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2
462화 4장. 누구나 물러설 수 없는 이유가 있다(3)
초연운의 전신은 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얼마나 많은 마교의 무인들을 죽였는지 몰랐다.
그는 정말 최선을 다했다. 한 명이라도 더 구하기 위해 누구보다 치열하게 싸웠다. 하지만 마교의 무인들은 아무리 죽이고, 또 죽여도 개미굴에서 기어 나오는 개미처럼 끝없이 몰려왔다.
체력보다 먼저 마음이 지쳤다. 하지만 초연운은 이를 악물며 팔황신권을 펼쳤다.
그때였다. 젊은 승려가 달려와 그를 부른 것은. 방장인 광천이 그를 부른다고 했다. 초연운은 결국 뒤로 빠져 광천에게 갔다.
초연운이 도착했을 때 광천의 주위엔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소천, 청운, 해소월, 그리고 무림맹에 소속된 젊은 무인들까지. 그들은 모두 당금 강호에서 촉망받는 젊은 기재들이었다.
광천이 초연운을 보며 말했다.
“아미타불! 오셨는가?”
“방장님.”
“미안하네. 그대의 말을 듣지 않아 사태가 이 지경이 됐네. 아마 이 죄는 지옥의 불구덩이에 빠져 수천 년을 참회해도 씻을 수가 없을 걸세.”
세상을 모두 잃은 듯한 광천의 표정에 초연운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광천의 말이 이어졌다.
“아미타불! 우리는 이곳에서 저들과 옥쇄를 할 것이네. 하지만 자네들까지 그래서는 안 되네.”
“그 말씀은?”
“우리가 시간을 벌어 줄 터이니 젊은 무인들과 무림맹의 무인들을 이끌고 숭산을 빠져나가게.”
“방장님!”
“소천이 은밀히 빠져나가는 길을 알고 있네. 그를 따라가시게. 그것만이 남은 전력이라도 온전히 보존하는 길일세.”
초연운이 피가 나도록 입술을 힘껏 깨물었다. 광천이 어떤 심정으로 하는 말인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알……겠습니다.”
그가 겨우 대답하며 주위를 둘러봤다.
젊은 무인들의 표정은 비통하기 그지없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비통한 이는 바로 소림사에 적을 두고 있는 소천이었다.
소림사에서 평생을 살아온 소천이었다. 소림은 그에게 있어 모든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곳을 버려두고 탈출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마음 같아서는 그 역시 이곳에서 옥쇄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그마저 잘못되면 소림의 수많은 절기는 역사 속으로 사라질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소림의 절기를 보존하고, 아직 살아남은 제자들을 지켜야 할 책임이 있었다. 그것이 광천이 그에게 바라는 유일한 한 가지였다.
아직 젊은 승려들과 사미승들이 오직 그만 바라보고 있었다. 소천은 냉정해질 수밖에 없었다.
“아미타불! 저를 따라오십시오. 이제부터는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소천은 일부러 냉정하게 뒤돌아섰다. 하지만 그의 가슴속에서는 피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를 따르는 소림사 제자들도 피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반드시 되돌아온다.’
‘꼭 이곳으로 돌아올 것이다. 그때까지 잠시 비워 둘 뿐이다.’
그들은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광천에게 눈인사를 하며 그들은 걸음을 옮겼다. 그 뒤를 각 파의 젊은 기재들과 무림맹의 무인들이 따랐다.
광천이 마지막으로 걸어가는 초연운에게 말했다.
“부디 우리 아이들을 잘 부탁드리겠소. 초 대협.”
“제가 반드시 그들을 지키겠습니다.”
“어디로 가실 생각이오?”
“화산으로 가겠습니다.”
“아미타불! 강호가 그들에게 큰 빚을 지는구려. 그들이 위기에 처했을 때 우리는 아무것도 도와준 것이 없는데. 화산파 장문인에게 전해 주시오. 이 빚은 죽어서도 갚겠다고.”
“분명 그리 전해 드리겠습니다.”
“고맙소! 어서 가 보시오.”
광천이 먼저 뒤돌아섰다.
콰콰콰!
불광조천탕마대절진이 흔들리고 있었다.
광천은 붉은 가사를 휘날리며 그 속으로 걸음을 옮겼다. 소천과 소림사의 제자들이 문득 고개를 돌려 멀어져 가는 그의 뒷모습을 눈에 담았다.
소림사의 방장이, 전 무림의 정신적인 지주가 스스로 죽음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그들은 피눈물을 흘리며 그 모습을 가슴속 깊이 각인시켰다.
‘절대 잊지 않으리라.’
‘반드시, 반드시 이곳으로 다시 돌아오겠다.’
그들은 다짐하고, 또 다짐하며 걸음을 옮겼다.
“휴우!”
초연운이 맨 뒤에서 그들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될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광천과 소림사의 수뇌부에게 퇴각할 것을 주장했었다. 하지만 그들은 초연운의 의견을 거부했고, 결국은 최악의 상황에 직면하게 됐다.
‘내가 더 강하게 주장했다면 상황이 바뀌었을까?’
쓸데없는 가정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마음이 너무 무거웠기에 후회가 밀려왔다.
그때였다.
“너무 자책하지 마시오, 초 형.”
청운이 그에게 다가와 위로했다. 그에 초연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처럼 지금은 자책할 때가 아니었다. 어떻게 해서든 이들을 무사히 이곳에서 빠져나가게 해야 했다.
초연운이 해소월을 불렀다.
“해 소저.”
“말씀하세요.”
“몸 상태는 어떻습니까?”
“최고예요.”
“다행이군요. 그럼 해 소저가 해남파의 제자들을 데리고 먼저 내려가서 매복이 없는지 살펴보십시오.”
“알았어요.”
“그리고 청운 형.”
“말씀하십시오.”
“청성파의 제자들을 데리고 부상자를 챙기십시오. 단 한 명의 낙오자도 이곳에 남겨 둬서는 안 됩니다.”
“명을 따르겠소.”
해소월과 청운이 초연운에게 포권을 취하고 물러났다.
초연운은 그 후로도 몇 명을 불러 명을 내렸다. 젊은 무인들과 군웅들은 군말 없이 그의 명을 따랐다.
질투나 시기의 감정 따윈 없었다.
그들이 질시의 감정을 갖기엔 초연운이 보여 준 것이 너무 많았다. 사람들의 뇌리에 초연운은 난세에 찬란하게 빛나는 별이었다.
전란의 세상이 탄생시킨 영웅. 모두가 홀린 것처럼 한마음으로 그를 따랐다. 하지만 명을 내리는 당사자인 초연운의 가슴은 커다란 바위를 얹어 놓은 것처럼 갑갑했다.
그의 양 어깨 위에 올려진 숙명이 너무 무거웠다. 할 수만 있다면 이 짐을 누군가와 덜어 나누고 싶었다.
‘친구여!’
담호가 보고 싶었다.
하지만 이내 그는 고개를 저어 상념을 지웠다.
이 자리에 없는 사람을 그리워한다고 해서 변하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지금은 오직 눈앞의 상황에 집중할 때였다.
***
천 년의 세월을 버텨 온 전각이 불타고 있었다.
시뻘건 불길에 휩싸인 사천왕상이 힘없이 무너지고 있었다. 금박이 씌워진 부처상이 화염에 녹아내리고 있었다.
지옥화는 모든 것을 불태웠다. 마치 끝없이 탐식을 하는 아귀처럼 천 년 소림의 모든 것을 게걸스럽게 먹어 치웠다.
상한천과 사대군장은 그 모습을 말없이 바라봤다. 그런 그들의 얼굴엔 만감이 교차하고 있었다.
중원 무림의 태산북두인 소림사.
천 년의 세월을 강호의 정상에서 군림해 오며 마교의 행보를 막아 온 난공불락의 거인이 화마에 스러지고 있었다.
“드디어…….”
“쓰러트렸다.”
다른 누구도 아닌 그들의 힘으로 소림사를 무너트렸다는 사실이 그들의 감정을 요동치게 만들었다.
소림사의 승려들은 실로 끈질겼다. 그들은 마지막 한 명까지 끈질기게 마교의 무인들을 붙잡고 늘어졌다. 그 때문에 마교의 피해도 엄청났다. 상한천의 예상보다 훨씬 더 많은 이들이 죽거나 다쳤다. 그 때문에 그의 마음은 무겁기 그지없었다.
그때였다.
“어둠이 태양을 영원히 가릴 수 없듯이 마도는 정도를 결코 이기지 못할 것이오. 지금 당장은 어둠이 승리한 것처럼 보이겠지만, 내일의 해가 떠오르는 것을 막을 수는 없을 터.”
나직한 목소리가 그들의 귓전에 울려 퍼졌다.
모두의 시선이 목소리의 주인을 향했다.
피투성이가 된 노승이 커다란 나무에 등을 기댄 채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왼쪽 팔이 잘려 나가고 양쪽 무릎이 으스러진 모습으로 그들을 바라보는 노승은 바로 소림사의 방장인 광천이었다.
생사판관 장무경이 살기를 피워 올렸다.
“아직 숨이 붙어 있었나? 땡중.”
“부……처의 가피가 있었던 모양이오.”
“흥! 그놈의 부처가 늙은 중의 목숨은 살려 주지 않는다고 하는가?”
“허허! 사람으로 태어나 어찌 천……리를 거스를 수 있겠소? 그렇지 않아도 부처께서 그……만 버티고 오라고 손짓……하시는구려.”
광천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그의 웃음에 산 자의 생기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사대군장 중 두 사람이 합공했다. 광천이 제아무리 고수라고 하지만 두 사람을 당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무참히 쓰러지고 말았고, 마지막 남은 내공 한 줌으로 겨우 버티고 있을 뿐이었다.
수많은 이들이 죽었다.
그를 따르던 소림의 제자들, 무림을 지키기 위해 무림맹에 들었던 무인들. 그 외에도 수많은 이들이 죽었다.
향내가 가득하던 불문의 성지엔 오직 피비린내만이 가득했다. 수 대가 지나도 숭산에 새겨진 혈향은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광천이 웃을 수 있는 것은 소림의 명맥이 완전히 끊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당장이야 쇠락을 피할 수 없겠지만, 소림은 다시 일어설 것이다.
‘소천이라면 분명 훌륭하게 소림을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웃으며 죽을 수 있었다.
자신의 죽음이 훗날 소림사를 다시 되살릴 훌륭한 거름이 될 테니까.
그렇게 광천은 숨을 거뒀다.
평온한 모습으로 죽은 광천을 보며 상한천이 눈을 빛냈다.
“훗날을 기약할 수 없는 자는 결코 저렇게 웃으며 죽을 수 없는 법. 땡중, 전력을 빼돌렸구나.”
상한천은 대번에 광천이 웃으며 죽은 이유를 알아냈다. 그렇지 않아도 그의 예상보다 적들의 전력이 적다 생각하고 있던 차였다.
성격이 급한 강위가 물었다.
“그럼 소림사와 무림맹이 전력을 빼돌렸다는 말입니까?”
“그렇다네.”
“이런 꼼수를 쓰다니.”
강위가 이를 빠득 갈았다.
소림사와 무림맹이 자랑하던 많은 고수들이 그의 손에 죽었다. 전신이 피로 물들어 있었지만 그의 분노와 갈증은 아직 풀리지 않았다. 그의 갈증은 마지막 한 명까지 찾아내 단죄의 철퇴를 내려야만 풀릴 수 있는 종류의 것이었다.
강위의 곁에서 생사판관 장무경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고 보니 창룡신협이라는 애송이도, 소림사의 희망이라는 소천도 보이지 않았군. 당장 추적해 후환을 없애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놈들은 분명 큰 후환이 될 겁니다. 이번 기회에 반드시 제거해야 합니다.”
“두 사람이 수하들을 이끌고 추적하게.”
상한천이 허락하자 강위와 장무경이 휘하의 병력을 거느리고 추적에 나섰다.
그 광경을 본 요사란이 입을 열었다.
“이미 승리했는데 꼭 이래야 할 필요가 있을까요?”
“남겨진 조그만 불씨가 다시 살아나 산천초목을 모조리 태우기 마련이오. 그래서 불은 확실히 꺼야 한다오.”
“하지만…….”
“요 군장도 마음이 많이 약해졌구려. 권마와 싸운 후유증이 그렇게 큰 건지?”
상한천이 서늘한 눈으로 요사란을 바라봤다. 그에 요사란이 입술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홀로 거스를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마교의 무인들은 승리감에 도취되어 있었다. 그런 그들에게 그녀가 어떤 말을 하더라도 통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휴!’
그녀는 남 몰래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얼마나 많은 이가 숭산에서 죽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최소 수천 이상의 무인이 목숨을 잃은 것만은 분명했다. 그들이 흘린 피가 소림의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때 중년의 미부가 상한천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군사! 대승을 축하드려요.”
“감사합니다, 마모님.”
“이 모든 게 군사의 탁월한 식견과 능력 덕분이에요. 교주님께서도 군사의 공을 크게 치하하실 거예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아직 우리의 일은 끝나지 않았어요. 이곳에 제단을 세워야 해요. 불이 꺼지는 대로 이곳에 세상에서 제일 큰 제단을 세워 제를 지낼 거예요.”
“모든 것이 마모의 뜻대로 되실 겁니다.”
“감사해요.”
상한천에게 감사의 인사를 한 단운향이 차가운 눈으로 겁화에 휩싸인 소림사를 바라봤다.
소림사는 이제 한 줌의 재가 되어 스러지고 있었다. 전각도, 석상도, 탑림도 하얀 재가 되어 세상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저곳에 제단을 세울 것이다. 천하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제단을 세워 본교의 위엄을 만천하에 알릴 것이다. 이제 그 누구도 본교를 감히 ‘마교’라 부를 수 없을 것이다.’
그녀를 따라온 중천의 무인들이 이미 제단을 세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원래 제를 지내려면 제물이 필요하지만, 이번에는 필요 없었다. 이미 제물을 바친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단운향의 눈에서 은은하게 사기가 일렁이고 있었지만, 그 사실을 눈치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