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권마-444화 (444/500)

 444

444화 7장. 무간지옥(無間地獄)이 열리다(1)

초연운이 문득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봤다. 그러자 어깨를 잔뜩 웅크린 채 묵묵히 걷고 있는 은소청의 모습이 보였다.

아직 어린 은소청의 행색은 말이 아니었다. 머리와 어깨 위에는 먼지가 잔뜩 내려앉아 있었고, 얼굴도 푸석했다.

은가보라는 거대 상단의 소가주로 평생을 호의호식했던 은소청이 언제 이런 고생을 해 봤을 것인가? 분명 상당히 고통스러울 텐데도 은소청은 전혀 표를 내지 않았다.

초연운은 그런 은소청을 대견하다고 생각했다.

검율천의 도움을 받아 위기를 벗어나긴 했지만, 또 언제 마교가 추적대를 보내올 줄 몰랐기에 지난 며칠 동안 거의 쉬지 않고 이동했다. 여린 은소청이 감당하기엔 너무나 가혹한 일정이었다. 그런데도 은소청은 힘들단 말 없이 초연운을 따르고 있었다. 하지만 얼굴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잠시 쉬어가자. 이 정도 왔으면 마교의 추적대도 더 이상 따라올 수 없을 것이야.”

은소청이 고개를 들어 초연운을 올려봤다.

“나 때문이면 괜찮아요. 난 더 걸을 수 있어요.”

“너 때문이 아니야. 내가 지쳐서 그래. 모두 이곳에서 잠깐 쉬어 갑시다.”

초연운이 결사대에 큰 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결사대가 기다렸다는 듯이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휴우!”

“으음!”

곳곳에서 나직한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말은 안 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상당히 지친 상태였다. 단지 동료들을 생각해 전혀 내색을 하지 않고 있었을 뿐이다.

초연운이 해소월과 청운에게 다가갔다.

“소천은?”

“많이 나아졌어요. 그래도 제대로 치료할 곳이 필요해요.”

해소월의 얼굴엔 짙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조금 낫는가 싶었던 소천의 상처는 십병과 격돌하면서 다시 터졌고, 길을 오는 내내 점점 악화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소천은 초인적인 인내심과 심후한 공력으로 버티고 있었지만, 제대로 된 치료가 필요했다.

“아미타불! 나는 괜찮소이다. 그러니 신경 쓰지 마시구려.”

소천이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이곳에 있는 모두가 그의 상처가 심각한 것을 알고 있었다.

그때 은소청이 다가와 말했다.

“조금만 힘내세요. 이곳에서 조금만 더 북쪽으로 가면 은가보의 안가가 있어요. 그곳에서라면 제대로 된 치료를 받을 수 있을 거예요.”

“정말이냐? 안가가 있다는 것이.”

“저희 같은 대상단은 만일을 대비해 중원 곳곳에 안가를 마련해 두고 있어요. 미래가 어찌 될지 모르니 대비를 확실히 해 두는 거죠. 다행히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그런 안가가 하나 있어요. 대외적으로는 본가와 전혀 상관없는 곳이니까 당분간은 안심하고 머물러도 될 거에요.”

은소청의 자신 있는 말에 결사대 무인들이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다행이군.”

“정말 은가보의 신세를 여러 번 지는구나.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으마.”

“정말 고맙다.”

결사대의 무인들이 분분히 인사를 해 왔다.

무림맹에서 마교까지, 또 마교에서 이곳까지 동행을 하면서 그들은 은소청과 많이 친해진 상태였다. 그들은 모두 은소청과 은가보에 은혜를 입었다고 생각했다.

살아남은 이들은 모두 중원 최고의 기재들이었다. 함께했던 결사대원 대부분이 죽은 이상 차후의 강호는 그들이 이끌어 갈 것이 분명했다.

억만금을 주고도 얻지 못할 인맥을 만든 셈이었지만, 은소청은 하나도 기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애써 표를 내려고 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지금 무척이나 지친 상태였다.

‘진보야.’

지금 이 순간 그녀가 간절히 보고 싶은 사람은 바로 방진보였다. 어떻게든 힘을 내서 무림맹으로 귀환해야만 방진보를 만날 일말의 가능성이 있었다. 음유경은 그녀에게 무림맹에 가지 말라고 경고했지만, 방진보를 향한 마음을 막을 수는 없었다.

초연운이 그런 은소청을 안쓰러운 시선으로 바라봤다.

차라리 힘들다고 울면 나을 텐데, 오는 내내 이를 악물며 견디는 모습이 더 애처롭게 보였다.

초연운은 담호와 방진보를 떠올렸다. 그리고 마음으로 말했다.

‘걱정하지 마라. 어떻게든 소청은 무사히 데려갈 테니까.’

***

“으음!”

나직한 신음성과 함께 남학이 정신을 차렸다.

초점이 풀려 있던 그의 동공이 차츰 선명해졌다. 이어 눈을 끔뻑거리더니 이내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둘러봤다.

제일 먼저 그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어둠 한가운데 홀로 빛나고 있는 모닥불이었다. 불빛이 눈에 익자 그 주위에 모여 있는 네 사람이 보였다. 그중에서도 유독 한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어둠과 구별되지 않는 칠흑 피풍의를 걸친 무표정한 얼굴의 남자였다. 남학은 단숨에 그를 알아봤다.

“담……호.”

그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담호가 고개를 돌려 바라봤다.

문득 남학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담호를 누구보다 무시하고 증오했는데 그에게 도움을 받아 목숨을 구했으니 수치스러운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은혜를 입고도 모른 척할 정도로 낯이 두껍지는 않았다.

남학이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간신히 딱지가 내려앉았던 상처에서 다시 피가 흘러내렸다. 고통스러웠지만 애써 태연한 표정을 유지했다.

“고맙다. 덕분에 살았다. 이 은혜는 반드시 갚겠다.”

목숨을 구한 것을 확인하자 남학의 말투가 당당하게 바뀌었다. 돌변한 그의 말투가 거슬릴 만도 하지만 담호는 신경 쓰지 않았다.

“어떻게 된 거지?”

“나도 모르겠다. 마교에서 탈출하려다 웬 괴노인을 만난 것까지는 기억나는데, 그 이후로는 하나도 생각나지 않는다. 정신이 들고 보니 저들에게 잡혀가던 중이었다.”

눈을 떴을 때 그의 몸엔 힘이 하나도 없었다. 공력이 봉쇄된 상태로 커다란 마차에 갇힌 것이다.

남학은 아예 기절한 척하고 공력을 회복하는 데 집중하는 한편 마차 밖의 동향을 살폈다. 그 결과 자신을 잡아가는 이들이 천사교의 무인들이라는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다. 그리고 기회를 보다가 내공이 어느 정도 회복되자 창문을 부수고 탈출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었다.

담호와 방진보 등은 말없이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남학은 천사교가 얼마나 무서운 단체인지 침을 튀기며 이야기했다. 그럼으로써 자신의 수치스러운 기분을 조금이라도 상쇄시킬 수 있다는 듯이 말이다.

“그들은 음지에서 마교와 무림맹의 분란을 조장하고 있네. 그들의 존재를 서둘러 무림맹에 알려서 대책을 세워야 하네. 그러니 내가 무림맹으로 무사히 귀환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으면 좋겠군.”

남학은 당당하게 담호에게 보호를 요청했다. 처음의 수치스러운 표정은 이미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담호가 대답 대신 물었다.

“무림맹에선 어떻게 된 거지?”

“기습은 실패로 돌아갔다.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지만 저들은 이미 우리의 존재를 눈치채고 만반의 준비를 한 채 기다리고 있었다. 결국 결사대 대부분은 죽거나 사로잡혔다. 그나마 내가 가장 마지막까지 남아 적들을 막았기에 그래도 제법 많은 이들이 탈출할 수 있었다.”

남학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태연히 거짓말을 했다.

어차피 거짓을 말해도 상대가 진실을 알아낼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누가 탈출했지?”

“그건 나도 정확히 알 수 없다. 마지막에 괴노인에게 제압당하지 않았다면 알 수 있었을 텐데.”

“설명해 봐.”

“무얼 말이냐?”

“괴노인에 대해서.”

“그건…….”

순간 남학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담호의 말에 괴노인을 떠올리려 했지만 마치 머릿속에 안개가 낀 것처럼 흐릿했기 때문이다. 분명 똑똑히 봤었는데, 괴노인의 얼굴이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게…….”

남학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며 땀이 뻘뻘 났다. 담호는 그런 남학을 무심히 바라봤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가 무슨 말을 했던 것도 같은데. 으으!”

갑자기 남학이 몸을 푸들푸들 떨며 입에 거품을 물었다.

“무슨?”

방진보와 남궁 형제가 그런 남학의 모습에 놀라 몸을 일으켰다. 그들은 자신도 모르게 뒤로 물러났다.

이마에 핏대가 서고 눈도 붉게 충혈된 모습이 심상치 않았다.

“그, 그는…… 끄으으!”

남학이 아예 바닥에 고개를 처박은 채 몸을 떨었다.

담호가 몸을 일으켰다.

그는 더 이상 남학을 바라보지 않았다. 남학이 발작을 하면서부터 주위에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스산한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천중산에서부터 바람을 불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마치 수천, 수만 개의 미세한 바늘로 신경을 쿡쿡 찌르는 것처럼 불쾌하면서도 거슬렸다.

담호의 눈빛이 깊이 가라앉았다.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남학은 더 이상 그의 관심 대상이 아니었다.

방진보도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끼고 얼굴이 굳었다. 마치 몸살이라도 난 것처럼 전신이 으스스했다. 남궁 형제는 아예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이리 와.”

방진보는 남궁 형제를 끌어안으며 뒤로 물러났다. 그런 그의 대응은 무척이나 노련해 보였다. 이제 그는 더 이상 애송이가 아니었다. 무작정 담호에게 의지하기보다는 스스로 상황을 판단할 줄 아는 어른이었다.

담호는 말이 없었다. 그는 굳게 입을 다문 채 어둠을 노려봤다. 어둠이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꿈틀거리며 다가오다가 모닥불의 불빛에 막힌 것처럼 주위를 맴돌았다.

생전 처음 보는 기괴한 장면이었다. 하지만 담호의 눈엔 그 어떤 흔들림도 보이지 않았다.

자연적으로는 절대 일어날 수 없는 현상이었다.

“사술(邪術)인가?”

담호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암혼심공이 절로 반응했다.

암혼심공에는 현문정종인 화산파의 공부인 중천심공의 묘리가 담겨 있었다. 화산의 가장 오래되고 무거운 심법인 중천심공은 각종 삿된 기운의 상극이었기에 절로 반응하는 것이다.

“우욱!”

담호나 방진보와 달리 아직 내공이 약한 남궁 형제는 사술의 역한 기운에 구역질을 했다.

쾅!

순간 담호가 크게 발을 굴렀다.

공력을 집중한 대진각(大震脚)이었다.

마치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대지가 흔들렸다. 대지의 흔들림에 모닥불 근처를 에워싸고 있던 어둠이 크게 출렁이며 밀려났다. 그러자 어둠에 숨어 있던 괴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뒤덮는 괴상한 형태의 옷을 입은 괴인이었다. 서역에 저런 식의 옷을 입는 사람들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자신을 감싸고 있던 어둠이 밀려나자 잠시 당황하는 기색을 보였지만, 괴인은 순식간에 평정심을 되찾았다.

“대단하구나. 권마! 설마 진각 따위로 천혼사기(千魂邪氣)를 흔들어 놓다니.”

그의 음성은 마치 까마귀의 울음처럼 거칠면서도 음산해 사람의 신경을 불안하게 긁어 댔다.

팟!

순간 담호가 움직였다.

어느새 충보를 펼쳐 괴인에게 쇄도한 것이다.

파성추가 괴인의 가슴에 작렬하며 커다란 구멍이 뻥 뚫렸다. 괴인이 어이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크읏! 듣던 대로 예의라곤 도무지 없는 불한당이구나.”

여전히 거친 음성과 함께 괴인의 몸이 크게 출렁이더니 이내 한 여름날의 얼음처럼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주먹을 거둔 담호는 녹아내린 괴인의 모습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무엇이 두려워 환영을 내세운 거지?”

괴인에게 작렬시킨 주먹엔 그 어떤 느낌도 없었다. 마치 허공을 친 것처럼 허무하기만 한 것이다. 진신(眞身)이 아닌 허상이었다.

순간 담호의 뒤쪽 어둠이 크게 출렁이더니 거짓말처럼 괴인이 나타났다. 마치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그렇게 말이다.

담호가 허상을 뒤로하고 새로이 나타난 괴인을 바라봤다. 그러자 괴인이 고개를 들어 담호를 바라봤다.

“으음!”

“헉!”

괴인의 얼굴을 본 방진보와 남궁 형제가 동시에 경호성을 터트렸다. 괴인의 얼굴은 한꺼번에 뭉뚱그려 놓은 것처럼 모호했다. 마치 안개가 낀 것처럼 말이다.

방진보가 공력을 끌어 올려 두 눈에 집중했지만, 안개를 뚫고 괴인의 본얼굴을 알아보는 데 실패했다.

담호의 눈에 더욱 깊은 음영이 드리워졌다.

“천사교인가?”

“그렇다. 내 이름은 귀사라고 한다.”

괴인은 바로 귀사였다.

천사교의 이인자이자 교주의 뜻을 대행하는 자. 그가 직접 담호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의 전신에서는 가공할 사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현문정종의 내공을 익히지 않은 이라면 단숨에 미치게 만들 정도로 그의 사기는 지독했다.

실제로 그의 사기에 직접 맞닿은 남궁 형제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고, 몸은 간질에라도 걸린 사람처럼 푸들거리고 있었다.

“남학을 추적해 온 건가?”

“아니, 나는 너를 보러 왔다.”

“왜지?”

“얼굴을 보고 싶었다고 하면 믿지 않겠지?”

“…….”

“솔직히 말하지. 너를 세상에서 지우려 왔다.”

“혼자서?”

“설마? 교주님이라면 모를까? 나는 무력으로는 너를 감당할 자신이 없다.”

“그런데도 왔단 말이지?”

“그러니까 죽이는 것이 아닌 지우려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추방함으로써.”

귀사의 얼굴을 가린 안개가 제멋대로 일렁였다. 그 모습을 본 방진보와 남궁 형제는 귀사가 웃고 있을 거란 느낌을 받고 몸을 흠칫 떨었다. 그만큼 귀사의 전신에서는 실체를 알 수 없는 불길한 기운이 느껴지고 있었다.

귀사가 몰고 온 사기는 해일처럼 꿈틀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사기는 감히 담호의 지척으로 접근하지 못하고 휘돌기만 하고 있었다. 담호의 기운이 사기의 접근을 막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담호는 사기를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리고 그 사실을 귀사도 알고 있었다.

아무리 일대를 잠식하고 있는 사기가 대단할 지라도 담호를 집어삼키지 못한다면 의미가 없었다.

귀사가 눈을 빛냈다.

“그래서 그가 필요했던 거고.”

순간 담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귀사의 시선이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를 향해 있다는 것을 눈치챈 것이다.

‘남학!’

“끄어어어!”

등 뒤에서 기괴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남학이었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