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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권마-460화 (46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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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0화 4장. 누구나 물러설 수 없는 이유가 있다(1)

“괜찮아요?”

“괜찮다.”

검율천의 담담한 대답에도 음유경은 쉽게 얼굴을 펴지 못했다. 그만큼 검율천이 입은 상처가 가볍지 않았기 때문이다.

얼굴엔 핏기 하나 없었고, 가슴을 칭칭 동여맨 흰 천 위로 붉은 선혈이 선명했다. 흰 천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지만 검율천은 오른쪽 어깨에서 왼쪽 복부까지 사선으로 길게 자상을 입은 상태였다. 조금만 상처가 더 깊었어도 내장이 모두 쏟아져 나왔을 만큼 깊은 상처였다.

그런 상처를 입고도 아직 살아 있을 수 있는 것은 극도로 단련된 육체 덕분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호교심공의 영향이 컸다.

일대 조사가 남긴 호교심공인 천마심공은 불세출의 신공이었다. 거의 빈사상태에 이른 검율천의 심맥을 보호하며 스스로 세력을 불려 결국은 회생시켰다.

검율천은 그렇게 죽음의 경계선에서 극적으로 부활했다. 하지만 그의 몸 상태는 아직 완벽한 것이 아니었다. 호교심공이 빠른 속도로 그의 상처를 회복시키고 있었지만, 완벽해지려면 아직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검율천이 손을 들어 가슴의 상처를 어루만졌다. 핏자국이 선명한 상처는 아직 완벽하게 아물지 않았다. 만지면 아프고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검율천이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혈노는 강했다.

단순히 무공만 강한 것이 아니었다. 그에겐 무공 이상의 그 무언가가 있었다. 그것이 검율천을 압박했고, 제 실력을 내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 결과가 지금 검율천의 모습이었다.

만일 음유경과 신무월이 제때 개입해 구하지 않았다면 검율천은 진즉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것이다.

호교심공을 익힌 이후 적수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검율천이었다. 그런 자부심이 혈노와의 격돌 이후 모래성처럼 무너졌지만, 그는 결코 좌절하지 않았다.

세상을 살다 보면 얼마든지 패하고 무너질 수 있었다. 중요한 것은 좌절하지 않고 다시 일어나는 것이었다. 다행히 검율천은 남들보다 강인한 정신력과 굴하지 않는 용기를 가지고 있었다.

괜히 그의 별호가 불굴(不屈)이 아니었다.

그는 다시 일어섰고, 그날의 격돌을 복기하며 다시금 마음에 날을 세웠다.

검율천의 시선이 음유경을 향했다.

“그는?”

“사라졌어요.”

음유경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검율천과의 격돌 이후 혈노는 완벽하게 세상에서 사라졌다. 그 어떤 흔적도 없이 말이다.

명천이 나서서 혈노의 흔적을 추적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그 어떤 실마리도 찾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명천이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 조금만 기다려요.”

음유경의 말에 검율천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는 명천이 혈노를 찾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그렇게 쉽게 찾을 수 있는 존재였으면 이미 찾았을 것이다.

지난 수십 년을 철저히 본모습을 감추고 살아온 혈노였다. 세상 사람 대부분은 그의 존재조차 몰랐다. 그를 집요하게 추적해 온 검율천조차도 수 년 만에 처음 그를 대면했을 정도였다. 그런 그가 이제 와서 쉽게 명천에게 꼬리가 밟힐 거란 생각은 아예 들지 않았다.

음유경이 검율천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검율천의 얼굴 어디에도 패배자의 쓰라림은 존재하지 않았다. 하늘이 무너져도 결코 흔들리지 않을 것 같은 굳건한 눈빛을 보자 어느 정도 마음이 놓였다.

음유경은 지난 며칠 동안 겨우 억눌러 두었던 궁금증이 고개를 쳐드는 것을 느꼈다. 더 이상은 참기 힘들었다.

그녀가 자신도 모르게 물었다.

“혈노는 누군가요? 그가 천사교주가 맞나요?”

검율천이 고개를 돌려 음유경을 바라봤다.

음유경의 눈은 진실을 갈구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추적해 온 진실의 끝자락에 매달려 있는 열매의 정체를 알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녀는 혈노와 직접 부딪쳐 본 검율천이라면 알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리고 검율천은 그녀의 물음에 대답할 의무가 있었다. 그녀는 진실을 알 자격이 있었으니까.

검율천이 대답했다.

“그는 호천산이다.”

“호천산? 혈광사신(血光死神).”

“그렇다. 내가 당한 검식은 분명 혈광사신 호천산의 성명절기인 검락천멸(劍落天滅)의 초식이었다.”

“그럴 수가…….”

음유경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

“그는 이관일 겁니다. 아니, 철혈무신(鐵血武神) 이관이 분명합니다.”

담호는 기산월의 청천벽력 같은 말에도 놀라지 않았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괴인과 직접 부딪쳐 싸운 담호였다.

그와 같은 수준에 이른 고수는 단 한 수만 겨뤄 봐도 상대의 격을 가늠할 수 있기 마련이었다.

담호에게 전율을 일게 할 수 있는 고수, 그것도 정체를 알 수 없는 전대의 절대고수. 여러 가지 정황상 사신제 중의 한 명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용화설은 여인이었고, 풍월제는 죽은 지 오래였다.

그렇다면 남는 선택지는 둘뿐이었다.

혈광사신 호천산과 철혈무신 이관.

상대가 호천산이 아닌 이관이란 사실이 뜻밖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같은 사신제였다.

문제는 이관이 왜 이지를 잃고 괴인이 되었냐는 것이다.

담호는 지금까지 사신제의 배신자가 철혈무신 이관일 거라고 생각했었다. 정황상 이관이 모두를 배신하고 천사교를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타당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괴인이 정말 이관이라면 배신자는 호천산이 되는 셈이었다.

“호천산의 본명은 호천명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아마 호천산은 그가 대외적으로 활동할 때 사용한 가명일 겁니다. 그래서 저는 그가 사신제의 일원일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때 저는 무척이나 어렸었거든요.”

기산월이 두 사람을 본 것은 지금보다 훨씬 어렸을 때였다. 당시엔 이관이 모든 것을 주재했었다. 때문에 모두의 시선은 이관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당시에 호천산, 아니 호천명은 모두의 관심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는 간간이 천사교에 들러 이관을 만났을 뿐 얼굴을 보이는 일이 극히 드물었었다. 때문에 그가 사신제의 일원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적어도 기산월이 알기엔 그랬다. 기산월 역시 무간지옥에서 오랜 세월을 보낸 후에야 자신이 간간이 보았던 신비의 무인이 사신제의 한 명인 호천산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기산월의 모든 이야기를 들은 담호의 눈빛이 더욱 깊이 가라앉았다.

이로써 천사교의 교주가 호천산, 아니 호천명이라는 것이 확실해졌다. 하지만 왜 그 이전까지 교주 역할을 했던 이관이 이지를 잃고 광인이 되었는지, 호천명이 대신 교주가 되었는지 여전히 밝혀지지 않은 사실이 더 많았다.

무엇보다 호천명의 진정한 목적이 무엇인지 아직까지 알지 못했다. 무림맹과 마교를 충돌시켜 그가 얻을 수 있는 이득이 무엇인지 여전히 알 수 없었다.

기산월이 말했다.

“제가 아는 것은 정말 여기까지입니다. 주군과 격돌하기 전까지는 그가 정말 철혈무신 이관인지도 의심스러웠으니까요.”

“이관은 왜 그렇게 된 거지?”

“아마 어떤 술법에 이지를 잠식당한 것 같습니다.”

“어떤 술법이지?”

“죄송합니다. 제 빈약한 지식으로는 거기까지는 알 수 없습니다.”

기산월은 진실을 말하고 있었다.

혼술사라고 하지만 그가 천사교에 있었던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때문에 익힌 술법 또한 그렇게 많지 않았다.

천사교의 술법은 하나같이 극악하거나 상리를 뛰어넘었다. 기산월이 익히지 못한 술법 중에 사람의 이지를 장악해 꼭두각시를 만드는 술법이 하나쯤 있다고 해도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담호가 눈을 감았다.

―나……는 아직 깨어나서는 안 된다.

이관이 마지막으로 그를 보며 했던 말이었다. 비록 단락, 단락 끊어지고 발음이 모호했지만, 이관은 그렇게 말했다.

“깨어나서는 안 된다?”

“예? 그게 무슨?”

곁에서 기산월이 물었지만 담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담호가 혼잣말을 하는 것이란 사실을 알아차린 기산월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담호에게도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휴!”

기산월이 한숨을 내쉬었다.

담호도 심사가 복잡하겠지만, 누구보다 충격을 받은 사람은 바로 기산월 본인이었다.

그는 이제까지 이관이 자신을 무간지옥에 집어넣은 원흉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이관을 향한 복수심을 불태우고 있었다. 하지만 이관이 이지를 잃은 모습을 보니 복수의 대상이 잘못된 것 같았다.

‘호천명,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설마 무간지옥? 아니지, 아닐 거야.’

갑작스럽게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기산월이 고개를 저어 부정했다. 하지만 한 번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사라지지 않고 계속해서 그의 가슴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

초연운은 태실봉 정상에 서서 숭산을 굽어보았다.

건너편 소실봉 중턱에 있는 소림사와 무림맹이 보였다. 비록 수림에 가려 그 모습을 온전히 볼 수는 없었지만, 분위기만큼 생생하게 전해지고 있었다.

지금 소림사와 무림맹의 상황은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바로 ‘혼돈(混沌)’이었다.

좋든 싫든 맹주 남천산은 무림맹의 중심축이었다. 그의 부재는 즉각 명령 체계의 혼선을 가져왔고, 전체의 사기를 바닥으로 떨어트렸다.

현재 소림사와 무림맹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어찌어찌 마교의 습격을 막아 내긴 했지만, 다시 한 번 저들이 전력을 다해 공격해 온다면 또다시 막아 낼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없었다.

“이대로라면 분명 전멸을 면치 못할 거야.”

소림사와 무림맹에 모여 있는 무인들의 수만 이미 수천 명이 넘어갔다. 그들은 모두 당금 무림의 정예라 할 수 있었다. 그들이 전멸한다면 아마 무림의 정기는 최소 수백 년 동안은 회복할 수 없을 것이다.

마교가 세상을 지배할 것이고, 그들의 지배하에서 무림이 다시 예전의 정기를 회복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초연운이 입술을 질겅 깨물었다.

지난 며칠간 수도 없이 고민했고, 불면으로 밤을 지새웠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이곳에서 수성(守城)만 해서는 가능성이 없다는 것이었다.

마교는 이미 대부분의 전력을 숭산에 집중시켰다. 그들은 촘촘하게 포위망을 구축했고, 지금 이 순간에도 소림사와 무림맹의 함락을 위한 준비를 차근차근 진행하고 있었다. 그런 마교를 분열된 소림사와 무림맹의 힘만으로 물리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모두 개죽음만 당하게 돼.”

그것이 지난 며칠 동안 고민해서 초연운이 내린 결론이었다.

꾸욱!

초연운이 주먹을 힘껏 쥐었다.

그는 태실봉을 내려와 소실봉에 있는 소림사로 향했다. 정확히는 소림사의 방장인 광천의 거처였다.

때마침 광천의 거처에는 소림사의 수뇌부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그들 역시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황이었다. 남천산의 죽음 이후 무림맹에 더 이상 기댈 수 없다는 것이 그들의 판단이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무림맹과 별개로 대책을 마련하는 데 몰두하고 있었다.

“잠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어서 오시게. 누가 감히 창룡신협의 발걸음을 막을 수 있겠는가? 허허!”

광천은 초연운을 흔쾌히 맞이했다. 초연운을 대하는 그의 말투도 어느새 바뀌어 있었다.

초연운은 이제 더 이상 강호의 후기지수가 아니었다.

창룡신협이라는 별호는 광천도 쉽게 대할 수 없는 무게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 창룡신협이 이곳엔 어인 일이신가?”

“꼭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어서 결례를 무릅쓰고 왔습니다.”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러는지 겁부터 나는구려. 어디 말씀해 보시오.”

소림사 수뇌부의 시선이 초연운에게 집중됐다.

그들은 모두 초연운보다 한참 오래 산 인생의 선배였고, 강호에서 차지하는 위치 또한 대단했다.

예전의 초연운이었다면 그들의 시선에 위축되었을지 몰랐다. 하지만 지금 초연운에게 그들의 눈빛은 전혀 두려운 것이 아니었다.

진정으로 두려운 것은 그들의 눈빛 따위가 아니라 숭산에 모인 무인들이 전멸하는 것이었다.

잠시 수뇌부들을 보며 숨을 고르던 초연운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저는 감히 방장께 퇴각을 건의하고 싶습니다. 제 말이 얼마나 건방지고 어이없게 느껴질지는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대로 숭산에 있다가는 무림맹은 물론이고, 소림사까지 마교에 전멸을 당하고 말 겁니다.”

“…….”

너무 충격적인 말이었는지 장내엔 정적이 감돌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소림사의 수뇌부들이 일제히 초연운을 성토하기 시작했다.

“그걸 말이라고 하시는 건가?”

“아미타불! 조그만 명성을 얻었다고 못하는 말이 없군.”

“우리보고 터전을 버리고 퇴각하라니, 제정신으로 그런 말을 하는 것인가?”

수많은 비난들이 쏟아졌지만 초연운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이미 어떤 비난이라도 기꺼이 받아들일 각오를 했기 때문이다.

광천이 그런 초연운을 심유한 눈으로 바라봤다.

“지금 초 대협은 우리가 전멸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그렇습니다. 아니, 반드시 그렇게 될 겁니다.”

“아미타불!”

광천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

현재 무림맹에서 초연운이 가지는 위치는 결코 낮은 것이 아니었다. 마교의 침공을 막아 내며 창룡신협이라는 별호까지 얻었기에 더더욱 무시할 수만은 없었다.

광천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그가 만일 단순한 강호의 무인 중 한 명이었다면 분명 초연운의 의견에 동조했을 것이다. 객관적으로 봤을 땐 초연운의 의견이 분명 옳았으니까. 하지만 그는 강호의 일개 무인이 아니었다.

그는 천 년을 이어 온 대소림사의 방장이었다.

“불가(不可)!”

초연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미 예상하고 있던 대답이었다. 하지만 가슴이 쓰린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광천이 초연운을 보며 말했다.

“초 대협이 어떤 마음에서 그런 의견을 제시한 것인지 충분이 이해한다네. 그만큼 이번 싸움이 절대적으로 불리하다는 것이겠지. 나도 마음 같아서는 초 대협의 뜻을 따르고 싶다네. 하지만 천 년 동안 소림사는 단 한 번도 외적이 두려워 터전을 버리고 떠난 적이 없다네. 단 한 번도.”

“하지만…….”

“그 말은 곧 우리가 그 어떤 역경이라도 이겨 냈다는 것을 의미하네. 무려 천 년 동안 말일세. 내 대에 와서 그 전통을 깨트릴 수는 없네. 천 년 소림 불패의 전설은 계속 이어져야 하네.”

“…….”

“우리는 반드시 그렇게 만들 걸세. 천 년 소림의 저력을 결코 무시하지 말게나. 소림에는 자네가 모르는 저력이 존재하니까.”

초연운은 눈을 감았다.

그 후로도 광천이 무어라 말을 더했지만 초연운의 귀엔 들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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