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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권마-449화 (449/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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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9화 8장. 그래도 희망을 놓지 않는다(3)

무간지옥은 살아 있는 생명체가 있을 수 없는 곳이었다.

그곳은 온통 잿빛 세상이었다. 하늘도 땅도 구별할 수 없었고, 시간의 흐름마저 느껴지지 않는 그런 곳이었다.

담호와 방진보는 무간지옥을 빠져나오기 위해 노력했지만, 방법을 찾을 수가 없었다. 아직 어린 남궁 형제는 절망에 빠졌지만, 담호와 방진보는 결코 좌절하지 않았다.

방진보는 담호가 반드시 방법을 찾아낼 거라고 믿었다.

담호는 방진보와 남궁 형제를 데리고 무간지옥 안을 헤맸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무간지옥 안에서 시간의 흐름이 느껴지지 않아 배고픔이 전해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무간지옥에 들어온 지 얼마나 됐는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며칠 안 된 것일 수도 있었고, 어쩌면 수 년이 넘은 것인지도 몰랐다.

이 기묘한 공간은 사람의 감각을 교란시켜 정상적인 판단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담호는 어쩌면 무간지옥이 결계 안의 공간이 아니라 어떤 시공의 틈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겨우 진(陣)으로 만들어 내기엔 너무나 광활한 세계였고, 불가해의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자신들 외에는 살아 있는 생명체는 존재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곳에서 뜻밖의 존재를 만났다.

살아 있는 사람, 그가 바로 기산월이었다.

얼마나 오래 무간지옥에 있었는지 모르지만 기산월은 지쳐 있었다. 아니, 미쳐 있었다.

그가 왜 무간지옥에 갇혀 있는 것인지는 몰랐다. 하지만 그가 매우 오랫동안 무간지옥에 갇혀 있던 것만은 확실했다.

혼자라는 고립감이, 영원히 무간지옥에서 빠져나갈 수 없다는 두려움이 그를 미치게 만들었다.

담호 일행을 처음 만났을 때 기산월은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 광기가 폭발한 것이다. 그의 광기를 잠재운 이는 바로 담호였다.

담호가 발산하는 원초적인 살기가 그의 광기마저 날려 버린 것이다. 정신을 되찾은 기산월은 수많은 감정이 담긴 울음을 토해 냈다.

그는 무간지옥에 담긴 비밀스러운 속살을 조금이나마 엿본 사람이었다. 그가 아니었으면 담호는 절대 무간지옥을 빠져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어렵게 무간지옥을 빠져나왔지만 담호의 표정엔 변화가 없었다. 오히려 그의 눈빛은 무간지옥에 들어가기 전보다 더욱 깊이 가라앉아 있었다.

지금은 감격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니었다.

그가 무간지옥에 갇혀 있는 동안 세상이 어떻게 변했을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잠시 주위를 둘러보던 담호가 혹시나 하고 휘파람을 길게 불었다.

“형?”

방진보가 의아한 표정으로 담호를 바라보던 그 순간이었다. 갑자기 근처의 수풀을 뚫고 검은 짐승이 뛰쳐나왔다.

잡털 하나 없이 칠흑처럼 검은 말, 바로 흑귀였다.

흑귀는 담호를 보자마자 달려와 미친 듯이 커다란 얼굴을 비벼 댔다. 담호는 그런 흑귀의 목덜미를 조용히 두들겨 줬다.

흑귀가 얼마나 오랫동안 이곳에서 있었는지 몰랐지만, 생각보다 상태가 괜찮아 보였다.

방진보가 혹시나 하고 휘파람을 불었지만, 그가 타고 다니던 백마는 나타나지 않았다.

“뭐, 괜찮아.”

방진보는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

어차피 예상했던 일이었다. 정이 많이 들긴 했지만, 백마가 흑귀처럼 영물이 아닌 이상 이곳에서 조용히 기다려 줄 리 없었다. 하지만 가슴 한편이 쓸쓸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담호가 방진보 등에게 말했다.

“가자.”

“예!”

그들이 한목소리로 대답했다.

담호가 흑귀의 고삐를 잡은 채 앞장섰다. 방진보와 남궁 형제가 그 뒤를 따랐고, 기산월이 제일 뒤로 처졌다.

“오오!”

기산월은 천중산의 푸른 전경을 보며 연신 감탄사를 흘렸다. 얼굴을 뒤덮은 머리카락 사이로 물기가 보였다. 울고 있는 것이다.

피부에 느껴지는 따사로운 햇살과 머리카락을 간질이는 부드러운 바람, 폐부 깊숙이 느껴지는 신선한 공기는 무간지옥에 있을 때는 전혀 느끼지 못했던 것들이었다.

‘꿈은 아니겠지?’

그는 꿈이라면 영원히 깨어나지 않길 바라며 담호를 따랐다.

서평(西平)은 천중산 인근에 자리 잡고 있는 제법 큰 현이었다. 하남성을 남북으로 관통하는 관도가 지나가는지라 서평은 항상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곳이었다. 하지만 담호 일행이 들어섰을 때 서평은 조용하기만 했다. 거리에 사람들이 거의 보이지 않는 것이 현 전체가 을씨년스럽게 보였다.

담호의 눈엔 그런 광경이 이질적으로 보였지만 오랫동안 틈, 즉 무간지옥에 갇혀 있었던 방진보와 남궁 형제의 눈에는 그런 풍경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들은 한시라도 빨리 좋은 객잔에 들어가 씻고, 배불리 먹고, 푹 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들은 인근에서 가장 커 보이는 객잔으로 들어가 별채를 잡았다.

방진보와 남궁 형제는 재빨리 우물가로 달려가 찬물을 몸에 끼얹었다. 날씨가 제법 선선해졌기에 우물물도 제법 차가웠지만,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어푸!”

“아, 좋다.”

“이제 살 것 같다.”

그들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조금은 성숙해진 듯한 그런 웃음이었다.

담호와 기산월은 별채 앞 평상에 앉아 방진보와 남궁 형제를 바라보았다. 부끄럽지도 않은지 옷을 홀딱 벗고 수욕을 하는 세 사람의 모습은 보는 것만으로도 시원해졌다.

기산월이 그들에게서 시선을 돌려 담호를 바라봤다.

마치 석상 같은 얼굴이었다. 그 어떤 감정도 드러나지 않는 무표정함이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기산월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성을 되찾고 처음으로 마주한 담호의 얼굴은 그에게 섬뜩한 두려움을 안겨 주기 충분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적의 입장에서 생각했을 때였다. 담호와 같은 편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보다 든든할 수는 없었다.

기산월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주군!”

“난 당신의 주군이 아니야.”

“저는 아주 오래전에 맹세했습니다. 저를 그 지옥 같은 곳에서 꺼내 주는 분에게 내 육신과 영혼을 모두 바칠 거라고. 이 기산월, 죽을 때까지 충심으로 주군을 따르겠습니다. 만일 지금 하는 맹세가 거짓이라면 제 영혼은 영원히 안식할 곳을 찾지 못하고 지옥 불에서 끝없는 고통을 받을 겁니다.”

기산월은 담호를 똑바로 바라봤다. 얼굴을 가린 머리카락 사이로 기묘한 눈빛이 일렁였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보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홀려 버릴 정도로 기산월의 눈빛엔 사이한 기운이 가득했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담호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 수도 없었다. 오히려 담호의 눈빛에 기산월은 두려운 표정을 지었다.

끝을 알 수 없는 담호의 깊은 눈빛은 그에게 짙은 공포를 안겨 주고 있었다. 마치 영혼이 옥죄어 오는 느낌이었다. 그를 배신한다거나 다른 생각을 한다는 것은 감히 시도조차 할 수 없었다.

기산월은 더 이상 담호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담호는 그런 기산월을 무심히 바라보다 다시 방진보와 남궁 형제를 바라봤다.

세 사람은 이제 수욕을 끝냈는지 옷을 주섬주섬 걸치고 있었다. 오랜만에 수욕을 해서 그런지 그들의 얼굴에 어린 환한 미소는 사라지지 않았다.

기산월이 담호에게 말했다.

“이제 주군도 씻으시지요. 저는 나중에 씻겠습니다.”

담호를 대하는 그의 태도는 너무나 극진해서 오히려 부담스러울 정도였다.

담호는 말없이 우물가로 걸어갔다.

이제까지 걸치고 있던 옷을 벗자 두텁게 쌓인 먼지가 우수수 떨어졌다. 옷에 쌓인 먼지가 그가 무간지옥에 갇혀 있던 시간을 가늠케 했다.

옷을 벗자 수많은 상처로 덮인 담호의 알몸이 드러났다. 상처 위에 또 상처가 생겨나고, 그렇게 얽히고설킨 상처가 마치 갑옷처럼 보였다.

기산월이 눈을 크게 치떴다.

저런 상처를 입고도 인간이 살아 있을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경이로웠기 때문이다.

‘대체 주군께서는 어떤 길을 걸어오셨기에.’

방진보로부터 대충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한 다리 건너 듣는 것과 직접 보는 것은 큰 차이가 있었다.

담호의 몸에 새겨진 낙인과도 같은 상처가 그가 어떠한 길을 걸어왔는지 말해 주고 있었다. 그래서 더욱 경이롭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담호는 대충 물을 끼얹고 옷을 다시 입었다. 몸에 물기가 채 마르지 않았지만 잠시 내공을 운용하니 수증기가 되어 사라졌다.

마지막으로 기산월이 우물가에 섰다. 우물에 찰랑이는 물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엔 만감이 교차하고 있었다.

그곳에선 이렇게 많은 물을 볼 수 없었다. 맑고 투명한 물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산월은 중원으로 돌아왔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기산월이 우물에 손을 뻗었다. 그러자 기묘한 현상이 일어났다. 고요하던 수면에 갑자기 파문이 일기 시작하더니 물줄기가 절로 치솟아 오른 것이다.

마치 뱀처럼 허공에 똬리를 틀던 물줄기는 이내 기산월의 전신을 휘돌기 시작했다.

촤하학!

물줄기는 기산월의 전신을 휘돌면서 깨끗이 씻겨 나갔다.

“우와!”

“저게 뭐야?”

그 모습을 본 남궁 형제가 난리 났다. 놀라기는 방진보 역시 마찬가지였다.

방진보가 눈을 끔뻑거리더니 이내 담호를 바라봤다. 담호의 반응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겉보기엔 담호의 표정은 똑같았다. 여전히 무감각한 얼굴과 눈빛이었다. 하지만 담호와 오랫동안 지내온 방진보는 그의 눈빛이 평소와 다름을 눈치챘다.

‘형도 놀라고 있구나.’

실제로 담호는 살짝 놀라고 있었다.

절대지경에 이른 고수라면 허공섭물의 묘를 이용해 기산월과 같은 기(氣)를 펼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매우 섬세한 기의 운용이 있어야 했다. 하지만 기산월의 전신에서는 그 어떤 기의 유동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물이 스스로의 의지로 기산월을 씻기는 것 같았다.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기산월이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신기해하실 필요 없습니다. 별 쓸모없는 잡술이니까요. 누구나 방법만 알면 할 수 있으니 원하신다면 차후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정말요?”

“저도 배우고 싶어요.”

남궁 형제가 제일 먼저 반응했다. 그들의 눈에는 기산월이 펼친 술법이 무척이나 신기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기한 광경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기산월이 손끝을 모아 머리를 쓸어 올리자 마치 가위로 자른 것처럼 머리카락이 우수수 잘려 나갔다. 이번에도 내공을 쓰는 흔적은 없었다.

방진보가 중얼거렸다.

“주술 같은 것인가?”

“정확히는 법술(法術)이지요.”

“네?”

방진보가 눈을 끔뻑거렸다. 순진한 방진보의 모습에 기산월이 미소를 지은 채 설명했다.

“자연의 법(法)을 이해하고, 술(術)로 행하는 것. 무인이 자연의 기인 외기(外氣)를 끌어와 단전에서 내기(內氣)로 가공해서 이용한다면 저 같은 경우에는 외기를 그대로 이용합니다. 그러면 이와 같은 장난질이 가능해집니다. 하지만 진짜 무인들의 절기에 비할 수 없으니 잡술에 불과하지요.”

“외기를 그대로 이용하면 더 대단한 거 아닌가요?”

“이론상으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아직은 제대로 된 연공술이 없으니 그림의 떡이나 마찬가집니다. 뭐, 제대로 된 연공술이 있다고 할지라도 주군과 같은 수준의 무인을 만나면 아무런 힘도 쓸 수 없으니 잡술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그래도 그나마 그곳에서의 시간이 헛되지 않았다고 조금이나마 위안받을 수 있다는 것이 이런 법술을 훔쳐 배울 수 있었다는 거죠.’

기산월의 마지막 말은 그의 입안에서만 맴돌아서 방진보가 들을 수 없었다.

머리를 잘랐던 것처럼 수염도 잘라 냈다. 그러자 오랫동안 햇볕을 보지 못했던 기산월의 본모습이 하늘 아래 드러났다.

“아!”

그의 얼굴을 본 방진보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해를 보지 못했는지 하얗고 고운 피부와 오밀조밀한 이목구비는 여인네를 연상시킬 정도로 어여뻤다. 하지만 그는 분명 남자였다. 옷 사이로 보이는 평평한 가슴팍이 그가 남자라는 사실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방진보뿐만 아니라 남궁 형제도 기산월의 극적인 변화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허름한 옷차림과 추레한 외모 때문에 그들은 당연히 기산월이 나이가 많은 남자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그들이 느끼는 괴리감은 무척이나 컸다.

기산월이 미소를 짓자 폭발적인 염기가 풍겨 나왔다. 그가 품기는 염기는 도저히 사내가 흘리는 것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농염하면서도 사이했다.

기산월이 방진보를 바라봤다.

“공자님.”

“네?”

“아무래도 옷을 새로 사야 할 것 같은데 같이 가 주시겠습니까?”

“제가요?”

“예! 제가 오랜만에 세상에 나오다 보니 물정에 어둡습니다. 아무래도 이곳에서 저와 함께 가 주실 만한 분이 공자님밖에 없어서 말입니다.”

“아, 알겠어요. 같이 가요.”

“감사합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주군.”

기산월이 담호에게 포권을 취한 후 방진보와 함께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담호는 말없이 기산월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오랫동안 이 세상이 아닌 틈에 갇혀 있었던 인간. 그런데도 그의 외모는 무간지옥에 들어갔을 때와 달라진 게 없다고 했다.

그것이 법술 때문인지, 혹은 시간의 흐름이 느껴지지 않는 공간에 갇혀 있었기 때문이지 모르지만, 어느 쪽이건 정상은 아니었다.

기산월은 스스로도 느끼지 못하는 사이 인간이 아닌 마귀에 가까워져 있는 것이다.

‘마귀가 부리는 법술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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