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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1화 2장. 발발(勃發) 천하대전(天下大戰)(3)
“휴!”
남궁선휘는 곤히 잠든 동생을 보며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많이 힘들 텐데도 그의 어린 동생은 생각보다 더 잘 버티고 있었다. 스스로의 힘으로 남궁세가의 비전 심공을 익히고, 깨닫는 것은 오히려 자신보다 나은 것 같았다.
막연히 자신이 지켜 줘야만 할 힘없는 존재라고 생각했었는데, 동생이 예상외로 뛰어난 재능을 보이자 오히려 힘이 빠진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내 마음을 추슬렀다.
동생이 뛰어난 무공을 익히면 남궁세가를 다시 재건하는 것도 훨씬 수월해질 것이다. 남궁선휘는 그렇게 생각하며 동생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우리 함께 힘내자.”
“응!”
갑자기 남궁영휘가 눈을 뜨며 대답했다.
“어? 자는 것 아니었어?”
“깼어.”
“미안해! 괜히 나 때문에.”
“아니야. 나는 형 목소리 듣는 게 더 좋은걸.”
남궁영휘가 누운 채 고개를 저었다. 남궁선휘가 그런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을 때였다. 갑자기 남궁영휘가 눈을 크게 떴다. 남궁선휘의 등 뒤로 검은 그림자가 보였기 때문이다.
“응? 왜 그래?”
남궁선휘가 경직된 남궁영휘의 모습에 놀라 뒤를 돌아봤다. 그러자 검은 그림자를 길게 드리우고 있는 사내의 모습이 보였다.
“웬 놈이냐?”
남궁선휘가 경호성을 내뱉으며 검을 뽑아 들었다.
그의 반응은 눈부시게 빨랐다. 그에 사내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좋은 자세다. 창궁무애검법(蒼穹無涯劍法)을 제대로 익혔구나.”
“그걸 어떻게?”
“허나 파지법이 조금 잘못되었구나.”
마치 스승이 제자에게 가르침을 주듯 사내는 자애로운 표정으로 말했다.
“다, 당신은 누굽니까?”
“그렇게 경계할 필요 없다. 난 너희와 남이 아니니까.”
“무슨?”
사내가 남궁선휘를 향해 한 걸음 다가왔다. 그러자 남궁선휘가 남궁영휘를 등에 숨긴 채 한 걸음 물러났다. 그에 사내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갑자기 나타나 남이 아니라고 하니 의심할 수밖에 없겠지. 허나 내 말은 사실이다.”
사내가 남궁선휘를 향해 손을 뻗었다.
분명히 가볍게 뻗어오는 것 같은데 그의 손은 순식간에 남궁선휘의 맥문을 제압했다. 남궁선휘는 급히 사내의 손을 떨쳐 내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그 순간 맥문을 통해 사내의 기운이 그의 몸 안으로 유입됐다. 큰 소리를 지르려던 남궁선휘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이건?”
“그래! 창궁대연신공(蒼穹大衍神功)이다. 남궁세가의 직계 장로들만이 익힐 수 있는 비전심공이지. 이젠 내 말을 믿겠느냐? 내가 남궁세가의 무인이라는 것을.”
남궁선휘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맥문을 통해 쏟아져 들어오는 웅혼한 기운은 분명 창궁대연신공으로 쌓은 내기였다. 그의 아비도 창궁대연신공을 익혔고, 그에게 체험하게 해 줬기에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사내의 말처럼 창궁대연신공은 오직 남궁세가의 직계 장로들만이 익힐 수 있는 비전심공이었다. 제아무리 훌륭한 재능을 가졌더라도 방계는 익힐 수 없는 공부인 것이다.
“정말 본가의 무공을 익히셨군요. 하지만 저는 한 번도 당신을 뵌 적이 없습니다.”
“그럴 게다. 내가 남궁세가를 떠난 것이 벌써 사십 년 가까이 되어 가니까.”
“사십 년?”
남궁 형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들이 가늠하기에는 너무나 오랜 세월이었기 때문이다. 그들 형제가 태어나기도 훨씬 전에 남궁세가를 떠났다고 하니 사내의 나이조차 쉽게 짐작이 가지 않았다.
사내가 혼란스러워하는 두 사람을 보며 말을 이었다.
“내 이름은 남궁인후라고 한다. 혹시 알고 있느냐?”
“호, 혹시 결사대에 참여하셨다는 묵검협(墨劍俠) 장로님이신가요?”
대답을 한 이는 바로 남궁선휘의 등 뒤에 숨어 있던 남궁영휘였다. 그가 어느새 고개를 내밀고 사내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사내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역시 기억하고 있구나. 그래, 내가 묵검협이라 불렸던 남궁인후다.”
“아!”
“말도 안 돼!”
사내, 남궁인후의 말에 남궁 형제가 다리에 힘이 풀려 그만 제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남궁인후는 남궁세가의 자랑이었다.
당시 남궁인후는 남궁세가 내에서도 손에 꼽히는 검객이었고, 하늘을 찌르는 의기의 소유자였다. 그리고 수많은 남궁세가 무인들의 우상이었다.
그는 스스로의 의지로 결사대가 되어 마교의 본단에 쳐들어갔고, 장렬히 산화했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렇게 남궁인후는 전설이 되었고, 남궁세가 무인들의 귀감이 되었다. 남궁세가가 멸문하기 전까지도 남궁인후의 이름은 가문의 많은 이들에게 회자되었었다.
남궁 형제도 귀에 못이 박이도록 남궁인후의 이야기를 들었었다. 그렇기에 그들의 놀람은 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남궁인후 장로님은 여든이 넘는 고령이신데 당신은?”
“그래! 쉽게 믿어지지 않겠지. 십여 년 전 고비를 넘기고 가문의 무공을 대성하고 나니 갑자기 젊어지더구나.”
“바, 반로환동?”
“그렇다. 난 가문의 무공을 완성해 다시 젊음을 되찾았다.”
사내, 남궁인후의 오연한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거짓을 말하는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남궁 형제는 진실이라고 생각했다.
굳이 남궁인후가 거짓을 자신들에게 말할 이유가 없을뿐더러, 그에게서 느껴지는 특유의 분위기와 기질이 남궁세가의 사람이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어, 어떻게?”
“사연을 말하자면 아주 길단다. 중요한 것은 이제라도 내가 너희들을 찾아왔다는 것이고, 너희들을 통해 남궁세가를 다시 재건하려 한다는 것이다.”
“아아!”
“그동안 고생 많았다. 허나 이제 방황할 필요 없다. 이제부터 내가 너희들을 돌봐 줄 테니까.”
남궁인후의 미소에 얼어붙어 있던 남궁선휘의 표정이 녹아내렸다. 그의 두 눈에서는 어느새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자, 장로님.”
“조부라고 부르거라. 따지고 보면 너희들의 아비도 내겐 조카나 다름없으니까.”
“조부님!”
“그래!”
남궁선휘는 마치 홀린 것처럼 남궁인후의 말을 따랐다.
남궁세가가 멸문한 이후 동생을 지키기 위해 노심초사했던 남궁선휘였다. 다행히 중간에 담호라는 무인을 만나 의지하게 되었지만, 그가 언제까지나 자신들을 지켜 줄 수 있다는 보장이 없었다.
아직은 여물지 못한 여린 어깨에 짊어진 거대한 짐은 감당하기 힘들 만큼 무거웠다. 매일같이 죽어라 무공을 연마하고, 심신을 단련했지만 그의 어깨를 짓누르는 중압감은 커져만 갔다.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다는 생각이 절실하던 때에 남궁인후가 나타났고, 남궁선휘는 속절없이 무너졌다.
“나와 함께 가자. 너희들은 새롭게 일어서는 남궁세가의 중시조가 될 것이다. 내가 그렇게 만들 것이다. 너희들은 그저 나만 믿고 따라오면 된다. 이 남궁인후가 너희들의 후원자가 될 것이다. 혼돈의 하늘 아래 오직 남궁세가만이 오롯하게 빛날 것이다.”
“조부님은 어디에 있었나요?”
순간 남궁영휘의 목소리가 남궁인후의 말을 끊었다.
“영휘야. 그게 무슨 말이야? 버릇없게…….”
놀란 남궁선휘가 남궁영휘를 바라봤다. 하지만 남궁영휘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조부님은 정말 남궁세가의 무인이 맞나요?”
“그게 무슨?”
“남궁세가가 마교에 무너질 때 조부님은 어디에 계셨나요? 정말 남궁인후 조부님이라면 본가가 무너질 때 도와주셨어야 하지 않나요?”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단다.”
“그 사정이란 게 무엇인가요? 그 사정이 본가의 흥망보다 더 중요한 건가요?”
남궁영휘의 눈은 그 어느 때보다 밝게 빛나고 있었다.
남궁인후는 그의 눈동자 안에서 굳은 심지와 총기를 읽었다. 형인 남궁선휘보다 훨씬 밝은 빛과 그에 어울리는 재능을.
‘이 녀석이다. 이 녀석이야말로 남궁세가를 일으키기에 최적의 인재다. 아직 하늘은 남궁세가를 버리지 않았다.’
남궁인후는 전율했다. 그리고 이런 인재를 남겨 둔 하늘에 감사했다. 아주 오래전 버린 하늘이지만 말이다.
“말씀해 주세요, 조부님. 그동안 뭐하고 계셨는지. 어디에 있었기에 본가의 위기에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는지. 그리고 왜 이제야 찾아오셨는지.”
“이제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무슨 때입니까?”
“나를 따라가면 자연 알게 될 것이다.”
“조부님!”
“이곳은 중요한 이야기를 나누기에 그리 적합하지 않다. 그러니까 조용히 나를 따라 오거라. 결코 너희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 테니까.”
“저는 조부님을 믿을 수 없어요.”
남궁영휘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남궁선휘가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조부님한테 왜 그래? 영휘야.”
“형은 이상하지 않아?”
“뭐가?”
“갑자기 나타나 조부라고 밝히면서 무작정 따르라고 말하는 사람이 이상하지 않단 말이야?”
“영휘야!”
“그리고 이렇게 그를 따라가는 것은 그분과 진보 형에 대한 예의가 아냐. 그들이 이제까지 우리를 어떻게 대해 줬는데 이대로 말도 없이 떠난단 말이야?”
“그건…….”
남궁선휘가 차마 대답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 모습을 본 남궁인후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휴! 지금은 나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나의 결정을, 나의 마음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게 무슨…….”
순간 남궁선휘와 남궁영휘의 몸이 딱 굳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늪에 빠진 것처럼 엄청난 압력이 그들의 전신을 칭칭 옭아매고 있었다.
“으윽!”
두 사람이 몸부림을 쳤지만 온몸을 짓누르는 압력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남궁인후가 몸을 돌렸다. 그러자 두 사람의 몸이 허공으로 둥실 떠올라 남궁인후를 따라 움직였다. 허공섭물로 두 사람의 몸을 옭아맨 것이다.
남궁인후의 손짓에 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
순간 남궁인후의 미간에 깊은 골이 패였다.
문 앞에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검은 그림자를 거슬러 올라가니 사위에 내려앉은 어둠과 쉽게 구별이 되지 않는 검은 남자가 서 있었다.
그는 칠흑 같은 피풍의로 전신을 가린 채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가 언제부터 서 있었는지 몰랐다.
오래전일 수도 있었고, 방금 전일 수도 있었다.
중요한 것은 그가 겨우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 있었음에도 남궁인후가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것이다.
쿠쿵!
“윽!”
“허억!”
허공섭물로 묶어 두고 있던 남궁 형제의 몸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남궁인후가 내공을 회수한 것이다.
“권마!”
이미 남자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는 듯이 남궁인후가 입을 열었다.
그의 앞에 서 있는 남자는 바로 권마 담호였다.
“…….”
“이렇게 될까 봐 기막(氣膜)을 쳐 놨는데 소용없었나 보군.”
남궁 형제와 대화를 하면서 그는 세 겹의 기막을 중첩해 펼쳤다. 그 어떤 소리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말이다. 그런데도 상대는 세 겹의 기막을 뚫고 자신의 존재를 감지했다.
“생각 이상이군. 권마.”
그렇지 않아도 날카롭던 남궁인후의 눈빛이 칼날처럼 예리하게 빛났다. 그러자 일대의 기온이 급속히 떨어졌다.
남궁 형제가 몸을 떨었다.
“괜찮아?”
등 뒤에서 누군가 그들의 손을 잡아끌었다.
뒤돌아보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진보 형?”
“이리 와!”
방진보가 남궁 형제들을 데리고 서둘러 방을 빠져나갔다. 그가 향한 곳엔 어느새 녹수빙이 서 있었다.
녹수빙은 마치 석상처럼 우두커니 서서 남궁인후를 바라보고 있었다. 남궁인후도 그녀의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
“너는?”
남궁인후가 얼굴을 찌푸렸다.
그는 녹수빙과 담호를 번갈아 바라봤다. 마치 지금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처럼. 하지만 이내 해답을 찾아냈다.
‘교주가 전달자로 사용했나 보군.’
그는 무의식중에 살짝 고개를 내저었고, 담호는 그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았다.
“천사!”
“뭐?”
예상치 못한 담호의 말에 그의 목소리가 절로 흔들렸다.
그의 흔들림을 감지한 담호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너 역시 변절자였군.”
“무슨 말이냐? 권마.”
“시치미 떼도 소용없어. 나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으니까. 결사대, 천사교.”
“…….”
“잘도 기어 나오는군. 추악하게 늙은 괴물들이.”
“우리를…….”
화하학!
순간 남궁인후의 입에서 폭풍 같은 외침이 터져 나왔다.
그의 눈에 분노가 이글거렸다.
“우리를 모욕하지 마라. 꿈도 이상도 없이 오직 폭력만 휘두를 줄 아는 괴물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