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4
434화 3장. 누가 더 지옥 밑바닥에 어울리는가?(3)
만월을 꿰뚫기라도 할 듯이 뾰족한 야산 정상은 마치 칼날처럼 하늘을 향해 서 있었다.
보통 사람은 감히 오를 엄두를 내지 못할 만큼 험준한 산 정상에 홀연히 나타난 이가 있었다. 마치 달에서 내려온 선자(仙子)처럼 표표히 옷자락을 흩날리며 서서히 하강하는 이는 바로 서왕모 용화설이었다.
그녀의 어깨에는 기절한 남궁인후가 들려 있었다. 녹수빙을 산 아래 홀로 두고 그와 함께 산 정상으로 허공답보를 펼쳐 올라온 것이다.
산 정상에 내려앉은 용화설은 남궁인후를 산 정상 위 조그만 평지에 거칠게 내던졌다. 그 충격으로 남궁인후가 잃었던 정신을 되찾았다.
겨우 눈을 뜬 그가 용화설을 알아봤다.
“서……왕모?”
“오랜만이군요. 남궁 대협.”
“당신이 어떻게? 아니, 그보다 권마는…….”
“내가 그에게서 당신을 인계받았어요.”
대답을 하는 용화설의 음성은 얼음보다 차가웠다. 그제야 남궁인후는 자신의 상황을 인지했다.
그의 몸은 그야말로 처절하게 망가져 있었다. 내장은 거의 짓이겨져 있었고, 주요 대맥은 끊기거나 상해 있었다. 지금 숨을 쉬고 있는 것도 워낙 심후한 내공 덕분이지, 실제로는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남궁인후는 용화설이 자신에게 모종의 조치를 취했음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그것이 결코 자신을 걱정해서가 아니라는 것도 말이다.
그렇지 않아도 창백한 그의 안색이 더욱 새하얗게 질려 갔다.
“설마 당신?”
“그래요. 나는 당신에게 답을 얻고 싶어요.”
“소용없소. 나에게선 그 어떤 답도 구할 수 없을 것이오. 잘 아시지 않소?”
“아니, 몰라요. 그리고 나는 반드시 당신에게 답을 구할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해요.”
“서왕모.”
남궁인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용화설의 눈빛은 칼날보다 날카로웠고, 그녀의 음성은 북해의 얼음보다 차가웠다.
누가 뭐래도 그녀는 사신제의 일원이었다. 천하에서 가장 강했던 네 사람 중 한 사람. 여인의 몸으로 궁극의 경지에 오른 절대 무인.
만일 남궁인후의 몸 상태가 정상이었다면 그래도 어느 정도 버텨 볼 만했지만, 최악의 상태인 지금은 절대 그녀를 감당할 수 없었다.
“참으로 절묘한 시점에 나타나셨구려.”
“기다리고 있었으니까요.”
“허!”
“‘그’는 어디에 있죠?”
“난 도대체 서왕모께서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구려.”
“우리 그러지 마요.”
“무슨 말씀이오?”
“남궁 대협이 나를 잘 알고 있듯, 나 역시 남궁 대협을 잘 알아요. 피차 심력을 소모하지 말죠.”
“…….”
“‘그’의 행방만 알려 주면 돼요. 그럼 남궁 대협을 놔두고 조용히 물러나죠.”
“헛된 노력하지 마시구려. 나는 아무것도 모르니까.”
“사람은 참 신기해요. 죽을 때까지 성향이 바뀌지 않으니. 난 남궁 대협 또한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럼 잘 알겠구려. 내 입을 통해서 얻어 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평상시라면 그렇겠죠.”
용화설의 눈이 남궁인후의 전신을 훑었다. 순간 남궁인후는 전신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설마?”
“난 그동안 많이 참았어요. 그를 생각해서, 그리고 그의 뜻을 존중해서. 참고, 또 참고, 오늘날까지 인내했어요. 나는 나의 인내에 한계가 없는 줄 알았어요. 하지만 깨달았어요. 결국 모든 것에는 끝이 있길 마련이고, 나의 인내도 한계에 봉착했다는 사실을.”
“하지만 약속했잖소?”
“그럴 수밖에 없는 분위기를 당신들이 만들었잖아요. 천하대의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허나…….”
“지난 수십 년 동안 당신들의 행위를 지켜봤어요. 허나 아무리 좋게 봐줘도 당신들의 행위가 진정으로 천하를 위한다고는 생각되지 않아요.”
쩌저적!
그녀의 서릿발 같은 음성에 주위의 모든 것이 얼어붙는 듯했다. 실제로 남궁인후는 극심한 한기를 느끼고 있었다. 그것이 그녀의 차가운 분노 때문인지, 아니면 죽음을 앞두고 체온이 식어 가기 때문인지 구별할 수 없었지만 말이다.
용화설이 남궁인후의 맥문을 잡았다. 그러자 그의 혈관을 타고 지옥의 한기가 쏟아져 들어왔다.
남궁인후가 눈을 부릅떴다. 생전 처음 경험하는 지독한 고통에 입이 절로 떡 벌어졌다.
용화설이 그런 남궁인후의 두 눈을 들여다보며 조용히 말을 이었다.
“내가 권마를 보며 느낀 것은 적재적소에 사용하는 폭력은 그 어떤 방법보다 효율적이라는 거예요.”
“끄으!”
결국 남궁인후의 입술을 비집고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그의 눈에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었고, 용화설은 그의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무심히 말했다.
“만일 당신이 대답을 하지 않겠다면 권마가 보호하고 있는 남궁세가의 마지막 생존자들을 무참히 죽일 거예요.”
“그, 그건…….”
순간 남궁인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리고 용화설은 그의 흔들림을 놓치지 않았다.
“이대로 남궁세가가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은 당신도 원하지 않을 거예요. 아닌가요?”
“끄으으!”
달빛 아래 남궁인후의 비명 소리가 점점 커져만 갔다.
***
“도대체?”
용화설과 남궁인후가 사라진 지 오래였지만 남궁영휘는 아직도 혼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것은 남궁선휘도 마찬가지였다.
풍파를 많이 겪어 제법 의젓한 티가 나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그들은 아직 누군가의 보호가 필요한 어린아이들이었다. 그들이 감당하기에는 간밤에 일어났던 일들이 너무 엄청났다.
가문의 장로라고 밝힌 남궁인후의 등장과 담호와의 싸움. 그리고 살아 있는 전설인 용화설의 극적인 등장까지. 조그만 아이의 심장과 두뇌가 감당하기엔 너무 엄청난 일들이 하룻밤 사이에 일어났다. 그래서 아직도 혼란스러웠고, 또 두려웠다.
한쪽에 서 있는 담호를 바라보는 남궁선휘의 눈에는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두려움이란 감정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담호가 무섭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이미 그가 싸우는 모습을 봤기에 얼마나 무서운지 충분히 알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남궁인후와의 싸움을 본 순간 자신이 담호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겨우 빙산의 일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담호는 막연히 그가 생각하던 것 이상으로 무서운 사람이었다. 천하의 사신제도 감히 그를 함부로 대하지 못하고 부탁을 할 정도로 말이다.
그렇게 흉험한 싸움을 하고도 담호는 전혀 흐트러지지 않은 모습이었다. 여전히 표정의 변화 없이 석상처럼 서 있었다. 그 모습이 오히려 더 무섭게 느껴졌다. 그래서 똑바로 그를 바라볼 수 없었다.
그때 그의 손을 잡는 따스한 손길이 있었다. 남궁영휘였다.
조금은 더 어른스러워졌지만, 아직은 자신이 지켜 줘야 할 동생이었다.
“영휘야. 걱정하지 마. 형이 지켜 줄 테니까.”
“응!”
남궁영휘가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지금은 영휘를 지키는 것만 집중하자. 그 외의 모든 것은 나에게 사치다.’
남궁인후가 담호에게 당한 것도, 용화설에게 잡혀간 것도 잊기로 했다.
어차피 오늘 이전까지는 남궁인후가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남보다 못한 사이였는데, 이제 와서 그에게 없던 정이 생길 리 없었다.
무엇보다 그의 감이 남궁인후와 어울려 좋을 것이 하나 없다고 말해 주고 있었다.
남궁세가가 멸문할 때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그였다. 그런 그가 갑자기 나타나 남궁세가의 재건을 도울 테니 자신을 무작정 따르라고 말하는 것도 의도부터가 의심스러웠다. 실제로 그는 자신과 동생을 강제로 납치하려고 했었다.
남궁선휘는 아무도 믿을 수 없었다. 그가 이제까지 만나 본 대부분의 사람들은 선악(善惡)이 모호했다. 어떤 이들은 웃는 얼굴로 악의(惡意)를 감추고 있었고, 악인이라 생각했던 이들 중에는 의외의 선인도 있었다.
아직 어린 남궁선휘는 겉으로 보이는 얼굴 이면에 숨겨진 그들의 진실 된 모습을 꿰뚫어 볼 능력이 없었다. 아직은 말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아저씨에게 의지하는 것이 훨씬 나아. 적어도 아저씨는 겉과 안이 똑같으니까.’
남궁선휘가 입술을 힘껏 깨물 때였다. 아직 형체를 유지하고 있는 객잔 본체에서 방진보가 헐레벌떡 뛰어오며 외쳤다.
“다 계산했어요. 이제 가도 돼요.”
“정말 다 계산했어요?”
방진보는 담호에게 말한 거지만, 대답은 남궁영휘가 했다. 하지만 방진보는 상관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돈이 많이 들었을 텐데.”
“그 정도는 있어. 걱정하지 마.”
방진보가 웃으며 남궁영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의 시선이 완전히 무너진 별채를 향했다.
간밤의 사건으로 별채가 무너지면서 객잔 주인은 막대한 손해를 입었다. 무너진 별채를 재건하고, 손님이 다시 찾아올 때까지 버티려면 많은 돈이 필요했는데, 그 정도의 돈을 객잔 주인이 가지고 있을 리 만무했다.
객잔 주인은 완전히 망한 거나 다름없었다. 아닌 밤중에 날벼락을 맞은 꼴이었다. 방진보는 그런 주인에게 객잔을 인수하겠다고 제안했다. 그리고 실제로 제법 많은 돈을 주고 인수했다.
“형, 괜한 데 돈을 쓴 거 아니에요?”
“우리 때문에 엄한 사람이 손해 보는 일은 없어야지.”
“그래도…….”
“괜찮아. 정, 뭐하면 나중에 무림 은퇴하고 이곳에서 객잔이라도 하면 되니까.”
방진보가 반쯤 무너진 객잔을 바라봤다.
이제 저 객잔은 방진보의 것이었다. 당장이야 이곳에 되돌아올 수 없겠지만, 언젠가는 돌아와 다시 객잔을 열면 된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인수한 것이었다.
방진보가 담호를 바라봤다.
“형, 조금 기다릴 수 있죠? 객잔 주인이 주먹밥을 조금 싸 주겠다고 해서요.”
“…….”
“헤헤! 전 괜찮아요. 비록 그동안 틈틈이 번 돈을 모두 썼지만, 그래도 제 객잔이 생겼으니까요.”
방진보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객잔은 전 주인이 계속 운영하기로 했다. 그것이 그들의 계약이었다.
비록 즉흥적으로 진행한 일이었지만, 방진보는 후회하지 않았다. 그리고 담호 역시 그런 방진보의 결정을 지지했다.
방진보의 미래는 방진보 스스로 만들어 가야 했다. 이렇게 조금씩 독립해 나가다 보면 언젠가는 그만의 길을 걸어갈 수 있을 것이다.
담호는 더 이상 방진보를 걱정하지 않았다. 그는 한 사람의 무인으로, 그리고 어른으로 착실히 성장하고 있었다. 더 이상 자신이 개입하는 것은 오히려 그의 성장에 방해가 될 것이다.
담호의 시선이 남궁 형제를 향했다.
남궁 형제가 쭈뼛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아직은 담호를 두려워하는 표정이었다. 그들에게 방진보와 같은 모습을 기대하는 것은 아직 무리였다.
담호가 남궁 형제에게 말했다.
“둘!”
“예?”
“예!”
남궁 형제가 동시에 대답했다.
“오늘부터 진보에게 무공을 배워라.”
“그게 무슨?”
“네?”
남궁 형제가 동시에 고개를 갸웃했다.
“진보와 대련을 하다 보면 배우는 게 있을 거다.”
“아!”
그제야 남궁 형제가 알아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반면 방진보는 곤혹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형? 하지만 저는…….”
“남궁세가의 무공엔 깊이가 있다.”
“네?”
“저 아이들과 대련을 하다 보면 너도 얻는 게 있을 거다.”
흔히들 가르치면서 배운다고 한다.
남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자신이 가진 바를 찬찬히 되돌아볼 필요가 있었다.
대련도 마찬가지였다. 타인과 잘 대련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역량을 냉철하게 파악해야 했다. 지금 방진보에게 필요한 것 역시 스스로의 역량을 잘 파악하는 것이었다.
비록 남궁 형제의 역량이 형편없었지만, 그래도 그들과 싸우다 보면 방진보 스스로도 느끼는 것이 많을 것이다.
“알았어요. 그렇게 할게요.”
방진보의 대답은 힘찼다.
담호와 함께하다보면 간혹 이해 못 할 주문을 받을 때가 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난 후 돌이켜 보면 담호가 하는 말은 항상 옳았다. 비록 그 수단이나 과정은 과격하기 그지없었지만, 그래도 항상 최선의 결과를 도출해 냈다. 그래서 방진보는 담호를 믿었다.
방진보가 남궁 형제를 바라봤다.
“나는 내공은 사용하지 않을게. 너희들은 내공을 사용해도 좋아.”
“하지만…….”
“괜찮아! 그 정도는 상관없어.”
“알았어요.”
“시작한다. 덤벼!”
방진보가 그들을 향해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그러자 남궁 형제가 동시에 방진보를 향해 달려들었다.
“챠아앗!”
“하압!”
객잔 공터에 그들의 기합 소리가 울려 퍼졌다.
담호는 제자리에 서서 그들이 싸우는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아직은 어린 소년들의 대결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그들의 대련은 격렬했다.
그들의 대련은 객잔 주인이 주먹밥을 가지고 올 때까지 계속됐다. 그리고 앞으로 남은 여정 내내 계속될 것이다.
담호의 시선이 하늘로 향했다.
시대의 흐름처럼 구름이 빠르게 흘러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