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5
465화 5장.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다(3)
모두가 말이 없었다.
담호의 도움으로 마교의 추적대를 물리쳤다고 하지만 많은 희생자가 생겼기 때문이다. 동료들을 잃은 무인들은 비통할 수밖에 없었다.
담호는 흑귀에 탄 채 말이 없었다. 아니, 말을 할 수 없었다. 암혼심공으로 내상을 다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담호의 상태를 눈치챈 초연운은 더 이상 말을 걸지 않았다. 해소월과 소천 역시 지켜만 볼 뿐 입을 열지 않았다.
초연운의 시선이 문득 담호의 뒤를 따르고 있는 기산월을 향했다.
“저분은?”
“아, 이분은 호 형을 따르는 기산월 대협이에요.”
방진보가 먼저 나서서 소개했다. 그제야 기산월이 초연운에게 포권을 취했다.
“기산월이라고 합니다. 주군의 친구분이시니 저에게도 편하게 대해 주십시오.”
“반갑습니다. 기 대협. 호를 따른다고요?”
“그렇습니다.”
“허! 저 목석같은 인간이 누군가를 수하로 두다니, 쉽게 믿기 힘드네요. 어쨌거나 앞으로도 저 녀석을 잘 부탁드립니다. 생각보다 손길이 많이 가는 녀석입니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두 사람의 인사는 그렇게 끝을 맺었다.
초연운의 시선은 이내 남궁 형제에게 향했다.
“남궁세가의 생존자들이라고?”
“예! 저는 남궁선휘, 이쪽은 동생인 남궁영휘입니다. 창룡신협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형인 남궁선휘가 나서서 동생을 소개했다.
“남궁영휘가 창룡신협을 뵙습니다.”
“반갑다. 둘 모두 이곳까지 오는 동안 고생이 많았겠구나.”
초연운의 따스한 말에 남궁 형제는 눈물이 핑 도는 것을 느꼈다. 방진보 외에는 누구도 그들에게 이렇게 따뜻한 말을 해 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애써 눈물을 참았다.
방진보가 남궁 형제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 모습을 본 초연운이 빙긋 웃었다. 헤어지기 전보다 방진보가 훨씬 더 성숙해진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저렇게 다독이고 안정감을 줄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방진보가 성장한 증거였다.
자신이 성장한 것처럼 방진보도 성장을 했다는 사실이 그저 기꺼웠다.
“녀석!”
“왜요?”
“그냥 좋아서.”
“쳇!”
“반갑다.”
“저도요.”
짧지만 정감 있는 말들이 오갔다.
잠시 주위를 둘러보던 방진보의 안색이 살짝 굳었다. 그가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얼굴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방진보가 초연운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소청은요?”
“무사해!”
“정말요?”
“속고만 살았냐?”
“다행이다.”
방진보의 표정이 풀어졌다. 그러자 초연운이 피식 웃으며 그의 머리를 헝클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소청은 내가 반드시 지켜야지. 그 아이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널 볼 면목이 없는걸.”
“형?”
“곧 볼 수 있을 거다. 네 눈으로 확인해.”
“네!”
방진보가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마음속을 짓누르던 거대한 바윗돌 하나가 치워진 느낌이었다. 덕분에 한결 가벼운 기분으로 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초연운은 일행들을 이끌고 북상했다. 마교가 당장이야 담호의 위세에 짓눌려 돌아갔다고 하지만 언제 또 마음이 바뀌어 추적해 올지 몰랐기에 한시도 쉴 수 없었다.
쉬는 시간마저 아껴 북상을 한 끝에 그들은 마침내 장강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
“와아!”
순간 곳곳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거대한 장강 위에는 크고 작은 수십 척의 배가 떠 있었다. 조그만 쪽배와 어선부터 상선, 운마도강선까지 종류도 다양했다.
갑판 위로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와아아! 왔다.”
“그들이 도착했다. 어서 발판을 내려.”
초연운과 담호 등을 보며 환호성을 내지르는 이들은 바로 소림과 무림맹에서 탈출한 무인들이었다.
초연운이 그들을 보며 중얼거렸다.
“역시 늦지 않게 배를 준비해 줬구나. 다행이다.”
“누가 준비해 준 건데요?”
“누구긴 누구겠냐? 네가 그토록 보고 싶어 하던 그녀지.”
방진보의 물음에 초연운이 손가락으로 가장 큰 배의 갑판을 가리켰다. 배의 갑판에는 청초한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소녀가 서 있었다.
소녀를 본 순간 방진보의 눈이 크게 떠졌다.
“소청!”
커다란 운마도강선에 타고 있는 소녀는 은소청이 분명했다. 은소청도 방진보를 발견했는지 하얀 손을 흔들고 있었다.
초연운이 미소를 지었다.
“무리한 부탁이었을 텐데, 결국은 해냈네.”
무림맹과 소림사가 마교에 함락하기 전날, 초연운은 은소청에게 전서구를 날려 배를 준비해 줄 것을 부탁했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결과를 알 수 없어 노심초사했는데, 다행히 은소청이 늦지 않게 배를 모아 이곳에 도착해 있었다.
“소청!”
방진보가 은소청이 타고 있는 배를 향해 몸을 날렸다.
수면을 몇 번 박차자 그의 신형이 순식간에 은소청이 타고 있는 배의 갑판에 도달해 있었다.
“진보야.”
은소청이 눈을 크게 치떴다. 그런 그녀의 얼굴엔 감격의 빛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방진보가 자신도 모르게 은소청의 조그만 몸을 콱 껴안았다.
“우와아!”
“휘유우! 화산대숙수도 꽤나 대담하구만. 모두가 보고 있는데.”
배에 타고 있던 이들이 두 사람을 보며 탄성을 내뱉었다. 그에 정신을 차린 방진보와 은소청이 급히 떨어졌다. 그들의 얼굴은 홍시처럼 붉게 물들어 있었다. 하지만 싫지는 않은 표정이었다.
뒤늦게 도착한 이들이 배에 올라탔다. 마지막 한 명까지 배에 탈 때까지 그들은 경계의 빛을 늦추지 않았다.
마침내 담호를 마지막으로 모두 올라타자 배가 출발했다.
“가자! 화산으로.”
수십 척의 배가 장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그들의 목적지는 화산파가 있는 섬서성이었다.
누군가 멀어지는 뭍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우리는 반드시 다시 돌아올 것이다.”
***
소림사가 있던 자리.
이제는 재와 폐허만이 남은 그곳에 크고 화려한 제단이 세워졌다. 형형색색의 수실이 바람에 흩날리고, 커다란 향로에서는 연신 향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제단 근처에서는 중천의 무인들이 한창 제를 지낼 준비를 하고 있었고, 중천의 천주이자 마모인 단운향이 화려한 의복을 차려입은 채 대기를 하고 있었다.
잠시 후 모든 준비가 끝나고 마침내 단운향이 제단에 올라 주위를 둘러봤다.
소림사는 겨우 주춧돌만이 남아 옛 영화의 무상함을 보여 주고 있었고, 무림맹이 있던 자리엔 아직도 꺼지지 않은 불꽃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단운향의 얼굴에 환희의 빛이 떠올랐다.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는 마교의 무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아직도 그들의 전신엔 격전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었다. 상처 입고, 피로 물든 몸을 하고서도 그들은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소림사는 마교의 오랜 숙적이었다. 소림이 있었기에 마교는 정통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중원의 변방을 겉돌았다. 그 때문에 소림사를 향한 그들의 원망과 증오는 뿌리가 깊을 수밖에 없었다.
무림맹 역시 마찬가지였다. 마교가 세를 확장할 만하면 중원의 무인들은 무림맹과 같은 단체를 만들어 그들을 탄압했다. 정의맹, 무림맹, 시대에 따라 그 이름은 달라졌지만, 그들이 이제까지 마교의 앞을 막아 온 것만은 다르지 않았다.
오랜 숙적을 마침내 쓰러트리고 승리자가 되었기에 마교도들은 기쁨을 감출 수 없었다. 소와 돼지를 잡아 그들은 승리자로서의 당연한 권리를 누렸다.
단운향이 마침내 제단에 올랐다. 제단 위에는 향로뿐만이 아니라 제사에 쓰이는 각종 제기(祭器)들이 놓여 있었다.
“제를 시작하겠다.”
그녀의 선언에 교도들이 일제히 경건한 자세를 취했다.
“하늘에 계신 명존께 아뢰오니 오늘 우리는 승리를 거두어…….”
단운향의 목소리가 낭랑하게 울려 퍼졌다.
수많은 마교도들이 단운향의 목소리에 집중됐고, 경건한 분위기 속에서 제가 진행됐다. 하지만 모두가 제에 집중한 것은 아니었다.
“죄송하외다, 군사.”
장무경이 상한천에게 고개를 숙여 사죄를 하고 있었다. 그런 그의 얼굴엔 굴욕의 빛이 가득했다.
상한천에게 사죄를 하는 게 수치스러운 것이 아니라 담호를 상대로 손 한 번 써 보지 못하고 겁먹은 개처럼 도주해 온 사실이 굴욕스러운 것이다.
상한천이 물끄러미 장무경을 바라봤다.
그는 장무경을 탓하지도, 위로하지도 않았다. 그 모습이 장무경을 더욱 수치스럽게 만들었다.
잠시 후 상한천이 입을 열었다.
“알겠소.”
“군사!”
“피곤할 테니 그만 쉬시오. 고생하셨소.”
상한천은 담담한 표정으로 말하고 있었지만, 그 안에 담겨진 분노를 장무경은 읽을 수 있었다.
다른 이도 아닌 사대군장의 일원을 잃었다. 다른 고수들을 잃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피해였다. 그런데도 상한천이 애써 분노를 눌러 참는 것은 잔치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권마!’
분노는 뜨거웠지만 이성은 차가웠다. 그리고 이성이 분노를 꽉 누르고 있었다.
상한천의 눈빛을 본 장무경은 그에게 포권을 취한 후 조용히 물러났다.
그들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단운향이 주관하는 제의 분위기는 최고조로 치닫고 있었다.
“오오! 명존이시여.”
“무량의 생으로 우리를 인도하소서.”
광기가 장내를 지배하고 있었다.
마교의 무인들은 단운향이 읊조리는 단어 하나, 몸짓 하나에 열광하며 미친 듯이 진언을 외우고 있었다.
상한천의 미간이 깊은 골이 패였다.
마교는 명존을 따르는 종교였다. 종교이기에 광신도 같은 행위를 나쁘게 생각하진 않는다. 오히려 그런 행위를 오히려 기껍게 여겼다. 상한천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단운향이 주관하는 제는 왠지 거부감이 들었다.
장내를 지배하고 있는 기이한 열기와 광기. 그 모든 것이 이전엔 전혀 느껴 볼 수 없을 정도로 과잉된 것이 분명했다.
“명존이시여, 이 산에 있는 제물을 모두 받으시고, 우리를 무량의 생으로 인도하소서.”
“인도하소서.”
“오오!”
단운향의 목소리에 홀린 것처럼 마교의 무인들이 연신 그녀의 말을 따라 외쳤다.
‘좋지 않아.’
상한천의 눈빛이 더욱 차가워졌다.
뭐든지 선이 있는 법이다.
신교가 아무리 마교라 불리고 있고, 종교 단체라고 하지만 그래도 정도 이상의 광기는 오히려 해가 되는 법이었다.
제의 절정은 명존에게 바칠 제물이 제단 위에 끌려 나오면서 이뤄졌다.
“크으!”
몸부림을 치면서 끌려 나온 이는 무림맹의 수뇌부 중 한 명인 철혈우사(鐵血羽士) 종학선이었다.
순간 상한천의 안색이 싹 변했다.
“설마 인신 공양?”
인신 공양은 살아 있는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행위였다. 마교에서도 오래전에 금지된 잔혹한 행위였고 절대로 행해져서는 안 되는 금기였다.
상한천은 급히 단운향의 행위를 제지하려 했다. 하지만 그보다 단운향의 움직임이 빨랐다. 그녀는 제사에 쓰는 화려한 단검으로 종학선의 목을 그었다.
푸화학!
하늘 높이 피분수가 치솟았고, 단운향은 그의 피를 그대로 뒤집어썼다.
우웅!
숭산 전체에 기묘한 파장이 일어나 휩쓸고 갔다.
상한천이 흠칫했다.
순간 묘한 상실감과 기묘한 감각이 그를 엄습했기 때문이다.
속이 울렁이는 것이 구역질을 할 것 같았다. 상한천은 애써 속을 억누르며 고개를 들었다.
장진명이나 요사란 같은 절대고수들의 표정은 상한천과 비슷했다. 당혹스러움이 묻어난 표정과 눈빛으로 상한천에게 답을 구하고 있었다. 하지만 상한천은 답을 할 수 없었다. 그 역시 답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상한천이 일반 교도들을 바라봤다. 의외로 그들의 표정은 평안했다. 방금 전 있었던 변고는 느끼지 못한 것처럼.
‘착각이었나?’
상한천이 고개를 저었다.
단순히 착각이라고 치부하기엔 방금 전 감각이 너무나 선명했기 때문이다.
“대체?”
그가 의문을 갖는 사이 제는 어느새 끝나 있었다.
언제 광기에 휩싸여 있었냐는 듯이 광기는 사라지고 차분한 분위기만 흐르고 있었다.
단운향은 법복을 벗어 던진 채 사뿐히 걸음을 옮겼다. 상한천은 그녀의 기이한 분위기에 짓눌려 말을 걸 수 없었다.
그렇게 소림사에서 행해진 제사는 끝이 났다.
마교는 소림사에 거대한 지부를 설립했다.
신교하남지부(神敎河南支部)가 정식 명칭이었다.
무당파가 있던 호북성, 소림사가 있던 하남성이 완벽하게 마교의 수중에 들어갔고, 중원의 삼분지 이가 마교에 장악됐다.
훗날 ‘무림의 겨울’이라 불리게 되는 혹독한 시대는 이렇게 시작됐다.
그해 겨울에는 유난히도 큰 재해가 많이 일어났다.
초겨울에 유례없는 폭설이 내려 수많은 이들이 고립되어 얼어 죽었다. 그 때문에 마교도 더 이상 정복 전쟁을 이어 가지 못하고 활동을 멈춰야 했다.
하지만 재앙은 거기서 끝이 난 것이 아니었다.
겨울이 끝나갈 무렵 중원 전역에 대지진이 일어났다. 대지가 갈라지고, 산이 무너졌다. 이루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엄청난 수의 이재민이 생겨났다.
무림 문파라고 피해를 비껴 나갈 수는 없었다. 많은 문파가 지진에 건물이 무너지는 큰 피해를 입었고, 마교 역시 큰 타격을 입었다.
사람들의 울음과 원망이 하늘을 찔렀고, 민심은 점점 흉흉해져 갔다.
중원 최악의 겨울이었다.
그리고 한 해가 또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