳤다.
콰아아!
가공할 장력이 은소청을 향해 해일처럼 밀려왔다.
‘진보!’
은소청은 감히 피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방진보의 얼굴을 떠올렸다. 이 순간 미치도록 그가 보고 싶었다.
그때였다.
“소청!”
날카로운 외침과 함께 누군가 은소청과 윤사일 사이에 뛰어들었다. 늘씬한 체형의 여인은 바로 해소월이었다.
츄화학!
마치 연어가 강물을 거슬러 오르는 것처럼 그녀의 검은 윤사일의 장력을 거침없이 가르며 파고들었다.
“헛!”
너무나 쉽게 분쇄되는 자신의 장력에 윤사일이 깜짝 놀라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해소월의 움직임은 그의 예상보다 몇 배는 더 비쾌 했다.
스가악!
해소월의 검이 윤사일의 오른손을 순식간에 베어 냈다.
잘린 손목에서 피가 분수처럼 치솟았다.
“크아악!”
윤사일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오는 순간 해소월이 그의 심장에 검을 찔러 넣었다.
그것이 윤사일의 최후였다.
“칫!”
그 모습을 본 원설화가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해소월도 더 이상 공격하지 않고 후퇴했다. 그녀의 목적은 원설화를 죽이는 것이 아닌 은소청을 지키는 것이었다.
“괜찮아?”
“예!”
해소월이 재빨리 은소청의 가냘픈 허리를 휘감으며 허공으로 몸을 뽑아 올렸다. 그 뒤를 소천이 따랐다.
콰쾅!
“크악!”
“죽어랏!”
곳곳에서 굉음과 함께 살의와 악의가 범벅된 외침이 울려 퍼졌다.
그 속에서 상한천이 홀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마음껏 발버둥 치려무나. 너희들에게 이곳은 빠져나갈 수 없는 지옥이 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