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5
425화 8장. 사로(死路)에서 생로(生로)를 찾는다(4)
노인이 눈을 끔뻑거렸다.
뻑뻑하기만 하던 눈에 눈물이 돌면서 흐릿했던 초점이 다시 돌아왔다. 그러자 주변 풍경이 다시 눈에 보였다.
노인의 얼굴에 의외라는 표정이 떠올랐다.
“내가 보이는군.”
나는 상대를 볼 수 있지만, 상대는 나를 볼 수 없는 것이 천리환혼대법(千里換魂大法)이었다.
천리환혼대법을 위해서는 엄청난 준비와 시간이 필요했다. 일단 혼을 바꿀 수 있는 그릇이 필요했고, 그 그릇을 키울 시간과 엄청난 노력이 필요했다.
녹수빙은 천리환혼대법을 펼칠 수 있는 적합한 그릇이었다. 그녀를 곤륜산 근처에서 발견한 것은 큰 행운이었다. 그래서 심혈을 기울여 키우고 그릇을 넓혔다. 그리고 담호를 직접 보기 위해 사용해야 했다. 설마 담호가 그녀를 통해 자신의 실체에 접근하려 할 줄은 몰랐지만.
천리환혼대법은 영혼에 막대한 부담을 주는 사술이었다. 때문에 한 번 펼치면 그릇을 두 번 다시 사용할 수 없게 되어 버리는 단점이 있었다.
심혈을 기울여 키운 녹수빙을 두 번 다시 이용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래도 노인은 아깝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기 때문이다.
“어디까지 봤을까?”
노인이 무심히 중얼거렸다. 하지만 크게 신경 쓰는 표정은 아니었다. 그저 겉껍데기를 조금 엿보았다고 실체까지 알 수 있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이 정도였나? 권마. 그래, 이 정도는 되어야 마선이라 불러 줄 수 있겠지.”
그가 창가로 다가가 창문을 활짝 열렸다. 그러자 막혀 있던 공기가 한꺼번에 밀려들어 오며 외부의 소리까지 섞여 들어왔다.
“저쪽이다.”
“놈들을 막앗!”
창문 너머로 사나운 기세를 발산하며 달려가는 마교의 무인들이 보였다. 그리고 그들에게 쫓겨 달아나는 무림맹의 젊은 기재들도.
고목나무 껍질 같은 주름으로 뒤덮인 그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점점 재밌어지는군.”
쿠콰콰!
저 멀리 장진명과 강위가 싸우는 모습이 보였다.
그가 서 있는 이곳은 마교의 본단이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노인을 혈노라고 불렀다.
혈노는 한참 동안이나 우두커니 서서 장진명과 강위의 싸움을 지켜보았다.
두 사람의 무공은 분명 장진명의 우세였다.
제아무리 강위가 마교의 사대군장 중 한 명이라지만 무공을 익힌 햇수와 무위, 그리고 경험에서 장진명에게 조금은 밀리는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곳은 마교의 본단, 즉 강위의 집 앞마당이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무엇보다 시간은 강위의 편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수많은 병력이 그를 지원할 것이고, 장진명은 고립될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심리적으로 강위는 느긋했고, 장진명은 쫓기고 있었다.
그 작은 차이가 두 사람의 격차를 메워 주었다.
‘서둘러라!’
장진명이 입술을 질겅 깨물었다.
많은 이들이 반대한 작전을 그가 우겨서 진행했다. 당연히 그 모든 책임도 그가 질 수밖에 없었다.
책임을 지는 것은 상관없었다. 그럴 각오로 결사대의 수장을 자처한 거니까. 하지만 원하는 결과를 만들어 내지 못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속전속결, 이 한 수에 모든 것을 건다.’
그는 망설일 것도 없이 전 공력을 끌어 올렸다. 그러자 손에 쥐고 있는 검에서 검명이 터져 나왔다.
쿠우우!
검명과 함께 검강이 휘몰아쳤다.
순간 강위의 눈이 살기로 번들거렸다.
“좋다!”
살이 떨릴 만큼 광포하고, 영혼을 분쇄할 만큼 무시무시한 압력이 피부에 느껴졌다. 그래서 오히려 더 기꺼웠다. 그는 오래전부터 이런 싸움을 기대하고 있었다.
실수 한 번에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치열한 싸움을.
슈우우!
그의 검이 빛이 되어 장진명의 검과 격돌했다.
쩌어엉!
순간 두 사람이 싸우고 있던 공간이 폭발했다.
***
은소청이 문득 뒤돌아봤다.
등 뒤에서 불어온 강렬한 기파가 그녀의 머리칼과 옷을 나부끼게 만들었다.
“무슨?”
“절대고수들 간의 격돌 여파야. 앞에만 집중해. 거기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어.”
대답을 한 이는 해소월이었다.
은소청을 가운데 두고 해소월과 소천이 좌우에서 달려가고 있었다.
그들의 전신에는 자잘한 상처가 가득했다.
그들이 제아무리 강호를 울리는 고수라고 할지라도 적들의 숫자가 너무 많았다. 더군다나 이곳은 적진 한가운데였다. 한 치의 방심도 용납하지 않는 사지였기에 해소월과 소천의 신경은 날카롭게 곤두서 있었다.
그들의 등 뒤로 십여 명의 결사대 무인들이 뒤따르고 있었다. 그들은 평소 소천과 해소월과 편하게 지내던 이들이었다. 위기 상황이 닥치자 그들은 본능적으로 두 사람을 따랐다.
해소월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이쪽으로!”
그녀는 마치 길을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일행을 이끌었다.
해소월은 아예 은소청을 들쳐 업었고, 소천이 그녀들을 호위했다. 그리고 그 뒤를 다시 십여 명의 무인들이 따랐다.
“무림맹의 결사대다.”
“막아!”
그들의 앞을 마교의 정예들이 막아섰다.
흉흉한 살기를 피워 올리고 있었지만, 그들의 수는 다른 곳보다 현저히 적었다. 다른 결사대를 막기 위해 분산되었기 때문이다.
순간 소천이 쏜살같이 앞으로 뛰쳐나가며 양 손바닥을 활짝 펼쳤다. 그러자 막강한 장력이 앞으로 쏘아졌다.
불문 소림사의 절기인 대반야장(大般若掌)이었다.
콰아아아!
엄청난 경력이 소천의 앞을 휩쓸고 지나갔다.
소천이 마음을 먹고 펼친 대반야장이었다. 살계를 어기는 것까지 각오했기에 더욱 강맹한 위력을 발휘했다.
대반야장에 휩쓸린 마교의 무인들이 추풍낙엽처럼 날아갔다. 개중에는 두 다리로 굳건히 버티고 선 무인들도 있었지만, 그런 이는 몇 명 되지 않았다.
“아미타불! 지금이오.”
소천의 신호에 뒤를 따르고 있던 결사대 무인들이 앞으로 튀어나갔다. 그들은 대반야장에 휩쓸린 이들에게 성명절기를 펼쳤다.
“크아악!”
“켁!”
수많은 이들이 죽어 나가면서 마교의 전열이 무너졌다.
해소월과 결사대는 그 사이를 통과해 질주했다. 그들은 순식간에 멀어져 갔다.
“자, 잡아!”
“어서 추적해!”
뒤늦게 정신을 차린 이들이 추적에 나섰지만, 그들 사이의 거리는 조금씩 멀어지고 있었다.
해소월이 입술을 질근 깨물었다.
“조금만 더 가면 돼.”
그녀는 어젯밤 초연운과 했던 대화를 떠올렸다.
―외성 동쪽에 옛 무림맹의 전각 중 하나인 성심전(聖心殿)이 아직 원형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문제가 생기면 반드시 그곳으로 가십시오.
초연운이 왜 그런 이야기를 했는지 이유는 아직도 몰랐다. 하지만 그녀는 초연운을 믿었다.
평소 실없는 말을 즐겨 했지만, 그렇다고 헛소리를 하는 이는 아니었다. 그런 그가 신신당부한 말이었다. 그렇기에 해소월은 초연운의 말대로 행동하고 있었다.
무너진 옛 무림맹의 터에 세워진 마교의 본단이었다. 많은 것이 바뀌고, 새로운 전각들이 수도 없이 들었지만 큰 틀은 바뀌지 않았다.
해소월은 예전의 무림맹을 기억하고 있었기에 어렵지 않게 성심전으로 가는 길을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성심전으로 가는 길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마치 개미굴에서 쏟아져 나오는 개미들처럼 수많은 마교의 고수들이 기어 나와 그들의 앞을 막았다.
“으아악!”
“켁!”
마교의 고수뿐만 아니라 해소월의 뒤를 따르고 있는 결사대의 무인들도 죽어 나갔다.
“아미타불!”
소천이 어떻게든 그들을 지키려 고군분투했지만, 혼자 힘으로 그 많은 이들을 모두 지킬 수는 없었다.
푸욱!
“크윽!”
창에 배를 찔린 젊은 무인이 눈을 치떴다.
그의 이름은 조시율, 남창목가의 촉망받는 기재였다. 유달리 의협심이 강해서 결사대에도 망설이지 않고 지원했다.
결사대에 참여할 때까지만 하더라도 그는 공을 세워 이름을 드높이겠다는 청운의 꿈을 안고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 닥친 현실은 냉혹했다.
배 속에서부터 시작된 극통에 조시율의 눈동자가 풀렸다.
멀어져 가는 동료들의 뒷모습이 흐릿하게만 보였다.
‘나도 데려가 줘. 제발!’
서걱!
그 순간 날카로운 절삭음과 함께 조시율에게 어둠이 찾아왔다.
“이 죽일 놈들!”
뒤늦게 현장에 나타난 마교의 고수가 채찍을 크게 휘둘러 묻은 피를 털어 냈다.
그의 발밑에는 머리를 잃은 조시율의 몸이 나뒹굴고 있었다. 그가 채찍으로 조시율의 머리를 날려 버린 것이다.
그의 이름은 윤광이었다.
천살신편(天殺神鞭) 윤광.
마교의 칠대마인 중 일인에 속하는 절대의 고수였다.
군사인 상한천이 불청객이 있을 거라고 말했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코웃음을 쳤었다. 설마 천하에 그 어떤 간덩이 부은 자가 감히 마교의 본단에 쳐들어올까 하는 의심스러운 마음이 있었다. 하지만 상한천의 말은 사실이 되었고, 마교의 성스러운 대지가 무림맹의 불한당들에게 짓밟히고 있었다.
윤광은 그 사실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어떻게 중원에 마련한 본단인가?
이곳을 차지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이들이 희생을 했는데, 또다시 무림맹에 짓밟힌단 말인가?
윤광은 분노했다.
그는 수하들과 함께 멀어지는 해소월과 소천 등을 뒤쫓았다.
“모조리 죽여 주마.”
그의 살기가 일대를 지배했다.
“크읏!”
윤광의 살기에 제일 먼저 반응한 이는 바로 소천이었다.
등골이 저릿저릿하고 심장이 격하게 뛰었다. 소천은 추적을 해 오는 이가 절대의 고수임을 깨달았다.
“아미타불!”
이제 조금만 더 가면 성심전이었다. 하지만 이대로라면 성심전에 채 도착하기도 전에 윤광에게 따라잡힐 것이 분명했다.
소천이 해소월과 눈빛을 교환했다.
“먼저 가시오. 내가 그를 막겠소이다.”
“하지만…….”
“아미타불! 금방 뒤따라갈 것이오.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오.”
“불리하다 싶으면 바로 뒤로 빠지세요.”
“알겠소.”
소천이 고개를 끄덕이며 뒤로 빠졌다.
“이놈!”
제일 뒤로 처지자마자 윤광의 채찍이 가공할 기세로 날아왔다.
윤광의 채찍에는 선명한 강기가 형성되어 있었다. 편강을 만들어 낸 것이다.
“아미타불!”
소천이 채찍을 향해 가볍게 주먹을 뻗었다. 소림의 절학 중 하나인 백보신권(百步神拳)이었다.
쿠와앙!
굉음과 함께 소천과 윤광의 몸이 동시에 들썩였다.
소천에게 막힌 윤광이 살기를 피워 올리며 소리쳤다.
“소림의 땡중이구나.”
쉬가가각!
그의 손에 들린 채찍이 춤을 췄다.
혈편난무(血鞭亂舞).
윤광을 천살신편이라 불리게 만든 절학이 펼쳐졌다. 소천 역시 소림의 절학을 풀어 내며 그에 맞섰다.
콰콰쾅!
두 사람이 격돌하며 발생한 거친 기파에 담이 무너지고 전각이 흔들렸다.
그사이 해소월이 이끄는 결사대는 성심전 앞에 도착했다. 하지만 성심전에 도착하는 순간 해소월 등은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성심전 앞에는 어느새 수많은 고수들이 포진해 있었기 때문이다.
언뜻 봐도 수백 명 이상의 고수들이 벽을 이루고 있었다. 그에 반해 해소월이 이끄는 젊은 기재들의 수는 겨우 십여 명에 불과했다. 그들 대분은 상처 입고 지쳐 있었다.
해소월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본능적으로 이들을 모두 데리고 벽을 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때 마교 측에서 중년의 무인이 걸어 나왔다.
살갗을 에는 듯한 날카로운 기세를 발산하는 무인의 등장에 해소월이 눈을 한껏 찌푸렸다.
‘고수. 그것도 절대의…….’
무인은 적수공권이었다. 대신 두 주먹에 굳은살이 뾰족하게 불거져 나와 창을 연상케 했다. 두 주먹이 창과 같은 남자, 해소월은 어렵지 않게 그의 정체를 유추해 낼 수 있었다.
“당신은 질풍신권(疾風神拳) 이선창 대협이군요.”
“맞네!”
적수공권의 무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해소월의 낯빛이 더욱 어두워졌다.
질풍신권 이선창은 칠대마인의 일인이었다.
삼 년 전 담호에 의해 칠대마인 중 상당수가 죽어 위신이 많이 떨어졌지만, 그래도 칠대마인이 절대고수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휴!”
해소월이 한숨을 내쉬며 은소청을 내렸다. 이곳에서 이선창을 상대할 만한 이는 자신밖에 없었다. 나머지는 덤벼 봐야 죽음만 당할 뿐이었다.
“언니?”
“내가 길을 뚫으면 너는 곧장 성심전으로 달려가거라.”
“하지만…….”
“금방 따라갈게. 나 믿지?”
“응!”
은소청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녀의 눈에는 어느새 뿌연 습막이 어려 있었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해소월이 죽음을 각오하고 남으려 한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녀가 남으면 살 확률보다 죽을 확률이 더 높다는 사실을.
‘이럴 때 멍청한 오빠는 뭘 하고 있는 거야?’
그녀는 자리에 없는 초연운을 원망했다.
그때 이선창이 차가운 미소를 피워 올렸다.
“너희들 뜻대로 될 성싶으냐?”
그가 손을 들자 등 뒤에 도열해 있던 수백 명의 무인들이 앞으로 나섰다.
이선창은 무인으로서 긍지가 드높았다.
마음 같아서는 일대일로 격돌해 해소월을 제압하고 싶었다. 하지만 등 뒤에 도열해 있는 부하들에게도 기회를 줘야 했다.
터전이 짓밟힌 자들의 분노는 제때 분출해 줘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훗날 더 큰 문제가 될 소지가 높았다.
지금이 그들의 화를 분출시킬 절호의 기회였다.
“큿!”
해소월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설마 칠대마인 중 한 명인 이선창이 이렇게 나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쳐랏!”
“와아아아!”
이선창의 명령이 떨어지자 마교의 고수들이 일제히 함성을 내지르며 달려들었다.
해소월과 결사대의 얼굴에 암담한 표정이 떠오를 때였다.
콰아아앙!
성심전 한가운데서 폭발이 일어나면서 시뻘건 불길이 일대를 휩쓸고 지나갔다.
“헛!”
해소월이 급히 은소청을 품에 안으며 호신강기를 펼쳤다. 정면에서 그 광경을 본 결사대의 고수들도 급히 공력을 끌어 올리거나 주위의 엄폐물에 몸을 숨겨 불길을 피했다.
반대로 등 뒤에서 폭발이 일어났기에 마교의 고수들은 상당수가 미처 대처를 하지 못하고 불길에 휩싸이고 말았다.
“으아악!”
“살려 줘!”
몸에 불이 붙은 마교의 무인들이 바닥을 나뒹굴며 처절한 비명을 질렀다.
“이럴 수가!”
그 광경을 본 이선창의 얼굴이 노기로 일그러졌다. 폭발의 순간 그는 호신강기를 펼쳐 화를 피했지만, 그의 수하들은 그렇지 못했다.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그들은 모두 이선창이 아끼는 이들이었다. 그렇기에 그의 분노는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웬 놈이냐?”
그가 폭발의 중심지를 향해 소리쳤다.
그때 불길을 뚫고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희미한 그의 형체를 본 순간 은소청이 소리쳤다.
“오라버니!”
“괜찮냐? 꼬맹이.”
그의 목소리가 은소청의 귀에 꽂혔다. 순간 은소청의 눈가에 눈물이 핑 돌았다.
술에 취해 구름 속을 헤매는 용이 불길을 뚫고 내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