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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권마-424화 (42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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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4화 8장. 사로(死路)에서 생로(生로)를 찾는다(3)

“영차!”

남궁영휘가 품에 마른 나뭇가지를 한가득 안고 모닥불 가로 걸어왔다. 모닥불이 피어오르고 있는 공터 근처에서는 남궁선휘가 열심히 남궁세가의 무공을 익히고 있었다.

방진보는 모닥불 근처에서 요리를 하고 있었고, 녹수빙이 곁에서 도와주고 있었다.

남궁영휘가 주워 온 나뭇가지를 모닥불 근처에 내려놓으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담호를 찾고 있는 것이다.

“헤헤!”

남궁영휘의 얼굴에 금세 미소가 걸렸다. 모닥불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바위 위에 홀로 앉아 있는 담호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담호의 얼굴엔 짙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때문에 눈을 감고 있는지, 혹은 뜨고 있는지 구별할 수조차 없었다. 당연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남궁영휘는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담호가 근처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남궁영휘는 가슴이 충만해져 옴을 느꼈다.

남궁세가 전체로 놓고 봤을 때 담호는 불공대천지 원수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아직 어린 남궁영휘는 그렇게 복잡한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어차피 남궁세가는 몰락했고, 모든 것을 무(無)에서 다시 시작해야 하는 시점이었다. 과거의 은원은 털어 버리고 앞만 보고 가야 했다. 그런 상황에서 담호에게 각을 세울 필요는 없었다.

무엇보다 남궁영휘는 담호가 좋았다.

말수도 극히 적었고, 눈빛 또한 무시무시했지만 그래도 좋았다. 담호가 근처에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든든해지는 기분이었다.

담호의 조언을 들은 후 남궁영휘는 형 남궁선휘와 많은 대화를 나눴다. 남궁영휘가 무공을 익힐 방법이 있다는 말에 남궁선휘는 많이 혼란스러워했지만, 그래도 이해하려 노력했다.

형제는 매우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눴고, 그 덕에 어깨에 짊어지고 있던 커다란 짐을 조금은 나눠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남궁선휘의 부담감 또한 줄어든 것이 사실이었다.

남궁영휘는 담호가 홀로 있도록 내버려 두고 방진보에게 다가갔다.

“제가 도와 드릴 건 없어요?”

“없어!”

“네?”

“괜찮으니까 너도 쉬고 있어.”

방진보가 웃으며 말했다. 그사이에도 그의 손은 쉬지 않고 재료를 다듬고 있었다.

남궁영휘는 고개를 끄덕이며 모닥불 근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 남궁세가의 비전 심공 중 하나인 대연심공(大衍心功)을 운공하기 시작했다.

대연심공이 남궁세가의 최상위 심공은 아니었다. 남궁세가의 직계 혈족이라면 누구나 익힐 수 있는 심공이었다. 하지만 막상 남궁세가 내에서 대연심공을 익힌 이는 그리 많지 않았다.

대연심공이 만들어진 것은 바로 남궁세가 초창기였다. 대연심공의 특징이라면 안정적이면서도 범용성이 무척이나 넓다는 것이었다.

그 어떤 내공 심법으로 전환해도 무리 없을 정도로 기반이 든든했고, 주화입마를 당할 위험이 거의 없을 정도로 안정적이었다. 대신 내공이 쌓이는 속도가 무척 늦었다.

지난 수백 년 동안 무림은 많은 발전을 했다. 과거의 심공을 개량해서 내공이 훨씬 빠른 속도로 쌓게끔 만든 것이 많았고, 남궁세가도 그런 분위기에 편승해 내공을 빨리 쌓을 수 있는 내공 심법을 다수 만들어 냈다.

무엇보다 대연심공은 구시대의 무공이라는 선입견이 강했다. 때문에 남궁세가 내에서도 사장되어 가고 있었던 무공이 바로 대연심공이었다.

남궁영휘가 다른 효율성 높은 심공을 제치고 대연심공을 꺼내 든 것은 남다른 효능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대연심공은 비록 성취는 느리지만 소림사의 역근경(易筋經)처럼 인간의 육신을 무공을 익히기 적합하게 근골을 바꿔 주고 단련해 주는 효능이 있었다.

대연심공을 대성한 자는 남궁세가의 그 어떤 무공이라도 쉽게 익힐 수 있었다. 단지 대연심공을 완성하는 것 자체가 어렵다는 단서가 붙었지만 말이다.

남궁영휘는 자신의 육체가 얼마나 형편없는지 잘 알고 있었다. 지금 이 상태로 바로 남궁세가의 절학을 익히는 것보다, 조금 더 시일이 걸리더라도 대연심공으로 육체의 질적 향상을 꾀한 다음 익히는 것이 훨씬 낫다고 판단을 내렸다.

무엇보다 대연심공은 안정적이기에 별도의 격리된 공간에서 익힐 필요가 없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남궁영휘는 금세 대연심공에 몰입했다.

녹수빙이 그 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형제가 열심히네.”

“그들은 강해질 이유가 있으니까요.”

“누구나 다 강해질 이유가 있어. 단지 강해지는 법을 아느냐, 모르느냐의 차이지.”

“의지의 차이이기도 하구요. 저들은 이유도 있고, 의지도 있어요.”

“그래서 기특해 보여?”

“네!”

방진보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그런 방진보의 모습이 뜻밖이었는지 녹수빙은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흐응! 꽤나 단호하네.”

“그러면 안 돼요?”

“아니! 그냥 의외라서.”

“뭐가요?”

“그냥 진보는 그런 식으로 강한 표현을 하지 않을 것 같아서. 그냥 좋은 게 좋은 거라고, 그렇게 유하게 살 것 같거든.”

“예전에는 그랬죠.”

“그럼 지금은 아니란 이야기네?”

“언제까지 그렇게 살 수는 없으니까요. 살다 보면 선택의 순간도 오기 마련이고, 때에 따라서는 모진 선택도, 독한 말도 해야 하니까요.”

방진보가 고개를 돌려 남궁 형제를 바라봤다. 두 형제는 나름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있었다.

비록 가는 길이 달라 끝까지 함께할 수는 없을지도 몰랐고, 또 언젠가는 적이 될지도 몰랐다. 그래도 방진보는 그들의 노력을 응원했다.

녹수빙이 갑자기 싱긋 웃었다.

“너, 매력 있네.”

“네?”

“갑자기 남자로 보인다고.”

“전 임자 있어요.”

“뭐?”

“이미 임자 있다구요. 누나의 마음만 받을게요.”

“쳇! 하여간 잘난 놈들은 귀신같이 알고 채간다니까. 누구야? 나보다 예뻐?”

“네!”

녹수빙이 코끝을 찡그리며 방진보를 노려봤다. 하지만 방진보는 어느새 요리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런 방진보의 모습이 살짝 얄밉게 보였다.

‘흐응! 이 몸이 이렇게 무시당해 보기는 이번이 또 처음이네.’

녹수빙은 사신성의 일원이었다. 구무룡 이후 최고의 후기지수 중 하나였고, 아름다운 외모로 유명했다. 그녀 스스로도 무공과 외모에 무척이나 자신 있었고, 어디서도 무시당한 적이 없었다.

남자라면 아이고 어른이고, 노인이고 할 것 없이 모두 그녀를 선망 어린 눈동자로 바라봤고, 그녀도 그런 분위기에 익숙했다. 그렇기에 방진보가 자신을 대하는 모습이 오히려 신선하게 느껴졌다.

그사이 방진보가 요리를 모두 완성시켰다.

“자, 다 됐으니 모두 모이세요.”

방진보의 외침에 담호와 남궁 형제가 하던 일을 멈추고 모닥불 가로 모여들었다. 방진보는 그들에게 방금 만든 음식을 나눠 주었다.

“후우!”

“맛있다.”

남궁 형제가 감탄사를 터트렸다.

방진보와 함께 다닌 이후 그들이 감탄을 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방진보가 만든 음식은 단순히 배만 부르게 하는 게 아니라 지친 심신까지 치유하는 것 같았다.

녹수빙도 방진보의 음식을 먹으며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방진보의 음식을 먹을수록 심신에 활력이 도는 듯했기 때문이다.

‘정말 대단하네.’

그녀는 방진보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아무것도 없는 황야에서 이런 음식을 뚝딱 만들어 내는 것은 강호의 그 어떤 숙수에게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오직 오랜 세월 담호와 함께 강호를 떠돈 방진보만이 가능한 일이었다.

녹수빙은 방진보가 만든 음식을 맛있게 먹었다.

“아! 배불러. 이러다가 살찌겠다. 장난 아니야.”

“헤헤!”

“설거지는 내가 할게.”

“고마워요.”

“얻어먹었으면 밥값을 해야지.”

녹수빙은 일행의 식사가 모두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설거지를 했다. 그녀가 개울가에서 설거지를 하고 다시 모닥불 가로 돌아왔을 땐 방진보와 남궁 형제가 잠자리에 든 이후였다.

그들은 무척이나 피곤한 듯 모닥불 가에 옹기종기 모여 곤한 잠을 자고 있었다.

오직 담호만이 모닥불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홀로 앉아 있었다. 비록 어둠 때문에 그의 얼굴을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깨어 있다는 것 정도는 느낄 수 있었다.

녹수빙은 마치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담호에게 다가갔다. 녹수빙이 지척에 도착하자 담호가 고개를 들어 올려다봤다.

“잠깐 곁에 앉아도 될까요?”

“앉아!”

“감사해요.”

이곳까지 오는 동안 그녀는 담호와 제대로 된 대화를 한 적이 없었다. 담호 자체가 워낙 말이 없기도 했지만,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세상과 분리된 듯한 분위기가 보이지 않는 벽을 만들어 낸 것이다. 그래서 보통 사람은 담호에게 다가가는 것은커녕 똑바로 보는 것도 어려웠다.

녹수빙이 비록 후기지수 중 최고 수준의 무력을 소유하고 있다지만 담호에 비하면 애송이나 다름없었다. 그만큼 두 사람 사이엔 엄청난 격차가 존재했다.

녹수빙은 경외감이 담긴 눈빛으로 담호를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담 대협은 어떻게 해서 그렇게 고강한 무공을 익히신 건가요?”

“…….”

“아! 다른 것은 아니고 화산파에서 무공을 배우셨다면서 전혀 화산파의 무공을 쓰지 않으셔서요.”

“그게 왜 궁금하지?”

“사부님께서 그러셨거든요. 담 대협이 정말 자신만의 무공을 만들어 내어 그렇게 강해진 거라면 당대무쌍(當代無雙)의 무인이 분명하다고.”

어둠 속에서 녹수빙의 눈이 몽혼하게 변했다. 담호는 그런 그녀의 눈동자를 무심히 바라보다 물었다.

“네 사부가 누구지?”

“사부는 무척 신비한 분이에요.”

“…….”

“어느 날 홀연히 나타나 아직 어린 저에게 무공을 가르쳐 주었지요.”

녹수빙의 고향은 중원에서 이역만리 먼 곳에 있는 청해성이었다. 청해성에서도 서쪽 끝에 있는 곤륜산 근처의 조그만 마을이었다.

곤륜산에 존재하는 곤륜파 외에는 변변한 무림 문파 하나 존재하지 않는 그런 외진 곳이었다. 당연히 녹수빙 역시 무공과 거리가 먼 어린 소녀에 불과했다.

그런 곳에 어느 날 한 노인이 홀연히 나타났다. 그리고 녹수빙에게 말했다.

“아이야, 너의 재질이 무척 좋구나. 나에게 무공을 배워 보지 않겠느냐?”

노인이 가볍게 손을 휘두르자 커다란 바위가 먼지로 변하고 아름드리나무가 성둥 잘려 나갔다.

어린 녹수빙의 눈엔 노인이 신선으로 보였고, 당연히 제자가 되겠다고 했다. 그 후로 녹수빙은 노인에게 무공을 배웠다.

노인은 스스로를 무명자(無名者)라고 칭했다.

무명자는 처음 일 년 동안만 마을에 머물면서 녹수빙의 기초를 닦아 줬고, 그 후로 간간이 마을에 찾아와 그녀의 성취를 확인하고 돌아갔다.

그렇게 십여 년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 때 무명자는 녹수빙에게 이름 모를 대법을 펼쳤고, 그 후로 녹수빙의 내공은 비약적으로 증가해 오늘날과 같은 성취를 이룰 수 있었다.

“무명자?”

“네! 사부님은 자신을 그렇게 밝히셨어요. 그리고 꼭 담 대협을 만나라고 명하셨죠. 사실은 그게 이번 강호행의 이유예요.”

“…….”

“이상하죠? 저도 이상했어요. 이유를 묻는 저에게 사부는 그냥 만나면 된다고만 말씀하셨어요. 그럼 알게 될 거라고.”

녹수빙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의 눈은 어둠 속에서 유난히 밝게 빛나고 있었다. 담호는 그런 그녀의 눈동자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녀는 마치 꿈을 꾸는 듯한 눈동자를 하고 있었다. 어느새 초점이 사라지고 마치 인형처럼 감정 없는 얼굴이 된 것이다.

“…….”

순간 담호의 미간에 깊은 골이 패였다.

우웅!

그 어떤 외부의 자극도 없는데 암혼심공이 갑자기 움직인 것이다.

이곳에 있는 이는 자신과 방진보, 남궁 형제, 그리고 눈앞에 있는 녹수빙뿐이었다. 암혼심공이 요동칠 이유가 없었다.

담호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이곳에서 변화가 나타난 이는 녹수빙뿐이었다. 그는 녹수빙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녹수빙의 눈동자는 텅 비어 있었다.

담호의 얼굴이 맺혀 있었지만, 단지 비추기만 할 뿐 그 어떤 감정의 편린이나 이지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마치 인형(人形)처럼 말이다.

하지만 담호는 보았다. 텅 빈 눈동자 안에 존재하는 또 다른 무언가를. 그것은 녹수빙을 매개로 담호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담호도 그것을 보았다.

“누구냐?”

담호가 물었다.

순간 녹수빙의 붉은 입술이 나풀거렸다.

“내가 보이느냐?”

분명 녹수빙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녹수빙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녹수빙의 입을 빌려 다른 누군가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무명자……인가?”

“호! 거기까지 유추해 냈느냐?”

녹수빙이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녀의 안면 근육은 부자연스러워서 누군가 손가락으로 억지로 잡아당기는 것 같았다.

“제자의 몸에 무슨 대법을 펼친 거지?”

“이 아이는 내 제자가 아니다. 단지 나의 눈과 귀로 키워진 중개인일 뿐.”

“중개인?”

담호의 눈빛이 스산하게 변했다.

무명자는 녹수빙의 눈을 통해 자신을 보고 있었다.

그의 눈빛이 느껴졌다. 집요하게 관찰을 하는 그 시선이.

마치 담호의 모든 것을 파악하기라도 하듯 훑어보고, 꿰뚫어 보고, 노려보고 있었다. 상대는 녹수빙의 눈을 통해 담호를 관찰하고 가늠하는 것이다.

담호가 물었다.

“나를 보려고 이 아이를 보냈는가?”

“그래! 그것이 그 아이의 용도니까. 그렇게 쓰려고 키워진 아이다.”

“그럼 나도 너를 볼 수 있겠군.”

담호가 암혼신공을 극성으로 끌어올렸다. 그러자 녹수빙의 뒤에 웅크리고 있는 그것이 보였다.

늙고 흉측한 그 무언가가.

순간 녹수빙의 입에서 경호성이 터져 나왔다.

“헛!”

동시에 녹수빙이 마치 실이 끊긴 인형처럼 그대로 쓰러졌다. 미지의 존재와 연결이 끊긴 것이다.

담호는 녹수빙을 무심히 바라보았다.

그녀의 모습 뒤로 보였던 그것은 이미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 잔향과 느낌만큼은 진하게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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