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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권마-443화 (443/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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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3화 6장. 산하(山河)가 피로 물들다(3)

“휴!”

방진보가 탄식을 토해 냈다.

그의 앞엔 엄청난 양의 나뭇가지를 쌓아 만든 단이 있었고, 그 위엔 마을 사람들의 시신이 올려 있었다. 방진보와 남궁 형제가 한 일이었다.

한쪽에는 흐느끼는 마을 아낙들과 아이들이 있었다. 하루아침에 가족과 친척을 모두 잃은 그들의 얼굴엔 슬픔이 가득했다. 그래도 그들이 힘을 낼 수 있는 것은 마을을 습격했던 산적들이 모조리 죽었기 때문이다.

담호는 사신이었다.

그는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비는 산적까지 무참히 죽였다.

용서도, 자비도 없었다.

너무나 잔혹한 모습이었지만, 오히려 마을 사람들은 그에 마음의 위안을 받았다. 그들은 산적에게 모든 것을 잃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이제까지 애써 가꿔 온 터전까지.

담호가 두렵긴 했지만, 그보다는 감사한 마음이 더 컸다. 담호가 아니었으면 아낙들은 무참히 유린당하다가 죽임을 당했을 테니까.

화르륵!

단에서 거센 불길이 피어올랐다.

화염은 나무뿐만 아니라 마을 사람들의 시신까지 집어삼켰다. 그 모습을 본 아낙들과 아이들은 아예 바닥에 주저앉아 대성통곡을 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방진보가 고개를 숙였다.

왠지 그들에게 미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마치 자신이 죄를 지은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지켜야 할 최소한의 도리마저 지켜지지 않는 난세였다. 이런 어지러운 시대일수록 무공을 익힌 이들이 경각심을 가지고 약자를 지켜야 했다. 방진보와 같은 이들이 말이다.

방진보의 시선이 문득 한쪽에 서 있는 담호를 향했다.

화염에 휩싸인 단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 짙은 음영이 드리워졌다. 특히 눈에 깊은 그림자가 내려앉아 그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오늘 담호는 자신보다 몇 배는 많은 피를 몸에 묻혔다. 그 모든 것이 자신의 죄책감을 희석해 주기 위한 행동이라는 것을 모를 방진보가 아니었다.

담호는 방진보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고 했다.

인간이라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다.

이런 난세에 힘을 지닌 자가 약한 자를 지켜 주지 않는다면 세상은 지옥으로 변할 것이다.

“휴!”

방진보가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이번 한숨은 먼젓번과 의미가 달랐다.

숙수이면서 무인의 길을 걷는 이가 스스로의 의지로 앞으로 걸어갈 길을 정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남궁 형제는 그런 방진보를 보면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방진보의 무위에 가장 큰 충격을 받은 이들은 바로 남궁 형제였다. 언제나 사람 좋은 모습을 보여 주던 방진보에게 그런 과단한 모습이 숨어 있을 줄은 정말 몰랐다.

무엇보다 충격적인 것은 방진보의 무위였다.

요리를 할 때 사용하는 주도로 그와 같은 무위를 발휘할 줄은 정말 몰랐다. 아무리 분노에 이성이 잠식되었다고 하지만 방진보가 보여 준 무위는 그만큼 그들에게 큰 충격을 던져 주었다.

반드시 강해져야 할 이유를 방진보에게서 찾았고, 그 때문에 방진보를 더 좋아하고 존경하게 됐다.

담호가 방진보에게 말했다.

“가자.”

“예!”

방진보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예전 같으면 화장을 끝까지 지켜보고 마무리까지 도와주었겠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남겨진 자들의 슬픔까지 함께해 줄 수는 없었다. 슬픔을 감당하는 것은 그들의 몫이었고, 방진보가 할 일은 따로 있었다.

그것이 무공을 익힌 자의 숙명이었다.

방진보는 비로소 무인의 숙명을 뼛속 깊이 체감하고 받아들였다.

담호는 그런 방진보를 담담히 바라봤다. 방진보의 눈빛이 변한 것을 그는 느끼고 있었다.

숙수의 순수함과 무인의 단호함이 그의 눈빛 속에 공존하고 있었다. 예전에는 둘 사이에 간극이 꽤나 크게 존재했지만, 지금은 많이 좁혀진 모습이었다.

담호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방진보는 착실히 성장을 하고 있었다. 자신의 예상보다도 더 빨리. 그리고 바른 방향으로.

무언가 결여된 자신과는 달랐다.

담호가 흑귀에 올라탄 채 하늘을 바라봤다.

구름이 시대의 조류처럼 빠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난세였다.

이런 시대에 자신과 같은 마인이 태어난 것도 이유가 있을 터였다.

아니, 있기를 바랐다.

그래야 살아갈 이유가 더 명확해질 테니까.

***

여남(汝南)은 하남성과 안휘성 접경 지역에 위치한 제법 큰 현이었다. 인근엔 천중산이라는 커다란 산이 있는 데다가 관도가 지나는 교통의 요충지로 평소에도 많은 사람이 모이는 곳이었다.

담호의 목적지는 바로 여남이었다. 여남에서 관도를 타면 소림사가 있는 등봉현까지는 불과 닷새 거리였다. 하지만 여남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천중산을 지나야 했다.

천중산은 하남성에서도 명산이라 부르는 곳이었다. 유서 깊은 서원이 있었고, 산 곳곳에 역사적인 가치를 가진 유적지가 산재해 있었다.

담호와 방진보 등은 천중산을 넘어가고 있었다. 곳곳에 유서 깊은 서원과 유적지가 보였지만, 두 사람 모두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오직 그들과 함께하는 남궁 형제만이 간간이 감탄사를 터트릴 뿐이었다.

담호가 문득 고개를 돌려 곁에서 말을 몰고 있는 방진보를 바라봤다. 아직 애티가 가시지 않은 얼굴은 여전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성숙한 것 같은 느낌이 물씬 풍기고 있었다.

불과 하룻밤 사이에 어른이 된 느낌이었다. 담호는 그런 방진보의 변화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언제까지나 소년으로 남는 사람은 없다. 좋든 싫든 수많은 경험을 하며 어른이 되기 마련이고, 일단 어른이 된 뒤에는 굳어진 사고관이 쉽게 바뀌지 않는다.

아직 소년일 때 수많은 경험을 하고, 제대로 된 가치관을 세우는 것이 중요했다. 방진보가 어떤 가치관을 갖게 될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어른이 되는 성장통을 겪는 것만은 확실했다.

담호는 방진보에게서 시선을 돌려 전방을 바라봤다.

이제부터는 방진보의 몫이었다. 거기에 담호가 개입할 여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도리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담호에겐 담호만의 길이 있듯이, 방진보에겐 그만의 길이 있었다. 이 이상 개입하는 것은 방진보에게 오히려 해가 될 뿐이었다.

푸르르!

그때 갑자기 흑귀가 거친 콧김을 내뿜으며 멈춰 섰다. 이상한 기척이라도 느낀 것인지 앞발로 연신 바닥을 긁는 모습이 심상치 않아 보였다.

담호가 미간을 찌푸리며 전방을 바라보는 순간이었다.

“크윽! 제기랄!”

갑자기 거친 욕설과 함께 전방의 수풀을 뚫고 누군가 튀어나왔다. 전신이 피투성이가 된 사내였다. 옷은 마치 걸레쪽처럼 헤져 있었고, 전신에는 수많은 자상이 새겨져 있었다. 보통 사람이었으면 벌써 죽었을 그런 상처를 입고도 사내는 움직이고 있었다.

혈인이 되다시피 한 사내가 담호 등의 기척을 느꼈는지 고개를 쳐들며 검을 들었다.

“누구냐?”

“…….”

“당신은?”

사내가 담호를 알아봤는지 눈을 크게 치떴다. 피로 물든 그의 얼굴에 반색이 떠올랐다. 그는 담호를 향해 뛰어오며 외쳤다.

“다, 담 형. 나 남학이오. 지금 쫓기고 있소. 제발 도와주시오.”

그의 말을 증명하기라도 하듯이 그가 뛰어나온 수풀 속에서 십여 명의 무인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남학을 무작정 쫓으려 하다가 담호를 발견하곤 흠칫했다.

“권마?”

“설마!”

그들의 얼굴엔 믿기지 않는다는 빛이 떠올라 있었다.

넓고 넓은 중원, 그것도 하필 천중산에서 담호와 만나게 되다니. 단순히 우연이라고 치부하기엔 너무나 공교로웠다.

남학이 허겁지겁 담호의 옆에 서며 말했다.

“저들은 천사교의 추적자들이외다. 저들에게 잡혀가던 중에 간신히 탈출했소. 도와주시오.”

남학의 얼굴엔 다급한 기색이 가득했다.

천뢰무객(天雷武客)이라 불리는 남학이었다. 공동파가 배출한 초기재이자 구무룡의 일원인 그가 이렇게 다급한 기색으로 남에게 도움을 요청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의 오만한 성정을 생각한다면 말이다.

그만큼 남학은 심각한 상처를 입고 있었다. 뼈까지 드러난 자상에서 흘러나온 피가 그의 발밑을 붉게 적시고 있었다.

담호가 흑귀에서 내리며 입을 열었다.

“천사교라고?”

“그렇소! 천하에 저들의 실체를 알려야 하니 나를 무림맹으로 데려가…….”

남학이 말을 끝내지 못하고 그대로 혼절했다. 중상을 입은 채 피를 너무 많이 흘렸기 때문이다.

“앗!”

방진보가 급히 말에서 내려 남학의 상처를 지혈했다.

담호는 그런 남학을 잠시 바라보다 주춤하고 있는 천사교의 추적자들을 바라봤다. 그들의 얼굴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남학을 추적해 왔는데 설마 이곳에서 권마를 만나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그들이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담호란 벽을 넘어야 했다.

추적자들이 서로의 얼굴을 바라봤다. 잠시 눈빛을 교환한 그들의 표정이 단호해졌다.

“쳐랏!”

그들이 일제히 담호를 공격해 들어왔다.

쉬가아악!

그들이 휘두른 검에 공기가 갈라지며 비명을 내질렀다.

오랫동안 손발을 맞춰 온 듯 그들의 합격술은 정밀하기 그지없었다. 방어는 도외시하고 온몸을 던져 상대의 숨통을 끊는 일격필살의 공격이 담호에게 쏟아졌다.

쿠우우!

그 순간 담호의 전신에 한 줄기 거친 기류가 휘돌았다. 폭마경이 발동한 것이다.

그 상태 그대로 담호는 추격자들을 향해 쇄도했다.

충보를 이용해 온몸을 내던진 것이다.

콰아앙!

폭음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십여 구의 고깃덩이가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처참하게 짓이겨져 본래의 형태를 잃은 그것들은 더 이상 인간이라 부를 수 없었다.

그것이 추적자들의 최후였다.

담호가 제자리에 선 채 허리를 폈다.

그를 중심으로 커다란 구덩이가 움푹 패여 있었다. 장인이 정성을 들여 조각을 한 것처럼 나선 문양이 회오리치며 바닥에 새겨져 있었다.

남궁 형제는 질렸다는 표정으로 순식간에 추적자들을 처리한 담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담호와 동행한 지 꽤 되었지만, 이런 광경은 전혀 익숙해지지 않았다.

그때 방진보가 담호에게 말했다.

“상처가 심해요. 아무래도 움직이는 것은 무리일 거예요. 근처에 자리를 잡고 잠시 상처를 치료해야 할 것 같아요.”

담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방진보가 남학을 조심스럽게 안은 채 노숙할 만한 곳으로 이동했다.

일단 불을 피우고 남학의 상의를 벗겼다. 그러자 끔찍한 상처가 눈에 들어왔다. 뼈가 보일 정도로 깊은 자상들이 지렁이처럼 꿈틀거리며 어지럽게 교차하고 있었다.

방진보는 일단 품에서 요상단 한 알을 꺼내 복용시킨 후 금창약을 상처에 덕지덕지 발랐다.

요상단과 금창약은 모두 종리연이 준 것이었다. 신의라는 별호답게 종리연이 준 요상단과 금창약은 탁월한 효능을 발휘했다. 단번에 피가 멎고, 얼굴에 혈색이 조금씩 돌아왔다. 위기를 넘긴 것이다.

방진보가 소매로 이마에 흐르는 땀방울을 닦으며 말했다.

“다행이에요. 상처가 조금만 깊었어도 절명했을 텐데, 다행히도 간발의 차이로 모두 요혈을 빗겨 나갔어요. 하늘이 도운 것이 분명해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방진보의 얼굴엔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남학은 결사대의 일원이었다.

결사대가 임무에 실패했고, 마교의 본진이 무림맹으로 진군을 했다는 소식은 이미 알고 있었다.

결사대에는 은소청을 비롯해 아는 사람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특히 은소청의 안위가 걱정이 되었지만, 그래도 이제까지 초연할 수 있었던 것은 초연운이 함께하기 때문이었다. 초연운이라면 반드시 은소청을 지켜 줄 거라는 믿음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구무룡 중 한 명인 남학의 처참한 모습을 보니 불현듯 불안감이 엄습했다.

“대체 어떻게 된 걸까요? 결사대에 참여해 마교를 기습했던 이가 갑자기 천사교에 쫓기는 중이었다니요?”

방진보는 극도로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그런 그의 마음속에는 은소청을 향한 걱정이 가득했다.

당장이라도 은소청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고 싶었다. 무사한지 알고 싶었고, 다친 곳이 없는지 살펴보고 싶었다.

그때 담호가 방진보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소청은 무사할 게다.”

“형?”

“연운을 믿어라.”

그가 유일하게 믿는 친구였다. 그라면 어떤 상황에서도 지인들을 지켜 낼 것이다. 담호는 그렇게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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