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3
463화 5장.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다(1)
숭산을 내려오는 길은 무척이나 험했다. 평소 사람들이 다니는 길이 아닌 뒷길이기에 더욱 험하고 거칠었다. 무공을 익힌 사람이라 할지라도 발을 헛딛는 순간 천장 단애로 추락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소림의 승려들조차도 평상시엔 절대 접근하지 않는 곳이기도 했다.
미끄러지는 이도 있었고, 넘어지는 이도 있었다. 하지만 그럴 때면 근처에 있는 이들이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그렇게 그들은 서로 도우며 힘겹게 숭산을 내려왔다.
겨우 숭산을 내려왔지만 한가하게 쉴 시간이 없었다. 지금쯤이면 저들도 젊은 무인들이 탈출했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추적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어서 움직입시다. 한시도 쉴 틈이 없습니다.”
초연운이 그들을 독려하며 주위를 둘러봤다.
수많은 무인들이 오직 그의 얼굴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그들이 믿고 따를 수 있는 이는 초연운뿐이었다.
“부상당한 분들을 부축하고, 그 외에 움직일 만한 분들은 사위를 경계하십시오.”
초연운은 쉴 새 없이 젊은 무인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무인들은 군말 없이 그의 말을 따랐다.
그때 먼저 상황을 파악하러 나섰던 해소월이 해남파 무인들과 함께 달려왔다.
“다행히 마교의 전력 대부분이 숭산에 오른지라 포위망이 풀렸어요. 북쪽에 길이 뚫렸으니 그쪽으로 가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초연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숭산의 북쪽에는 장강이 흐르고 있다. 장강에서 배를 타면 거칠기 그지없는 삼협을 지나 호북성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장강으로 대탈주가 시작됐다.
수많은 무인들이 초연운을 따라 북쪽으로 달렸다.
초연운은 선두에서 그들을 이끌며 쉴 새 없이 주위를 경계했다. 해소월이 그의 눈과 귀가 되어 주고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부디 늦지 않게 준비해 놓아야 할 텐데.’
입안이 바싹바싹 탔다.
이럴 때 맛 좋은 술 한 잔만 할 수 있다면 원이 없을 텐데.
초연운은 그런 생각을 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달리고 또 달렸다.
지쳐 쓰러진 자는 등에 들쳐 업고, 부축했다.
처음 숭산을 내려왔을 때만 하더라도 그들의 인원은 겨우 수백여 명에 불과했지만, 장강 지척에 이르렀을 때는 천 명이 훨씬 넘어갔다. 등봉현에 숨어 있던 자들과 낙오되었던 자들, 뒤늦게 달려온 무인들까지 합류한 것이다.
그들을 통솔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해소월과 청운을 비롯한 열일곱 명의 결사대가 큰 도움을 줬다.
마교 본단을 탈출한 그날 이후 그들은 초연운의 가장 큰 지지 세력이 되었다. 초연운의 명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뛰어들 기세였다.
청운은 선두에서 사람들을 이끄는 초연운을 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난세가 그의 그릇을 확장시킨 것인가? 예전에는 이 정도까지의 인재는 아니었던 것 같았는데.’
청운은 초연운을 난세가 탄생시킨 영웅이라고 생각했다.
수많은 위기를 넘기면서 그는 점점 더 성장하고 있었다. 처음엔 그런 초연운을 내심 질투하기도 했었지만, 이젠 그런 마음은 들지 않고 오로지 감탄할 뿐이었다.
그때였다.
“추, 추격입니다. 마교의 추적자들이 따라붙었습니다.”
갑자기 뒤쪽에서 누군가 달려오며 외쳤다.
초연운이 이를 꽉 깨물었다.
“벌써 따라붙은 건가? 그래도 시간이 조금은 더 걸릴 줄 알았는데.”
그의 예상보다 적이 훨씬 더 빠르게 추적해 왔다. 이쪽의 숫자가 적지 않지만 많은 이들이 부상을 입은 데다 사기마저 바닥이었다. 이 상태로 저들과 충돌하게 된다면 전멸할 수밖에 없었다.
“청운 형!”
“말씀하십시오, 초 대협.”
“청운 형이 이들을 이끌고 북진하십시오. 장강에 도착하면 기다리는 사람이 있을 겁니다. 그를 따라가시면 됩니다.”
“기다리는 사람이라뇨?”
“도착하시면 알게 될 겁니다. 지금은 설명할 시간이 없습니다. 어서 가십시오.”
“아, 알겠습니다. 허면 초 대협은?”
“놈들을 막겠습니다.”
“하지만…….”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습니다. 어서 가십시오.”
초연운이 청운의 대답도 듣지 않고 뒤로 달려갔다.
“우리도 초 대협을 따르자.”
“가자!”
그 뒤를 또다시 일단의 무리들이 따랐다. 그들은 모두 초연운에게 진심으로 감복한 무인들이었다. 그들은 누가 강요하지도 않았는데 자발적으로 초연운의 뒤를 따랐다.
초연운과 무인들은 순식간에 제일 뒤로 처졌다. 뒤쪽에는 이미 해소월과 소천이 문파의 제자들을 데리고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도 함께하겠어요.”
“같이합시다, 초 대협.”
그들의 말에 초연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많은 생사고락을 함께해 온 세 사람이었다. 눈만 봐도 서로의 의중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그들은 탈주 행렬의 제일 후미에 처져서 추적자들을 기다렸다.
오래 기다리지 않아 추적자들이 나타났다.
강위와 장무경이 휘하의 수하들을 데리고 무서운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마교의 최고수라 할 수 있는 사대군장이었다. 그런 이들이 둘이나 달려오고 있었다. 그들이 발산하는 기세는 폭풍처럼 주위를 휩쓸고 있었다.
초연운의 입술을 힘껏 깨물었다.
위축감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그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여기에서 그가 물러선다면 수많은 무인들이 죽을 것이다. 겁이 난다고 피할 수도, 물러설 수도 없었다.
“그래, 한번 해 보는 거야. 어차피 한 번 죽지, 두 번 죽냐? 까짓 한 번 사는 인생인데 멋지게 불태워 보지.”
초연운이 웃었다.
해소월과 소천 등이 그런 초연운을 보며 잠시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들의 얼굴에도 어느새 초연운과 비슷한 웃음이 번져 가고 있었다.
“바보들!”
누군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조차도 기꺼이 ‘바보’가 되기로 결심했다.
“이놈들!”
“잡았다.”
그 순간 강위와 장무경이 이끄는 군단이 들이닥쳤다. 그리고 격돌했다.
채채쟁!
“챠아앗!”
곳곳에서 무기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살기 담긴 음성과 비명성이 터져 나왔다.
“타합!”
초연운은 전력을 다해 강위를 향해 온몸을 내던졌고, 해소월과 소천은 장무경을 맡았다.
“이 애송이들이!”
“감히!”
강위와 장무경이 분노했다.
명색이 마교의 최고수인 두 사람이었다. 마교 내에서 적수를 찾아보기 힘든 자신들에게 감히 애송이들이 정면으로 덤벼드니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그들은 단숨에 초연운과 해소월을 죽이고자 전력을 다했다. 하지만 그들의 예상과 달리 초연운과 해소월 등은 결코 녹록한 상대가 아니었다.
비록 나이가 어리지만 그들 역시 산전수전을 다 겪은 능구렁이들이었다. 수많은 격전을 통해 비약적으로 강해졌고, 승부사적인 기질을 가지게 됐다.
그중에서도 초연운의 무력은 단연 발군이었다.
소림사에서의 기연 이후 그의 무력은 예전과 차원을 달리했다. 섬전마검 강위를 상대로도 그는 한 치도 밀리지 않고 대등하게 상대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그런 초연운의 모습이 젊은 무인들에게 용기를 줬다.
“우리도 힘을 내자.”
“저들을 물리칠 수 있다.”
“와아아!”
그들은 힘을 내서 강위와 장무경이 이끄는 군단을 막아 냈다.
피와 땀이 튀었다. 대지가 피로 물들었다.
그 속에서 젊은 무인들이 죽어 가고 있었다. 그들은 기꺼이 다른 이들을 살리기 위해 목숨을 내던졌다.
초연운의 가슴에 피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비록 전력을 다해 강위와 싸우고 있었지만, 그는 동료들의 죽음을 눈에 담고 있었다.
“이 애송이가!”
강위가 그런 초연운을 보며 분노를 터트렸다. 감히 자신을 상대하면서 다른 곳에 신경을 쓸 여유가 있다는 사실이 그의 신경을 건드린 것이다.
상대가 제아무리 창룡신협이라 불리는 최고의 젊은 고수라지만 자신과는 무공을 익힌 햇수부터 커다란 차이가 났다. 초연운이 태어나기도 전부터 그는 마교 최고수 중 한 명으로 대접받고 있었다. 그런 자신이 초연운을 단숨에 쳐 죽이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수치스럽게만 느껴졌다.
그는 연신 절기를 펼쳐 초연운을 압박했다. 하지만 초연운은 그를 상대로 한 치도 밀리지 않았다. 오히려 간간이 하는 반격이 더욱 날카로워지고 정묘해지는 느낌이었다.
‘이 녀석 발전하고 있어.’
가슴 한편이 서늘해졌다.
실제로 초연운은 지금 전신의 모든 감각이 활짝 열린 신기한 경험을 하고 있었다. 그의 정신은 강위에게 집중되어 있었지만, 주변의 모든 상황이 열린 감각을 통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그런데도 집중력은 전혀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제야 초연운은 자각했다. 자신이 강호에 몇 되지 않는 무인들만이 발을 디딘 지고한 경지에 올랐음을.
절대고수(絶對高手).
감히 대적할 자가 없다는 경지.
그와 강위의 경지는 대등했다.
문제는 승부의 맥을 짚어 내는 감각과 경험의 차이뿐. 처음엔 많은 차이가 났는데, 초연운은 빠른 속도로 간격을 줄여 가고 있었다.
쿠콰가각!
그들 주위에 폭풍이 휘몰아쳤다.
그만큼 움직임이 빨라 다른 사람들은 감히 그들의 싸움에 개입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렇게 얼마나 싸웠을까?
쾅!
굉음과 함께 두 개의 인영이 서로 반대 방향으로 튕겨 나갔다. 초연운과 강위였다. 두 사람 모두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초연운이나 강위 모두 가볍지 않은 상처를 입고 있었다. 양패구상(兩敗俱傷)한 것이다.
“허억! 허억!”
초연운이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심장이 격하게 뛰는 것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았다. 그만큼 몸에 무리가 간 것이다.
반면 강위는 감탄했다는 표정으로 초연운을 바라봤다. 이제까지 자신을 이 정도로 밀어붙인 이는 초연운이 유일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초연운에 비하면 그의 상태는 양호한 편이었다.
“잘됐다. 너라는 인재가 더 크기 전에 싹을 자를 수 있어서.”
만일 초연운에게 더 시간이 주어진다면 마교에 얼마나 큰 후환이 될지 몰랐다. 후환은 더 크기 전에 제거해야 한다는 것이 강위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무리해서라도 초연운을 죽이려 했다.
초연운이 붉게 충혈된 눈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동료들이 죽어 나가고 있었다. 장무경을 상대하는 해소월과 소천도 혈인이 된 지 오래였다. 어찌어찌 겨우 버티고 있었지만, 이젠 한계였다.
‘끝인가?’
자신의 한목숨 죽는 것은 상관없었지만, 저들까지 함께 목숨을 잃어야 한다는 사실이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자신과 이들의 죽음으로 다른 젊은 무인들을 살릴 수 있다면 헛된 희생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꼬맹아, 부디 늦지 마라.’
초연운이 이를 악물며 몸을 일으켰다.
죽을 때 죽더라도 끝까지 저들의 발목을 붙잡아야 했다. 아직 그의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그런 초연운의 모습에 강위가 질렸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살기를 피워 올렸다.
“크윽!”
“헉!”
그의 가공할 살기에 근처에서 싸우던 무인들이 심장을 부여잡고 쓰러졌다. 초연운 역시 그의 살기에 영향을 받아 피를 흘렸다. 강위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초연운을 향해 달려들었다.
슈우우!
그의 검이 섬전처럼 초연운을 향해 뻗어 나가는 그 순간이었다. 갑자기 커다란 무언가가 날아와 검로를 막았다.
“뭐냐?”
서걱!
강위가 경호성을 터트리며 날아온 물체를 두 동강 냈다. 그러자 사방으로 피가 튀었다.
“이건?”
강위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그의 검에 두 동강이 난 물체는 바로 사람이었다. 그것도 그가 아주 잘 아는 사람이었다.
“주광!”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하는 남자의 이름은 석주광, 그의 심복 중 한 명이었다.
누군가 석주광을 제압해 그에게 던진 것이다.
“어떤 놈이 감히!”
강위가 흉수를 찾아 석주광이 날아온 방향을 바라보는 순간이었다.
슈우우!
또다시 누군가 그를 향해 날아왔다.
피할 시간이 없었기에 그는 하는 수 없이 검을 휘둘러 다시 두 조각냈다.
철푸덕!
두 동강 난 무인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이번에도 그의 휘하 군단에 소속된 무인이었다.
강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제 초연운은 더 이상 그의 관심 대상이 아니었다. 그는 안력을 끌어올려 무인이 날아온 방향을 노려보았다. 그러자 자신이 있는 방향으로 똑바로 걸어오는 한 남자가 보였다. 남자가 그의 수하들을 던진 것이 분명했다.
마치 바다가 갈라지듯 남자의 앞이 갈라졌다.
그의 행로에 있는 모든 이가 약속을 한 것처럼 싸움을 멈추고 뒤로 물러났다.
남자가 모습을 드러낸 그 순간부터 뜨겁게 달아올랐던 전장의 공기가 싸늘하게 식었다.
단 한 명의 존재감이 전장을 지배하는 것이다.
그가 강위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그의 강렬한 존재감이 강제로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끄는 것이다.
그것은 고문이나 다름없었다.
남자는 한쪽 발을 살짝 절고 있었다. 세상에 수많은 무인이 존재했지만 이렇게 극명한 특징을 가진 무인은 오직 한 명뿐이었다.
“권……마!”
“아!”
탄성과 탄식이 한데 섞여 나왔다.
탄성을 내뱉은 자는 초연운과 함께하는 무인들이었고, 탄식을 뱉은 자는 마교 측 고수들이었다.
단 한 사람의 등장이 불러온 후폭풍은 그야말로 어마어마했다. 전장에 일순 정적이 내려앉은 것이다.
모두의 주목 속에서 담호는 걸음을 옮겼다.
“권마!”
강위가 검을 치들며 담호를 경계했다. 하지만 담호는 무심히 그를 지나쳐 갔다. 마치 자신을 허수아비 취급하는 담호를 보면서도 강위는 그 어떤 반응도 할 수 없었다. 이상하리만큼 몸이 굳었기 때문이다.
강위를 지나친 담호가 초연운에게 손을 내밀었다.
초연운이 친구의 굳건한 손을 맞잡고 일어섰다.
“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