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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9화 5장. 천하보다 자파의 안위가 우선이다(2)
초연운은 눈을 부릅떴다. 실핏줄이 온통 터져 붉게 충혈된 눈동자는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꾸욱!
얼마나 주먹을 꽉 쥐었는지 핏기가 사라지고 굽어진 손가락 사이로 선혈이 흘러나왔다.
“오라버니.”
곁에 있던 은소청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불렀지만 반응조차 할 수 없었다.
그는 절대 봐서는 안 될 무언가를 본 듯한 얼굴이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여유를 잃지 않던 얼굴엔 표정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 초연운의 이런 모습은 처음이었기에 은소청은 더욱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초연운뿐만이 아니었다. 아직 생존해 있는 결사대의 무인 전부가 초연운과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들이 지금 느끼는 감정은 극심한 무기력함과 절망이었다.
어떤 노력을 하더라도 절대 넘을 수 없는 벽에 부딪쳤을 때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이었다.
담호 이후 두 번 다시 느끼지 못할 거라 생각했던 그 감정을 초연운은 다시 한 번 느끼고 있었다.
지금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뭐라 표현해야 할까?
지옥도.
목불인견의 참상.
아니, 그 정도는 숱하게 봤다.
겨우 그 정도로 이들을 침묵하고, 절망하게 만드는 것은 불가능했다.
도산검림(刀山劍林) 속에서 살아가는 자들에게 이 정도의 풍경은 너무나 익숙한 것이었으니까.
한 남자가 더해졌을 뿐이다.
단지 그뿐인데 풍경이 달라졌다.
마치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한 이질적인 풍경과 기운이 그들을 침묵하게 만들었다.
빠지직!
그의 몸에서 명멸하던 백광(白光)이 거짓말처럼 사라져 갔지만, 그 잔상은 아직도 그들의 눈에 선명하게 남아 어른거렸다.
마치 평원에 홀로 우뚝 서 있는 거대한 산악처럼 그는 그렇게 서 있었다. 그리고 한 남자가 그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올려다보고 있었다.
“율……천!”
무릎을 꿇은 남자의 입에서 상처 입은 사자의 신음성처럼 거친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의 얼굴은 굴욕과 분노로 얼룩져 있었다.
마치 자신의 패배를 받아들이지 못하겠다는 듯이 입술을 꽉 깨물고 있는 모습이 비장하기까지 했다.
그는 바로 정천악이었다.
그의 모습은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오른쪽 팔은 어깨에서부터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고, 복부엔 커다란 구멍이 새까맣게 그을린 채 뻥 뚫려 있었다.
반 동강이 난 창천도로 겨우 상체가 무너지지 않게 버티고 있었지만, 그마저도 위태위태해 보였다. 하지만 그는 악착같이 버티며 눈앞에 서 있는 산악 같은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크윽! 율천!”
그를 내려다보는 커다란 남자는 바로 검율천이었다.
검율천을 올려다보는 정천악의 눈에 분노와 불신의 빛이 가득 어려 있었다. 그는 자신의 패배를 믿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네가 그런 무공을…….”
“기연이 있었다고 하지 않았더냐?”
“크큭! 기연이라니. 크하하하!”
갑자기 정천악이 앙천광소를 터트렸다.
분명 자신과 검율천의 무공은 호각이었다. 양측의 무력이 절묘하게 균형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아무런 피해도 없이 제압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런데 그런 불가능한 일이 일어났다. 정천악은 처참하게 망가져 거의 빈사상태에 이르렀지만, 검율천은 멀쩡해 보였다.
물론 그렇다고 아예 상처를 입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정천악에 비할 수 없이 미미한 것이 사실이었다.
아주 오랫동안 검율천을 경쟁자로 여겨 왔던 정천악이었기에 이렇게 완벽한 패배를 받아들이기 더 힘들었다.
주르륵!
문득 정천악의 뺨 위로 붉은 핏물이 흘러내렸다. 눈가가 찢어져 흐르는 핏물과 분루가 뒤섞여 피눈물이 되었다.
스스로를 대장부라고 생각하는 남자가 흘리는 피눈물이었다. 오랫동안 숙적 관계를 유지해 왔던 검율천도 절로 숙연해질 수밖에 없었다.
“천악. 미안하다.”
“크흐흐! 뭐가 미안하단 말이냐? 약한 자는 죽고, 강자는 사는 것이 강호의 법도인데. 나를 더 이상 모욕하지 마라, 율천.”
“…….”
“나는 무……인이다. 내 삶을 후회하지 않…….”
정천악의 목소리가 점점 잦아들더니 덜컥 고개를 숙였다.
그것이 십병의 수장인 정천악의 최후였다.
“천악!”
순간 서문하경의 처절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녀의 모습 역시 정천악과 다를 바가 없이 처참했다. 신무월과의 싸움에서 큰 상처를 입은 것이다. 신무월은 그녀를 쓰러트린 후 지수현을 상대하고 있었다.
서문하경은 원독이 가득 어린 시선으로 음유경과 검율천을 노려봤다.
“너희들이 천악을…….”
정천악은 그녀에게 십병의 수장, 그 이상의 존재였다.
그의 죽음은 서문하경의 심맥에도 큰 타격을 주었다. 가뜩이나 신무월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어 기식이 엄엄하던 서문하경은 그 충격으로 숨이 끊어졌다.
검율천이 눈을 감았다.
비록 서로 이상과 가는 길이 달라 갈라지긴 했지만, 그래도 한때는 같은 곳에 몸을 담고 같은 밥을 먹었던 친구들이었다. 그런 이들을 자신의 손으로 죽였다는 사실이 그를 참담하게 만들었다.
음유경이 검율천의 곁으로 다가왔다.
“율천.”
“난 괜찮아.”
다시 뜬 검율천의 눈에는 더 이상 후회나 회한의 빛은 존재하지 않았다.
검율천이 문득 자신의 주먹을 내려다보았다.
예전과 크게 달라진 것이 없는 주먹이었다.
하지만 달라졌다. 몸 안에 뇌전이 흐르는 것 같은 짜릿함과 아득한 고양감.
분명 이전에는 느낄 수 없는 감각과 기분이었다.
신교의 호교무공을 익힌 후 일어난 변화였다. 그 사실을 아는 자는 음유경과 신무월, 명천뿐이었다.
“챠앗!”
신무월이 마지막 일격을 날림으로써 싸움을 마무리하는 모습이 보였다. 명천의 수하들이 십병이 이끌고 온 수하들을 압도하는 모습도 보였다.
대승이었다. 하지만 누구 한 명 웃지 않았다.
그들이 쓰러트린 자는 한때 그들의 동료였고, 가족과도 같은 존재였었다. 그들을 이겼다고 해서 승리감에 도취되거나 웃는 것은 스스로가 용납할 수 없었다.
검율천이 문득 고개를 들어 어느 한 곳을 바라봤다. 초연운을 비롯한 결사대의 무인들이 있는 곳이었다.
‘가지 않았군.’
좋든 싫든 십병은 그들과 같은 뿌리에서 난 형제였다. 형제들끼리의 싸움을 외인에게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알아서 떠났으면 싶었는데, 의외로 그들은 아직까지 남아 있었다.
그의 시선이 문득 초연운을 향했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취운룡.’
그는 당연히 초연운을 알고 있었다.
현 강호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자라면 초연운을 모를 수 없었다. 특히 신교에 적을 둔 무인이라면.
삼년 전 신교가 화산파를 침공했을 때 가장 두각을 드러낸 존재가 바로 초연운이었다. 담호라는 존재도 있었지만, 그는 어디서나 예외로 취급받았다.
초연운이 이를 악물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의 눈동자는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경악으로 물들어 있던 눈동자에는 어느새 투지가 가득했다.
분명 자신의 무위를 보았을 텐데도 저 남자는 투지를 불태우고 있었다. 그 모습이 검율천의 뇌리에 깊이 각인되었다.
검율천은 초연운에게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아직 생존해 있는 결사대 무인들이 움찔했다. 하지만 누구도 피하거나 시선을 회피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를 악문 채 검율천을 노려봤다.
비록 검율천의 정체를 제대로 아는 이 한 명 없었지만, 그들도 느끼고 있었다. 상대가 보통 거물이 아니라는 것을.
부르르!
검율천이 가까이 다가올수록 그들이 느끼는 전율 또한 강렬해졌다. 하지만 누구 한 명 물러나지 않고 버텼다. 그 중심에 초연운이 있었다. 그가 버티고 서 있기에 모두가 한마음으로 버티는 것이다.
턱!
마침내 검율천이 초연운의 앞에 섰다.
초연운도 올려다볼 만큼 거대한 덩치의 검율천이었다. 그 덩치만으로도 그는 결사대를 압도하고 있었다.
“왜 가지 않았나?”
검율천이 물었다.
단순히 질문을 던졌을 뿐인데도 엄청난 압력이 초연운의 양 어깨를 짓누르는 듯했다. 하지만 초연운은 몸에 가해지는 압력을 견디며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 했으니까.”
“확인?”
“당신들의 전력을.”
“왜지?”
“언젠간 적이 될 테니까.”
초연운의 대답이 의외였는지 검율천이 잠시 말을 잃었다.
“담호 말고도 정파에 자네와 같은 무인이 있을 줄은 몰랐군.”
“그를 알고 있나?”
“나는 그를 친구라고 생각한다네.”
“친구란 말이군.”
“우리는 공공의 적을 두고 있지. 그래서 친구가 될 수 있었네.”
“공공의 적이 사라진다면? 그래도 끝까지 친구로 남을 수 있겠나?”
“…….”
초연운의 질문이 의표를 찔렀는지 검율천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잠시 후 그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자네의 혀는 참으로 날카롭군.”
“가끔 그런 소리를 듣네.”
두 사람 사이에 냉랭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한쪽은 정파 최고의 젊은 기재였고, 다른 한 명은 마도 최고의 병기였다. 두 사람은 본능적으로 서로를 경계하고 있었다.
특히 초연운이 느끼는 위기감은 엄청났다.
그가 본 검율천은 절대 남의 밑에 있을 사람이 아니었다. 시간이 얼마가 걸리든 반드시 정점에 올라설 자였다.
검율천은 존재 자체만으로도 무림맹과 정파 무림에 큰 위협이었다. 그리고 그의 존재감은 시간이 갈수록 커 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잠시 초연운을 바라보던 검율천이 한쪽으로 비켜섰다.
“확인했으면 이제 그만 무림맹으로 돌아가게. 더 이상 자네들을 추적하는 이는 없을 걸세.”
초연운이 잠시 검율천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마치 그의 얼굴을 각인시키기라도 하듯이 말이다.
잠시 후 그가 검율천에게 포권을 취했다.
“목숨을 구해 줘서 고맙네. 이 은혜, 반드시 갚지.”
“신경 쓸 것 없네. 딱히 자네들을 구하고자 나선 것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덕분에 목숨을 구한 것도 사실이지. 나 역시 한 번은 자네의 목숨을 구해 주겠네.”
“기억해 두지.”
“그럼…….”
초연운이 검율천을 지나쳐 갔다. 그 뒤를 결사대의 무인들이 따랐다.
검율천을 따르는 이들은 초연운과 결사대들이 지나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줬다.
음유경도 옆에 비켜서서 지나가는 결사대의 무인들을 바라봤다. 그런 그녀의 시선이 멈춘 곳은 제일 뒤에서 초연운을 따라가는 조그만 소녀에게서였다.
“소매.”
“언니!”
은은한 미소를 지은 채 대답하는 이는 바로 은소청이었다.
음유경은 예전에 오행마동의 추격을 뿌리치기 위해 은소청이 타고 있던 마차에 숨어든 적이 있었다. 두 사람 모두 그때의 인연을 기억하고 있었다.
“무사해서 다행이야.”
“고마워요. 덕분에 살았어요.”
“이제 겨우 은혜를 갚은 셈이지. 부디 무사히 귀환하길 바랄게.”
“고마워요, 언니. 더 이야기하고 싶지만…….”
“소매의 마음 알아. 그러니 신경 쓰지 마.”
“네!”
“그리고…….”
음유경의 목소리가 잠시 끊겼다. 그녀는 잠시 검율천과 명천 등을 바라보다가 은소청의 귀에 속삭였다.
“될 수 있으면 무림맹으로는 가지 마.”
“네?”
“소매와 초 대협이 쫓기는 사이 신교가 무림맹으로 진격을 시작했어. 곧 대대적인 공세가 있을 거야.”
“그런…….”
“차라리 다른 안전한 곳에 몸을 피해.”
“알았어요. 고마워요, 언니.”
“아니야! 어차피 알게 될 일었는걸. 하여간 부디 몸조심해.”
“언니도요. 이만 가 볼게요.”
은소청이 음유경에게 감사의 인사를 한 후 초연운과 결사대가 있는 곳을 뛰어갔다.
음유경은 은소청의 조그만 몸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눈을 떼지 못했다. 그리고 검율천은 그런 음유경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명천이 검율천의 곁으로 다가왔다.
“괜찮겠어요?”
“뭐가 말이냐?”
“그들을 이대로 보내 줘도 말이에요. 이대로 무사히 돌아가면 그들은 분명 정도 무림의 주축으로 성장할 거예요.”
“그렇겠지.”
검율천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무인의 성장이라는 것은 비단 좋은 무공과 부단한 수련만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이번 경우처럼 목숨을 걸고 수많은 고수들과 대결을 한 경험은 그들을 비약적으로 성장하게 만들 것이다. 그들이 현 강호에서 가지는 위치와 재능을 감안한다면 최고 수준의 고수가 될 것이 분명했다.
특히 초연운의 성장이 어떨지는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비록 검율천 등이 천사교 때문에 신교와 대립하고 있다지만, 그래도 그들의 가슴속에는 항상 신교를 생각하는 마음이 있었다.
신교를 위해서라면 지금 저들을 죽여 후환을 제거하는 것이 나았다. 명천은 바로 그 점을 검율천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검율천이 무심히 말했다.
“그는 담호의 친구다. 그 이유 하나만으로도 그는 살아 돌아갈 충분한 자격이 있다.”
“하지만…….”
“언젠가는 저들과 싸우게 될지도 모르지. 아니, 반드시 그렇게 되겠지. 그러나 그건 그때의 일이다. 미래의 위협이 두려워 앞날이 창창한 이들을 죽이는 비겁자가 되고 싶지는 않구나.”
“죄송해요, 형. 괜한 말을 해서.”
“괜찮다. 너는 당연히 그렇게 말할 수 있다. 그게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니까. 하지만 나를 믿어라. 나는 그렇게 약하지 않다.”
천하를 오시하는 힘을 손에 넣은 자의 여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