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7
457화 3장. 난세는 영웅을 만들어 낸다(1)
상한천은 심유한 눈으로 숭산을 바라봤다.
천하에서 손꼽히는 다섯 개의 거대한 산 중 하나이자 불문의 성지, 그리고 중원 무림의 태두, 수많은 수식어가 붙은 명산이 장엄한 모습으로 그를 굽어보고 있었다.
숭산의 허리로 흐르는 새하얀 구름이 신비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지만, 상한천의 얼굴엔 별다른 감흥이 떠올라 있지 않았다.
지금 그의 머릿속엔 어떻게 하면 숭산을 점거하고 있는 소림사와 무림맹을 최대한 빨리 제압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뿐이었다.
현재 그가 있는 곳은 숭산 아래 있는 평지였다. 평지에는 수많은 막사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고, 엄청난 수의 무인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이곳에 오는 동안 무당파를 봉문시키고, 제갈세가를 멸문시켰다. 그리고 그 외에도 수많은 문파들이 신교에 짓밟혔다. 승리의 연속이었기에 신교의 사기는 최고조에 달해 있었다.
“무림맹과 소림사만 병탄하면 더 이상 어떤 세력도 본교를 위협하지 못하리라.”
무림맹은 천하의 모든 힘이 집약된 세력이었고, 소림사는 중원 무림의 정신적인 지주였다. 이 둘만 무너트리면 강호에서 더 이상 신교에 대항할 세력은 존재하지 않았다.
상한천이 주먹을 꽉 쥐었다.
두 세력만 무너트린다면 자신의 이름은 신교의 역사에 영원히 남아 사람들 사이에 회자될 것이다. 신교의 군사로서 그보다 영광스러운 일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제 멀지 않았다.”
상한천이 그렇게 중얼거릴 때였다.
“군사님.”
갑자기 등 뒤에서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뒤돌아보니 그를 호위하는 무사가 송구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
“본단에서 손님이 오셨습니다.”
“손님?”
“마모께서 도착하셨다고 합니다.”
순간 상한천의 미간에 깊은 골이 패였다.
“마모께서?”
그녀는 이곳에 있을 사람이 아니었다. 교주의 곁에 있어야 할 사람이 피비린내가 가득한 전장에 왔다고 하니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군사님을 뵙고 싶다고 하는데 어찌할까요?”
“일단 모시거라.”
“예!”
대답과 함께 무사가 물러났다. 잠시 후 다시 나타난 그의 곁엔 단운향이 있었다.
상한천이 먼저 입을 열었다.
“마모께서 여긴 어인 일로?”
“죄송해요, 군사. 연락도 없이 불쑥 찾아와서. 하지만 반드시 해야 할 말이 있어서 이렇게 불원천리 달려왔어요.”
“그게 무슨?”
“소림사에 제단을 세워야 해요.”
“예?”
“소림사가 있던 자리에 거대한 제단을 세워 본교의 위엄을 만천하에 알려야 한다는 말이에요.”
뜬금없는 단운향의 말에 상한천이 살짝 인상을 썼다. 단운향도 그런 상한천의 표정을 봤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숭산은 곧 오악의 중심, 소림은 무림의 태두. 그런 곳에 본교의 제단을 세운다면 상징적인 의미가 무척이나 크다 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천하의 공분을 살 우려가 큽니다. 오히려 많은 이들이 반감을 가지고 더욱 악착같이 본교에 대항할 수도 있습니다.”
“어차피 한 번은 넘어야 할 관문입니다. 우리가 소림사에 제단을 세우지 않는다고 해도 어차피 천하는 우리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차라리 정면 돌파를 하는 것이 낫습니다.”
상한천이 반론을 제기했지만 단운향은 듣지 않고 오히려 고집만 피웠다. 그에 상한천의 얼굴에 곤혹스러운 빛이 떠올랐다.
신교에서의 서열만 따진다면 상한천보다 위에 있는 사람은 교주 한 명밖에 없었다. 단운향이 아무리 마모를 자처한다고 하지만 상한천에게 이래라저래라 명을 내릴 수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외적인 부분에 불과했다.
단운향은 교주의 총애를 한 몸에 받는 여인이었다. 더군다나 중천이라는 포교 조직의 수장, 제아무리 상한천이라고 하더라도 그녀를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었다.
신교가 이제까지 외연적인 확장을 한 데는 중천의 공로도 컸기에 상한천은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상한천을 바라보는 단운향의 표정은 단호했다. 그런 그녀의 얼굴에서 협상의 여지는 찾아볼 수 없었다.
상한천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좋습니다. 제단을 세우는 것은 그리 어려울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제단을 세우겠다는 것은 마모의 생각이십니까?”
“제 생각이에요.”
단운향이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단호히 대답했다.
상한천의 표정은 펴지지 않았다.
‘달라.’
그가 아는 단운향과 지금 눈앞에 있는 단운향은 달랐다. 뭐라고 딱 꼬집어 말할 수는 없었지만, 미묘하게 달랐다. 그 점이 상한천의 신경을 건드리고 있었다.
“이번 전쟁엔 중천도 참전합니다.”
단운향의 선언에 상한천의 눈빛이 더욱 깊이 침잠됐다.
중천은 기본적으로 신교의 포교를 위한 조직이었지, 일선에 나서서 싸우는 곳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단운향이 그렇게 선언했다는 것은 그녀의 의지가 얼마나 큰지 보여 주는 것이었다.
상한천은 단운향의 마음을 돌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알겠습니다. 단 조건이 있습니다.”
“그게 뭔가요?”
“마모와 중천은 최전선이 아닌 후방에 있어야 합니다. 이게 제 조건입니다.”
“알았어요. 군사의 명을 따를게요.”
단운향이 순순히 상한천의 말을 따랐다.
그녀가 돌아간 후에도 상한천은 찝찝한 감정 때문에 쉽게 마음의 평온을 찾지 못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단운향의 제안은 이성적이지가 않았다. 상한천은 그에 의문을 가졌다.
“추명!”
“예! 군사님.”
순간 기척도 없이 삼십 대 후반의 무인이 그의 앞에 나타나 부복했다. 그는 상한천이 심복이었다.
“마모를 감시해라. 그녀와 접촉하는 이들을 파악해 나에게 보고하거라.”
“알겠습니다.”
추명이 대답과 함께 사라졌다.
홀로 남은 상한천이 중얼거렸다.
“어쩌면…….”
언제부턴가 느끼기 시작한 마교 내의 이상기류, 상한천은 단운향이 그와 관계되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상한천은 불편한 감정을 애써 억누르며 숭산을 바라봤다.
***
“이쪽입니다.”
기산월이 정면을 가리키며 말했다.
담호는 말없이 기산월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흑귀를 몰았다. 그 뒤를 방진보와 남궁 형제가 따랐다.
기산월이 가리킨 방향으로 가자 바닥이 드러난 강이 보였다. 배를 탈 필요도 없이 그냥 걸어서 건너가기만 하면 됐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늘 이런 식이었다. 기산월은 일행의 길잡이가 돼서 이끌었다. 그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다 보면 절대 길이 없을 것 같은 곳에서도 신기하게도 길이 나타났다.
그는 마치 보이지 않는 무언가와 소통을 하는 듯했다. 눈을 감고 바람을 맞으며 무어라 중얼거리는 그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왠지 모를 신비한 기운이 느껴졌다.
방진보의 시선을 느꼈는지 기산월이 문득 그를 바라봤다.
“이제 하루 정도만 더 걸으면 숭산이 나올 겁니다.”
“예? 예!”
왠지 모르게 허를 찔린 느낌에 방진보가 허둥지둥 대답했다. 그 모습이 웃긴지 기산월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방진보만큼 속을 알기 쉬운 사람도 없었다. 얼굴에 모든 감정이 드러나니 숨기려야 숨길 수가 없었다. 기산월은 그래서 방진보가 더 마음에 들었다.
강을 건넌 지 얼마 되지 않아 해가 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방진보와 남궁 형제가 나서 노숙할 만한 곳을 찾았다.
“여기가 좋을 것 같아요.”
방진보가 노숙지를 결정하자 남궁 형제가 당연하다는 듯이 나뭇가지를 주워 와 모닥불을 피웠다. 그사이 방진보는 짐을 풀고 저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기산월이 담호의 곁으로 다가왔다.
“주군도 이제 쉬시지요.”
그는 당연하다는 듯이 흑귀의 등에서 짐을 내리며 종복을 자처했다. 담호를 대하는 그의 태도는 그야말로 극진하기 이를 데 없었다.
무간지옥을 나온 이후 그는 한결같이 공경스러운 태도로 담호를 대했다. 그런 기산월이 부담스러울 만도 하건만 담호는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였다.
담호가 자리에 앉자 기산월이 방진보에게 다가갔다.
“제가 도와 드릴 일은 없겠습니까?”
“없는데요.”
“그럼 말동무라도 되어 드릴까요?”
“그건…….”
방진보가 잠시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부담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해맑은 모습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기산월의 얼굴을 보니 차마 거절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는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공자님.”
방진보의 허락에 기산월이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방진보의 옆에 쪼그리고 앉아 요리를 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오!”
“아!”
그러다가 가끔 뜬금없는 감탄사를 터트리기도 했다. 말동무가 되어 준다고 해 놓고서 방진보의 요리 실력에 감탄만 하는 것이다.
한참 요리를 하던 방진보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물었다.
“그런데 기 대협께서는 어쩌다가 무간지옥에 갇히신 건가요?”
“어쩌다 보니요.”
“네?”
“하하! 역시 믿지 않으시겠죠?”
“네!”
“이미 짐작하고 계시겠지만 전 천사교에서 키워 낸 혼술사입니다.”
“역시!”
방진보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간지옥은 결코 인간이 살 수 있을 만한 곳이 아니었다. 그런 곳에서 생존한 인간이 정상적일 리 없었다.
“놀라지 않으십니까?”
“놀라야 하나요?”
“보통은 그렇지 않나 싶어서요.”
“무간지옥에서 처음 봤을 때 충분히 놀랐거든요.”
“그렇군요.”
이번엔 기산월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주군과 천사교는 철천지원수라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경계된다거나 밉지 않습니까?”
“확실히 천사교는 싫지만, 이상하게도 그쪽엔 그런 감정이 들지 않네요.”
“하하! 감사합니다. 사실 공자님이 저를 싫어하시면 어쩌나 겁이 났거든요.”
“설마요?”
“진심입니다. 공자님이 저를 싫어하셨으면 주군께서 저를 받아 주시지 않을 것이 분명했으니까요.”
“으음!”
“한 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제가 혼술사라고 하더라도 천사교에 대해서 아는 것이 거의 없다는 겁니다. 혼술사로 막 기틀을 잡아 가던 시점에 무간지옥이 열렸고, 모두를 대표해 그 안으로 들어갔거든요.”
기산월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모두를 대표해 들어갔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강제로 떠밀려서 들어갔다.
훗날 무간지옥이라 명명된 ‘틈’은 혼술사 그 누구도 경험해 보지 못한 신비한 공간이었고, 그 어떤 정보도 없는 미지의 세계였다. 그런 곳에 제 발로 들어갈 만큼 담량이 크거나 무모한 자는 거의 없었다.
기산월 역시 그런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제 발로 무간지옥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명에 의해 억지로 들어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게 됐다.
때문에 그는 오히려 천사교에 큰 원한을 갖고 있었다. 혼술사로서 정체성을 확고히 하기 전에 무간지옥에 갇혀 오랫동안 증오심을 키워 왔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늘 웃는 모습만 보이지만 사실 그의 가슴엔 차가운 증오와 뜨거운 복수심이 가득했다.
방진보가 물었다.
“정말 무간지옥은 아무것도 없는 그런 공간인가요?”
“그게…… 아, 음식 탑니다.”
“네?”
기산월의 말에 방진보가 깜짝 놀라 모닥불에 올려놓은 냄비를 바라봤다. 냄비 바닥에서 음식이 타는 냄새가 났다. 방진보는 허둥지둥 냄비를 휘저었다.
겨우 한숨을 돌리고 고개를 돌렸는데 기산월은 보이지 않았다. 어느새 담호의 곁으로 간 것이다.
“휴!”
방진보가 한숨을 내쉬었다.
기산월이 의도적으로 대답을 회피했다는 것쯤은 그도 알 수 있었다. 그렇다고 싫다는 사람한테 더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방진보는 궁금증을 억누르며 요리에 다시 집중했다.
“주군!”
기산월이 담호를 불렀다. 하지만 담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담호의 눈빛은 어둠 속에서도 무섭게 빛나고 있었다. 그런 담호의 모습에 기산월이 섬뜩한 감정을 느꼈다.
오랜 세월 고립된 곳에 갇혀 있었기에 감정이 마모되어 그 어떤 것도 자신에게 두려움을 줄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담호는 그런 그의 자부심을 산산이 부숴 버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지금 담호의 눈빛은 평상시와 달랐다. 더욱 무섭게 느껴졌다.
“제가 무슨 실수라도…….”
기산월이 말을 하다 말고 갑자기 코끝을 찡그렸다.
익숙한 냄새가 났기 때문이다.
수십 년이 지나도 결코 잊을 수 없는, 기산월에게는 고향의 품과도 같은 그런 냄새였다.
사이한 술법의 향기.
보통 사람은 절대 느낄 수 없는 냄새가 바람에 실려 오고 있었다.
순간 기산월의 눈빛이 스산하게 변했다.
그는 마치 홀린 사람처럼 담호를 따라 바람이 불어오는 곳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