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2
442화 6장. 산하(山河)가 피로 물들다(2)
툭!
방진보의 머릿속에서 무언가 툭 끊어지며 새하얗게 비워졌다.
세상 모든 것이 회색 운무에 쌓여 있는 것 같았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고, 심지어 소리조차 왜곡되어 명확히 들리지 않았다.
그 속에서 방진보는 혼자 움직이고 있었다. 이따금씩 아찔한 부유감이 느껴졌고 얼굴에 이물질이 튀었다.
모든 것이 몽혼했다.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꿈을.
방진보의 꿈이 끝난 것은 그의 몸이 무언가에 덜컥 걸린 후였다. 마치 족쇄에 잡힌 것처럼 몸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정신 차려라.”
익숙한 음성이 방진보의 정신을 꿈속에서 끄집어냈다.
방진보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그러자 담호의 무뚝뚝한 얼굴이 보였다.
“형?”
방진보의 얼굴에 혼란스러운 빛이 떠올랐다.
정신이 몽혼해서 무엇이 어떻게 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마치 커다란 쇠몽둥이로 후려 맞은 것처럼 전신이 아파 왔다.
방진보가 주위를 둘러봤다. 그러자 그의 주위에 흩어져 있는 십여 구의 시신이 보였다. 방금 전까지는 없었던 시신이었다. 쩍 벌어진 상처 사이로 흘러나온 피에서 아직도 뜨거운 김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공포에 질려 있는 도적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의 시선이 향하고 있는 이는 분명 방진보 자신이었다.
방진보가 눈을 끔뻑거렸다.
안개가 낀 것처럼 흐릿하기만 했던 정신이 조금씩 돌아왔다. 그리고 떠올랐다.
“우욱!”
순간 방진보는 그만 욕지기를 하고 말았다. 이곳에 도착하기 전에 먹었던 모든 것을 게워 올렸다.
“내가, 내가…….”
이 참극의 주인공은 바로 자신이었다. 그가 이성을 잃고 도적들에게 달려들어 도륙을 한 것이다.
한낱 도적들이 방진보의 매화도를 감당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선두에서 기세 좋게 달려들던 도적들은 방진보의 주도에 무참히 잘려 나갔다.
만일 담호가 제때 개입하지 않았다면 방진보 혼자 도적들을 모조리 죽였을 것이다.
“형?”
방진보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담호를 올려다봤다.
요리를 더 잘하기 위해 배운 무공이었다.
화산에 있을 때는 스스로를 숙수라고 생각했지, 무인이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다.
담호를 찾기 위해 다시 세상에 나와서 무인임을 자각했고, 자신이 무인임을 단 한 번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았다.
요리를 하던 칼로 사람을 상하게 했지만 정당한 대결의 결과였기에 껄끄러움은 있을지언정 부끄럽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래서 요리를 위한 주도를 하나 더 마련했고, 무인의 길을 함께 걸은 자신을 자랑스럽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 자신이 행한 일은 무인끼리의 정당한 대결이 아니었다. 강자가 약자를 무참히 도륙한 도살이었다. 인도부(人屠夫)나 할 짓을 자신의 손으로 행한 것이다.
방진보의 어깨와 손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그 순간 담호의 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잘못하지 않았다.”
“형?”
순간 떨림이 가셨다.
담호의 목소리엔 이상하게 사람을 진정시키는 힘이 담겨 있었다. 흔들리지 않는 담호의 눈동자를 보면서 방진보는 치밀어 오르던 욕지기가 절로 진정이 되는 것을 느꼈다.
“너의 분노는 잘못된 것이 아니다.”
“하지만…….”
“누구도 너에게 잘못했다 말할 수 없다. 적어도 인간이라면…….”
담호가 뒤돌아섰다.
방진보는 멍하니 그런 담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담호는 아직 살아 있는 도적들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절대고수들도 버티기가 쉽지 않던 담호의 기세였다. 거대한 짐승이 이를 드러내고 다가오는 듯한 그 기세를 한낱 도적들이 감당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으으!”
“이럴 수가!”
도적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난데없이 뛰어들어 도륙하던 소년도 무서웠지만, 지금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칠흑처럼 검은 사내는 더욱 끔찍했다.
보는 것만으로도 심혼이 아득히 날아갈 것 같은, 생전 처음 느끼는 감정이 그들의 전신을 지배하고 있었다.
“너, 너는 누구냐?”
도적들의 우두머리가 용기를 내서 입을 열었다.
그런 그의 입가로 침이 흘러내리고 있었지만, 우두머리는 그런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구사역이었다.
구사역은 본래 녹림십팔채 휘하의 조그만 산채의 채주였다. 성정이 포악하고 욕심이 많은 그는 자신이 이끄는 산채가 녹림십팔채에 들기를 원했다. 하지만 능력이 부족한 데다가 기존의 녹림십팔채가 워낙 견고해 그 틈을 파고들 수가 없었다.
결국 조그만 산채의 채주로 만족해하며 살아가고 있던 차에 마교의 난이 터졌다. 철혈의 율법으로 녹림 전체를 지배하던 총채주인 황경문의 죽음 이후 녹림십팔채는 구심점을 잃고 흔들렸다.
큰 산채의 눈치를 봐야 했던 구사역은 그런 혼란을 절호의 기회로 봤다. 더군다나 마교 때문에 인근의 모든 문파들이 문을 걸어 잠그고 있었다.
거리낄 것도, 눈치 볼 것도 없었다.
구사역은 수하들을 이끌고 거침없이 약탈을 자행했다. 마음에 드는 것은 모조리 빼앗고, 거치적거리는 인간들은 죽이고, 예쁜 여자들은 마음껏 겁탈했다.
남들에겐 지옥 같은 시간이었지만, 그에겐 극락의 나날이었다. 마교가 불러온 난세는 그의 세상을 만들었다. 적어도 이 일대에서는 그를 막을 문파나 무인은 없었다.
오늘도 그는 며칠 전부터 찍어 둔 마을을 약탈하고, 계집들을 손에 넣었다. 이제 즐길 일만 남았는데, 뜻밖에 웬 소년이 뛰어들면서 재앙이 시작됐다.
덜덜덜!
그의 몸이 떨리고 있었다.
애써 진정을 시키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성보다 몸이 먼저 공포에 반응하고 있었다.
‘대체 저 괴물은…….’
문득 그의 눈에 살짝 절고 있는 담호의 왼다리가 들어왔다. 그제야 그는 절름발이 무인을 떠올렸다.
작금 강호를 지배하고 있는 권마의 전설을.
오늘날의 난세를 불러온 그 무서운 마교마저도 저 권마 앞에서는 한 수 물러 준다는 믿지 못할 이야기가 떠돌고 있었다.
그 정도로 무서운 남자였다. 그를 향해 다가오고 있는 권마라는 무인은.
구사역이 이 조그만 지역을 제멋대로 약탈하면서 만족하는데 반해 권마는 천하를 무대로 활약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감당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그가 왜 자신의 앞마당에 뛰어들었는지 모르지만 말이다.
대화를 해야 했다.
“나, 나는 녹림의 형제요. 다, 담 대협께서 총채주와 깊은 연관이 있다고 들었소. 그, 그러니까 우, 우리는 한 형제나 다름없소. 그러니 진정하고 내 말을 들어 보시오. 형제끼리 싸우는 것은 아니라잖소.”
구사역이 급히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의 말은 담호의 걸음을 멈추게 할 수 없었다.
담호와 눈이 마주쳤다.
“…….”
구사역이 입을 뻐끔거렸다. 분명 말을 하고 있지만 목소리가 세어 나오지 않았다. 담호의 기세가 그의 성대마저 마비시킨 것이다.
그는 마치 전신이 마비된 것처럼 우두커니 서서 담호의 커다란 손이 다가오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꾸욱!
강철 집게 같은 손이 그의 목을 움켜잡았다. 그때까지도 구사역은 움직이지 못했다.
그의 미간 사이를 굵은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우, 움직여라. 제발!’
그는 간절히 자신의 몸이 움직이길 기원했다. 하지만 돌덩이처럼 굳은 몸은 여전히 움직일 줄 몰랐다.
담호의 무심한 눈동자가 그의 동공에 박히는 그 순간이었다.
뿌드득!
구사역의 목에서 섬뜩한 파골음이 울려 퍼졌다. 담호가 그의 목을 비튼 것이다.
구사역이 혀를 길게 내밀며 그대로 절명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담호는 양처럼 한쪽에 모여서 부들부들 떨고 있는 산적들에게 죽음을 내렸다.
무인 간의 대등한 싸움도 아니었고, 생존하기 위해 타인을 죽이는 것도 아니었다.
말 그대로 도살이었다.
강자가 약자를 상대로 벌이는 무자비한 학살 행위.
평소 담호는 손속에 자비를 두지 않는 편이었지만, 지금 하고 있는 살상은 너무 과했다. 그 사실을 담호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멈추지는 않았다.
지금 그가 행하고 있는 살상은 방진보에게 전하는 가르침이었다.
너의 행위를 결코 후회하지 말라고.
네가 행한 일은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크아악!”
“사, 살려 줘!”
산적들의 절규가 폐허가 된 마을에 처절하게 울려 퍼졌다.
오늘 이곳에 산 자는 없었다.
***
어둠이 잠식한 공간, 오직 희미한 야명주 불빛만이 실내를 비추고 있었다.
그곳에 두 명의 남자가 모여 있었다. 야명주 불빛이 너무 희미해 그들의 얼굴은 확실히 보이지 않았지만, 그들의 몸에서는 지독한 사기가 흘러나와 실내를 잠식하고 있었다.
남자들의 앞 단상에는 시신이 한 구 놓여 있었다.
처참하게 망가진 시신은 그들이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묵검협이 이렇게…….”
생전에 남궁인후라고 불렸던 이였다. 묵검협이라는 별호로 천하를 질타했던 절대의 무인.
세상에서 자취를 감춘 지 오래되어 이젠 잊혀진 존재가 되다시피 했지만, 그의 절대적인 무위는 여전했다. 아니, 오히려 수십 년의 고련을 통해 더욱 높은 경지에 달했다. 그래서 당적 할 자가 거의 없다고 생각했던 이가 바로 남궁인후였다.
그런 남궁인후가 처참한 시신이 되어 그들의 앞으로 돌아왔다. 얼굴은 원래의 모습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있었고, 고문을 당한 것처럼 전신에 끔찍한 상처가 가득했다.
유독 허리가 꾸부정한 남자가 남궁인후를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흉수는?”
“고문을 가하고 마지막 일격을 가한 자는 서왕모입니다.”
“진정한 흉수는 따로 있는 것처럼 말하는군. 누군가?”
“권……마입니다. 치명적인 상처는 모두 그에게 입은 겁니다.”
“권마! 으음!”
허리가 꾸부정한 남자가 자신도 모르게 침음성을 흘렸다. 보고를 하던 자가 그런 남자를 말없이 바라봤다.
허리가 굽은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희미한 야명주 아래 역시 흐릿한 그의 이목구비가 모습을 드러냈다.
희미한 불빛 아래 짙은 사기에 뒤덮여 있어 원래의 얼굴을 알아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은 그의 진면목을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사람들이었다.
귀사(鬼邪).
교주의 심복이자, 대행하는 자.
교주의 부재 시 그가 모든 권한을 가지고 계획을 행한다.
그의 나이나 진정한 얼굴을 아는 자는 오직 교주뿐이었다. 교주는 귀사에게 대부분의 일을 일임한 채 모습을 보이는 일이 거의 없었다.
남궁인후의 시신을 바라보는 귀사의 눈에 짙은 사기가 일렁였다.
“남궁인후는 우리와 오랜 세월을 함께해 온 동료이자 훌륭한 조력자였네. 그는 본교에 헌신적이었고, 누구보다 열과 성의를 다해 일을 했지. 그런 그의 죽음은 우리에게 큰 타격일 수밖에 없네. 남궁인후뿐만 아니네. 많은 이들이 권마, 혹은 그와 연관된 자들에게 죽임을 당했네. 이대로 그들을 내버려 두면 우리의 위대한 뜻이 희석되고, 대계마저 흔들릴 것이 분명하네.”
“허면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권마는 함부로 손대기엔 너무 위험천만한 자입니다. 남궁인후는 오사(五邪)의 일원입니다. 본교의 최고수 중 하나인 그가 저리 무기력하게 당했습니다. 그를 제거하고자 한다면 본교도 막심한 피해를 입을 겁니다.”
“그렇겠지.”
귀사는 다른 남자의 말에 동의했다.
그의 이름은 오극이었다.
천병왕(天兵王) 오극.
수십 년 전 강호를 쩌렁쩌렁 울리던 오대무객의 일원이었고, 현재는 천사교의 오사 중 제일 윗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절대의 무인이었다.
사신제가 아니었다면 그 시대의 천하제일인 자리를 바라봤을지도 모르는 절대의 무인이 어두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 모든 것이 담호 때문이었다.
담호는 그들의 예상을 벗어난 자였다.
그만 관계되면 모든 일이 어긋나거나 잘못됐다. 그 대표적인 예가 남궁인후였다.
그를 직접 죽인 이는 용화설이었지만, 원인을 제공한 자는 담호였다.
용화설이 남궁인후에게 어디까지 알아냈는지는 모르지만, 그 때문에 대계가 흔들릴 공산이 커졌다. 그 모든 것이 담호 때문이었다.
담호는 단지 마교에만 재앙이 아니었다. 천사교에도 재앙이었다. 살아 있는 것 자체가 세상에 해가 되는 자였다. 적어도 귀사는 그렇게 생각했다.
오극이 귀사에게 말했다.
“차라리 제가 권마를 상대하겠습니다.”
“그건 아니 될 말이네.”
“다른 이들이 나서면 피해만 커질 뿐입니다. 차라리 제가 나서는 것이 피해를 줄이는 일입니다.”
“자네가 빠지면 교주님이 짊어져야 할 부담이 더욱 커질 뿐이네.”
“으음!”
오극이 나직이 신음성을 흘렸다. 그러자 귀사가 말했다.
“차라리 내가 나서는 것이 좋을 것 같군.”
“안 될 말입니다. 어찌 귀사께서…….”
“아니, 내가 가장 적임자일세. 이유는 자네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으음!”
“그리 걱정하지 않아도 되네. 내가 직접 무공을 사용하는 일은 없을 테니까.”
귀사의 얼굴에 어려 있는 짙은 사기가 크게 출렁였다. 오극은 그것이 귀사가 미소를 지었기 때문에 일어난 현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귀사의 음성이 한층 더 차가워졌다.
“마침 교주께서 사용하라고 보내 준 제물도 있으니 더욱 잘됐군. 그를 이용하면 한결 수월하게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게야.”
“혹시 그 방법을 사용하시려는 겁니까?”
“그렇다네.”
“허나 그것은 너무 위험합니다.”
“알고 있네. 그래도 한 번쯤은 사용해 볼 만한 방법이지.”
“교주님께서 허락을 하지 않으실 겁니다.”
“허락은 내가 구하겠네.”
“으음!”
“자네는 너무 걱정할 거 없네. 설마 나를 못 믿는 것은 아니겠지?”
“아닙니다. 저는 당신을 믿습니다.”
오극이 급히 고개를 저었다.
귀사를 바라보는 그의 눈에는 복잡한 감정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단순히 무공으로만 승부한다면 오극은 얼마든지 귀사를 제압할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귀사에게는 무공 이상의 그 무언가가 있었다. 그것이 오극을 두렵게 했다.
어둠 속에서 귀사의 눈이 섬뜩하게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