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1
461화 4장. 누구나 물러설 수 없는 이유가 있다(2)
밤부터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가을의 끝자락에 내리는 비였다. 아마 이 비가 끝난 후엔 찬바람이 불고 겨울이 찾아올 것이다.
소림사의 승려들과 무림맹의 무인들은 피풍의를 입고 경계를 섰다. 연이은 격전으로 인해 그들의 얼굴엔 피곤한 기색이 가득했다.
얼마나 많은 동료들을 잃었는지 몰랐다. 마교가 한 번씩 습격해 올 때마다 수많은 이들이 죽었고, 곁에 있는 동료들의 얼굴이 바뀌었다.
처음엔 분노했고, 그 후엔 두려움을 느꼈다. 지금 그들의 얼굴이 피곤해 보이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들은 두려움이란 감정을 피곤한 얼굴로 감추려 하고 있었다.
경계를 서고 있던 무림맹의 무인 중 한 명이 심란한 마음을 애써 감추며 투덜거렸다.
“니미럴! 오려면 시원하게 내릴 것이지, 지랄같이 내리네. 꼭 누구 오줌같이.”
“자네 오줌을 말하는 건가? 자네도 찔끔찔끔 싸지 않는가?”
“봤어? 봤냐고. 내 오줌은 장대비야. 뭘 알고나 떠드는가?”
동료가 놀리자 처음 말을 꺼낸 무인이 발끈했다. 그러자 동료가 자신의 사타구니를 내밀며 떠들었다.
“그게 장대비면 난 폭포다. 적어도 이 정도의 물건은 돼야 폭포를 흘려보낼 수 있는 거지. 흐흐!”
“지랄 염병하네.”
“왜, 보여 줄까?”
“그 쪼그만 물건을 내가 뭐하러?”
무인이 손사래를 쳤다. 그의 얼굴엔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시답잖은 농담이라도 주고받으니 조금은 마음이 풀린 것이다. 하지만 농지거리를 하던 동료의 무인은 오히려 조금 전보다 더 굳어 있었다.
“왜 그러는가?”
“저, 저기!”
“뭐가?”
무인이 동료가 바라보는 곳을 바라보다가 눈을 크게 떴다. 분명 비가 내리는데 허공에 불이 둥둥 떠 있었기 때문이다.
“저건?”
무인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었다. 비록 찔끔찔끔 온다고 하지만 그래도 물기가 가득한데 허공에 불이 떠 있다니. 불은 급속도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순간 무인은 불의 정체를 깨달았다.
“부, 불화살이다.”
“습격이다.”
그들은 급히 엄폐물에 몸을 숨겼다. 그 직후 불이 붙은 화살이 그들이 있던 자리에 꽂혔다.
“멍청한 놈들. 비오는 날 불화살을 쏘다니.”
“그러게 말일세.”
간발의 차이로 목숨을 구한 무림맹의 무인들은 화살을 쏜 자들을 비웃었다.
그때였다.
챙그랑!
바닥에 꽂힌 화살에서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무인들이 깜짝 놀라 바라보니 화살 끝에 달린 조그만 자기병이 깨져 까만 기름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기름은 빗물을 타고 번지며 순식간에 그들의 발을 적셨다.
“설마?”
푸화학!
그 순간 화살의 불이 기름으로 옮겨 붙었다. 불은 순식간에 하늘높이 치솟아 오르더니 이내 경계를 서고 있던 무인들을 덮쳤다.
“끄아악!”
“살려 줘!”
멋도 모르고 불길에 휩싸인 무인들이 처절한 비명을 내질렀다. 그들은 물에 젖은 바닥을 뒹굴며 불을 끄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물과 섞이자 오히려 더욱 격렬하게 타올랐다.
물에도 꺼지지 않고 오히려 더욱 격렬하게 타오르는 불길은 순식간에 근처에 있던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무림맹이 만들어놓은 저지선은 물론이고 경계를 서던 무인들까지도.
지금 숭산 곳곳에서는 이와 같은 상황이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했다. 무림맹과 소림사가 겹겹이 펼쳐 놓은 경계망이 꺼지지 않는 불꽃에 순식간에 무력화되었다.
마교의 무인들이 무너진 경계망을 뚫고 숭산을 달렸다.
이제까지 수차례 마교의 공세가 있었지만, 이번엔 차원이 달랐다. 숭산 아래 진을 치고 있던 마교의 전력이 전부 동원됐다.
사대군장, 새로운 칠대마인, 내원까지 동원할 수 있는 고수들은 전부 이번 싸움에 참여했다.
그들은 빗속을 질주했다.
목표는 소림사와 무림맹이었다.
그 중심에 상한천이 있었다.
상한천 또한 수많은 무인들의 호위를 받으며 숭산을 오르고 있었다. 그가 빗속에서 타오르는 불꽃을 보며 중얼거렸다.
“지옥화(地獄火), 일단 한번 붙으면 절대 꺼지지 않는 지옥의 불꽃. 될 수 있으면 지옥화를 쓰고 싶진 않았지만 어쩔 수가 없지.”
뭐든지 지켜야 할 선이 있는 법이다.
지옥화는 그 선 너머에 있는 금기였다. 오랜 세월 연구한 끝에 만들어 낸 지옥화는 일단 인체에 한번 옮겨붙으면 절대 꺼지지 않는다. 물로도 끌 수가 없고, 오직 생명체가 완전히 재가 된 후에야 절로 꺼질 뿐이다.
그 때문에 마교에서도 지옥화는 금기 물품으로 정해져 있었다. 그런데 상한천이 지옥화를 동원한 것은 그만큼 독심을 품었기 때문이다.
이 이상 싸움이 길어져 전선이 고착화가 되면 그만큼 마교의 희생이 커진다. 더 많은 희생을 막기 위해서라도 빨리 이 싸움을 끝내야 했다. 그래서 상한천은 오늘 승부를 걸었다.
“크아악!”
“막아!”
곳곳에서 마교와 무림맹의 무인들이 격돌했다.
마교가 기습한 소식은 무림맹과 소림사에도 전해졌다. 대기하고 있던 무인들이 무기를 들고 뛰쳐나왔다.
“마교도를 물리쳐라.”
“감히 더러운 발을 숭산에 들이다니, 절대 용서할 수 없다.”
언제고 마교가 다시 들이닥칠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무기를 휘두르는 그들의 손속엔 일말의 사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무림맹과 소림사의 고수들은 해일처럼 밀려드는 마교의 무인들을 맞아 분전했다. 하지만 아무리 죽이고, 또 죽여도 끝없이 밀려드는 마교의 전력에 점차 뒤로 밀릴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든 버텨.”
“제기랄!”
무인들은 이를 악물고 제자리를 지키려 했다. 하지만 다시 지옥화를 동반한 불화살이 쏘아지자 분루를 삼키며 피할 수밖에 없었다.
화르륵!
빗속에서 지옥화가 순식간에 몸집을 불렸다.
애써 만든 무림맹의 건물들이 지옥화의 먹이가 됐다. 불을 끄려고 접근했던 몇몇 무인들 또한 지옥화의 희생자가 됐다.
“으아악!”
“살려 줘!”
아수라 지옥도가 따로 없었다.
지금 이곳은 지옥이었다.
초연운은 지옥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해소월과 청운 등이 분전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각기 마교의 고수들을 맞아 막강한 위용을 발휘하고 있었다. 하지만 급속히 기울어지는 전황 앞에서 그들의 몸부림은 무의미하게 보이기만 했다.
“소림, 소림으로 퇴각해!”
무림맹의 수뇌부들이 외쳤다. 그에 지리멸렬해 가던 무인들이 급히 소림사 쪽으로 퇴각했다.
불과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었지만, 소림사는 천 년이란 시간 동안 경내에 철옹성을 구축했다.
백팔나한이 나서서 무림맹의 무인들이 퇴각할 시간을 벌어 줬다. 덕분에 상당수의 무인들이 소림사로 도주할 수 있었다.
광천이 외쳤다.
“불광조천탕마대절진을 발동하라.”
“발동하라.”
쿠우우!
순간 소림사 전체에서 기이한 소성이 울려 퍼졌다.
벽이 이동하고 바닥이 꺼졌다. 그리고 자욱한 운무가 일어나 소림 전체를 뒤덮었다.
불광조천탕마대절진(佛光照天蕩魔大絶陣).
소림이 남겨 둔 최후의 패였다.
마지막까지 몰려 멸망을 피할 수 없는 그 순간을 위해 만들어 둔 것이 바로 불광조천탕마대절진이었다.
겉보기엔 그저 커다란 사찰로만 보이지만 사실 소림은 기관진식 위에 만들어진 철옹성이었다. 전각의 배치부터 모든 것이 철저하게 음양오행의 이치에 따라 지어졌고,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기관이 설치되어 있었다.
지난 수백 년 동안 소림은 은밀히 기관진식을 개보수 해 왔다. 그런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것은 소림이 그만큼 위기에 몰린 일이 없어 사용할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퓨퓨퓩!
“크아악!”
“어흑!”
평범한 벽에서 갑자기 수십 자루의 창이 튀어나와 마교 무인들의 몸을 꿰뚫었다.
멀쩡하던 바닥이 꺼지며 십여 장이 넘는 지하로 추락하기도 했고, 운무에 방향 감각이 헝클어져 엉뚱한 곳을 헤맸다.
해일처럼 한꺼번에 밀려오던 마교의 군세가 소림사에 들어선 그 순간 수십 조각으로 갈라질 수밖에 없었다. 소림사의 승려들과 무림맹의 무사들은 조그만 집단으로 갈라진 마교의 전력을 기습했다. 각개격파에 나선 것이다.
예상치 못한 기관에 절진까지 더해지니 소림사는 순식간에 철옹성으로 돌변했다. ‘부처의 광휘가 하늘을 비추니 모든 마를 쓸어버린다’는 이름처럼 마교의 병력이 쓸려 나갔다.
“성가시군!”
불광조천탕마대절진에 막혀 소림사를 장악하는 게 늦어지자 상한천의 표정에 균열이 갔다.
시간이 흐를수록 피해가 늘어나고 있었다.
특단의 대책이 없다면 소림사를 점령하는 것은커녕 오히려 커다란 피해만 입고 패퇴할 수도 있었다.
위기감을 느낀 순간 상한천이 직접 앞으로 나섰다. 그러자 네 명의 무인이 그를 호위했다.
하나같이 범상치 않은 기세를 발산하는 삼 남 일 녀. 마교에서는 그들을 가리켜 사대군장(四大軍將)이라 불렀다.
섬전마검(閃電魔劍) 강위.
혈륜마녀(血輪魔女) 요사란.
만영신군(萬影神君) 임학.
생사판관(生死判官) 장무경.
한 명만 나서도 세상을 뒤엎을 수 있다는 절대의 고수가 무려 네 명이나 상한천의 호위에 나선 것이다.
“마교의 수뇌부다.”
“저들만 죽이면 승기를 잡을 수 있다.”
불광조천탕마대절진 안쪽에서 지켜보던 소림사와 무림맹의 수뇌부들이 그들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아미타불! 장문인 저를 내보내 주십시오.”
“아닙니다. 제가 가서 놈들의 목을 따 오겠습니다.”
승려와 무인들이 서로 자신이 나서겠다고 아우성이었다. 하지만 광천의 선택은 그들이 아닌 백팔나한이었다.
“백팔나한은 적들의 수괴를 섬멸하라.”
“방장의 명을 받듭니다.”
백팔나한이 출동했다.
소림이 자랑하는 최강의 전력이 백팔나한이었다. 그들이 펼치는 백팔나한진은 최강의 대일인절진(對一人絶陣)이었지만, 다수에도 큰 위력을 발휘했다. 특히 상대가 강하면 강할수록 더욱 강한 반진력을 발휘하기에 상대하기가 쉽지 않았다.
“흠! 백팔나한진인가? 난 예전부터 땡중들이 펼치는 절진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
사대군장 중 만영신군 임학이 나서며 중얼거렸다. 나머지 세 사람은 상한천을 호위하면서 그저 지켜보기만 했다. 그 모습이 백팔나한의 화를 북돋았다.
“감히 백팔나한진을 우습게 보는 건가?”
“겨우 백팔나한진을 깨는 데 모두가 나설 이유가 있을까? 나 혼자라도 충분해.”
임학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순간 백팔나한의 얼굴에 굴욕스러운 표정이 떠올랐다.
제아무리 상대가 마교의 수괴 중 하나라고 하지만 이렇게까지 백팔나한이 무시당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촤르륵!
백팔나한이 애써 분노를 억누르며 산개했다. 백팔나한진을 펼치려는 것이다. 그 순간 그들이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까앙!
임학이 갑자기 나타나 백팔나한 중 가장 어린 승려를 공격했기 때문이다. 임학의 절기인 철섬보(鐵閃步)는 소림사의 부동명왕보에 비견되는 순간 이동의 묘를 가지고 있었다. 당하는 입장에서 보자면 갑자기 허공을 가르고 나타난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극한의 쾌(快)가 만들어 낸 현상이었다.
승려가 급히 선장을 들어 임학의 공격을 막았지만, 몸이 뒤로 주르륵 밀려나며 백팔나한진을 채 펼치기도 전에 전열이 흐트러지고 말았다.
“비겁한!”
“큿! 목숨이 오가는 싸움에 비겁한 게 어디 있나? 이기면 그만이지.”
임학이 백팔나한을 비웃으며 무공을 펼쳤다.
만영신군(萬影神君)이라는 별호처럼 그가 무공을 펼치면 일순 수백, 수천의 그림자가 일제히 일어나 백팔나한을 상대하는 것처럼 보였다.
백팔나한은 상리를 벗어난 임학의 무공에 갈피를 잡지 못하고 우왕좌왕했다. 임학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그렇게 임학이 백팔나한을 농락하고 있는 동안 상한천은 불광조천탕마대절진을 파훼하기 시작했다.
“저곳!”
쾅!
강위가 상한천이 가리킨 곳을 파괴했다. 그러자 마교를 괴롭히던 기관 중 하나가 멈췄다.
상한천의 손가락이 이번엔 연무장 가에 세워져 있는 커다란 석상을 가리켰다.
“석상의 머리를 파괴하게나.”
“이번엔 내가 하지.”
장무경이 튀어나와 장력을 날렸다. 족히 이 장이 넘는 크기의 석상이 단숨에 파괴됐다. 그러자 쉴 새 없이 창을 발사하던 기관이 작동을 멈췄다.
요사란이라고 가만있지는 않았다. 그녀 역시 상한천이 가리킨 곳을 파괴했다. 그러자 또다시 불광조천탕마대절진을 이루고 있던 기관 중 하나가 작동을 멈췄다.
상한천의 걸음엔 거침이 없었다. 그는 단숨에 불광조천탕마대절진의 원리를 파악했고, 적재적소에 사대군장을 움직여 파괴했다.
불광조천탕마대절진은 서서히 제 기능을 잃기 시작했고, 마교의 무인들은 그들을 옭아매고 있던 족쇄에서 벗어나 다시 위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이익!”
“멈춰랏!”
보다 못한 소림의 장로들과 무림맹의 수뇌부가 나서서 그들을 막으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사대군장은 마교가 자랑하는 최고의 고수들이었다. 그들의 무력은 가히 천하를 뒤엎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런 그들을 정면으로 상대할 수 있는 이는 천하에 몇 되지 않았다.
“아미타불!”
광천을 비롯한 소림사 장로들의 얼굴에 곤혹스러운 표정이 떠올랐다. 설마 소림이 자랑하는 불광조천탕마대절진이 이렇게 쉽게 무력화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그제야 그들의 가슴에 위기감이 엄습했다.
더 이상 불광조천탕마대절진은 그들과 군웅들을 지켜 줄 수 없었다.
소림사의 방장인 광천은 문득 춥다는 생각을 했다.
섬뜩하리만큼 차가운 바람이 가슴을 할퀴고 지나갔다.
문득 초연운의 충고가 떠올랐다. 진작 그 말을 들었어야 한다는 자책감도 들었다. 하지만 이미 상황은 되돌릴 수도, 걷잡을 수도 없이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아미타불! 전 장로들은 적의 수괴들을 전력으로 상대하게.”
“방장의 명을 받듭니다.”
“아미타불!”
장로들이 사대군장과 상한천을 향해 달려갔다. 하지만 광천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에겐 달리 해야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아직 자신의 곁을 지키고 있는 제자에게 명을 내렸다.
“아미타불! 초 대협을 불러오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