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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권마-466화 (466/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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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6화 6장. 매화가 피어나면 손님이 찾아온다(1)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처럼 혹독하기만 하던 겨울도 어느새 끝이 보이고 있었다. 산봉우리마다 쌓여 있던 하얀 눈은 따스한 기운을 싣고 온 바람에 녹아내리고, 계곡마다 눈이 녹은 물이 가득 흐르고 있었다.

화산에도 봄은 찾아왔다.

봄을 가장 먼저 알린 것은 뭐니 뭐니 해도 화산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하얀 매화였다. 화산 곳곳이 매화로 하얗게 물들었고, 은은한 매화향이 바람에 실려 맴돌았다.

“하하!”

“우와아!”

매화나무 밑에서 어린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이제 예닐곱 살 정도로 보이는 아이들이 매화나무를 놀이터 삼아 뛰어놀고 있는 것이다.

그때였다.

“이놈들! 익히라는 무공은 수련하지 않고 예서 뛰어놀고 있는 것이냐? 어서 다들 제자리로 돌아가지 못할까?”

중년 도사의 노호성이 터져 나왔다.

그의 등장에 아이들이 ‘와’ 하면서 메뚜기처럼 사방으로 튀어 갔다. 그런 아이들을 바라보는 중년 도사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중년 도사의 도호는 원웅, 화산파의 일대제자였다. 그리고 매화나무에서 뛰어놀던 철없는 아이들은 지난겨울에 받아들인 도동들이었다.

지난해 발생했던 대재앙은 중원에 수많은 이재민들과 고아를 발생시켰다. 대재앙에 부모를 잃고 거리를 떠도는 아이들이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그들 모두를 구제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여력이 되는 만큼 화산파는 아이들을 받아들였다. 그 덕에 생각지도 못하게 도동들이 넘쳐났고, 덕분에 화산파에도 생기가 넘쳐흐르고 있었다.

도동 대부분이 무림과는 관련 없는 삶을 살아온 아이들이었다. 때문에 화산파와 같은 무파에서의 삶이나 무공 수련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그것이 얼마나 큰 기연인지도. 그 때문에 틈만 나면 이렇게 농땡이를 치며 뛰어노는 것을 더 좋아했다.

원웅은 그런 아이들을 탓하지 않았다. 화산에서의 삶은 이제 시작이었다. 이제부터라도 천천히 기틀을 만들어 나가면 됐다.

원웅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아직은 통제가 되지 않는 말썽꾸러기들일망정 그래도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졌기 때문이다.

“좋구나.”

아이들이 모두 도관으로 돌아간 것을 확인한 후에야 원웅은 종종걸음을 옮겼다.

그가 향한 곳은 화산 중봉에서도 외딴 곳에 있는 조그만 모옥이었다. 화산파의 도관들 대부분이 수수한 편이었지만, 모옥은 수수하다 못해 초라할 정도였다. 하지만 모옥 앞에서 원웅은 옷매무새를 단정히 하고 최대한 공손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사숙조, 저 원웅입니다.”

잠시 후 초라한 모옥의 문을 열고 청수한 얼굴의 노도사가 걸어 나왔다. 그러자 원웅이 허리를 깊이 숙였다.

“사숙조.”

노도사를 바라보는 원웅의 얼굴엔 존경의 빛이 가득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금 그의 앞에 서 있는 노도사는 바로 화산파 제일의 어른인 현소 진인이었다.

현소 진인은 실전된 절학들을 다시 돌려줌으로써 몰락한 화산파를 일으켜 세웠다. 무공은 어린 도동만도 못했지만 세상의 이치를 꿰뚫어 보는 혜안을 갖고 있었고, 화산파의 정신적인 지주로 항상 든든한 모습을 보여 줬다.

장문인인 운경은 물론이고, 화산제일검인 명경조차도 그를 대함에 있어 항상 극상의 예를 취할 정도였다. 그러니 일반 제자들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무슨 일이냐? 원웅.”

“아, 장문인께서 사숙조를 모셔 오라 하셨습니다.”

“장문인이?”

“예! 의논할 것이 있다하십니다.”

“이 늙은이한테 의논할 것이 뭐 있다고 부르시는가?”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저 사숙조를 모셔 오라는 명만 들었습니다.”

“알겠네. 함께 가세.”

“예! 제자가 안내하겠습니다.”

원웅이 앞장서서 현소 진인을 안내했다.

현소 진인이 원웅을 따르다 말고 문득 화산 전경을 둘러보았다. 바람에 실려 오는 매화향을 맡았기 때문이다.

“봄이구나.”

유난히도 올해 겨울이 무척이나 길다 생각했었는데 어느새 봄이 찾아와 있었다.

“예?”

“아니다. 그냥 혼잣말이야. 봄이 찾아오니 이 늙은이가 기분이 좋아서 그러니 신경 쓰지 말거라.”

“아, 예! 알겠습니다.”

“가자!”

“예!”

두 사람이 다시 걸음을 옮겼다.

중봉을 내려와 연화봉이라 불리는 서봉으로 향했다. 봉우리를 내려가고, 오르는 과정이 번거롭고 힘들었지만 현소 진인은 힘든 기색 하나 내보이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화산 곳곳에 새로운 도관이 세워져 있었다. 일차 정마대전 당시 한 번 무너지고, 불과 얼마 전 또 한 번 혈난을 겪었다. 그리고 작년에는 상궁이 무너지는 비극까지 겪었다. 그러다 보니 화산파에는 옛 도관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거의 대부분이 근래에 새로 지은 것들이었다. 화려하게 지을 수도 있었지만 장문인인 운경은 될 수 있으면 수수하게 짓도록 명을 내렸다. 때문에 새로이 지은 도관들은 수수하다 못해 초라하게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화산파의 도사들 중 누구도 그런 화산파의 도관을 부끄럽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도관이나 전각 같은 겉모습이 아니었다.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제일 중요했다.

현재 화산파는 새로운 제자들을 키우는 데 전력을 다하고 있었고, 실제로 그 결과가 조금씩 나타나고 있는 중이었다.

현소 진인의 눈에도 그 결과가 보였다. 젊은 도사들과 어린 도동들이 한데 어우러져 생기가 넘쳐났다. 현소 진인의 그들의 모습에서 화산의 밝은 미래를 보았다.

“음?”

문득 그의 시선이 담 구석으로 향했다. 그곳에 쪼그려 앉아 있는 조그만 아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또래의 다른 아이들에 비해 너무나 왜소해 보이는 소년이었다. 무릎을 감싸 안고 있는 모습이 유독 쓸쓸해 보였다.

현소 진인은 방향을 바꿔 소년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원웅이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급히 뒤를 따랐다.

현소 진인이 무릎을 꿇으며 소년과 시선을 맞췄다.

“여기서 혼자 왜 이러고 있느냐? 다른 아이들이 놀아 주지 않는 것이냐?”

“아, 아니에요.”

소년이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눈동자가 선명한 게 여간 똘망똘망해 보이는 것이 아니었다.

소년은 현소 진인을 보고 놀라 말을 잘 잇지 못했다. 그러자 원웅이 급히 말했다.

“무얼 하느냐? 본파의 최고 존장께 어서 예를 취하지 않고.”

“아니다. 예가 무엇이 중요하겠느냐?”

현소 진인이 원웅을 말리며 미소를 지었다. 푸근한 그의 미소에 소년의 얼굴에 짙게 드리워진 그늘이 조금은 사라졌다.

“이름이 무엇이냐?”

“나, 남서일이에요.”

“좋은 이름이구나. 우리 서일이는 왜 그렇게 기분이 좋지 않누?”

“그게…….”

순간 남서일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며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러자 현소 진인이 남서일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남서일이 용기를 내서 말했다.

“그냥 무공을 익히는 게 무서워서요.”

“왜 무섭지?”

“무공을 익히면 남을 때려야 하잖아요?”

“누가 그러느냐? 무공을 익히면 남을 때려야 한다고.”

“모두 다 그래요. 무공을 익혀서 마, 마교라는 곳과 싸워야 한다고.”

“우리 서일이는 남과 싸우는 게 싫으냐?”

“네!”

남서일이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현소 진인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면 안 싸우면 되지. 누가 뭐라고 하더냐?”

“하, 하지만 안 싸우면 화산파에서 쫓겨날지도 모른다고.”

“쫓겨난다고? 왜?”

“그, 그게 쓸모가 없으니까요.”

남서일이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런 그의 얼굴에선 어느새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흐르고 있었다.

현소 진인이 남서일의 조그만 몸을 꼭 끌어 안았다.

“왜 우누?”

“화산파에서 쫓겨나면 전 갈 곳이 없어요. 엄마도 죽고, 아빠도…… 흐흑!”

결국 남서일이 현서 진인의 품에 안겨 대성통곡을 했다. 현소 진인은 꽉 껴안은 남서일의 등을 토닥였다.

“저, 저?”

현소 진인의 가슴이 남서일의 눈물로 젖는 것을 보며 원웅이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그의 입장에서는 남서일이 불경을 저지르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소 진인의 얼굴을 보자니 자신이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진심으로 남서일의 고민을 공감하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화산파는 도문(道門)이기도 했지만 무파(武波)이기도 했다. 도사도 기본적으로 무공을 익혀야 했고, 무공을 익히지 않은 도사는 쓸모가 없다는 것이 세간의 인식이었다. 특히 지금과 같은 전란의 시대에는 무공을 익히지 않은 도사는 문파에 크게 필요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도동들 사이에는 무공을 익히지 않으면 화산파에서 쫓겨날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모든 이야기를 들은 현소 진인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괜찮다. 무공을 익히지 않아도 서일이는 이곳에 있을 수 있단다.”

“저, 정말인가요? 저 계속해서 여기 있어도 돼요?”

“그럼!”

“아!”

그제야 남서일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이 귀여웠는지 현소 진인이 시선을 떼지 못했다.

“남을 때리는 것이 싫으면 서일이는 무엇을 좋아하느냐?”

“전 책을 읽는 것을 좋아해요.”

“책?”

“네!”

“그래? 그것 참 잘되었구나. 나도 마침 책을 좋아하는 아이를 찾고 있었는데.”

“정말요?”

남서일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말이고말고. 서일이는 이 할아비를 따라가자.”

현소 진인이 손을 내밀었고, 남서일은 망설이지 않고 그 손을 잡았다. 그 모습을 본 원웅이 몸을 흠칫 떨었다. 현소 진인이 손을 내민 의미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사숙조께서는 서일이를 진정한 후계자로 삼았구나.’

현소 진인이 화산파의 최고 어른이라는 것과 화산권마 담호의 사부라는 사실 때문에 사람들이 잊고 있는 사실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현소 진인이 화산파의 학도사라는 것이다.

학도사는 화산파의 모든 것을 배우고, 기억하고, 연구하고, 그 모든 것을 후대에 전수해 줘야 할 막중한 사명을 갖고 있었다. 화산파가 다시 예전의 성세를 빠르게 회복할 수 있었던 것도 알고 보면 현소 진인이 학도사로 갖고 있었던 지식 덕분이었다.

그동안은 무너진 화산파를 다시 일으켜 세우느라 후대를 양성할 여유가 없었던 현소 진인이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안정기에 접어든 이상 반드시 후대 학도사를 키워야 했다.

현소 진인은 자신의 후대 학도사로 남서일을 택했다. 그리고 원웅은 그 모습을 지켜본 유일한 사람이었다. 원웅은 영광이라고 생각했다.

현소 진인과 남서일이 어깨를 맞댄 채 걸음을 옮기는 모습은 정겨워 보이기까지 했다.

잠시 후 그들은 연화봉 정상에 지어진 새로운 상궁에 도착했다. 상궁 앞에는 화산파의 제자들이 도란도란 모여 있었다. 그들은 현소 진인을 발견하자마자 분분히 허리를 숙였다.

“사숙조님 오십니까?”

“사조님!”

그들의 얼굴에 의혹의 빛이 떠올랐다. 현소 진인의 곁을 따르고 있는 남서일 때문이었다. 일개 도동이 어째서 현소 진인을 따르고 있는지 그들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원웅이 그들에게 방금 전 있었던 일을 귀엣말로 알려 줬다.

“그럼?”

“새로운 학도사?”

순간적으로 그들의 얼굴에 부러움의 빛이 떠올랐다.

예전에는 학도사가 경원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현소 진인으로 인해 학도사에 대한 인식이 크게 바뀌었고, 이젠 오히려 경외의 대상이 되었다. 화산파에서 가장 현명한 자가 학도사가 된다는 인식이 생긴 것이다.

현소 진인은 그들에게 알은척을 한 후 남서일과 함께 상궁 안으로 들어갔다.

상궁 안에는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이제는 완숙한 관록이 묻어나는 장문인 운경, 그리고 잘 벼려진 칼처럼 날카로운 분위기를 풍기는 명경, 그 외에도 새로이 장로가 된 이들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사숙.”

제일 먼저 장문인인 운경과 화산제일검 명경이 일어나 인사를 했다. 그러자 다른 장로들도 분분히 인사를 했다.

“인사는 됐네. 우리 사이에 무슨. 다들 자리에 앉게.”

현소 진인이 그들의 인사를 만류하며 자리에 앉았다.

운경의 시선이 현소 진인의 옆에 있는 남서일을 향했다.

“그 아이는?”

“책을 좋아한다고 하니, 앞으로 그쪽으로 가르쳐 볼 생각이네.”

“아!”

운경이 단숨에 현소 진인의 말에 담긴 뜻을 알아차렸다.

“혜안과 지식을 전수할 제자를 맞이한 것 축하드립니다. 사숙.”

“축하드립니다, 사숙.”

명경과 장로들이 연이어 축하를 해 왔다. 현소 진인은 담담하게 웃고 말았지만, 얼떨결에 따라온 남서일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덕분에 장내의 분위기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그때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천하에 위명이 드높은 현소 진인이 새로이 제자를 얻었으니 이는 화산뿐 아니라 무림의 큰 흥복입니다. 감축드립니다, 현소 진인.”

그제야 현소 진인의 시선이 낯선 인물을 향했다.

이제 육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노인이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꼬장꼬장한 인상과 날카로운 눈매가 돋보이는 노인이었다. 노인의 좌우에는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는 장년의 무인들이 함께 하고 있었다.

운경이 뒤늦게 그들을 현소 진인에게 소개했다.

“이분들은 종남파의 신임 장문인이신 고일원 대협과 제자분들이십니다.”

현소 진인이 놀란 표정을 지으며 고일원에게 포권을 취했다.

“반갑습니다, 고 장문인. 인사가 늦었습니다.”

“아닙니다. 현소 진인을 뒤늦게나마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동안 고생이 많으셨다 이야기 들었습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잘 수습할 수 있었습니다.”

“다행입니다.”

현소 진인의 진심 어린 표정에 고일원이 미소를 지었다.

같은 섬서성 내에 있었기에 오랫동안 화산파와 반목을 해 온 종남파였다. 하지만 화산파가 혈겁을 당할 때 종남파 역시 마교에 의해 멸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기에 지금은 동병상련의 심정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장문인인 설문천과 장로는 물론이고, 종남제일검인 종남진검 염중화까지 잃은 종남파였다. 수뇌부와 수많은 제자들을 잃고 하루아침에 나락에 떨어진 종남파를 수습한 이가 바로 고일원이었다.

고일원이 말했다.

“현소 진인께서도 오셨으니 이제 회의를 진행합시다. 우리 종남파는 언제든 마교와 싸울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고일원의 음성엔 스산한 한기가 감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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