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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권마-447화 (447/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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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7화 8장. 그래도 희망을 놓지 않는다(1)

마교의 본단이 있는 악양 거리는 한산했다.

무림맹과 소림사로 많은 병력이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주요 전력이 대부분 빠져 나갔기에 마교의 본단엔 최소한의 병력만이 남아서 지키고 있었다.

최소한의 병력이라고 하지만 어지간한 중원 대문파도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할 정도의 전력이었다. 때문에 감히 그 어떤 문파나 무인도 이곳에 쳐들어올 엄두를 낼 수 없었다.

한동안 굳게 닫혀 있던 본단의 정문이 열린 것은 해가 서산으로 뉘엿뉘엿 넘어갈 무렵이었다.

거대한 철문이 열리고 화려한 사두마차 한 대가 밖으로 나왔다. 마차가 향한 곳은 바로 근처에 있는 동정호였다.

평소 시인묵객들이 많이 찾는 동정호엔 한동안 인적이 드물었었다. 마교가 악양을 장악하자 사람들이 겁을 집어먹고 아예 접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들의 예상과 달리 마교는 무림과 상관없는 자들에겐 그 어떤 위해도 끼치지 않았다. 그러자 점차 예전처럼 많은 이들이 동정호를 찾았다.

동정호 변에 걸려 있던 수많은 등불들이 불을 밝혔다. 형형색색의 등불이 수면에 비치면서 환상적인 광경을 연출했다.

많은 이들이 동정호 변을 거닐면서 환상적인 풍경에 취했다. 성급한 이들은 벌써 기루를 찾아 술을 즐기고 있었다.

그곳에 마교에서 빠져나온 사두마차가 들어왔다. 사두마차가 멈춰 선 곳은 동정호의 선착장이었다. 선착장에는 많은 배들이 정박해 있었다.

이곳에 정박한 대부분의 배는 운마도강선처럼 장강을 주기적으로 운행하는 배가 아닌 풍류객들을 위한 배였다. 풍류객들은 이 배에 기녀들을 태우고 동정호에서 풍류를 즐겼다.

사락!

치마 끌리는 소리와 함께 사두마차에서 중년의 여인이 내렸다. 얼굴에 붉은 면사를 쓴 여인의 전신에서는 범접할 수 없는 고귀한 기세가 풍겨 나오고 있었다.

순간 가장 큰 풍류선에서 책임자가 뛰어나와 여인의 앞에 부복했다.

“소인 금오연이 마모를 뵙습니다.”

“오랜만이군, 금 당주.”

중년 여인이 얼굴을 가린 붉은 면사를 걷었다. 그러자 아름다운 얼굴이 드러났다.

성녀였지만, 스스로의 의지로 마모가 된 여인.

그녀는 바로 단운향이었다.

단운향의 앞에 있는 커다란 배는 바로 마교의 것이었다.

“동정호가 아름답다는 소리는 익히 들었지만, 직접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구나.”

“어찌 소식도 없이 오셨습니까?”

금오연의 얼굴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단운향은 마교 내에서도 가장 존귀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었다. 교주인 척관혈을 제외하면 그녀보다 귀한 이는 존재하지 않을 정도였다. 그런 그녀가 이렇게 예고도 없이 올 줄은 정말 몰랐기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동정호가 아름답다기에 구경이나 하려고 왔다. 배를 띄울 수 있겠는가?”

“당장 말입니까?”

“그렇다.”

“조, 조금만 기다려 주시면 금방 배를 띄우겠습니다.”

“준비를 할 게 무에 있을까? 그저 배만 띄우면 될 것을.”

“그래도 마모께서 타시는데 준비를 해야지 않겠습니까?”

“됐다.”

단운향은 금오연을 지나 배로 걸음을 옮겼다. 금오연은 그런 단운향의 기세에 밀려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휴! 어쩔 수 없지.”

그는 결국 고개를 숙인 채 그녀의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원래대로라면 그녀가 오기 전에 마교의 고수들을 배치해 두고, 만반의 준비를 해야 했다. 그녀의 안전을 위해서였다.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도 들었다.

‘별일이야 있겠는가? 이곳은 본교의 안마당인데.’

배에 타고 있는 선부들도 모두 무공을 익힌 고수였고, 소리만 지르면 달려올 마교의 고수들이 동정호 변에 수두룩했다.

결국 금오연은 동정호에 배를 띄웠다.

그 커다란 배가 소리도 없이 물을 가르며 앞으로 나갔다.

“아름답구나.”

단운향이 선수에서 동정호를 둘러보며 감탄사를 터트렸다.

악양에 온 후 단운향은 교주인 척관혈과 함께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꿈결 같은 시간이 지나간 후에야 그녀는 비로소 악양을 둘러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세상이 어지럽다고 하지만 동정호는 별개의 세상처럼 아름다운 풍경을 자랑하고 있었다. 해가 완전히 떨어지자 배가 한두 척씩 동정호로 나왔다.

배 위에 화려한 등불이 걸리면서 수면엔 꽃이 핀 것처럼 형형색색의 불빛이 수를 놓았다. 등불의 빛과 수면의 일렁임, 그리고 달빛이 어우러져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신비로운 광경을 만들어 냈다.

“아름답구나. 동정호의 야경이 천하제일이라더니, 정말 대단하구나.”

환상적인 동정호의 야경을 보자 단운향은 조금은 답답했던 가슴이 시원해지는 것을 느꼈다.

언제부터였는지 모르지만 바위를 올려놓은 것처럼 가슴이 불현듯 답답해질 때가 있었다. 그럴 때면 머릿속이 몽혼해지는 것이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언제부터였지?’

그녀는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깊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비록 무공을 익힌 고수였지만, 그녀 역시 사람이었다. 사람인 이상 여러 가지 생리 현상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이번에도 그런 거라고 생각했다.

화려한 자태를 뽐내는 등불들을 보고 있자니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지금쯤이면 본교의 전력이 무림맹 근처에 도착했겠구나.”

마교와 천하의 운명이 갈리는 천하대전이었다. 그런 역사적인 전투에 참여할 수 없다는 사실이 못내 아쉬웠지만, 그녀에겐 이곳에서 할 일이 있었다.

바로 교주인 척관혈을 안정시키는 것이었다.

풍월제 단공월에게 암습당한 이후로 척관혈은 때때로 발작을 하곤 했다. 척관혈은 가히 천하제일이라 불려도 아깝지 않을 무공을 익힌 고수였다.

그런 그의 광증이 폭발하면 마교도 감당하기 힘들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단운향이 있으면 눈에 띄게 안정된다는 것이다.

마교에 돌아온 이후 단운향이 척관혈의 곁에 붙어 있는 것도 그와 같은 이유 때문이었다.

“이제 신교 천하가 멀지 않았다. 천하의 모든 백성이 곧 신교를 믿게 되리라.”

그녀는 새 시대가 열릴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리고 새 시대의 주인은 당연히 신교가 될 것이다.

단운향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걸렸다. 그녀의 미소는 달빛을 받아 무척이나 아름답게 빛났다.

시간이 지나자 동정호에는 더욱 많은 배들이 나타났다. 기녀들을 옆구리에 낀 채 웃음을 흘리는 풍류객부터 시인묵객까지 종류도 다양했다. 어떤 배는 아예 악공까지 태워 탄주를 하게 했다.

문득 그녀의 눈에 한기가 스쳐 지나갔다.

‘쓰레기 같은 것들.’

어떤 대의나 이상도 없이 현재를 소비하는 쓸모없는 인간들. 단운향은 그런 인간들을 증오했다. 그리고 지금 동정호에 배를 띄우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녀의 눈에는 쓸모없는 인간으로 보였다.

그때였다. 조그만 배 한 척이 미끄러지듯 그녀가 타고 있는 배 쪽으로 다가왔다. 다른 배들과 마찬가지로 등불을 잔뜩 걸고 있는 배였다. 한 가지 다른 점이라면 배 위엔 기녀도, 음악을 연주하는 악공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배의 선수에는 바람에 옷자락을 흩날리는 여인이 홀로 서 있었다. 등불에 그림자가 져서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단운향은 왠지 여인의 자태가 눈에 익다고 생각했다. 그런 그녀의 생각은 배가 점점 가까워질수록 확신으로 변했다.

여인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그림자가 점차 사라지고 본모습이 드러났을 때 단운향의 얼굴엔 한 겹 서리가 내려앉아 있었다.

“네년이 감히…….”

상대편 배 위에 타고 있는 여인은 그녀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당혹스러웠다. 그 여인은 결코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될 사람이었기에.

“유경!”

“오랜만이에요, 사부.”

“네년이 간덩이가 부은 모양이구나. 감히 이곳이 어딘 줄 알고 기어 들어온 것이냐?”

“전 그럴 만한 자격이 있어요, 사부. 전 아직도 본교의 성녀예요. 사부가 인정을 하든, 하지 않든 간에요.”

담담히 대답하는 여인은 바로 음유경이었다.

그녀의 등장은 단운향을 분노케 하기 충분했다. 이곳은 마교의 본단이 있는 곳이었다. 무림의 새로운 성지가 될 이곳에 음유경과 같은 더러운 반역자가 설 땅은 존재하지 않았다.

“누가 아직도 네가 성녀라고 하더냐? 너는 이미 본교에서 파문됐다.”

“누구도 나를 파문할 수 없어요. 내가 원하지 않는다면요.”

“감히!”

단운향이 살기를 피워 올렸다. 그러자 배에 타고 있던 선부들이 무기를 꺼내 들었다. 비록 이곳에서 배나 몰고 있지만, 그들 역시 무공을 익힌 마교의 고수들이었다.

단운향이 그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당장 저년을 잡아 와 내 앞에 무릎을 꿇려라.”

“존명!”

금오연이 복명을 하며 수하들과 함께 몸을 날리려는 그 순간이었다.

“멈춰요.”

갑자기 음유경이 손을 들며 외쳤다. 그녀의 손에는 둥근 철패가 들려 있었다.

단운향이 그런 음유경을 비웃으려 했다. 겨우 철패 하나 들고 뭐라도 되는 것처럼 명령을 내리는 음유경의 태도가 가소로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철패에 새겨진 문양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건…… 설마?”

“마, 마모 님?”

단운향뿐만 아니라 금오연과 수하들도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음유경의 손에 들린 물건은 아주 오래전에 이 세상에서 사라진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성물?”

“맞아요. 본교의 성물이에요. 설마 성물의 권위를 부정하진 않겠죠?”

“그걸 어떻게?”

단운향의 얼굴엔 불신의 기색이 역력했다.

그녀도 한때는 성녀였었다. 때문에 음유경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이 진짜 성물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음유경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성물의 권위로 명을 내리겠어요. 지금 당장 무장을 해제하고 물러나세요.”

“서, 성물의 명을 받습니다.”

금오연이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성물은 교주와 대등한 권위를 지닌다. 때문에 금오연과 같은 일반 문도들은 성물의 명을 받들 수밖에 없었다.

금오연과 수하들이 내친김에 허리에 찬 검까지 풀려는 순간이었다.

서걱!

날카로운 절삭음과 함께 금오연과 수하들의 머리가 순식간에 잘려 나갔다.

바닥을 나뒹구는 금오연 등의 머리가 죽음조차 인지하지 못한 듯 눈을 깜빡였다.

그 모습을 본 음유경의 표정이 철갑을 씌운 것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지금 성물의 권위를 부정하는 건가요?”

“아니, 인정한다. 예전의 나였다면 말이지. 허나 지금의 나는 성녀가 아닌 마모다. 새로운 신교를 꿈꾸기에 구시대의 유물에 불과한 쇠 쪼가리의 명은 내게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호호호!”

단운향의 교소가 동정호에 울려 퍼졌다. 순간 일대의 수면이 크게 출렁였다. 그녀의 교소가 조용하던 수면에 파도를 일게 만든 것이다. 그야말로 가공할 내공이었다. 하지만 음유경이 놀란 것은 그녀의 내공 때문이 아닌 성물의 권위가 철저하게 부정당했기 때문이다.

성물은 신교를 창시한 일대 교주를 상징했다. 때문에 교주의 명에 우선하는 권위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단운향은 그런 성물의 권위를 철저하게 부정하고 있었다.

‘이렇게 될지도 모른다고 예상은 했지만…….’

성물의 권위를 부정한다는 것 자체가 지금의 신교가 과거와 단절이 됐다는 것을 의미했다. 음유경으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사실이었다.

음유경이 목소리를 높였다.

“정신 차리세요, 사부. 제게 반드시 성물을 찾아 법을 세워야 한다고 가르쳐 주셨던 분이 바로 사부였어요.”

“과거의 나는 분명 그랬지. 허나 지금의 나는 다르다. 새롭게 태어나는 신교에 그런 과거의 명령은 필요하지 않다.”

단운향의 눈에서 섬뜩한 광망이 폭사되어 나왔다. 그녀의 눈빛을 정면으로 마주한 음유경은 순간적으로 정신이 아찔해지는 것을 느꼈다.

‘사기?’

단운향의 눈에서 느껴지는 기운은 분명 혼탁한 사기였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말이다.

‘사부도 천사교에 당한 것인가?’

그때 단운향이 배를 건너뛰어 공격해 왔다. 음유경도 지체하지 않고 반격을 했다.

콰콰콰!

잠잠하던 동정호에 폭풍이 휘몰아쳤다.

두 여인은 두 마리 용이 되어 서로를 공격했다.

예전이었다면 음유경이 단운향의 상대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음유경은 예전과 달랐다.

그녀가 달라진 것을 제일 먼저 눈치챈 이는 바로 사부였었던 단운향이었다.

“이렇게 강해지다니, 설마 성물의 무공을 얻은 것이냐?”

“일부를 취했어요.”

“그럼 나머지는?”

음유경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단운향은 큰 충격을 받았다.

‘저년이 진짜 성물의 무공을 익혔다면 위험하다.’

단운향은 힘을 모아 음유경을 공격했다. 하지만 그녀의 공격은 음유경이 휘두른 일검에 갈라졌다.

음유경은 여세를 몰아 다시 단운향을 공격하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단운향이 허공으로 길게 몸을 빼 도주한 것이다.

“치잇!”

음유경이 서둘러 단운향을 추적하려다가 멈칫했다.

이제까지 단운향이 타고 있던 배 위에 보지 못했던 책자 하나가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단운향이 떨어트린 것이었다.

음유경이 급히 책자를 집어 들었다.

천사심마공(天邪心魔功).

책자엔 그렇게 적혀 있었다. 하지만 단운향에겐 책자를 살펴볼 여유가 없었다. 동정호 변에 대기하고 있던 마교의 고수들이 배를 몰거나 수상비를 펼쳐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음유경은 하는 수 없이 배를 반대편으로 몰아 빠져나갈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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