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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권마-448화 (448/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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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8화 8장. 그래도 희망을 놓지 않는다(2)

“미안해요. 실패했어요.”

음유경이 거처로 돌아오자마자 제일 먼저 한 말은 사과였다.

비밀리에 마련한 거처에는 검율천과 신무월, 명천 등이 모여 있었다.

“역시 성물의 권위를 부정한 모양이군.”

이미 예상이라도 했던 것처럼 검율천이 담담히 말했다.

“맞아요. 사부는 더 이상 성물을 인정하지 않아요.”

“상관없어. 이미 예상했던 바니까.”

“하지만…….”

“됐어. 안 되는 것에 더 이상 심력을 소모하지 마.”

검율천의 단호한 말에 음유경이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각고의 노력으로 어렵게 구한 성물이었다. 음유경은 성물의 권위라면 신교의 수뇌부들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 거란 기대를 했다. 하지만 검율천은 달랐다.

성물이 권위를 갖는 것은 그만한 무력과 정통성이 뒷받침되었을 때의 이야기였다. 음유경은 더 이상 신교의 성녀도 아니었고, 정통성 있는 후계자도 아니었다. 당연히 성물의 권위가 통할 리 없었다.

힘이 뒷받침되지 않는 권위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검율천은 이미 알고 있었다. 적자생존의 대지인 신교에서 힘의 논리보다 앞서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미안해요. 괜히 내 고집 때문에 이제 저들이 경각심을 갖게 되었어요.”

“상관없어. 어느 정도는 예상했으니까.”

“참! 이거요.”

갑자기 음유경이 품에서 책자 하나를 꺼냈다.

동정호에서 단운향이 떨어트리고 간 천사심마공(天邪心魔功)이었다.

“사부가 가지고 있던 거예요. 전 신교에 이런 무공이 있다는 것을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어요.”

검율천이 천사심마공을 받아 조용히 읽기 시작했다.

서책을 읽어 내리는 동안 그의 표정은 조금씩 경직되기 시작했다. 신무월과 명천이 그 모습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그들이 아는 검율천은 이렇게 감정의 변화를 잘 드러내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신무월이 명천에게 속삭였다.

“무슨 책이기에?”

“잠시만 기다려 보죠. 대형이 읽으시면 이야기해 주실 겁니다.”

명천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검율천을 바라보았다.

탁!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 마침내 검율천이 천사심마공을 덮었다.

“휴!”

그제야 그의 입에서 이제까지 억눌러 두었던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런 검율천의 눈에서 순간적으로 유성처럼 강렬한 빛이 터져 나왔다.

“대형!”

“왜 그러세요?”

검율천의 심상치 않은 반응에 신무월과 명천이 앞을 다퉈 이유를 물었다. 하지만 검율천은 대답 대신 음유경을 바라봤다.

“혹시 이 책을 읽었느냐?”

“추적대를 피하느라 읽을 시간이 없었어요. 왜 그러나요?”

“천만다행이구나.”

“왜 그래요?”

“이 책엔 심마의 씨앗이 담겨 있다.”

“그게 무슨?”

“얼핏 봐선 일반 무공서나 다름없다. 고절한 이치도 담겨져 있고. 허나 교묘하게 구절구절에 심마를 일으킬 수 있는 구결들이 숨겨져 있다.”

천사심마공을 바라보는 검율천의 눈빛이 차가웠다.

실제로 천사심마공을 읽는 내내 그는 마음이 요동치는 것을 느꼈다. 명경지수를 넘어 부동심의 경지에 이른 그의 마음이 흔들릴 정도로 천사심마공에 숨겨져 있는 구결들은 지독하면서도 교묘했다.

“누구라도 이 책을 한번 읽으면 심마에 빠질 수밖에 없다. 단지 시일의 차이만 있을 뿐, 언젠가 심마가 싹을 틔울 것이다. 특히 이 무공을 익히는 순간 심마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지다가 종국에는 스스로를 폭주시키며 파멸의 길을 달려갈 것이다.”

“어찌 그럴 수가? 그럼 당신은 괜찮나요? 당신도 이 책을 읽었잖아요.”

“나는 괜찮다.”

“역시 천마심공(天魔心功) 때문인가요?”

검율천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성물에는 신교의 호교무공이 숨겨져 있었다. 그중 가장 핵심적인 것이 바로 심공인 천마심공이었다. 초대 조사 이후 절전된 무공이었기에 이젠 그런 무공이 존재했었다는 사실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지난 수백 년 동안 강호는 발전을 했다. 예전의 무공보다 오히려 위력적인 무공도 많이 나왔기에 옛 무공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런 분위기는 신교에도 통용됐다. 수많은 세대를 거치면서 옛 무공들은 훨씬 효율적으로 개량됐다. 그 때문에 많은 이들이 옛 무공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오래전에 만들어진 무공 중에 아직까지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것들은 기반 자체가 탄탄했다.

빠르게 가는 속성이 아닌, 느리더라도 기반을 탄탄히 다지는 정통의 길을 걷기에 외부의 영향을 적게 받는다.

검율천이 새로이 익힌 천마심공이 그랬다. 천마심공은 모든 것을 포용하는 심공이었다. 검율천이 본래 익힌 뇌정류는 패도무쌍한 무공이었다. 벽력의 힘을 담고 있기에 결코 다른 무공에 뒤섞일 수가 없었다. 그런데 천마심공은 뇌정류까지 포용했다. 그리고 뇌정류의 위력을 배가시켰다.

있을 수 없는 일이 천마심공으로 가능해진 것이다.

천마심공엔 마(魔)라는 단어가 들어가지만 오히려 도가의 무공에 가까웠다. 특히 포용이라는 부분에 있어서는 그 어떤 무공도 따라올 수 없었다.

검율천이 천마심공을 익혔기에 천사심마공에 심마의 씨앗이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지, 다른 이였다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마모가 천사심마공을 읽었을 확률은?”

검율천의 물음에 음유경이 단운향을 만났던 기억을 떠올렸다.

‘동정호에서 사부는 확실히 정상은 아니었어.’

평소와 달리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빛과 차분하지 못한 이성, 은연중 느껴지던 사기, 그 모든 것이 단운향이 천사심마공을 읽었다는 사실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확실히 그녀는 천사심마공을 읽은 것 같아요.”

단운향은 단운향에게 의심을 느낀 점을 가감 없이 말했다. 모든 이야기를 들은 검율천이 수긍했다.

“분명 천사심마공을 읽었군.”

“도대체 그녀가 어디서 이런 사악한 무공을 얻은 걸까요?”

“이제부터 그것을 알아봐야지.”

검율천의 목소리가 묵직하게 가라앉았다.

그는 오랫동안 천사교를 추적해 왔다. 그렇기에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천사심마공이 천사교에서 흘러나온 무공이라는 것을.

“이 정도로 교묘하게 무공상에 심마를 일으킬 구결을 자연스럽게 녹이려면 보통 고수가 아니야.”

이제까지 세상에 존재하지 않던 무공을 새로이 창안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거기에 무공 속에 이렇듯 심마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구결을 교묘하게 삽입하는 것은 무공이 가히 신화경에 이르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검율천은 그럴 가능성이 있는 존재를 단 한 명 알고 있었다.

“천사교주. 분명 천사심마공은 천사교의 교주가 만든 것이 분명해. 이 서책의 출처를 찾는다면 천사교의 교주를 찾을 수 있을 거야.”

검율천의 시선이 명천을 향했다.

명천이 기억을 더듬으며 말했다.

“마모는 사천성에서 권마에게 큰 상처를 입고 운남성의 분원으로 몸을 피했어요. 사천성에서는 심마의 기색이 전혀 없었으니 분명 그 후에 서책을 얻었을 가능성이 커요.”

“분원이라.”

“네! 이곳에 와서는 교주와 쭉 함께 있었으니 다른 경로로 얻었을 가능성은 없어요. 그렇게 본다면 분원의 누군가가 그녀에게 천사심마공을 주었을 가능성이 커요.”

“분원의 누군 것 같으냐?”

“마모가 신뢰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아요. 극히 한정적이죠. 그중에서도 가장 신뢰하는 이라면…….”

“혈노겠군.”

“맞아요.”

명천의 확신 어린 대답에 검율천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혈노는 여러모로 신비한 인물이었다.

그가 언제부터 신교에 있었는지 정확히 아는 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제까지 전면에 부각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최근에 신교 내 포교 조직인 중천이 부각되면서 많이 언급되기 시작했지, 그 전에는 그의 이름을 알고 있는 이조차 드물었다.

명천조차 단운향에 대해 조사하면서 겨우 알게 된 이름이었다. 그만큼 그의 많은 것이 두터운 장막에 가려져 있었다.

“혈노는 지금 어디에 있지?”

“마모와 함께 마교의 본단으로 들어온 것으로 파악되었어요. 하지만 정확한 위치는 아직 몰라요.”

“최우선적으로 그의 행방을 추적해. 그야말로 이번 사태의 핵심 인물이니까.”

“알겠어요.”

명천이 굳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검율천이 일행을 둘러봤다.

“모두 알고 있겠지만 이대로 두면 중원 무림과 신교의 공멸은 기정사실이 될 것이다. 천하엔 피가 넘쳐흐르고 수많은 이들이 죽어 갈 것이다.”

모두가 그의 말에 집중했다.

그들이 이제까지 믿고 따라온 남자였다.

그가 아니었으면 이곳까지 올 수도 없었다는 사실을 알기에 검율천을 바라보는 그들의 눈엔 신뢰가 가득했다.

검율천의 말이 이어졌다.

“나온 지 오래되었지만 신교는 우리 모두의 고향이 분명하다. 우리의 고향이 다른 누군가에 휘둘려 상처 입고 피를 흘리고 있다. 이대로 간다면 신교는 결국 파멸하고 말 것이다. 그런 최악의 상황만큼은 반드시 막아야 한다. 모두 힘들겠지만 조금만 더 힘을 내자. 지금 우리가 흘리는 피는 결국은 신교를 위한 밑거름이 될 테니.”

“하하! 당연한 말 아닙니까?”

“명만 내리세요. 대형의 명이라면 불구덩이에 뛰어들라고 해도 따를 테니까.”

“이제까지 당신을 믿고 왔듯이 앞으로도 그럴 거예요. 우린 당신의 등 뒤만 보고 따라갈 거예요.”

단지 하루 이틀의 인연, 말 몇 마디로 쌓인 신뢰가 아니었다.

검율천은 그 어떤 고난과 역경에도 남을 내세우지 않았다. 항상 선두에 서서 그 모든 풍파를 몸으로 막아 냈다. 그렇게 자신의 온몸으로 길을 열고, 자신이 만들어 낸 길로 동생들을 따라오게 했다.

검율천의 신념을 믿기에 그들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검율천 또한 그들이 있기에 이 거칠고 힘든 길을 용기 내어 걸을 수 있었다.

‘이 길을 걷다 보면 언젠가는 정상에서 그와 만나겠지.’

그가 유일하게 친구이자 경쟁자라고 생각하는 인물, 화산이 세상에 내보낸 희대의 무인 권마와.

검율천은 언제고 그와 반대편에서 만나게 될 거라고 예감했다. 그때까지 자신이 쓰러지지 않는다면 말이다.

***

천중산은 언제부턴가 사람들이 접근하지 않는 죽음의 대지가 되었다. 항상 선기가 가득하던 산에는 언제부턴가 귀기가 어렸고, 산에 들어갔던 사람들은 핼쑥한 얼굴로 겨우 빠져나왔다.

그들은 하나같이 천중산에서 몇 날 며칠을 헤매다가 나왔다고 했다. 평생을 천중산 인근에서 살았던 사람들도 예외는 없었다. 일단 천중산에만 들어갔다 하면 방향 감각이 이상해져서 길을 헤매게 된다고 했다.

멋모르고 천중산에 들어갔던 사람들은 겨우 빠져나와서도 여러 날을 고생했다. 사정이 그렇다 보니 천중산에는 사람들의 발길이 뚝 끊겼다.

사람의 발길이 끊어진 산은 더욱 무성해지기 마련이었다. 천중산 역시 그랬다. 예전에 사람이 다니던 길에는 수풀이 무성하게 자라 원래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쿠웅!

정적이 감도는 산에 언제부턴가 둔중한 소성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쿠웅! 쿠웅!

처음엔 희미하기만 하던 소성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커져 갔다. 마치 산이 울음을 토하는 것 같은 소리에 짐승들이 제일 먼저 도망갔다. 그리고 산새가 날아오르던 그 순간이었다.

쩌어엉!

갑자기 천지에 균열이 가는 듯한 날카로운 소성이 천중산 일대에 울려 퍼지는가 싶더니 이내 사나운 바람이 사방으로 터져 나갔다.

아름드리나무가 사나운 바람에 뿌리째 뽑혀 나가고, 커다란 바위가 원래 있던 자리에서 벗어나 처참한 모습으로 뒹굴었다.

사나운 바람이 휘몰아치는 근원에 커다란 균열이 생겨났다. 투명하기만 하던 공간에 마치 먹물이 뿌려진 것 같았다.

츠으으!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짙고 검은 공간에서는 사나운 바람이 무섭게 풀려 나왔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던 바람은 잠시 후 서서히 잦아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바람이 완전히 멈췄을 때, 검은 공간이 일렁인다 싶더니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얼굴을 가리는 긴 머리카락과 코밑과 턱을 뒤덮은 짙은 수염, 다 찢어진 피풍의로 전신을 가린 사내였다. 사내의 검은 머리와 검은 피풍의 위에는 짙은 먼지가 쌓여 있었다.

사내는 잠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시리도록 푸른 하늘과 녹음이 가득한 천중산의 주봉이 눈에 들어왔다.

사내가 얼굴을 가린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그러자 가려 있던 원래의 얼굴이 드러났다.

짙은 눈썹 아래 자리 잡은 차가우면서도 깊은 눈동자. 비록 코 아래로는 수염이 가득했지만 그는 담호가 분명했다.

그때 담호의 등 뒤에서 아직 앳된 목소리들이 들려나왔다.

“밖이다.”

“드디어 나왔어.”

“크흑!”

검은 균열에서 빠져나와 감격 어린 음성을 토해 내는 이들은 바로 방진보와 남궁 형제였다.

그들은 푸른 하늘을 우러러보며 어깨를 떨고 있었다.

눈을 아프게 하는 눈부신 햇살마저도 감미롭게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그들의 감동은 뒤이어 나온 한 존재에 의해 묻혀버리고 말았다.

“으허헝!”

갑자기 균열에서 뛰어나와 대성통곡을 하는 사내. 헝클어진 머리카락이 허리 아래까지 뒤덮었고, 얼굴에 난 수염은 가슴까지 내려와 이목구별을 구별할 수 없었다.

“드디어 돌아왔다. 으아아아!”

그는 한참을 울다가 하늘을 향해 크게 소리를 쳤다.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수많은 감정이 그의 외침에 담겨 있었다.

그가 뒤를 돌아봤다.

검은 균열, 무간지옥(無間地獄)이 서서히 닫히고 있었다. 그제야 세상으로 돌아왔음을 직감한 사내가 담호에게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 기산월, 충심을 다해 주군을 모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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