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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8화 1장. 사선을 뚫고……(3)
“후욱! 후욱!”
초연운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경공을 펼쳤다. 그런 그의 등엔 소천이 업혀 있었다.
소천은 피투성이가 된 채 정신을 잃고 있었다. 성심전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초연운은 소천을 구할 수 있었다.
그가 발견했을 당시 소천은 천살신편 윤광과의 격전으로 중상을 입은 상태였다. 초연운은 필사적으로 윤광을 떨쳐 내고 소천을 구해 탈출했다.
“소천은 어떤가요?”
초연운의 곁에서 경공을 펼치던 해소월이 근심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좋지 않습니다.”
초연운이 고개를 저었다.
등 뒤에서 소천의 희미한 호흡이 느껴졌다.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가늘게 이어지는 호흡이 위태롭기만 했다. 해소월이 곁에서 내공을 불어넣어 주지 않았다면 소천은 진즉에 숨이 끊어졌을 것이다.
해소월은 초연운의 곁을 따르면서 새삼스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초연운이 강한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초연운은 천뢰무객 남학을 쓰러트림으로 자신의 강함을 증명했으니까. 하지만 질풍신권 이선창을 상대로 발휘한 그의 무위는 이전과는 차원을 달리했다.
이제 초연운을 구무룡과 동급으로 취급하는 것은 그에 대한 모독이나 마찬가지였다. 칠대마인 중 한 명인 이선창을 상대로 그는 거의 대등한 무력을 발휘했다. 거기다 소천을 구하는 과정에서 천살신편 윤광을 상대로도 엄청난 무위를 발휘했다.
그 혼자서 칠대마인 중 두 명을 상대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해소월이 돕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엄청난 성과를 홀로 이룬 것이나 다름없었다.
두 사람은 미로처럼 복잡한 악양의 뒷골목을 무서운 속도로 질주했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여기예요, 오라버니.”
“이쪽일세.”
갑자기 골목 한쪽에서 두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은소청과 청운이었다. 그들이 초연운과 해소월에게 손짓을 했다.
“괜찮아요?”
초연운을 바라보는 은소청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우물 밑에 있던 비밀 통로를 통해 밖으로 나온 그녀를 맞이한 것은 바로 청운과 하오문의 무인들이었다.
초연운이 우물 밑에 있던 비밀 통로를 찾아낸 것은 바로 하오문 덕분이었다. 그들은 담호와의 인연으로 초연운에게 정보와 벽력탄을 제공했다. 덕분에 초연운은 비밀 통로를 확보할 수 있었다.
청운과 하오문도들을 만나고 난 후에야 은소청은 초연운이 얼마나 고군분투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가 아니었으면 자신과 결사대로 참여한 많은 무인들이 전부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초연운이 소천을 등에 업은 채 은소청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괜찮아. 그보다 탈출로는?”
“준비해 두었지만 서둘러야 하네. 저들이 눈치채고 추적하면 그마저도 위태로울 걸세.”
청운이 앞으로 나섰다.
결사대에서 빠진 이후 가장 많이 마음고생 한 이가 바로 청운이었다. 그는 초연운과 의논한 후 안전한 퇴로를 확보하기 위해 노심초사했었다.
그가 있었기에 초연운은 결사대를 구하는 것에 집중할 수 있었다.
“소천을 이리 건네주게.”
청운은 소천을 건네받아 청성파의 비전 영약을 복용시켰다. 그러자 소천의 안색이 한결 편안해졌다. 급한 불은 일단 끈 것이다.
그제야 초연운과 해소월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주위를 둘러볼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하오문의 도움을 받아서 구한 결사대 무인들의 수는 모두 스무 명 정도에 불과했다. 나머지 무인들은 아직 마교 본단에 남아 악전고투를 하고 있었다. 그들 중 몇 명이나 살아남았는지 알 수 없었다.
아직 많이 살아 있을 수도 있었고, 전멸했을 수도 있었다. 정확한 상황을 파악하려면 다시 마교의 본단에 돌아가야 했다. 마음 같아서는 다시 돌아가고 싶었지만, 초연운은 그럴 수 없었다.
다시 돌아가기에는 위험부담이 너무 클뿐더러, 겨우 구한 다른 사람들까지 위험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이들은 몰라도 은소청은 반드시 무사히 보호해야 했다.
‘나머지는 천운에 맡길 수밖에…….’
초연운은 그들이 부디 무사히 빠져나오길 빌며 뒤돌아섰다. 그런 그의 얼굴엔 독한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분명 놈들이 추격대를 보내올 거야. 그들이 따라오기 전에 악양을 벗어나야 해.”
“알겠네. 자네가 우리를 이끌어 주게.”
청운의 말에 초연운이 머뭇거렸다.
모두가 전멸하는 꼴을 두고 볼 수 없어 나서긴 했지만, 이들 모두를 이끈다고는 생각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주위를 둘러보니 스무 명의 결사대 무인들이 간절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엔 불안감과 두려움이 가득했다.
호기롭게 은가보를 나설 때와 정반대로 달라진 표정과 태도였다. 직면한 위협 앞에서 그들은 의지가 될 만한 누군가가 간절히 필요했다.
그들이 원하는 그 누군가가 바로 초연운이었다.
“이만큼이라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도 초 대협 덕분이에요. 초 대협이 우리를 이끌어 주세요.”
해소월의 말이 결정적이었다.
“알겠습니다. 미력하나마 내가 앞장서겠으니 많이들 도와주시오.”
“명만 내려 주세요. 지옥의 불길에라도 뛰어들 테니까.”
“그럴 필요까지는 없고, 일단 빨리 움직입시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그리 많지 않으니까.”
초연운의 말에 모두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모두가 지치고 부상을 입었지만 누구 한 명 힘들단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그들 역시 상황의 심각함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초연운이 이제까지 도와준 하오문의 문도들에게 포권을 취했다.
“그럼 부디 몸조심하십시오. 저희들이 빠져나간 것을 알면 마교에서 분명 조력자를 색출하려 할 겁니다.”
“하하!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들이 아무리 집요해도 저희만은 못하니까요. 저희 걱정은 말고 어서 악양을 빠져나가십시오. 이렇게 시간을 허비하다가 겨우 확보한 퇴로마저 막힐 수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초연운이 하오문도들을 뒤로 하고 결사대와 함께 움직였다. 그의 지휘에 결사대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빠져나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하오문의 책임자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취운룡, 역시 난세의 별이 분명하구나.”
잔인한 말이지만 영웅은 평화 시에 탄생하지 않는다.
오직 세상이 어지럽고 피에 잠길 때만 그 본모습을 드러낸다. 난세에만 존재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불완전한 존재, 하오문의 책임자는 초연운도 그런 이들 중의 한 명이라고 생각했다.
“자, 우리도 움직이자. 모든 흔적을 완전히 지우고 이곳을 빠져나간다.”
“예!”
하오문도들이 힘찬 대답과 함께 움직이기 시작했다.
***
담호는 기절하다시피 잠든 녹수빙의 얼굴을 무심히 바라봤다.
녹수빙을 통해 미지의 존재와 대화를 나눈 것이 하루 전의 일이었다. 대화가 끝나자마자 녹수빙은 그대로 기절을 하다시피 잠이 들었고, 다음 날 일어났을 때는 간밤에 있었던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다른 기억은 멀쩡한데 오직 간밤의 기억만 가위로 도려낸 것처럼 깨끗이 삭제되었다. 여타 인간의 상식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녹수빙을 전달자로 사용한 이는 바로 그녀의 사부였다.
‘무명자.’
스스로를 이름이 없는 자라 밝힌 노인.
담호는 무명자가 어쩌면 천사교의 교주와 동일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살아 있는 사람을 수천 리 먼 곳에서 전달자로 이용할 수 있는 사술(邪術)을 가진 자가 그 외에는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명자는 살아 있는 사람을 마치 인형처럼 이용하고 있었다. 그에게 살아 있는 사람의 가치란 이용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담호도 무자비한 인간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듣고 있었지만, 단 한 번도 언제든 인간을 이용하고 버릴 수 있는 장난감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단순히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의 유희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담호는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고 느꼈다.
담호의 눈빛이 더욱 깊이 침잠되어 갈 때였다.
“형, 무슨 생각을 그리 하세요?”
낯익은 음성이 그의 상념을 깼다. 고개를 드니 방진보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것도 아니다.”
“헤헤!”
방진보가 특유의 웃음을 흘렸다.
담호와 함께한 지 벌써 수 년째였다. 아마 천하에서 방진보만큼 담호를 경험하고 아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담호의 눈빛이 저렇게 깊이 가라앉았다는 것은 그만큼 생각이 많다는 증거였다. 비록 무슨 생각을 하는지 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방진보는 담호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세상 모두가 피에 미친 살인마라고 부르는 사람이었지만, 그에겐 그 무엇보다 든든한 방벽 같은 사람이 담호였다.
“형은…… 아, 아니에요.”
방진보가 무언가를 물어보려다가 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담호가 입을 열었다.
“말해!”
“그냥 궁금해서요.”
“…….”
“만일 이 혈란이 종식되면 형은 어떻게 사실 거예요?”
방진보의 얼굴엔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빛이 떠올라 있었다.
수 년을 함께했지만 담호는 단 한 번도 자신이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말해 준 적이 없었다. 그래서 궁금했다. 이 철혈의 남자가 강호 은퇴 뒤 꿈꾸는 삶은 무엇인지.
담호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시간이 지난 후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대답이 아닌 물음이었다.
“너는 어떻게 살고 싶으냐?”
“저는요…… 그냥 객잔이나 할까 해요. 너무 크면 부담스럽고, 너무 작으면 심심할 것 같고. 그냥 적당한 크기에 너무 많은 사람이 오지 않는. 그런데 너무 안 오면 망할 것 같으니까 그저 적당한 길목에서 적당히 팔면서…….”
방진보의 입가엔 어느새 은은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화산대숙수라는 별호로 불릴 만큼 강대한 무공과 명성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는 소박한 꿈을 꾸고 있었다.
자신의 무공으로 세상을 어찌해 보겠다는 생각도 없었고, 단지 어떻게 하면 사람들에게 몸에 좋은 음식을 값싸게 먹일 수 있을지만 생각했다. 그리고 기회가 된다면 더욱 음식에 정진해 자신의 깨달음을 책으로 정리할 수 있으면 했다.
“네 실력이면 큰 객잔을 해서 중원에서 손에 꼽히는 유명 인사나 거부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아깝지 않느냐?”
“전혀요.”
방진보가 단숨에 고개를 저었다.
담호의 말처럼 지금 그의 실력이면 얼마든지 대접을 받을 수도 있었고, 엄청난 부를 쌓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삶은 방진보가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 혼자만이 아닌 최대한 많은 이들에게 몸에 좋은 음식을 대접하고, 능력이 된다면 많은 후학들을 키우고 싶었다. 물론 먼 훗날의 일이지만 말이다.
방진보의 확고한 대답에 담호의 눈빛이 더욱 깊이 가라앉았다.
눈앞에 있는 이 어린 소년은 항상 그랬다.
아비를 잃고 세상에 혼자 남겨졌을 때도 세상에 대한 따스한 시선을 잃지 않았었다. 그래서 빛이 난다고 생각했었다.
숱한 고난의 세월을 견뎌 오면서도 그의 신념의 빛은 전혀 쇠락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눈이 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그 빛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강해지고 있었다.
담호는 평생을 경주해도 절대 가질 수 없는 영역에 존재하는 밝음이었다. 그래서 꺼지지 않게 지켜 주고 싶은 것인지 몰랐다. 세상에 이런 존재 하나쯤은 있어야 한다는 것이 담호의 생각이었다.
방진보가 초롱초롱하게 빛나는 눈으로 담호를 바라봤다.
“형은요? 형은 어떻게 살고 싶으세요?”
“글쎄!”
“그러지 말고 말해 주세요.”
오늘따라 방진보가 담호를 졸랐다.
어떻게든 담호의 대답을 듣고 말겠다는 의지가 엿보이고 있었다.
담호가 문득 자신의 주먹을 바라봤다.
굳은살이 마치 정(釘)처럼 툭 불거져 있었다. 꽉 쥐면 뭉툭한 창을 연상시키는 그의 주먹은 그 자체로 이미 완성된 흉기나 다름없었다.
이 두 주먹에 수많은 이들의 피를 묻혔다. 수백, 어쩌면 천 이상이 넘어갈지도 몰랐다.
그의 인생은, 그의 영혼은 이미 타인의 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런 주제에 안온한 삶을 갈구하는 것도 스스로를 기만하는 일이었다.
방진보와의 대화를 통해 담호는 그런 자신의 마음을 확실히 깨달았다.
자신은 혈란이 끝났다고 어딘가에 안주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가 돌아갈 곳은 화산파도, 인적이 드문 심산유곡도 아니었다.
“어디선가…… 싸울 곳을 찾아 떠돌겠지.”
“형?”
“이제 와서 내가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으냐?”
“그건…….”
방진보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담호는 더 이상 방진보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잠든 녹수빙을 향해 있었다. 아니, 녹수빙을 통해 자신을 엿보았던 그 누군가를 보고 있었다.
담호는 직감하고 있었다.
자신이 걸어가는 길의 끝에 그가 서 있음을.
그 이후로도 과연 길이 이어져 있을지, 혹은 더 이상 나갈 수 없게 끊어질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힘이 남아 있는 한 자신은 그곳까지 걸어갈 테니까.
그가 무명자건, 혹은 천사교의 교주이건, 또는 다른 존재라도 상관없었다.
그가 존재함으로서 아직 자신이 살아야 할 이유가 있는 셈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