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권마-437화 (437/500)

 437

437화 4장. 영웅은 난세에 탄생한다(3)

스르릉!

정천악이 애병 창천도(蒼天刀)를 꺼내들었다. 그러자 일대의 기온이 순식간에 내려갔다.

순간 모든 것이 멈췄다.

결사대와 십병의 싸움도, 바람도, 시간마저도 멈춘 것 같았다. 그렇게 정지된 세상 속에서 정천악의 차가운 음성이 울려 퍼졌다.

“모두 물러서.”

순간 결사대를 상대로 싸우던 마교의 무인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이 일제히 뒤로 물러섰다. 그 안에는 십병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은 정천악의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분노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 있었다.

그들은 체면 따윈 잊어버리고 다급히 정천악의 뒤로 물러났다. 그때 정천악의 창천도가 허공을 갈랐다.

소리도 형체도 없었다. 하지만 그들 앞의 공기가 갈라지고 있었다. 결사대의 무인들은 거의 본능적으로 무기를 들어 자신의 전면을 막았다.

그 순간 무형의 기운이 그들의 무기와 격돌했다.

쩌저저정!

“크헉!”

“악!”

청운의 검이 두 동강이 났다. 해소월의 검도 산산이 부서졌다. 그것은 다른 이들의 무기도 마찬가지였다.

결사대가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순식간에 스무 명이나 되는 무인들이 무력화된 것이다. 그야말로 가공할 일격이었다.

결사대 무인들의 얼굴에 암담한 빛이 떠올랐다. 정천악이 다시 한 번 창천도를 휘두르는 것을 보면서도 그들은 아무런 행동도 할 수 없었다.

이미 내장이 진탕되고, 공력이 흩어진 상태였다. 그들에겐 정천악의 다음 공격을 막을 힘이 남아 있질 않았다.

‘끝인가?’

‘아아!’

그들은 마지막을 예감하며 눈을 감았다.

해소월도, 청운도…….

오직 초연운만이 눈을 부릅뜬 채 정천악을 노려보고 있었다.

‘움직여라. 제발!’

그는 움직이지 않는 팔다리에 억지로 힘을 주었다.

죽을 때 죽더라도 이렇게 죽을 수는 없었다.

결사대의 무인들이야 칼날 위에 목숨을 건 인생들이었지만, 은소청은 달랐다. 그녀는 반드시 보호해야 할 존재였다. 그녀가 어떻게 된다면 죽어서도 방진보를 볼 면목이 없었다.

“이야아아!”

그는 마지막 힘 한 방울까지 짜내며 정천악에게 달려갔다. 하지만 그의 몸짓은 불에 뛰어드는 부나방처럼 허무해 보일 뿐이었다.

순간 정천악의 도가 다시 한 번 허공을 갈랐고 초연운이 눈을 부릅떴다.

‘죽는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보았다.

허리가 양단된 채 바닥에 널브러지는 처참한 모습을 떠올렸다.

쩌어엉!

그 순간 엄청난 압력이 그를 후려쳤다.

초연운은 무려 이십여 장이나 뒤로 날아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그런 그의 전신은 피로 물들어 있었고, 가슴엔 커다란 자상이 생겨나 있었다.

“크헉!”

그가 피를 토해 냈다.

눈이 떠지지 않았다. 억지로 뜬 눈에 세상이 온통 뿌옇게 부였다. 그래도 죽지는 않았다.

‘왜?’

고통보다 먼저 의문이 들었다.

방금 전 정천악의 일격은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몸이 멀쩡하다고 해도 쉽게 감당할 수 있다고 자신할 수 없는 수준의 공격이었다. 그런데 몸은 망가졌을지언정 아직 숨을 쉬고 있었다.

있을 수 없는 결과였다. 그래서 아직 살아 있는 것이 거짓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겨우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본 순간 초연운은 왜 자신이 살아 있는지 알게 되었다.

누군가…… 커다란 누군가 그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누구?’

거대한 방벽처럼 든든해 보이는 광활한 등을 보면서 초연운은 흐려지는 정신을 애써 붙잡았다.

그 순간 초연운의 앞을 가로막은 남자의 입에서 묵직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늦지 않았군.”

거대한 등만큼이나 묵직한 음성이 전장에 울려 퍼졌다.

정천악의 눈에 어린 살기가 짙어졌다.

그는 감히 자신의 일격을 막은 남자를 노려보았다. 그의 입에서 착 가라앉은 음성이 흘러나왔다.

“율……천.”

“오래만이군, 천악.”

“검율천, 네가 왜?”

정천악의 살기를 온몸으로 받아 내는 남자는 바로 검율천이었다. 그는 마치 철탑처럼 압도적인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서늘하면서도 묵직한 눈빛과 오롯한 존재감으로 일대를 압도했다.

그의 등장에 정천악의 살기가 더욱 증폭됐다.

결정적인 순간 검율천이 끼어들어 정천악의 공격을 상쇄시킨 것이다.

“네가 왜 여기에 나타났느냐?”

“그들은 아직 죽어서는 안 되니까.”

검율천의 시선이 바닥에 쓰러져 있는 결사대 무인들을 향했다. 그들은 너무나 처참한 모습으로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들은 본교의 적이다. 그런데도 방해를 하겠다는 것이냐? 율천, 정녕 본교와 척을 지려는 것이냐?”

정천악의 사자후가 일대를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크윽!”

“흑!”

그렇지 않아도 엄중한 상처를 입은 결사대의 무인들은 양손으로 귀를 막으며 괴로워했다.

그 순간 검율천이 발을 들어 힘껏 바닥을 굴렀다. 진각이었다.

쾅!

진각으로 발생한 강렬한 음향이 정천악의 사자후를 분쇄했다.

정천악의 표정이 돌덩이처럼 굳었다. 이 한 수로 검율천의 무공 수위를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강해졌구나. 기연이라도 얻은 것이냐?”

“그것도 기연이라면 기연이겠지.”

“너?”

정천악의 짙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검율천의 외모는 얼마 전에 보았을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느껴지는 분위기나 눈빛, 기도 등은 큰 차이가 있었다.

무인으로서 한 단계 더 성장한 것이 느껴졌다.

그렇지 않아도 이미 더 이상 밟을 곳이 없는 백척간두의 경지에 오른 검율천이었다. 그 정도의 경지에 오른 무인이 또다시 한 단계 성장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검율천의 눈빛이나 기도를 보면 성장한 것이 분명해 보였다.

“율천!”

서문하경을 비롯한 십병이 정천악 주위로 하나 둘 모여들었다. 검율천을 바라보는 그들의 눈에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복잡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

한때는 우상으로 여기기도 했고, 질투의 대상으로도 생각했었고, 그리고 종국에는 증오라는 감정으로 귀결된 자.

그가 바로 검율천이었다.

“결국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이냐? 율천.”

“강은 진즉에 건넜다. 하지만 아직 다리까지 끊어진 것은 아니다, 천악.”

“혀가 길어졌구나. 언제부터 천하의 검율천이 이렇게 궤변이나 늘어놓았느냐?”

“천악, 아직도 모르겠느냐? 지금 신교는 정상이 아니다.”

“거기까지. 더 이상 너의 헛소리를 들어 줄 수가 없구나. 도대체 언제까지 나와 동료들을 기만하려는 것이냐? 부끄럽지도 않나?”

정천악이 살기를 피워 올렸다. 그에 다른 십병들이 동조했다.

검율천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

몇 마디 말로 이들을 설득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꽉 막혀 있을 줄은 몰랐다.

정천악이 검율천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 어떤 말로도 우리를 홀릴 수 없을 것이다. 네가 신교를 뛰쳐나갔을 때부터 우리는 이미 남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배신자의 궤변을 들어 줄 만큼 시간이 남아돌지 않는다. 배신자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죽음뿐이다.”

십병이 그의 기세에 동조했다.

비록 임독오가 초연운에게 죽임을 당해 빠졌지만, 그들의 기세는 조금도 약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독기까지 더해져 더욱 살벌하게 증폭됐다.

“네가 아무리 기연을 얻었다고 할지라도 홀로 우리 모두를 상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정천악의 말은 사실이었다.

십병 개개인은 이미 절대고수라고 봐도 무방한 수준에 이르러 있었다. 그런 이들을 모두 상대하는 것은 검율천으로서도 부담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전혀 걱정을 하지 않았다.

“누가 혼자라고 했느냐?”

“뭐?”

그 순간 검율천의 등 뒤로 세 명의 무인이 떨어져 내렸다.

선자처럼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여자와 공작의 꽁지깃 모양을 한 검갑을 등에 짊어진 남자, 그리고 아직 애티가 가시지 않은 소년이었다.

정천악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유경, 무월, 명천.”

그들은 바로 음유경과 신무월, 명천이었다. 그들이 검율천을 따라 나타난 것이다.

“오랜만이에요.”

“배신자들이 한데 모였구나. 차라리 잘됐다. 한꺼번에 정리할 수 있을 테니.”

정천악은 무서운 눈으로 음유경을 노려봤다. 그에 음유경이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 사이에는 결코 좁힐 수 없는 간극이 존재했다. 겨우 말 몇 마디로 좁히기엔 벌어진 틈이 너무나 컸다.

검율천과 정천악. 그리고 그들을 따르는 무인들이 서로를 보고 마주 섰다. 그들 사이에 초연운과 결사대의 무인들이 끼어들 틈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제기랄!”

초연운이 그들을 보며 몸을 일으키고자 버둥거렸다. 하지만 너무 중상을 입은지라 몸이 마음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그 순간 음유경이 초연운을 돌아봤다.

“초 대협, 고생하셨어요. 지금부터는 우리가 맡을게요. 초 대협은 저들을 수습해 무림맹으로 귀환하세요.”

“그럴 수는 없소.”

“초 대협과 결사대는 충분히 제 역할을 하셨어요. 이제부터는 신교 내부의 일이에요.”

조곤조곤 말하는 음유경의 목소리엔 단호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그녀의 말을 듣는 순간 초연운이 수긍할 정도의 강력한 의지가.

“휴!”

초연운이 깊은 탄식을 토해 냈다. 음유경은 그것을 수긍의 의미로 받아들였다.

초연운의 곁으로 은소청과 살아남은 결사대의 무인들이 모여들었다. 세 명이 죽어서 이제 겨우 열일곱 명만 남았다. 그나마 조금의 위안이라면 해소월과 청운, 소청 등의 핵심 무인들은 그래도 살아남았다는 것이다.

“저들이 싸우는 틈에 우리는 이곳을 빠져나갑시다.”

“그렇습니다. 이 기회를 이용해야 합니다.”

피와 땀으로 범벅 된 무인들이 초연운의 손을 잡아끌었다. 하지만 초연운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는 이곳에서 저들의 싸움을 지켜볼 겁니다.”

“그게 무슨?”

“저들은 마교의 미래입니다. 누가 이기던 그들이 앞으로의 마교를 이끌어 갈 겁니다. 그들의 전력을, 그들의 무공을 눈에 담을 절호의 기회입니다.”

비록 중상을 입어 충혈되긴 했지만 초연운의 눈동자는 그 어느 때보다 밝게 빛나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검율천과 정천악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자신과 동년배의 무인들이었다.

그 어느 쪽이 이기든 승자와 같은 시대를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 말은 지금부터 수십 년 이상을 계속 부딪칠 수밖에 없는 운명이란 뜻이었다.

초연운은 당장이 아닌 수십 년 후의 미래까지 내다보고 있었다. 그런 초연운의 모습에 결사대의 무인들 역시 마음속 깊은 곳에서 무언가 울컥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결사대가 마교 본단에서 탈출하는 과정에서 보여 준 초연운의 지도력과 결단력은 그야말로 대단한 것이었다. 만일 초연운이 아니었다면 지금 이 정도의 인원도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갑자기 소천이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아미타불! 나도 이 자리에 남겠소. 그가 아니었으면 이미 죽었을 목숨. 끝까지 따라가리다.”

“저도 남겠어요.”

“휴! 나만 갈 수는 없지. 나도 남아서 저들의 싸움을 지켜보겠소.”

소천의 뒤를 따라 해소월, 청운까지 주저앉았다.

구무룡 중 셋이 초연운을 따르겠다고 하자 다른 결사대 무인들도 미련 없이 남았다.

그들이 떠나지 않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바로 초연운 때문이었다.

결사대의 마음속에서 그는 이미 영웅이었다.

난세가 만들어 낸 또 하나의 영웅.

해소월이 심유한 눈으로 초연운의 등을 바라봤다.

‘우리는 미래의 무림맹주를 보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녀는 자신의 예감이 언젠가 현실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때였다.

“놈들을 죽여랏!”

정천악의 외침이 전장에 울려 퍼졌다.

그의 외침을 신호로 그들이 격돌했다.

콰아앙!

전장에 굉음이 울려 퍼졌다.

검율천과 정천악이 격돌했고, 음유경은 남정옥을 상대했다.

명천이 손을 들자 그의 등 뒤로 수많은 무인들이 나타났다. 명천이 비밀리에 키운 무인들이었다. 그들이 십병의 수하들을 상대했다.

각자가 격에 맞는 상대와 싸웠다.

피가 튀고 살점이 갈라졌다.

독기와 악이 전장을 지배했고, 그 속에서 무인들은 인간이길 포기했다.

목불인견의 지옥도가 눈앞에 펼쳐졌다.

결사대의 무인들은 그 광경을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머리에 담았다.

지금 이곳은 강호의 미래를 이끌어 갈 자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싸우고 있는 전장이었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