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5
455화 2장. 욕망대로 살아가기 마련이다(2)
신무월의 검은 날카로웠다. 단순히 검만 날카로운 것이 아니라 신무월이라는 무인 자체가 예리했다. 그 예리함이 검에게까지 전해졌다.
쿠우우!
단순히 검을 휘두르는 것뿐인데 검기가 뭉게구름처럼 피어나더니 이내 검의 형상을 갖추며 쭉 늘어났다.
하늘의 별빛을 모아놓은 것처럼 검의 기운이 눈부신 빛을 발했다.
검강(劍罡)이었다.
제아무리 절대고수라 할지라도 검 두 자루로 검강을 발휘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공력의 소모가 극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신무월은 검 두 자루에 각기 검강을 뽑아내고 있었다. 그야말로 가공할 공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혈노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자네도 호교심공의 일부를 익힌 건가? 자네 대형이 마음이 참 넓군. 누구라도 자신이 익힌 절학을 타인과 공유하는 것은 꺼려하는 법인데.”
“시끄럿!”
신무월이 노성을 내뱉으며 그대로 혈노를 찔렀다. 순간 혈노의 형상이 일렁이는가 싶더니 신무월의 뒤에 나타났다.
“무슨?”
신무월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혈노가 그의 등 뒤로 어떻게 이동했는지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미 백척간두의 경지에 올라 있던 신무월이었다. 거기에 호교심공의 심득 일부가 더해지면서 벽을 넘어섰다. 지금 신무월의 무위는 몇 달 전과는 감히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상승한 상태였다. 당연히 감각 또한 몇 배나 예리해진 상태였다. 그런데도 혈노의 움직임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사실에 그는 강렬한 위기감을 느꼈다.
그는 공작보(孔雀步)를 펼쳐 맹렬한 기세로 회전을 했다. 마치 꽁지깃을 활짝 편 공작의 날갯짓처럼 화려하면서도 우아한 몸짓엔 그의 절실한 감정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츄화학!
검강을 두른 검이 그대로 혈노의 인후혈을 찔러 들어갔다. 순간 혈노가 뒷짐 쥐고 있던 손을 풀며 검강을 향해 검지를 마주 찔러 갔다.
누가 봐도 미친 짓이었다. 맨손으로 검강을 향해 손을 내뻗는 행위는 자살하지 못해 안달이 난 자의 미친 짓이나 다름없었으니까. 하지만 손가락과 검이 부딪치는 순간 신무월의 얼굴에 경악의 빛이 떠올랐다.
파스스!
손가락에 부딪친 그의 검이 마치 과자처럼 바스러지고 있었다. 검에 어려 있던 검강 역시 아침 햇살에 증발하는 새벽이슬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큭!”
단 한 번도 상상 못 했던 기사에 신무월이 놀라 검을 쥔 손을 풀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넋을 놓고 물러난 것은 아니었다.
왼손에 들고 있던 검을 휘두름과 동시에 공작검갑에 꽂혀 있던 마지막 검을 또 꺼내 들었다.
“챠아앗!”
마치 용권풍처럼 두 자루 검이 혈노의 전신을 갈기갈기 찢어발겼다. 신무월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그의 입가에 미소가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무월!”
“피해!”
검율천과 음유경이 동시에 외쳤다.
신무월은 강렬한 위기감을 느끼고 뒤로 물러나려 할 때였다.
퍼엉!
가죽 북이 터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신무월의 몸이 그대로 뒤로 튕겨 나갔다. 단정하게 묶어 두었던 머리는 산발이 된 채 미친 듯이 흩날리고 있었고, 전신에 피를 흘리고 있는 그의 모습은 누가 봐도 기식이 엄엄해 보였다.
혈노가 그 모습을 보며 살포시 미소를 짓는 그 순간이었다.
까아앙!
갑자기 쇳소리가 터져 나오며 공기 전체가 요동쳤다.
순간 혈노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지고 대신 감탄했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호!”
어느새 나타난 검율천이 신무월을 감싸 안은 채 혈노를 향해 손바닥을 활짝 펴고 있었다. 그런 검율천의 손바닥은 붉게 달아오른 채 흰 연기를 피워 올리고 있었다.
검율천의 표정에 균열이 갔다.
“무……형검(無形劍)인가?”
형상도 기척도 느껴지지 않는 검.
심검(心劍)처럼 전설에서나 존재할 법한 지고한 검공이었다.
“젊은 친구가 식견이 제법이군. 정확히는 무형격(無形擊)이라고 하네. 뭐, 무형검의 변형된 형태라고 보면 될 걸세. 나와 제법 상성이 맞아 자주 사용하는 무공인데, 설마 자네가 알아볼 줄은 몰랐군.”
혈노가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이야기를 듣는 검율천의 얼굴은 돌덩이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무형검이라는 경지가 혈노가 말하는 것처럼 아무렇지 않은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심검과 더불어 검으로 다다를 수 있는 거의 마지막 경지가 바로 무형검이었다.
검율천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최고조에 달한 그의 감각이 위기를 경고하고 있었다. 상대가 단순히 무형검만 완성시켰다면 이렇게까지 위기감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혈노에게선 위화감이 느껴졌다.
무어라 할까? 그는 지금 이 풍경과 어울리지 않았다.
마치 이방인인 것처럼 주위와 섞이지 못하고 혼자만 겉도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검율천 평생 가장 강렬한 인상을 받은 남자가 있다면 바로 담호였다. 그 역시 주변과 섞이지 못하고 혼자만 돋보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질적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혈노는 달랐다.
꾸욱!
검율천이 주먹을 꽉 쥐었다.
자신이 느끼는 위화감의 실체를 알고 싶다면 역시 부딪쳐 보는 것이 최고였다.
빠지직!
그의 몸 주위로 순백의 뇌전이 명멸했다.
혈노는 그런 검율천의 모습을 빤히 바라봤다. 그의 눈엔 옅은 호기심이 떠올라 있었다.
“서두르게. 내가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아서 급히 가 봐야 하니까.”
순간 검율천이 대지를 박차고 혈노를 향해 달려들었다.
세상이 온통 백광으로 하얗게 물들어 갔다.
“율천!”
음유경이 신무월을 품에 안은 채 그의 싸움을 지켜보았다.
***
초연운은 밖으로 나왔다.
얼마나 많은 시간을 방 안에서 보냈는지, 햇살에 눈이 아파 왔다. 초연운은 잠시 눈을 찌푸린 채 빛에 적응해야 했다. 그래도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그는 햇살을 맞으며 몸에 찾아온 변화를 느끼고 있었다.
온몸이 가벼웠다. 너무 가벼워서 마음먹고 힘껏 뛰면 하늘 위로 날아오를 것 같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감각은 어찌나 예리해졌는지 예전에는 듣지 못했던 벌레들의 움직임과 숨소리마저 생생하게 감지해 내고 있었다.
온몸을 휘돌고 있는 내기엔 거침이 없었다. 막히는 것도 없었고, 마음먹은 대로 수발되는 것이 낯설기까지 했다.
머릿속에서는 팔황신권의 모든 초식들이 염주 알처럼 하나로 관통되어 맴돌고 있었다.
단순히 초식을 익히고 펼치는 것이라면 예전에도 가능했다. 하지만 지금은 겨우 그 정도 수준이 아니었다.
팔황신권이라는 무공을 먼지 알갱이 단위로 분해하고, 관찰한 후 다시 재조립한 느낌이었다. 초연운은 이제야 팔황신권을 완벽하게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제까지의 팔황신권이 사부가 창조한 권이었다면 오늘부터의 팔황신권은 오로지 그만의 것이었다. 아마 사부가 다시 살아 돌아온다고 해도 그보다 팔황신권을 완벽하게 펼칠 수는 없을 터였다.
보는 눈이 달라졌고, 그릇이 커졌다.
초연운은 그런 자신의 변화를 충분히 인지했고,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기연을 얻은 셈이군.”
소림사에서 준 소환단에 이 정도의 효능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랬다면 소림사에서 선뜻 소환단을 내주지도 않았을 것이다.
소환단을 복용하기 전에 초연운은 이미 백척간두의 경지에 달해 있었고, 그릇이 차서 넘치기 직전이었다. 그에게 필요했던 것은 단지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향해 한 발을 내디딜 용기와 계기뿐이었다. 그리고 소환단이 그 계기가 되어 주었다.
산을 오르는 길은 결코 하나가 아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 길로만 산을 오른다. 힘들게 올라 산 정상에 서게 되면 비로소 자신이 올라온 길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길도 볼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조화를 꾀할 수 있게 된다.
등봉조극(登峯造極)이라는 말은 그래서 나온 것이다. 대종사라면 반드시 통과해야하는 관문이기도 했다.
초연운 역시 그 길에 들어섰다.
예전이었다면 감정이 벅찼을 것이나 지금은 이상하게 담담했다. 초연운은 그런 자신의 감정조차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마치 물이 흐르듯 자연스럽게.
그의 걸음걸이 역시 그랬다. 아무래도 의족을 하고 있는 터라 무거웠던 걸음이 가벼웠다. 예전에는 이질감 때문에 간혹 진저리를 치곤 했는데, 지금은 마치 진짜 다리같이 느껴졌다. 쇠로 된 의족에도 피가 흐르는 것 같은 느낌이 초연운을 미소 짓게 만들었다.
초연운이 거처에서 나오자 제일 먼저 해소월이 다가왔다.
“몸은 괜찮은가요?”
“보다시피 멀쩡합니다.”
“다행이네요. 전 사흘이나 나오지 않기에 무슨 일이 있나 싶었어요.”
“벌써 사흘이나 지났단 말입니까?”
“네!”
해소월의 대답에 초연운이 살짝 놀랐다. 기껏해야 하루 정도 지났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전황은 어떻습니까?”
“하아! 좋지 않아요.”
해소월의 표정은 어두웠다.
초연운이 운공삼매경에 빠져 있는 동안 그녀는 최전선에서 마교의 전력과 싸웠다. 그렇기에 전황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어느 정도입니까?”
“삼차 저지선이 붕괴되었어요. 적들은 등봉현을 손에 넣고 숭산 바로 아래에 진지를 구축했어요.”
초연운의 표정이 돌덩이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숭산 바로 아래라고 하면 지척이었다. 경공을 익힌 무인이라면 겨우 한두 시진 정도 만에 올라올 수 있는 거리. 소림사와 무림맹의 턱 끝에 마교의 검 날이 닿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가 봅시다.”
초연운이 급히 산문 쪽을 향해 달려갔다. 그 뒤를 해소월이 따랐다.
“초 대협이다.”
“취운룡!”
“와아아!”
그가 모습을 보이자마자 산문을 지키고 있던 무인들이 알아보고 환호성을 내질렀다. 하지만 그들을 바라보는 초연운의 표정은 결코 밝지 않았다.
산문은 소림사의 얼굴이나 다름없었다. 불문의 성지 소림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처음 보는 광경이 산문이었기 때문이다. 너무 화려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초라하지도 않은 평범한 모습 속에 무림의 태산북두다운 위엄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지금 소림의 산문에서 그런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산문 앞에 병영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진지가 구축되고, 수많은 도검이 고슴도치처럼 삐쭉 삐져나와 있었다. 이미 수차례 충돌이 있었던 듯 산문 앞길은 피로 붉게 물들어 있었고, 짙은 혈향에 머리가 다 지끈지끈 아파 올 지경이었다. 산문을 지키고 있는 무인들과 승려들의 몸에도 크고 작은 상처가 가득했다.
“어떻게 된 겁니까? 저들이 여기까지 올라온 겁니까?”
“맞아요. 벌써 수차례 충돌해 많은 사상자가 생겼어요.”
대답을 하는 해소월의 표정 또한 어두웠다.
등봉현을 마교에 내주면서 전황은 소림사와 무림맹에 불리하게 전개됐다. 이제 무림맹과 소림사는 숭산에 고립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무기와 식량이 충분해 농성을 하면서 시간을 벌 수 있다는 거예요.”
“이렇게 될 때까지 무림맹과 소림사는 무얼 한 겁니까?”
초연운의 목소리엔 은은한 분노가 담겨 있었다. 순간 일대의 공기가 차갑게 얼어붙었다.
해소월의 얼굴에 경악의 빛이 떠올랐다. 초연운의 무공이 진일보했음을 눈치챘기 때문이다.
마교에서 탈출하는 과정 속에서 보여 준 초연운의 기지와 무공은 정말 놀라운 것이었다. 취운룡이란 그의 별호는 이미 구무룡을 뛰어넘은 지 오래였다. 그런데 지금 보여 주는 초연운의 경지는 또 한 번 벽을 넘은 것처럼 보였다. 그야말로 무서울 정도의 빠른 성취였다.
아마 담호를 제외하고 강호에서 이 정도로 빠른 성취를 보여 주는 젊은 무인은 초연운이 유일할 것이다. 이제 구무룡은 감히 초연운에 비할 수 없었다.
“진정하세요. 초 대협!”
“지금 진정하게 됐습니까?”
“휴우!”
해소월이 나직이 한숨을 토했다. 그런 그녀의 얼굴엔 복잡한 심사가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마교는 이곳에 전력을 집중하고 있었다. 그들은 지속적으로 병력의 지원이 이뤄지고 있는 반면 소림사와 무림맹은 고립된 채 사상자만 내고 있었다.
지금이야 어떻게 간신히 저울추의 균형을 맞추고 있지만, 이대로 시간이 흐른다면 저울추가 어디로 기울지는 불 보듯 뻔했다.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현 맹주인 남천산의 명이 잘 먹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련의 사건으로 인해 남천산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다. 이제 무인들은 예전처럼 맹목적으로 그의 명령을 따르는 게 아니라 이해득실을 따졌다. 당연히 단결이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모든 이야기를 들은 초연운이 한숨을 내쉬었다.
“휴! 개판이구나.”
“개판 맞아요.”
“염병!”
초연운이 애꿎은 바닥의 돌을 걷어차며 화풀이를 했다. 해소월은 그런 초연운을 조용히 바라봤다.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엔 기대감이 담겨 있었다. 그것은 산문에 모인 다른 무인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지쳐 있었다. 마교와의 싸움에 지친 것이 아니라 내부의 분열과 권력 싸움에 지쳐 있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순수하게 마교와의 싸움에 집중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돌아가는 상황은 그들을 지치게 만들고 있었다.
그들에겐 새로운 구심점이 필요했다.
그들을 하나로 똘똘 뭉치게 만들 새로운 중심이.
초연운은 그들의 눈에 어린 갈망을 읽었다. 그래서 부담이 되었다. 자신은 결코 이들을 이끌 만한 재목이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그때였다.
“마교도들이 올라온다.”
“습격이다.”
밑에서부터 사람들의 외침이 들려왔다.
뒤이어 새까만 검은 그림자들이 숭산을 올라오는 모습이 보였다. 다시금 마교가 기습을 한 것이다.
“썩을!”
초연운이 이를 악물었다.
고민이고 뭐고 머릿속에서 싹 날아갔다.
그는 제일 먼저 앞장서 마교도들에게 달려갔다.
쿠우우!
구름 속의 용에게서 더 이상 취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초연운은 맹룡(猛龍)의 위엄을 발휘했고, 산문을 지키던 무인들은 자신도 모르게 그의 뒷모습을 쫓아 달렸다.
그날 초연운은 취운룡이라는 별호 대신 창룡신협(蒼龍神俠)이라는 새로운 별호를 얻었다.
창룡신협 초연운.
난세에 빛을 발하는 새로운 영웅의 등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