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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권마-426화 (426/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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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6화 1장. 사선을 뚫고……(1)

화아악!

뜨거운 열풍이 해일처럼 밀려왔다. 은소청의 지척까지 다가왔던 열풍은 갑자기 방향을 바꿔 허공을 향해 치솟아 올랐다. 소용돌이치며 상승하는 열풍은 주위의 화염까지 끌어들여 순식간에 몸집을 불렸다.

‘화룡(火龍).’

은소청의 눈에는 저 소용돌이가 승천하는 용으로 보였다. 지옥의 불길로 온몸을 두른 거대한 화룡으로 말이다.

쿠아아!

무서운 기세로 승천하던 화룡은 결사대를 공격하던 이선창의 부하들을 덮쳤다.

“뭐, 뭐야?”

“으아악!”

쿠와앙!

화룡은 그대로 이선창의 부하들을 덮쳤고, 순식간에 수십여 명의 무인들이 잿더미로 변했다.

너무나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기에 어떻게 대처할 틈도, 반응할 여유도 없었다.

엄청난 대참사 앞에 잠시 싸움이 멈추고, 사람들의 이목이 화룡에 집중됐다.

수많은 이들을 몰살시킨 화룡은 서서히 형체를 잃어 갔다. 회오리치던 바람은 흩어졌고, 바람에 실려 열기를 퍼트리던 화염도 사그라졌다. 그리고 한 사내가 나타났다.

입가에 싱그러운 미소를 지은 채 모습을 드러낸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은소청의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오라버니.”

“꼬맹아.”

은소청을 보고 꼬맹이라 부를 수 있는 이는 단 한 명뿐이었다.

취운룡(取雲龍) 초연운.

술에 취해 구름 속을 떠도는 용이 화염을 휘감은 채 나타난 것이다.

“어떻게?”

이선창이 초연운을 망연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초연운의 등 뒤로 넘실거리는 화염이 보였다. 화염은 무서운 기세로 성심전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불길의 근원지는 성심전 앞에 있는 커다란 우물이었다. 무림맹이 자리를 잡았을 때부터 있었던 우물이었다. 우물은 산산이 부서진 채 엄청난 화염을 내뿜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화염이 이내 잦아들며 거대한 공동이 나타났다.

무공으로는 만들어 낼 수 없는 현상과 위력이었다.

이선창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이런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 물건은 하나뿐이었다.

“벽력탄인가?”

“맞아! 덕분에 돈이 엄청 깨졌지.”

초연운이 어깨를 으쓱하며 은소청의 앞을 막아섰다.

“오라버니, 어떻게?”

“우물을 통해 밖으로 나가. 그럼 자연히 알게 될 거야.”

“오라버니는요?”

“한 명이라도 더 구해 봐야지. 그러려고 돌아온 거니까.”

초연운이 씨익 미소를 지었다. 예의 장난스러우면서도 천진한 미소였다. 하지만 은소청은 그 안에 담긴 비장함을 엿보았다. 그리고 그의 말이 진실이라는 사실도 알아차렸다.

“얼른 가.”

초연운이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 그는 더 이상 은소청을 보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이선창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의 눈에 어린 투지와 신념을 읽었기에 은소청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자신이 어떤 말을 하든 초연운은 듣지 않을 것이 분명했으니까.

은소청이 초연운을 스쳐 지나가면서 말했다.

“조심해요.”

“나가면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을 거야. 그들을 따라가.”

“네!”

은소청이 고개를 끄덕이며 부서진 우물로 걸음을 옮겼다.

초연운의 시선이 결사대의 무인들을 향했다.

“당신들도 어서 가.”

“하지만…….”

결사대가 망설였다.

도주하기 위해 해소월을 따라왔지만, 막상 기회가 생기자 망설여지는 것이다. 다른 결사대의 무인들은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오히려 본단 깊숙이 파고들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동료들을 버리고 자신들만 도주한다는 것이 마음에 걸리는 것이다.

초연운이 망설이는 그들에게 말했다.

“먼저 나가서 퇴로를 확보해.”

“퇴로?”

“그래!”

그제야 결사대 무인들의 표정이 조금은 밝아졌다. 초연운의 말은 그들에게 정당히 나갈 명분을 만들어 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고맙네! 먼저 나가서 퇴로를 확보해 놓고 있겠네.”

“부디 조심하게.”

그들은 은소청을 호위해 우물로 들어갔다.

이선창이 그 광경을 보며 중얼거렸다.

“허! 성심전의 우물에 저런 비밀이 있었나?”

무림맹의 옛 터전 위에 세운 마교의 본단이었다. 옛 시설에 관해서는 대부분 파악했다고 자부했는데, 우물 밑에 저런 공간이 있을 줄은 정말 까마득하게 몰랐다.

초연운이 해소월의 곁에 서며 말했다.

“여우는 원래 빠져나갈 구멍을 두 개 이상 만들어 두는 법이지.”

“그 말은 여우가 만들어 둔 통로란 말인가?”

“여우처럼 머리가 비상한 사람이 만들어 둔 통로란 뜻이오.”

“남궁창이겠군. 그가 무림맹의 군사였으니까 당연히 빠져나갈 통로 몇 개는 마련해 두었겠지.”

이선창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살아 있을 때도 걸림돌이었는데, 죽어서도 신교를 괴롭히고 있으니 꽤나 악연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이선창이 수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추적해 척살하라.”

예상치 못한 초연운의 등장에 수십 명의 수하들을 잃었지만, 아직도 그 몇 배에 달하는 수하들이 건재했다. 이선창은 은소청 등이 그들의 추적을 뿌리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의 앞을 막아서는 이가 있었다.

“쯧! 순순히 통과시킬 것 같으면 내가 뭐 하러 여기 나타났을까?”

바로 초연운이었다.

그가 해소월을 슬쩍 바라봤다. 그러자 해소월이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지만, 눈빛만으로도 서로의 의중을 알 수 있었다.

‘이곳에서 저들을 막고, 최대한 많은 동료들을 구한다.’

초연운이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러자 벽력 같은 기세가 일대로 퍼져 나갔다.

벽력탄의 폭발을 이용해 적을 공격할 수 있을 만큼 그의 팔황신권(八荒神拳)은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고 있었다.

담호를 돕기 위해 세상에 나왔지만, 막상 팔황신권을 제대로 펼칠 기회를 잡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사부!’

장일산이 남긴 유일한 유산. 백전문 최고의 무공이 그의 몸을 통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려 하고 있었다.

그 압도적인 존재감이 이선창의 수하들을 압도하고 있었다. 마치 거미줄에 걸린 곤충처럼 수많은 이들이 초연운의 존재감에 묶여 움직이지 못했다.

그 광경을 본 이선창의 전신에 가공할 살기가 피어올랐다.

“건방진 애송이들!”

휘류류!

그의 두 주먹에 거친 기류가 휘돌았다. 기류는 광풍이 되어 곧 그의 전신을 휘감았다.

이선창이 해소월과 초연운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 뒤를 그의 수하들이 따랐다.

팟!

해소월과 초연운이 그들을 향해 뛰어들었다.

콰콰쾅!

***

구의진의 별호는 천랑객(天狼客)이었다. 하늘 아래 제일 큰 늑대 같다 해서 붙여진 별호였다.

그가 진가를 드러낸 것은 수십 년 전 일차 정마대전 당시였다. 그 이전까지 철저하게 무명이었던 구의진은 수많은 마교 무인들을 도륙하면서 전장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그의 성명절기인 혈운낭아류(血雲狼牙流)는 잔혹함의 극치를 달렸다. 혈운낭아류에 당한 자는 마치 커다란 늑대에게 뜯어 먹힌 것 같은 상처와 흔적이 남았고, 극한의 고통 속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비켜랏! 마교의 잡졸들아.”

쿠콰콰!

구의진이 손을 휘두르자 늑대의 이빨 같은 강기가 달려오는 마교의 고수들을 갈기갈기 찢어발겼다.

“크아아!”

“아악!”

팔다리가 잘려 나가고, 피 보라가 흩날렸다. 짓이겨지고 잘려 나간 내장과 뼛조각이 사방으로 튀었다.

너무나 잔혹해서 오히려 비현실적인 광경이었다.

무영신룡 엄태천의 얼굴에도 적들의 피가 점점이 뿌려졌다. 눈가를 따라 흐르는 핏방울을 닦을 여유도 없었다.

미친 듯이 질주하는 구의진을 따라잡는 것만으로도 벅찼기 때문이다. 엄태천의 등 뒤로도 수많은 결사대의 동료들이 뒤따르고 있었다.

그들이 구의진을 따르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마교의 교주를 척살한다.’

구의진의 말이 그들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

마교라는 거대 집단의 정점에 선 남자.

수만 신도들의 정신적인 지주이면서 무력으로도 천하에서 손에 꼽히는 공포의 무인.

그를 죽인다면 이 저주스러운 전쟁을 종식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교주를 죽인 자는 단번에 천하를 아우르는 엄청난 위명과 명예를 갖게 될 것이다.

어차피 한 번밖에 살지 못하는 인생이었다.

결사대에 자원하면서 죽음은 각오했다.

그런 그들에게 최고의 영예는 바로 마교 교주와 싸우는 것이었다.

구의진이 그런 이들을 이끌었다.

그의 혈운낭아류는 가로막는 마교의 고수들을 무참히 도륙했다. 덕분에 그들은 단 한 번도 멈추지 않고 마교의 본단을 질주할 수 있었다.

구의진은 마치 본단의 내부 지리를 훤히 알기라도 하듯이 최단거리로 질주했다.

“막아!”

“이놈들! 멈춰랏.”

마교의 고수들은 필사적으로 그들을 막고자 했다. 하지만 구의진의 가공할 무력 앞에 그들은 추풍낙엽처럼 떨어졌다.

쿠콰콰!

강기의 폭풍이 휘몰아쳤다.

그 무엇도, 그 누구도 구의진을 막지 못할 것 같았다. 실제로도 그랬다. 마교의 고수들이 따라붙는 속도보다 그가 질주하는 속도가 훨씬 더 빨랐다.

콰앙!

인간의 힘으로는 절대 부수지 못할 것 같은 철문이었다. 하지만 구의진의 혼신의 힘을 다한 강기에 사람들이 겨우 들어갈 만한 틈이 벌어졌다.

“이곳에 마교의 교주가 있다. 모두 들어가 놈을 죽이자.”

구의진의 외침에 엄태천을 비롯한 결사대의 고수들이 마치 홀린 것처럼 안으로 뛰어들었다.

멈추지 않는 무한의 질주는 때로는 이성을 마비시키고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게 만든다. 지금 결사대의 상태가 그랬다.

구의진의 뒤를 맹목적으로 따라 달렸기에 그들의 전방 시야는 무척이나 좁혀져 있었다. 거기에 이제까지 믿고 따라온 구의진의 외침이 들리자 그들은 망설이지 않고 금역의 철문 안으로 질주했다. 하지만 정작 구의진은 철문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그 옆에 멈춰 서 있었다. 그런 그의 얼굴엔 기묘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수많은 감정이 범벅이 되어 있는 그런 표정이었다. 우는 것 같기도 하고, 웃는 것 같기도 한 이질적인 표정들이 마구 뒤섞여 있었다.

그의 성명절기인 혈운낭아류에는 세상이 알지 못하는 비밀이 하나 숨겨져 있었다. 바로 혈운낭아류의 심공을 운공하면 주변의 사람들까지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성은 마비시키고, 투쟁심을 고양시킴으로써 무력을 끌어올리고 광기의 지배하에 드는 것이다.

미리 알고 대비하기 전에는 그 어떤 누구도 혈운낭아류의 광기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지금 철문 안으로 뛰어 들어간 기재들처럼 말이다.

“미안하구나. 너희들을 사지에 몰아넣는 나를 마음껏 원망하거라. 허나 이 모든 것은 이 세상을 위한 것일지니, 훗날 강호의 역사가들이 너희들을 높게 평가해 줄 것이다.”

구의진이 입술을 질겅 깨물며 뒤돌아섰다.

그도 인간이었다.

감정이 남아 있기에 당연히 어느 정도의 죄책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대의’라는 만사형통의 단어를 내세워 자신의 행위를 위로했다.

자신이 행하는 모든 것은 강호를, 아니 이 세상을 위한 것이었다. 비록 그 때문에 당장 수많은 이들이 죽어 가겠지만, 그들의 희생은 이 세상을 더 생동감이 넘치게 바꿔 놓을 것이다.

구의진이 그렇게 생각하며 걸음을 옮길 때였다.

“감히!”

쩌렁쩌렁한 노성과 함께 하얀 벼락이 그를 향해 내리꽂혔다. 섬전처럼 내리꽂히는 새하얀 벼락에 맞서 구의진이 혈운낭아류의 호신기공을 펼쳤다.

쾅!

“크윽!”

구의진이 답답한 신음성과 함께 뒤로 열 걸음 이상 물러났다. 화강암으로 이뤄진 바닥엔 그의 족적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섬전처럼 내리꽂힌 사내는 마치 눈처럼 새하얀 장포를 입고 있었고, 목에는 여우 가죽으로 만든 목도리를 하고 있었다.

머리카락도 하얗고, 눈썹도 하얬다. 심지어는 눈동자마저 하얘서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을 주는 남자는 바로 백익멸왕(白翼滅王) 노군상이었다.

교주 척관혈의 최측근이자 백사자인 그가 구의진 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의 눈에서 새하얀 벼락이 뿜어져 나오는 듯했다.

구의진은 노군상의 등 뒤에 펼쳐진 새하얀 날개를 보았다. 날개의 형상을 한 강기는 이내 사라졌지만, 그 잔상은 오래도록 남아서 구의진의 눈에 어른거렸다.

구의진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백익멸왕?”

“나를 아는가?”

순간 노군상의 눈에서 백광이 작렬했다.

구의진이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너무 놀라서 결코 하지 말아야 할 실수를 범한 것이다.

마교의 흑백사자, 그중에서도 백익멸왕 노군상은 대외 활동을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의 얼굴을 아는 이는 마교 내에서도 단 세 사람뿐이었다. 교주와 군사, 그리고 같은 흑백사자의 일원인 흑익사왕 진도휘뿐, 그 외의 누구도 그의 진정한 모습을 알지 못했다.

노군상의 새하얀 장포가 하늘을 향해 부풀어 올랐다.

“네놈…… 누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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