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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권마-445화 (445/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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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5화 7장. 무간지옥(無間地獄)이 열리다(2)

남학의 전신에서는 붉은 운무가 안개처럼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피?”

짙은 혈향을 맡은 방진보가 경호성을 터트렸다.

붉은 운무는 바로 남학의 피가 기화된 것이었다. 그 증거로 운무를 발산한 남학의 전신이 급격히 쪼그라들고 있었다. 순식간에 목내이처럼 변하는 남학의 모습은 공포스럽기 그지없었다.

“무슨?”

남궁 형제가 생전 처음 보는 광경에 겁을 집어먹었다.

우우웅!

붉은 운무와 사기가 공명하는가 싶더니 갑자기 담호 앞에 검은 공간이 나타났다. 순식간에 나타난 검은 공간은 반응할 사이도 없이 담호와 방진보 등을 순식간에 집어삼켰다.

담호와 방진보가 세상에서 사라졌고, 검은 공간은 짐승의 아가리처럼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귀사의 신형이 촛농처럼 녹아내렸다. 그 역시 진신이 아닌 환영이었던 것이다.

진짜 귀사는 담호의 근처가 아닌 천중산 정상에 우뚝 서 있었다.

이형전혼술(異形轉魂術).

본신이 아닌 환영을 통해 자신의 말과 뜻을 전하는 사술이었다.

지금은 세상에서 사라진 소뢰음사의 비전 술법 중 하나로 워낙 내공의 소모가 극심해 알아도 펼치기 쉽지 않은 사술이었다.

귀사조차도 한 번 펼치면 탈진해서 사나흘을 앓아누워야 할 정도로 이형전혼술은 고도의 집중력과 엄청난 내공을 소모했다. 그래서 귀사도 평상시에는 펼치는 것을 꺼려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굳이 이형전혼술을 펼친 것은 바로 담호 때문이었다.

솔직히 인정했다시피 진신 무력으로는 담호를 상대할 자신이 없었다. 직접 대면하기엔 담호는 너무나 과격했고, 무시무시한 무력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직접 대면하는 대신 이형전혼술을 펼쳐 담호 앞에 나섰다.

산 아래 담호가 있던 곳을 중심으로 천혼사기가 안개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천혼사기는 결코 한두 명의 노력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기운이 아니었다.

지금 천중산 일대엔 백여 명에 달하는 혼술사(混術士)들이 포진해 있었다. 혼술사는 도가의 방술사와 비슷했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방술사들이 도가의 정통 술법을 익히는데 반해 혼술사들은 사술을 익힌다는 것뿐이었다.

정통 방술사에 비해 혼술사는 키우는 것이 몇 배는 더 힘들었다. 그만큼 사술을 지고한 경지로 익히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런 이유로 혼술사는 천사교 내에서도 그리 많지 않았다. 백 명이라고 하면 거의 전부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소중한 전력을 귀사는 전부 동원했다. 그 모든 것이 담호 때문이었다.

단순히 무력으로만 상대하기엔 담호는 너무나 부담스러운 존재였다. 이제껏 그의 주먹 아래 쓰러진 존재들의 면면만 살펴봐도 그랬다.

무림맹, 마교, 천사교 가릴 것 없이 각 세력에서 가장 무공이 강하다는 이들이 골고루 쓰러졌다.

천라지망도, 절대고수도 그에겐 소용이 없었다.

어떠한 역경 속에서도 일어나 정면으로 부딪쳐 오는 담호의 투지는 많은 이들을 두렵게 했다. 적어도 정면으로 그를 상대하는 것은 이쪽에서도 너무나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자칫하다가는 빈대 한 마리를 잡으려다가 초가삼간을 모조리 태울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귀사는 혼술사를 동원했다.

혼술사들은 사술만 전문적으로 익힌 이들이었다.

사술은 말 그대로 사이한 술법이었다.

도력을 쌓거나 진언을 이용하는 방술사들과 달리 혼술사들은 죽은 자들이 내뿜는 음기나 피를 이용해 기운을 쌓아 활용했다. 그 때문에 예로부터 혼술사들이 세상에 나오면 천하에 혼란이 찾아왔다.

전통 도가에서는 예로부터 혼술사를 방문좌도로 보고 척살했다. 그 때문에 혼술사들이 제대로 성장한 예가 없었다. 그만큼 희귀했기에 혼술사가 제대로 된 술법을 익혔을 때 어느 정도 위력을 발휘하는지에 대해서도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그것은 귀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처음 교주가 혼술사를 키우라고 했을 때는 의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혼술사를 키우고, 그들의 성취가 어느 정도 올라오자 교주의 뜻을 알 수 있었다.

혼술사 한두 명은 큰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하지만 십여 명 이상이 모여서 사술을 펼치게 되면 위력이 마치 눈덩이처럼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귀사는 똑같은 사술을 펼치는 혼술사들의 수를 점차 늘려 갔다.

열 명, 이십 명, 그리고 백 명으로 늘렸을 때 기이한 현상이 발생했다. 한계 이상으로 농축된 사기가 자연의 기와 충돌하면서 공명을 하는 것이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그런가 하고 넘어갔다. 그런데 근처에 피를 흘리고 있던 무인이 있었다. 갑자기 그의 피가 기화하면서 틈이 발생했다.

마치 검으로 공간을 베어 낸 것처럼 뜬금없이 나타난 검은 공간. 천사교에서는 그곳을 ‘틈’이라고 불렀다.

틈은 모든 것으로부터 격리되었다.

공간, 시간, 그리고 빛으로부터도.

그리고 일단 한 번 틈에 갇히면 빠져나오는 것은 불가능했다.

시험 삼아 중원의 고수 한 명을 납치해 와 집어넣었던 적이 있었다. 그는 중원에서도 내로라하는 무인이었지만 결국은 빠져나오지 못했다.

호기심에 제 스스로 틈으로 들어간 혼술사도 마찬가지였다.

일단 들어가면 절대 빠져나올 수 없는 공간.

최소한 백여 명의 혼술사들이 사술을 펼쳐야만 만들어지는 불가해(不可解)의 영역.

그 후부터 천사교에서는 그곳을 무간지옥(無間地獄)이라 불렀다.

무간지옥을 일단 한번 펼치면 혼술사들은 족히 일 년 이상을 앓아누워야 했다. 몸을 회복하는 데만 일 년이고, 원래의 실력을 되찾는 데는 그 몇 배의 시간이 걸렸다. 그만큼 부담이 큰 사술이 바로 무간지옥이었다.

천사교에서는 무간지옥을 비장의 한 수로 남겨 두고 있었다.

궁지에 몰리고 몰려,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을 때를 대비해 남겨 둔 그 한 수를 담호를 가두는 데 사용한 것이다.

“오옴!”

지금 이 순간에도 백여 명의 혼술사들은 천중산 곳곳에 흩어져 무간지옥을 펼치는 데 집중을 하고 있었다.

그들의 뺨은 홀쭉하게 들어갔고, 전신에서는 땀이 비 오듯 흐르고 있었다.

혼술사들은 남학을 제물 삼아 무간지옥을 열었고, 또한 담호를 가뒀다. 만일 남학이 담호 일행과 함께 있지 않았다면 무간지옥으로 담호를 가두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귀사는 모든 것이 뜻대로 이뤄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비장의 한 수로 숨겨 두었던 혼술사를 동원하는 것은 그로서도 무척이나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교주의 뜻에 반하는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무간지옥은 세상과 격리된 공간. 절대 빠져나올 수 없을 것이다. 그곳에서 영원히 썩어 가거라. 권마!”

귀사의 얼굴에 어린 안개가 출렁였다.

권마를 제거(除去)했다는 만족감에서 나오는 미소였다.

그는 말 그대로 담호를 세상에서 제거했다. 직접 죽이지는 못했지만, 존재를 지웠으니 소기의 목적을 이룬 셈이었다. 단지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이라면 이제 혼술사를 몇 년 동안은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커흑!”

“큭!”

그 증거로 기력이 다한 혼술사들이 차례로 픽픽 쓰러지고 있었다. 기력을 모두 탕진한 그들의 모습은 목내이나 다름없었다.

미리 대기하고 있던 무인들이 쓰러진 혼술사들을 들쳐 업고 천중산을 빠져나갔다. 귀사는 마지막까지 남아 무간지옥이 펼쳐져 있던 곳을 바라봤다.

담호와 방진보 등을 삼켜 버린 그곳은 언제 틈이 있었냐는 듯이 본래의 모습을 회복해 있었다. 무간지옥이 닫힌 것이다.

귀사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려 사라졌다.

칠흑 같은 어둠만이 가득할 거라 생각했던 그 공간은, 사실은 회색에 가까웠다. 하늘도 바닥도,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것이 잿빛이었다.

무한에 가깝게 펼쳐진 잿빛 공간, 그 한가운데 담호와 방진보 등이 서 있었다.

방진보가 눈을 끔뻑거렸다.

눈동자의 초점이 잘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야가 흐릿했고, 귀에서는 끊임없이 이명이 울리고 있었다.

균형 감각이 흩어져 제대로 서 있는 것조차 힘이 들었다. 실제로 남궁 형제는 일어서지 못해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그나마 방진보는 오행군자공을 대성의 경지에 달하도록 익혀서 버티고 있는 것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진즉에 남궁 형제처럼 주저앉고 말았을 것이다.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 그나마 다행히 시간이 지나면서 머릿속이 정돈되고, 귀에서 들려오던 이명도 잦아들었다. 방진보가 현 상황에 적응을 한 것이다.

그제야 방진보는 담호를 바라봤다.

미지의 공간에 들어온 그 순간부터 담호는 석상이 된 것처럼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혼란스럽기는 그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방진보와 다른 점이 하나 있다면 줄곧 냉철함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결계의 일종인가?’

담호는 그렇게 상황을 인식했다.

정확한 이치나 방법은 모르지만, 간혹 절진 중에는 이런 식으로 세상과 단절된 공간을 만들어 내는 것들이 있다고 들었다.

담호는 이 공간도 그런 방법으로 만들어진 곳이라고 생각했다.

이질적인 공간이었다.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것이 잿빛이었고, 시간의 흐름도 느껴지지 않았다.

모든 것이 정지(靜止)된 완벽한 고요의 세계.

담호가 문득 주먹을 들어 바닥을 내리쳤다. 파성추의 힘을 담은 일격이었다. 집채만 한 바위도 단숨에 박살 낼 힘이 바닥과 충돌했다.

투웅!

순간 격렬한 파장이 퍼져 나가더니 공간 전체가 출렁였다. 그리고 담호가 뒤로 튕겨 나갔다. 바닥에서 어마어마한 반진력이 발생한 것이다.

“형!”

방진보가 놀라 담호에게 달려왔다. 하지만 담호는 손을 들어 방진보가 자신에게 달려오는 것을 제지했다.

담호가 다시 한 번 파성추를 펼쳤다.

투웅!

이번에도 반진력과 함께 담호가 튕겨 나갔다. 다행히 이번에는 담호도 대비를 하고 있어 꼴사납게 뒤로 나가떨어지지는 않았다.

이로써 확실히 알았다.

이 세계는 전해진 충격만큼 반발했다. 그것도 똑같은 힘으로 말이다. 즉 담호가 가하는 힘만큼 반발력이 돌아온다는 뜻이었다.

담호는 그제야 이곳이 일반적인 결계와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적어도 그의 상식으로는 존재해서는 안 되는 곳이었다.

잠시 눈치를 보던 방진보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형! 괜찮아요?”

“괜찮다.”

“도대체 이곳은 어딜까요? 천중산이겠죠?”

조심스럽게 물어보는 방진보의 목소리엔 불안한 심경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이곳이 정말 절진에 의해 만들어진 환경이라면 천중산이라고 해야 옳았다. 절진이 제아무리 환경을 변화시킨다고 하더라도 위치조차 바꿔 버리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담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할 수 없었다. 그조차도 이곳이 어떤 곳인지 명확히 정의를 내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감각이 이상하게 교란되고, 배고픔이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담호의 눈빛이 깊이 가라앉았다.

이런 곳이 정상일 리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빠져나가지 못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어떤 난관이든 통과할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하기 마련이었다. 냉철함을 잃지만 않는다면 방법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관건은 이성을 차갑게 유지하는 것.

담호가 가장 잘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반드시 이곳을 나가게 될 것이다.”

그의 음성이 잿빛 세상에 울려 퍼졌다.

***

달빛이 고고히 비추는 연화봉 정상에 청수한 인상의 노도사가 홀로 서 있었다. 달빛이 그의 장삼에 부딪치며 부서졌다.

노도사는 바로 현소 진인이었다.

그는 달빛을 맞으며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하염없이 하늘을 올려다보는 현소 진인의 모습은 학처럼 고고하면서도 신비로워 보였다.

반개한 그의 눈은 마치 꿈을 꾸는 것처럼 몽혼하기 그지없었다.

그때 연화봉 위로 중년의 도사가 조용히 올라왔다. 그는 현소 진인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잠시 걸음을 멈췄다.

‘사숙!’

중년의 도사는 바로 화산파의 장문인인 운경이었다.

심사가 복잡해 잠시 바람이나 쐴까 해서 연화봉에 올라왔다가 현소 진인을 발견한 것이다.

운경이 화산파의 장문인이 되고 나서 가장 의지하는 이가 바로 현소 진인이었다. 비록 무공은 일초반식도 제대로 펼치지 못하지만 그 존재감만으로도 사람을 의지하게 만들었다.

문득 운경의 입가에 고졸한 미소가 떠올랐다.

설마 자신이 이렇게 현소 진인을 의지하게 될 줄은 스스로도 몰랐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현소 진인이 다시 화산파로 돌아온 것은 크나큰 축복이었다. 그가 있었기에 운경 진인은 정신적으로 의지하면서 이만큼이나 화산파를 이끌어 올 수 있었다. 그가 아니었다면 지금쯤 심마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을지도 몰랐다.

운경은 몽혼한 현소 진인의 눈이 신비하게 빛난다고 생각했다. 분명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지만, 그보다 훨씬 더 먼 곳을 보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때였다.

“운경 왔느냐?”

갑자기 현소 진인이 입을 열며 그를 바라봤다.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청정을 깨셨군요.”

“아니다.”

“그런데 무엇을 그리 보고 계셨습니까? 제 눈에는 별들밖에 보이지 않는데 말입니다.”

“내 눈에도 별들만 보인단다.”

현소 진인이 고졸한 미소를 지었다.

운경은 왠지 그의 미소가 낯설다고 생각했다.

“정말이십니까?”

“왜, 아닌 것 같으냐?”

“제 눈에는 사숙이 그 이상의 무언가를 읽는 것처럼 보입니다.”

“네가 나를 너무 후하게 평가하는구나. 무공도 익히지 못한 늙은이가 보면 무얼 보겠느냐? 그렇지 않아도 이제 안력이 조금씩 떨어지고 있는데.”

“사숙!”

“사실 눈이 침침해서 그런지, 아니면 내가 늙어서 그런 것인지 모르지만 잠시 꿈을 꾸었다.”

“꿈을 꾸셨단 말입니까?”

“그래! 별일이지? 별들을 하염없이 보다 보니 나도 모르게 꿈을 꾸었다. 꿈이 너무 생생해서 잠시 긴가민가하고 있던 차였다.”

“그렇습니까?”

“내가 본 광경은 너무 끔찍해서 차라리 꿈인 것이 다행이구나.”

“대체 어떤 꿈을 꾸셨기에?”

현소 진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모든 것이 지워진 세상.

날갯짓을 하지 않고도 하늘을 날던 거대한 새는 대지로 추락했고, 홀로 달리던 마차는 더 이상 달리지 않게 되었으며, 인간은 스스로의 의지로 짐승이 되었다. 검은 구름에 막혀 햇빛 한 점 들지 않는 어둠 가득한 세상엔 인성이라곤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 세상을 꿈에서 봤다고 어찌 말할까?

두 번 다시 꾸기 싫은 그런 악몽(惡夢)이었다.

이상하게 요즘 들어 이런 악몽을 자주 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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