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3
453화 1장. 원한만이 켜켜이 쌓여 갈 뿐이다(3)
숭산 인근의 풍경은 그야말로 처참했다.
무림맹과 마교의 계속된 싸움으로 인근은 아예 초토화가 되었고, 수많은 이들이 죽었다. 초연은 곳곳에서 피어오르고 있었고, 거리엔 죽은 이들의 시신만이 가득했다.
“하아!
그 광경을 바라보던 무림맹 외당 이 조장 유청언은 탄식을 내뱉었다. 그가 서 있는 이곳은 한때 등봉현이라 불리던 곳이었다.
화음현이 화산파를 상징하는 도시라면 등봉현은 소림사를 상징하는 곳이었다. 대대로 소림사와 함께 흥망성쇠를 해 왔기에 사람들은 그 둘을 다르게 생각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등봉현 하면 제일 먼저 소림사를 떠올릴 정도였다. 그런 등봉현이 철저하게 파괴되어 있었다. 지난 다섯 차례의 전투 중 둘이 이곳 등봉현에서 이뤄졌기 때문이다.
일반인들은 휩쓸리지 않게 하는 것이 강호의 불문율이건만 마교에 그런 상식은 통하지 않았다. 그들은 소림사와 무림맹을 공격하기 위해 등봉현을 지나려 했다. 당연히 소림사와 무림맹은 그들을 저지하려 했고, 등봉현의 사람들이 그들을 도왔다.
등봉현 사람들에게 소림사는 단순한 무림 문파가 아니었다. 천 년을 넘게 그들과 생사고락을 함께해 온 또 다른 자신이었다. 그렇기에 소림사가 마교에게 위협을 받는 것을 마냥 지켜볼 수 없었다.
그들은 소림사의 눈과 귀가 되었고, 때로는 손발 역할도 수행했다. 그들의 도움이 있었기에 소림사와 무림맹은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 마교의 침공을 막아 낼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마교는 적잖은 피해를 입었고, 사기가 떨어졌다. 사정이 그렇게 되자 상한천은 극단적인 방법을 동원했다. 바로 등봉현을 밀어 버리는 것이었다.
그들은 등봉현에 불을 지르고, 사람들을 죽였다. 소림사와 무림맹을 암중에서 돕는 자들에게 본보기를 보이기 위해 더욱 잔혹하게 칼부림을 하고, 약탈을 했다.
수많은 이들이 죽었고, 집을 잃었다. 집집마다 시신이 넘쳐났고, 거리엔 사람들의 울음이 가득했다. 불심 가득하던 마을엔 사기가 짙게 끼었고, 공포로 인해 사람들은 감히 소림사와 무림맹을 도울 엄두를 낼 수 없게 되었다.
그런 분위기를 제일 먼저 감지한 이가 유청언처럼 일선에서 마교와 싸우던 무인들이었다. 언제나 그들을 은밀히 돕던 마을 사람들은 문을 꼭꼭 걸어 잠갔다.
“잔인무도한 놈들! 무림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들까지 잔혹하게 도살하다니.”
유청언이 치를 떨었다.
마교가 잔혹하다는 것은 진즉에 알고 있었지만, 이곳에서 벌어지는 행위는 인륜을 완전히 저버린 것이었다.
그때였다.
바스락!
갑자기 인기척이 느껴졌다.
“누구냐?”
“웬 놈이냐?”
유청언과 무사들이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향해 검을 겨누며 소리쳤다. 그런 그들의 얼굴엔 긴장의 빛이 역력했다.
“무림맹의 무사인가?”
나지막한 목소리와 함께 일단의 무리가 나타났다.
그들을 보는 순간 유청언과 무사들의 눈이 크게 치떠졌다.
“서, 설마?”
“결사대?”
행색은 초라했지만, 범상치 않은 기세를 발산하는 열일곱 명의 젊은 무인들. 그들은 바로 초연운을 비롯한 젊은 결사대 무인들이었다.
옷은 다 찢어지고, 오랫동안 감지 못한 머리는 떡져 있어 거지나 다름없는 몰골이었지만, 그들의 눈빛만큼은 칼날처럼 차가우면서도 예리하게 빛나고 있었다.
초연운, 해소월, 소천, 청운, 그리고 나머지 열세 명.
상처 입고, 지쳐 있었지만 그들이 발산하는 기세는 유청언을 비롯한 외당 무사들을 압도하고 있었다.
유청언이 조심스럽게 그들을 향해 다가갔다.
“정말 초 대협이십니까?”
“유 조장님이군요.”
유청언이 초연운의 손을 와락 잡았다. 그에 초연운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살아 계셨군요. 정말 다행입니다.”
“감사합니다.”
초연운이 참담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소림사를 등에 업은 등봉현은 화려한 도시였다. 그런 도시가 처참하게 파괴당한 모습은 초연운뿐만 아니라 젊은 기재들의 마음을 아프게 만들었다.
특히 소림사의 기재인 소천이 느끼는 참담함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다.
“아미타불! 아미타불!”
그렇지 않아도 지독한 내상을 입어 창백하던 얼굴이 더욱 하얗게 질렸다.
초연운이 그런 소천을 안쓰러운 표정으로 바라봤다.
“소천.”
“아미타불! 어서 소림사에 올라가야겠네.”
“제가 모시겠습니다. 저희들을 따라오십시오.”
유청언이 앞장서서 그들을 안내했다.
숭산은 소천이 알고 있던 풍광과 달랐다. 고즈넉하던 산길에는 마교의 침공을 막기 위한 목책이 설치되었고, 수많은 병력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이곳에서도 치열한 전투가 있었던 듯 짙은 혈향이 공기를 떠돌고 있었다.
“결사대가 돌아왔다.”
“초 대협이다.”
“해중화 해 소저도 있다.”
결사대가 귀환했다는 소식은 소림사와 무림맹에까지 전해졌다.
소림사의 방장인 광천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소천이 귀환했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지금 올라오고 있다고 합니다.”
“아미타불! 불존께서 돌보셨구나.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소천은 소림사 최후의 희망이었다.
그만 있다면 최악의 경우에도 훗날을 도모할 수 있었다. 그가 무사히 돌아왔다는 소식에 광천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이유였다.
“나가 보세. 소천을 내 눈으로 직접 봐야겠네.”
“예!”
광천은 급히 산문으로 나왔다.
산문 앞에는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나와 있었다. 그들 중 상당수는 결사대에 참여했던 무인들이 소속된 문파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설렘이 가득했다.
그때 누군가 소리쳤다.
“온다.”
“결사대다.”
그들의 말처럼 결사대가 언덕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순간 탄성과 탄식이 교차했다.
“아!”
“어, 없다.”
탄성을 내뱉는 자들은 살아 돌아온 결사대가 소속된 문파의 사람들이었고, 탄식을 토하는 자들은 돌아오지 못한 결사대가 소속된 문파의 사람들이었다.
광천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소천이 살아 돌아온 사실이 한없이 기뻤지만, 절망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감정을 드러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마침내 초연운과 결사대가 산문 안으로 들어섰다.
“결사대 십칠 인, 지금 귀환했습니다.”
모두를 대표해 초연운이 광천에게 말했다.
“아미타불! 잘 돌아왔네.”
“죄송합니다. 임무는 실패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알고 있네. 허나 스스로를 탓하지 말게. 이게 어찌 자네들 탓이겠는가? 먼 길에 모두 고단할 텐데 어서 들어가 쉬시게나. 보고는 그대들의 피로가 풀린 후 듣겠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그렇지 않아도 조금 쉬고 싶군요.”
“어서 들어가게.”
“예!”
초연운이 광천에게 포권을 취한 후 안으로 들어갔다. 그 뒤를 결사대의 무인들이 따랐다.
마지막으로 소천이 광천에게 반장을 취했다.
“제자, 돌아왔습니다.”
“잘 돌아왔다. 안색이 좋지 않구나. 어서 쉬면서 내상부터 회복하거라. 자세한 이야기는 차후 하자꾸나.”
“알겠습니다. 그럼…….”
소천이 다른 장로들에게도 인사를 한 후 초연운을 따라갔다.
그들을 마중 나왔던 사람들이 분분히 비켜섰다.
초연운을 비롯한 결사대의 전신에서는 사위를 압도하는 기세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비록 지치고 상처 입었지만, 그들이 발산하는 기세는 너무나 사나워 감히 접근하거나 말을 걸 엄두를 내지 못하게 만들었다.
“아미타불! 저들은 또 성장했구나. 그나마 다행이야.”
광천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
고난과 역경을 극복한 자들은 눈에 띄는 성장을 하게 마련이었다. 하물며 저들은 강호 최정상의 기재들이었다. 그런 이들이 죽지 않고 살아 돌아왔으니 얼마나 큰 성취를 얻었을지 쉽게 짐작이 가지 않았다.
특히 초연운이 발산하는 기세는 그야말로 발군이었다.
초연운을 후기지수 취급하는 것은 그를 모욕하는 일이었다. 그는 이미 강호의 최고 수준에 근접하고 있었다. 적어도 광천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그를 따르는 십육 인의 결사대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발산하는 기세에 산문에 모인 수많은 무인들이 압도당했다. 저들은 더 이상 온실 속의 화초 따위가 아니었다.
광천이 곁에 있던 장로에게 말했다.
“소천이 큰 내상을 입은 듯하구나. 그 아이에게 대환단을 복용시키거라.”
“대환단 말입니까?”
장로가 놀라 고개를 들어 광천을 바라봤다.
대환단은 이제 소림사에도 몇 알 남지 않은 무가지보였다. 단 한 알을 복용하는 것만으로 수십 년을 고련해야 쌓을 수 있는 내공을 얻을 수 있었고, 그 어떤 심각한 내상도 순식간에 낫게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만드는 것이 너무 힘들어 벌써 십여 년째 새로운 대환단을 만들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기도 했다.
더군다나 소천은 이미 대환단을 복용했다. 그런 그에게 또 한 알을 지급하겠다고 하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냥 지급하게. 소천에게 큰 도움이 될 게야. 어쩌면 벽을 넘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
“알겠습니다.”
“다른 기재들에게도 소환단을 지급하게. 다들 적잖은 내상을 입은 것 같으니 큰 도움이 될 게야.”
“그렇게 하겠습니다.”
장로가 공손히 대답했다.
소환단도 귀물임은 분명했지만, 그래도 대환단에 비하면 한결 여유가 있었다.
“이럴 때 저들이 돌아와서 다행일세.”
결사대의 임무가 실패했다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때야 적경천과 전대 결사대의 언변에 휘둘려 의심을 할 여지가 없었으나 이제 와 돌이켜 보면 애당초 무리였던 작전이었다. 젊은 결사대가 아무리 강하다 하더라도 결국은 강호의 후기지수에 불과할 뿐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강호의 운명을 송두리째 맡긴 것은 정말 염치없는 일이었다.
“아미타불! 아미타불!”
염주를 굴리는 광천의 손놀림이 더디기만 했다.
***
털썩!
초연운이 침상에 몸을 뉘였다.
철퇴를 맞은 것처럼 전신이 아팠다. 뼈마디가 아프고, 근육이 찢겨 나가는 것처럼 고통을 호소했다.
마교 본단을 탈출한 이후 이곳까지 오는 동안 초연운과 결사대가 겪은 고초는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고된 것이었다.
천하 곳곳에 마교의 눈이 퍼져 있었기에 긴장의 연속이었다. 어떤 때는 운공으로 피로를 풀지도 못하고 몇 날 며칠을 쉬지 않고 걸어야 했다.
무엇보다 초연운을 힘들게 했던 것은 살아남은 자들을 무사히 소림사와 무림맹으로 귀환시켜야 한다는 책임감이었다.
단 한 명도 헛되이 죽게 하지 않겠다는 일념하에 그는 움직였다. 막대한 책임감은 그의 양 어깨를 천근만근의 무게로 짓눌렀다. 그럼에도 그는 단 한 번도 힘들다는 표정을 짓지 않았다.
결사대는 오로지 그만 바라보며 따르고 있었다. 그가 약한 모습을 보이면 결사대도 흔들릴 것이 분명했기에 스스로를 다잡을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이곳에 오는 도중 은가보의 안가를 이용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안가에서 휴식을 취하고, 정보를 수집하면서 그들은 이곳까지 왔다. 그리고 등봉현에 거의 다 왔을 때 은소청은 안가에서 기다리고 있던 은가보의 무인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은소청은 은가보의 무인들과 함께 아비에게 돌아갔고, 초연운과 결사대는 한결 홀가분한 마음으로 이곳에 올 수 있었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만일 누구 한 명이라도 죽었다면 초연운은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막상 그들을 모두 무사 귀환시키고 나니 맥이 탁 풀려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초연운이 침상에 누운 채 멍하니 천장을 바라볼 때였다.
“아미타불! 초 대협, 잠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아, 예!”
급작스럽게 밖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초연운이 겨우 몸을 일으켰다. 그 순간 밖에서 소림사의 장로가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조그만 목함이 들려 있었다.
“그게 뭡니까?”
“방장 사형께서 초 대협에게 소환단을 드리라 하셨습니다.”
“그런 귀물을 함부로 받을 수는 없습니다.”
“아미타불! 저희가 해 드릴 것이 이런 것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부디 사양하지 마십시오. 그럼…….”
장로는 초연운의 손에 억지로 목함을 쥐어 주고 밖으로 나갔다.
초연운은 목함을 쥔 채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그의 눈에 초점이 돌아온 것은 한참 후였다.
“그래! 힘을 내야지.”
그는 입안에 소환단을 털어 넣고는 운공에 들어갔다.
츠으으!
소환단의 약력은 거침없이 그의 몸 안 혈맥을 휘돌았다. 그렇지 않아도 연이은 격전 때문에 초연운의 혈맥과 세맥은 크게 확장되고 예민해진 상태였다.
그 상황에서 소환단의 약력이 들어오자 게걸스럽게 잡아먹기 시작했다. 조금의 낭비도 없이 약력을 모조리 흡수한 초연운의 몸에 새로운 변화가 나타났다.
그의 몸에서 뿌연 운무가 발산되기 시작했다. 그의 몸을 휘돌던 운무는 이내 머리 위해 뭉쳐 세 개의 고리를 만들어 냈다.
뒤이어 가부좌를 틀고 앉은 초연운의 몸이 서서히 허공 위로 떠올랐다. 하지만 초연운은 그런 사실도 인지하지 못한 채 망아(忘我)의 세계에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