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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4화 2장. 욕망대로 살아가기 마련이다(1)
“건방진 것. 감히 사부를 욕보이다니.”
단운향이 하얀 이빨을 부서져라 갈았다.
동정호에서 돌아온 후 그녀의 마음속에는 화가 가득했다. 가슴속에 쌓인 화를 어딘 가에 풀어야겠는데, 그럴 만한 곳을 찾지 못해 노기만 커져 가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연인이자 신교의 교주인 척관혈을 찾아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척관혈은 대공의 완성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그런 중요한 시기에 단운향이 찾아가면 대공이 늦어지거나, 아예 수포로 돌아갈 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홀로 분노를 삭일 수밖에 없었다.
“유경, 그 발칙한 것. 성물의 무공을 취했단 말이지?”
분명 음유경은 성물의 무공을 일부만 취했다고 했다. 그런데도 자신과 대등한 무력을 선보였다. 성물의 무공이 그녀의 짐작보다 훨씬 더 뛰어나단 증거였다.
아무리 청출어람이라고 하지만, 아직까지는 제자였던 이에게 추월당할 마음이라곤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쉽게 마음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화를 삭이지 못했다.
사실 차분히 생각할 여유가 있었다면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겠지만, 지금 단운향에게는 그럴 만한 냉철함도, 이성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때였다.
“잠시 안에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익숙한 목소리가 밖에서 들려왔다. 순간 단운향의 얼굴에 반색이 떠올랐다.
“들어와요.”
그녀의 허락이 떨어지자 추레한 몰골의 노인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단운향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노인은 그녀가 유일하게 믿고 의지하는 존재인 혈노였기 때문이다.
“마침 잘 왔어요. 그렇지 않아도 마음이 울적해서 견딜 수가 없었는데.”
“저런? 왜 그런지 이유를 들어 봐도 되겠습니까?”
“얼마 전 동정호에서 본교를 버린 못된 제자를 만났어요.”
단운향은 음유경을 만나 격돌했던 이야기를 했다. 그러자 혈노의 눈이 음침하게 변했지만, 단운향은 그런 사실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마침내 단운향의 모든 이야기를 들은 혈노가 입을 열었다.
“그럼 성물을 저들이 찾아냈고, 그 안에 있는 무공까지 익혔다는 거군요.”
“확실해요.”
“그럼 큰 위협이 되겠군요.”
“맞아요. 이대로 있어서는 안 돼요. 당장이라도 병력을 움직여 그년을 잡아 족쳐야 해요. 지금이라도 중천을 움직여야겠어요.”
“그 일은 제가 하겠습니다.”
“혈노가 직접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괜찮아요. 내가 직접 하면 돼요.”
“마모님께서 그런 하찮은 일에 신경 쓰실 필요 없습니다. 마모님께서는 더욱 중요한 일을 하셔야지요.”
“중요한 일?”
“예!”
순간 단운향의 눈이 빛났다.
혈노가 이렇게 말을 할 때면 정말 중요한 일이 있을 때뿐이었다. 그의 말을 따르면 항상 좋은 결과가 뒤따랐기에 그녀는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그게 뭔가요?”
“제단을 세우는 겁니다.”
“제단?”
“예! 명존을 모시는 거대한 제단을. 천하 만인이 우러러보고 성지로 삼을 수 있는 거대한 제단을 세워 신교의 위엄을 만천하에 알리는 겁니다.”
순간 단운향의 눈이 몽롱해졌다.
“제단을 어디에 세운다는 거죠? 이곳 악양에?”
“원래 본단과 제단은 한곳에 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는 굳이 제단을 세울 의미가 없지요. 천하에서 가장 기운이 좋은 곳에 세워야 합니다.”
“기운이 좋은 곳?”
“그렇습니다. 한 번 제단을 세우면 천 년을 가는 곳. 천하에서 그런 곳은 딱 하나뿐이지요.”
“어딘가요?”
“숭산!”
“설마 소림사가 있는 그곳을 말하는 건가요?”
단운향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천하를 아우르는 다섯 개의 큰 산, 그중에서도 소림사가 자리를 잡고 있는 신성한 산이 바로 중악(中岳) 숭산이었다.
혈노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말을 이어 나갔다.
“소림사는 숭산에 자리를 잡았기에 천 년의 역사를 이어 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 이유가 단지 소림사의 무공이 고강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닌가요?”
“달마는 본 겁니다. 숭산에 모이는 순수하면서도 거대한 기운을. 그 기운이 소림의 영화를 천 년이나 지속시킨 겁니다.”
“천 년을 이어 가는 영화라니.”
“본교도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소림사가 그랬듯 본교 역시 천 년의 영화를 이어 갈 수 있습니다. 숭산에 제단만 세우면 말입니다. 땡중들의 시신 위에 본교의 제단을 세우십시오. 그곳에 무림맹 무인들의 수급을 올려놓고 제를 지내면 본교의 영화는 영원히 이어지고, 천하 만인이 교주님과 마모님을 숭앙하게 될 겁니다.”
혈노의 음성은 무척이나 거칠고 음산했다. 하지만 단운향의 귀에는 그 어떤 밀어보다도 달콤하게 들렸다.
신교의 부흥을 위해 평생을 바친 단운향이었다. 성녀라는 직책이 신교를 부흥시키는 데 제약이 많아 거추장스럽게 느껴지자 거침없이 버릴 만큼 그녀의 성향은 호전적이었다.
“숭산에 제단을 세운다. 신교를 상징하는 제단을?”
“그리고 신교의 역사에 길이 남을 큰 제를 지내는 겁니다. 주관을 하시는 분은 당연히 마모님이시지요.”
“아!”
“천하 만인이 그 광경을 본다고 생각하십시오. 그들의 입에서 입으로 영원히 회자될 겁니다. 그리고 그들의 뇌리에 신교가 깊이 각인될 겁니다. 그리고 그들은 신교를 믿게 될 겁니다.”
단운향은 혈노의 속삭임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상상했다.
숭산 정상에 세워질 거대한 제단을.
그곳에서 제를 지내는 자신과 신교의 고수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교주인 척관혈이 제단으로 오르면서 그 대미를 장식할 터였다.
눈을 감고 상상을 하는 단운향의 입가에 자신도 모르게 미소가 어렸다. 그리고 혈노는 그런 단운향의 모습을 바라보며 기묘한 미소를 지었다.
혈노가 한 것은 단운향의 가슴속에 내재된 욕망이 자연스럽게 고개를 내밀 수 있도록 길을 터 준 것밖에 없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이제까지 그래 왔듯이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흘러갈 것이다. 뭐든지 시작이 어렵지, 물고만 터 주면 알아서 흘러가 바다에서 모이게 된다. 그것이 혈노의 철학이었다.
“음유경은 제가 처리할 터이니 마모님께서는 지금 당장 숭산으로 달려가십시오.”
“그래야겠어요. 천하에서 가장 화려한 제단을 숭산에 세워야겠어요.”
“교주님께서도 출관하시면 좋아하실 겁니다.”
“아!”
단운향이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었다. 그런 그녀의 얼굴엔 숨길 수 없는 욕망의 빛이 가득했다.
혈노는 그런 단운향을 잠시 바라보다 조용히 밖으로 나왔다.
“이제 이곳에서의 일은 모두 끝난 건가?”
혈노가 홀가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스스로 천하에서 가장 강한 인내심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했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도 지난 수십 년의 세월은 인고의 세월이었다.
그는 곡식을 키우는 농부의 마음으로 지난 수십 년을 보내 왔다. 인내하고, 배려하고, 보살피고, 준비하고, 그렇게 그는 한시도 쉬지 않고 움직였다. 그리고 이제 곧 노력에 대한 보상을 받을 것이다.
혈노가 슬쩍 단운향의 거처를 바라봤다.
벌써부터 그녀가 부지런히 움직이는 기척이 느껴졌다. 중천의 포교자들이 그녀를 도울 것이다. 이제 더 이상 그가 할 일은 이곳에 존재하지 않았다.
혈노는 뒷짐을 쥔 채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가져갈 짐 따윈 없었다.
올 때도 맨손으로 왔으니, 나가는 것도 맨손으로 가는 것이 당연했다.
본단의 정문을 통과해 밖으로 나왔다.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휘적휘적 걸어가는 것 같은데 그는 어느새 악양 시내를 통과해 동정호 근처에 도착해 있었다. 그야말로 귀신같은 걸음이었다.
혈노는 잠시 멈춰 서서 그림 같은 동정호의 풍경을 바라봤다.
바다를 연상시키는 광활한 호수, 그 위에 떠 있는 수많은 배들, 그리고 물놀이를 즐기는 사람들.
숭산은 무림맹과 마교의 전투로 난리가 났는데, 이곳은 아예 다른 세상 같았다. 기녀들은 대낮부터 웃음을 팔고, 한량들은 돈으로 그녀들을 샀다. 시인묵객이라는 것들이 한가하게 시나 읊고 있는 모습이, 마치 별세상에 사는 것 같았다.
“평화롭군. 너무 평화로워!”
혈노는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처럼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자 그의 얼굴을 가득 채우고 있는 주름살이 지렁이처럼 꿈틀거렸다.
그때였다.
“평화가 마음에 들지 않는가 봅니다.”
갑자기 묵직한 저음이 들려왔다. 놀랄 만도 하건만 혈노는 이미 예상이나 한 것처럼 미소를 지으며 뒤를 돌아봤다.
거대한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단지 덩치만 커서 거대하게 느껴지는 것이 아니었다. 남자가 가진 분위기와 눈빛이 그를 거인(巨人)으로 보이게 만들고 있었다.
천하에 이렇게 독특하면서도 패도적인 분위기를 가진 남자는 단 한 명뿐이었다.
검율천, 그가 동정호변에 나타난 것이다.
혈노는 검율천의 등장에 놀라지 않았다. 마치 미리 그럴 줄 알고 있었다는 듯이 푸근한 미소를 지은 채 검율천을 바라봤다.
검율천의 등 뒤로 신무월과 음유경이 보였다. 그들은 긴장 가득한 눈빛으로 혈노를 바라봤다.
혈노라는 존재를 알고는 있었지만, 직접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혈노를 배후로 지목한 그들은 여러 경로를 통해 그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려 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 어떤 정보도 얻을 수 없었다.
과거 행적을 찾아볼 수도 없었고, 그에 대한 기록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마치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 같았다. 마치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처럼 그의 모든 것이 두꺼운 장막에 가려 있었다.
바닥을 알 수 없다는 것, 저 웃는 얼굴 뒤에 숨겨진 진짜 모습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이 그들을 긴장하게 만들었다.
혈노의 시선이 먼저 음유경과 신무월을 훑고 지나갔다. 그의 시선을 받는 순간 두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그 어떤 적의도 보이지 않는 눈빛이었다. 오히려 호의가 담겨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도 섬뜩했다.
혈노의 눈에 주름이 잡혔다. 웃고 있는 것이다.
“성녀, 공작귀검, 그리고 검율천.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만 직접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군. 반갑네.”
“우리를 모두 알고 있나 봅니다.”
검율천이 모두를 대표해 입을 열었다.
“어찌 모를까? 아무리 신경이 무딘 사람이라도 누군가 그렇게 개처럼 냄새를 맡고 쫓아오면 뒤돌아보게 마련이네.”
“저희가 제대로 냄새를 맡았나 보군요. 부인하지 않는 것을 보니.”
“쯧! 자네들은 잘못 태어났어. 차라리 사냥개로 태어났다면 주인에게 예쁨을 많이 받았을 텐데.”
혈노의 말에 검율천 등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비록 부드럽게 말하고 있었지만, 은연중 그들을 개에 비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 또한 산전수전 다 겪은 노련한 무인들이었기에 금방 표정을 수습했다.
검율천이 혈노를 향해 다가가며 물었다.
“천사교의 교주 맞습니까?”
“맞네! 내가 천사교를 만들었네.”
뜻밖에도 혈노는 솔직히 대답했다. 그러자 검율천과 음유경 등이 더 놀랐다. 혈노가 부인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의 예상과 달리 혈노는 순순히 자신의 정체를 밝혔다.
빠직!
순간적으로 검율천의 몸 주위에 백광이 명멸했다.
그의 눈동자에 폭풍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드디어 이 모든 사태의 종착점에 존재하고 있는 남자를 찾아냈다. 이 남자를 찾기 위해 그는 젊음을 모두 받쳤다. 당연히 격동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애써 흥분을 억눌렀다.
상대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 없었다. 그가 무슨 목적으로 천사교를 현 시대에 다시 되살린 것인지, 또 무림맹과 마교의 충돌을 조장하고 있는지 말이다.
검율천이 물었다.
“당신은 누굽니까?”
“글쎄! 나는 누굴까? 나 역시 궁금하군.”
“철혈무신 이관! 아닙니까?”
“호! 거기까지 접근했는가?”
“맞습니까?”
“나는 혈노일세. 그리고 무명자이기도 하지. 그 외에도 수많은 이름을 가지고 있네. 그중에 이관과 연관이 있는 이름이 없다고 장담은 못 하겠군.”
마치 뜬구름을 잡는 것처럼 모호한 말이었다.
검율천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의 전신에서는 천하를 짓누를 듯한 패도적인 기세가 흘러나왔다. 마치 거대한 산이 눈앞에 있는 듯한 착각이 들게 할 만큼 검율천의 기세는 압도적이었다. 하지만 혈노는 하등의 위축됨도 없이 오히려 흥미롭다는 눈빛으로 검율천을 바라봤다.
“역시 호교심공을 익힌 모양이군.”
“그렇소!”
“익힌 기간이 그리 길지 않았을 텐데 벌써 그 정도의 성취를 얻다니. 자네의 무재야말로 가히 천하에서 으뜸이라 할 만하네. 이 정도로 나를 놀라게 한 자는 몇 명 되지 않는다네. 자네는 스스로를 대견하게 생각해도 좋을 걸세.”
“당신의 말장난을 듣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그런가? 아쉽군! 나는 진심을 말하는데 말장난이라고 생각하다니.”
“당신의 진실한 목적이 무엇입니까? 혼란을 조장하여 무엇을 얻으려는 겁니까?”
“일종의 농부라고 생각하면 편할 걸세.”
“농부?”
“그래! 가을날의 과실을 얻기 위해 겨울에 토지를 마련하고, 봄에 부지런히 씨앗을 뿌리니 농부가 아니고 무엇이라 할 수 있을까.”
“신교와 무림맹의 충돌이 당신이 뿌린 씨앗입니까?”
“내가 뿌린 씨앗 중 가장 큰 놈인 것만은 확실하지.”
그 순간 이제까지 잠잠히 듣고만 있던 신무월이 나섰다.
“대형, 저 미친 늙은이의 이야기를 더 이상 들어 줄 필요 없습니다.”
그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는 마치 탈속한 것처럼 말하는 혈노에게 지독한 적개심과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혈노가 그런 신무월을 보며 빙긋 웃었다.
“자네는 대성을 하려면 먼저 그 급한 성질을 고쳐야 할 거야. 그렇지 않으면 벽을 뛰어넘기 힘들 게야.”
툭!
순간 신무월의 머릿속에서 간신히 붙잡고 있던 이성의 끈이 끊어졌다.
“이야앗!”
그가 검 두 자루 뽑아 들고 혈노를 향해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