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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권마-458화 (458/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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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8화 3장. 난세는 영웅을 만들어 낸다(2)

적경천은 숭산을 떠나 남하하고 있었다.

숭산에서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기에 그의 발걸음은 제법 가벼웠다. 적경천의 등 뒤로 예의 괴인이 따르고 있었다.

커다란 방립과 피풍의로 전신을 가렸기에 원래의 모습을 알아볼 수는 없었지만, 괴인이 움직일 때마다 범상치 않은 기세가 발산됐다.

적경천이 문득 괴인을 바라봤다.

“정말 대단하단 말이지.”

그 자신도 절대지경에 오른 고수였지만 괴인에 비할 수는 없었다.

소림사의 장로인 광해와 무림맹주인 남천산을 순식간에 죽인 괴인의 무위는 그야말로 천하제일이라 할 만했다.

괴인은 말 그대로 괴물이었다. 그런 괴물의 통제권이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하자 가슴이 든든했다.

그때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수풀 속에서 들려왔다.

“누구냐?”

적경천의 눈빛이 차갑게 빛나는 순간이었다.

“저예요.”

나지막한 목소리와 함께 중년의 미부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를 보는 순간 적경천이 반색을 했다.

“무사했구나. 보원.”

중년의 미부는 바로 천산설화(天山雪花) 소보원이었다. 젊은 결사대를 이끌고 마교의 본단을 습격했던 전대의 결사대. 그녀의 등장에 적경천은 환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소보원은 웃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엔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적경천이 물었다.

“어찌 너 혼자냐? 다른 이들은?”

“저만 빠져나왔어요.”

그제야 적경천의 표정이 조금은 굳었다.

“진명, 의진 모두 죽었는가?”

“아마도요.”

“음!”

그가 자신도 모르게 침음성을 흘렸다.

일차 정마대전 이후 늘 함께해 온 동료들이었다. 이젠 동료보다 형제라는 단어가 더 어울리는 이들. 그들이 함께 귀환하지 못했다는 소식은 그에게도 비통함을 안겨 주었다.

적경천은 애써 웃으려 했다.

“그들도 대의를 위해 죽었으니 그다지 억울하지 않을 게야.”

“뭐가 대의란 거죠?”

“보원!”

“그들은 그렇다 치고 중원의 동량이 될 만한 젊은 기재들까지 모조리 잃었어요. 그게 어떻게 대의가 된다는 거죠? 제가 우둔한 건가요? 저만 이해 못 하는 건가요? 대답해 주세요.”

소보원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적경천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엔 원망의 빛이 가득했다.

악양까지 동행하는 동안 결사대의 젊은 기재들은 그녀를 믿었다. 마교의 본단을 기습하던 날, 그녀는 젊은 기재들을 버리고 홀로 도주했다. 그때 자신을 바라보던 그들의 얼굴이 생각났다.

배신과 원망, 그리고 답을 구하던 그 표정들이 밤마다 떠올라 견딜 수가 없었다.

“대답해 주세요. 그들을 그렇게 죽게 내버려 둔 것이 정말 대의를 위한 건가요?”

“네가 감히 교주의 결정에 반기를 드는 것이냐?”

“나는 단지 알고 싶은 것뿐이에요. 내가 정말 옳은 길을 가고 있는 것인지, 내가 행하는 모든 일이 정말 대의인 것인지.”

소보원의 목소리가 비수가 되어 적경천의 가슴을 후벼 팠다. 하지만 정작 적경천의 얼굴엔 어떤 흔들림도 없었다.

“우리가 가고자 하는 길을 의심하지 말거라.”

“하지만…….”

“그만! 그 이상 말하는 것은 그분에 대한 불경이다. 선을 넘으면 제아무리 너라 할지라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적경천이 무서운 눈빛으로 소보원을 노려봤다. 소보원도 지지 않고 적경천을 마주 노려봤다.

두 사람 사이에서 불꽃이 튀는 듯했다. 하지만 그들의 대치는 예상치 못한 괴인의 움직임 때문에 깨지고 말았다.

“흐으!”

괴인이 거친 숨소리를 흘리며 어느 한 방향을 노려봤다. 순간 적경천의 얼굴에 경악의 빛이 떠올랐다.

괴인에게선 인간적인 감성이나 이성이 모조리 제거된 상태였다. 때문에 그 자신의 의지로 외부의 자극에 반응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최소한 적경천이 알기로는 그랬다.

그런데 지금 괴인은 자신의 의지로 반응하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그 무언가가 괴인의 봉인해 둔 경계심을 자극하는 것이 분명했다.

“대체?”

덩달아 적경천과 소보원의 시선이 괴인이 보는 곳을 향했다.

처음엔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하지만 잠시 후 적경천의 표정이 무섭게 경직되었다.

무언가 수풀을 헤치며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발소리가 그의 귓전을 자극하고 있었다. 그런데 발소리가 이상했다.

둔탁하고, 끄는 소리가 한꺼번에 났다.

천하에 수많은 이들이 존재하지만 이런 독특한 발소리를 가진 무인은 단 한 명뿐이었다. 그리고 적경천은 발소리의 주인을 알고 있었다.

“권……마.”

그의 부름에 답하기라도 하듯 수풀을 헤치며 담호가 나타났다. 담호가 나타난 그 순간 일대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단지 모습을 나타낸 것만으로도 담호의 존재감은 일대를 무섭게 장악하고 있었다. 때문에 그의 뒤에 있는 기산월의 모습은 보이지도 않았다.

담호의 모습을 확인한 적경천과 소보원의 눈동자가 거의 동시에 흔들렸다. 설마 이곳에서 담호를 만나게 될 줄은 정말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네가 어떻게 여기에?”

“…….”

담호는 적경천의 물음에 대답하는 대신 괴인을 바라봤다.

“크흐흐!”

순간 괴인의 입에서 짐승의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담호의 뒤쪽에 있던 기산월의 눈빛이 더욱 스산해졌다.

그가 느꼈던 익숙한 향기의 주인은 바로 괴인이었다. 괴인이 사술의 주체인지, 아니면 종속자인지는 모르겠지만 연관이 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그 순간 적경천의 입꼬리가 치켜 올라갔다.

담호를 확인하는 순간 당황했지만, 이제는 차라리 잘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담호를 제거할 절호의 기회였기 때문이다.

평상시라면 그와 상대하는 것이 꺼림칙했겠지만 지금 그의 곁에는 괴인이 존재했다. 괴인을 이용하면 담호를 제거하는 것은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딱 그 모양이구나.”

담호가 적경천을 빤히 바라봤다.

그 어떤 감정도 담기지 않은 무감각 눈빛이 적경천을 울컥하게 만들었다.

“놈! 강호의 어른을 보았으면 재깍 인사를 해야지, 도대체 예의는 어디에다 팔아 버린 것이냐? 근본도 없는 후레자식 같은 놈.”

적경천이 담호를 자극하기 위해서 일부러 거친 말을 토해 내던 그 순간이었다.

쾅!

갑자기 눈앞이 희끗해지는가 싶더니 강렬한 풍압이 적경천을 덮쳤다. 사나운 바람에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마치 수천, 수만 개의 바늘로 일제히 얼굴을 쑤셔 대는 것 같은 통증이 느껴졌다.

순간 식은땀이 그의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적경천 앞에 괴인의 등이 보였다. 그리고 그 너머로 담호가 보였다. 담호의 주먹은 적경천의 몸에 격중하기 직전이었다. 그의 주먹을 대신 막아선 이가 바로 괴인이었다.

만일을 대비해 호신강기를 은밀히 펼쳐 두고 있었지만, 그가 아니었다면 담호의 일격에 적경천은 적잖은 상처를 입었을 것이 분명했다. 그만큼 담호의 일격은 강렬했다. 아직도 피부를 자극하고 있는 기파가 그 사실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담호가 성격이 급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렇게 앞뒤 가리지 않고 덤벼들 줄 몰랐기에 적경천은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엄청난 풍압에 괴인이 눌러쓰고 있던 방립이 날아가며 얼굴이 드러났다. 괴인은 하얀 천으로 얼굴 전체를 칭칭 동여매고 있어 본모습을 알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하얀 천 사이로 드러난 두 눈에는 광포한 기운이 일렁이고 있었다.

“흐으으!”

괴인의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오는 거친 숨소리는 먹이를 탐하는 짐승의 울음과 닮아 있었다.

괴인의 몸에서 검은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마치 헝클어진 실타래처럼 사방으로 뻗어 나간 아지랑이는 제멋대로 꿈틀거리며 보는 이들에게 섬뜩한 감정을 느끼게 했다.

괴인은 마치 철천지원수를 만나기라도 한 듯 담호를 보며 적개심을 피워 올리고 있었다.

“크아아!”

담호의 눈매가 가늘어지는 찰나 그의 일격이 날아왔다. 담호도 피하지 않고 파성추를 날렸다.

주먹과 주먹이 허공에서 격돌했다.

쩌어엉!

순간 일대의 공기가 터져 나갔다.

괴인의 등 뒤에 있던 적경천은 물론이고 소보원까지 폭발에 휩쓸려 뒤로 날아갔다.

적경천의 얼굴에 곤혹스러운 빛이 떠올랐다.

“진정하라.”

그가 괴인에게 명령을 내렸지만 소용이 없었다. 괴인은 적경천의 통제를 거부하고 담호를 향해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

콰아앙!

괴인의 주먹 한 방에 대지가 함몰됐다.

단단한 암반이 우르르 무너지고 부서진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괴인은 먼지를 뒤집어쓴 채 담호의 신형을 쫓았다.

담호를 포착하자마자 몸을 날리는 그의 모습은 먹이를 포착한 거대한 곰 같았다. 온몸을 내던져 공격하는 그의 광기는 보는 이들을 압도하다 못해 질리게 만들었다.

적경천은 괴인을 통제하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평소 심령으로 명령을 내리면 충실히 이행하던 괴인이 어쩐 일인지 통제를 벗어나 미친 듯이 날뛰고 있었다.

콰아앙!

괴인의 경로에 있던 집채만 한 바위가 산산이 부서졌다. 수백 년을 살아왔을 아름드리나무는 마치 벽력탄을 맞은 것처럼 터져 나갔다.

소보원이 적경천을 바라봤다.

“오라버니?”

“통제가 되지 않는다.”

그 순간 두 사람이 동시에 떠올린 단어는 하나였다.

폭주(暴注).

괴인이 통제를 벗어나 제멋대로 날뛰는 것이다.

두 사람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려 갔다.

수십 년 전에 강호의 절대고수 반열에 올랐던 두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런 두 사람도 괴인 앞에서는 결코 강하다 말할 수 없었다. 그만큼 괴인은 대단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폭주를 한다면 결코 감당할 수 없었다.

그때 두 사람 곁으로 기산월이 다가왔다.

“술법에 문제가 생긴 모양이군요.”

“너는 누구냐?”

“역시 기억하지 못하시나 봅니다? 저는 두 분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데.”

“뭣이?”

기산월의 말에 적경천의 얼굴에 노기가 떠올랐다. 기산월이 자신을 놀리는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꺼지거라, 너 따위와 한가하게 이야기할 여유가 없으니까.”

쉬가악!

적경천이 다짜고짜 기산월을 향해 도를 휘둘렀다.

천도왕이라는 별호로 이미 한 시대를 풍미했던 적경천이었다. 단순해 보이는 한 수에도 수십 년을 참오 해 온 무인의 힘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그의 일격은 허무하게 빗나가고 말았다. 기산월이 마치 유령처럼 움직여 피한 것이다. 하지만 그 모습이 적경천을 더욱 분노하게 만들었다.

“놈! 제법 숨겨 둔 한 수가 있는 모양이구나.”

쉬이익!

그의 도가 연이어 기산월을 압박했다. 하지만 기산월은 그 모든 공격을 유령처럼 움직여 피했다.

그 모습이 적경천의 화를 폭발시켰다.

“놈!”

적경천은 괴인에게 신경 쓰는 것도 잊고 기산월을 연신 공격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소보원이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결코 적경천과 기산월의 싸움에 끼어들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럴 만큼 정신적인 여유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적경천에 대한 믿음도 예전 같지 않았다.

수많은 젊은 기재를 마교 본단에서 잃으면서 그녀의 정신력은 무척이나 약해진 상태였다. 때문에 예전처럼 단호하게 행동할 수 없었다.

소보원은 적경천과 맞서 싸우는 기산월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한참을 본 후에야 소보원은 기산월의 얼굴을 기억해 냈다.

“그 아이구나. 무간지옥에 들어갔던…….”

아직도 그녀는 기억하고 있었다. 억지로 무간지옥에 들어가야 했던 어린 혼술사의 얼굴을.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어떠한 희망도 없이 무간지옥에 던져졌던 아이. 그녀는 내심 그가 무사히 귀환하길 기대했지만, 수년이 흘러도 혼술사는 귀환하지 못했다.

몇 년이 더 흐르고 소보원의 기억에서조차 혼술사는 잊혀졌다. 그 후로는 완전히 잊고 살았는데, 오늘 다시 그 혼술사를 보게 된 것이다.

소보원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정말 무간지옥에서 귀환했단 말인가?”

그녀의 상식을 송두리째 흔드는 일대사건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기산월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기산월은 단순히 유령처럼 움직이는 것이 아니었다. 가끔씩 바닥에 발을 디딜 때가 있었는데, 족적이 깊이 패였다.

순간 소보원이 경악 어린 표정을 금치 못했다. 단순히 발에 힘을 주었기에 새겨졌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족적에서 빛이 치솟아 올랐기 때문이다.

“진법인가? 아니, 달라.”

아주 오래전 강호에 보법으로 진을 완성하는 지고한 공부가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하지만 기산월이 펼치는 것은 그완 달라 보였다.

의미를 알 수 없는 수많은 문양이 빛으로 변해 적경천의 몸을 휘도는가 싶더니 이내 사라졌다. 그리고 적경천의 움직임이 그대로 멈췄다.

마치 넋이 빠진 사람처럼 적경천은 허공을 바라보며 움찔하고 있었다.

소보원이 기산월에게 다가갔다.

“무슨 짓을 한 것이냐?”

“환상을 보여 줬습니다.”

“환상?”

“예! 그가 가장 보기 싫어하는 환상을.”

“그것은 또 무슨 사술이냐? 천사교에 그런 사술이 존재한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는데.”

“천사교의 사술이 아닙니다. 오롯한 저의 법술이지요.”

“법술?”

그녀의 얼굴에 의혹의 빛이 떠오르는 그 순간이었다.

콰직!

소름끼치는 파골음이 전장에 울려 퍼졌다.

두 사람의 고개가 동시에 소리가 들려온 것으로 돌아갔다. 그 순간 소보원의 눈이 찢어져라 부릅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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