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8
468화 6장. 매화가 피어나면 손님이 찾아온다(3)
모두 다 함께 비명성이 터져 나온 곳으로 갔다. 그곳은 커다란 동혈 입구였다.
그곳엔 두 명의 무인이 바닥에 엎드린 채 꺽꺽대고 있었다. 검붉은 피를 토하는 무인들의 상태는 그야말로 심각해 보였다.
“저, 저?”
고일원은 경지에 이른 고수답게 한눈에 무인들의 상태를 알아보았다. 심상치 않은 내상이었다. 이대로 방치한다면 내상이 악화되어 죽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초연운과 창천맹의 수뇌부들은 별로 걱정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그 이유는 금방 밝혀졌다. 묘령의 여인이 사뿐히 걸어와 무인들의 상처를 보살폈기 때문이다.
그녀는 무인들의 전신에 침술을 펼치더니 품에서 환단 두 개를 꺼내 무인들의 입에 한 알씩 넣어 줬다. 그러자 창백하게 질렸던 무인들의 얼굴이 순식간에 혈색을 되찾았다. 그리고 은침을 회수하니 언제 내상을 입었냐는 듯이 벌떡 일어났다.
두 눈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믿기 힘든 광경이었다.
그들이 입은 내상은 아무리 뛰어난 명의라도 쉽게 치료하기 힘들 정도로 심각한 것이었다. 그런 내상을 단순히 침술과 단환 한 알로 치료해 내다니, 고일원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기적 같은 일이었다.
“대체 저 여인이 누구기에?”
“신의입니다.”
초연운이 담담히 대답했다.
“신의?”
“신의 종리연 소저입니다.”
순간 여인이 초연운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뒤돌아봤다. 언뜻 평범한 듯 보이지만 기품 있는 아름다움을 간직한 여인은 바로 종리연이었다.
종리연이 현소 진인과 명경을 발견하고 반색을 했다.
“언제 오셨어요?”
“방금 전에 왔단다. 허허!”
“연락 좀 미리 주지 그러셨어요. 그럼 마중 나갔을 텐데.”
“번거롭게 무슨.”
“그래도요.”
“더 예뻐진 것 같구나. 호가 잘해 주는 모양이구나.”
“어휴! 잘해 주긴요.”
종리연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모습마저도 예뻐 보였기에 현소 진인은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한편 고일원은 숨이 멎을 만큼 놀라고 있었다.
‘맙소사! 신의라니.’
그 역시 종리연에 대한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다. 숨만 붙어 있다면 아무리 위중한 환자라도 살려 낼 수 있고, 그 어떤 내상도 치유할 수 있다는 전설적인 신의의 명성을.
화산이 급속도로 예전의 성세를 회복한 데는 그녀의 도움이 크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솔직히 쉽게 믿기 힘들었었다. 하지만 오늘 그녀의 실력을 직접 눈으로 보니 믿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그때 내상을 입었던 무인들이 종리연에게 다가왔다.
“늘 폐만 끼치는군요. 덕분에 살았습니다.”
“아니에요. 그 사람 때문에 이렇게 된 건데요. 오히려 제가 미안하지요.”
“아닙니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덕분에 저희들의 한계를 실감하고, 벽을 깰 수 있었습니다.”
무인이 손사래를 쳤다.
고일원이 무인을 알아봤다.
“아니, 자네는 금사문(金射門)의 양천화 소협이 아닌가?”
“아, 종남파의 고 장문인이시군요. 인사가 늦었습니다. 금사문의 양천화가 인사드립니다.”
“허! 자네도 여기 있었던가?”
고일원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양천화는 마교의 본단을 기습했던 결사대의 일원이었다. 최후까지 살아남은 십칠인 중 한 명이기도 했고, 강호에서 촉망받던 후기지수였다. 비록 구무룡에는 속하지 못했지만, 그 재능과 오성만큼은 무척이나 뛰어나다고 들었다. 하지만 문파의 태생적인 한계 때문에 더 이상의 성장을 기대하는 것은 어렵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고일원도 양천화를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그도 양천화의 재능이 뛰어나다고 들었지만 한계가 명확하다고 판단했었다. 금사문의 절기가 그의 뛰어난 재능을 뒷받침해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양천화가 보여 주는 기도와 성취는 고일원의 예상을 훨씬 웃도는 것이었다.
초연운이 양천화에게 물었다.
“호는?”
“어휴! 말도 마십시오.”
“여전한 모양이군.”
“제발 좀 살살해 주라고 말 좀 해 주십시오. 이러다 정말 죽겠습니다, 맹주.”
양천화가 질렸다는 표정을 짓자 초연운이 피식 웃었다. 상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초연운이 양천화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들겨 준 후 동혈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나 왔네. 자네 사부님도 오셨으니 이제 그만 나오게나.”
쿠우우!
동굴 안에서 한 줄기 거친 바람이 밀려 나왔다. 순간 고일원은 전신의 털이란 털이 모조리 쭈뼛 곤두서는 것을 느끼고 자신도 모르게 검을 빼 들었다.
명경이 검을 잡고 있는 그의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
“검을 거두십시오.”
“하, 하지만…….”
“괜찮습니다.”
명경이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고일원은 그럴 수 없었다.
끔찍하리만큼 불길한 느낌이 전신을 지배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가 느끼는 불쾌감과 위화감은 말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렬했다. 이런 느낌은 생전 처음인지라 고일원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동굴 안에서 누군가 나오고 있었다. 그에게 끔찍한 위협을 주는 그 무언가가.
잠시 후 어둠을 뚫고 그가 모습을 드러냈을 때 고일원은 하마터면 검을 휘두를 뻔했다.
사자의 갈기처럼 산발한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깊은 눈동자와 굳게 다문 입술이 보였다. 무인으로서 큰 체구는 아니었지만, 그에게선 마치 폭발하기 직전의 화산처럼 강렬한 기운과 분위기가 느껴졌다.
고일원은 거의 본능적으로 그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화……산권마 담호.’
천하에 수많은 무인들이 존재하지만 이렇게 보는 이로 하여금 위기감을 느끼게 하는 무인은 담호 단 한 명뿐이었다.
명문 화산파가 세상에 내보낸 희대의 마인.
섬서성이 마교의 광풍 속에서도 아직까지 무사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담호 때문이라는 소문이 나돌고 있었다.
담호가 무서워서 마교가 섬서성만큼은 건드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누군가는 터무니없는 이야기라 하고, 어떤 이는 헛소문이라고 치부했지만, 무림과 관계된 이들만큼은 그것이 아주 거짓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만큼 담호가 강호에서 차지하고 있는 존재감이나 위치는 특별한 것이었다.
담호의 시선이 현소 진인을 향했다.
“사부.”
“오랜만이구나. 잘 지냈느냐?”
“예!”
현소 진인이 따스한 눈으로 담호를 바라봤다.
그때 초연운이 다가와 담호의 팔을 붙잡아 끌었다.
“우리 애들 그만 두들겨 패고 이리 와. 진인께서도 오셨으니 오늘은 조금 쉬라고.”
“…….”
“자네 때문에 근래 철혈지옥수련관을 통과한 이가 단 한 명도 없다는 것은 알고 있지? 그들에게도 조금은 숨 쉴 여유를 주라고.”
담호가 나온 동혈은 철혈지옥수련관 최후의 관문이었다. 본래 그곳엔 치밀하게 설계된 기관이 있었지만, 어느 날 담호가 그곳을 거처로 삼아 버렸다.
즉 철혈지옥수련관을 통과한다는 건, 담호라는 관문을 지나가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 후 수많은 고수들이 도전했다. 하지만 단 한 명도 담호란 관문을 통과하지 못했다.
많은 이들이 예외 없이 내상을 입거나 크고 작은 부상을 입었다. 그때마다 그들을 치료해 준 이는 신의 종리연이었다.
그런 두 사람을 보며 누군가 농담처럼 말했다.
“쳇! 바깥사람은 두들겨 패고, 안사람은 치료해 주는 건가? 미워할 수가 없잖아.”
많은 이들이 그의 의견에 동의했다. 하지만 불만을 토로하는 사람은 없었다.
담호라는 존재가 있어 한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었고, 그 덕에 무섭게 실력이 느는 것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현소 진인이 담호에게 말했다.
“우리 잠시 걸을까?”
“예!”
그제야 담호가 겨우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현소 진인이 초연운을 보며 말했다.
“그럼 고 장문인과 이야기를 나누게나. 나는 호와 잠시 단둘이 시간을 보낼 테니.”
“부디 오래오래 보내십시오.”
“허허!”
초연운의 말에 현소 진인이 너털웃음을 흘렸다.
밖에서는 창룡신협이라 불리고, 안에서는 창천맹의 맹주라고 떠받들어지지만 현소 진인에겐 언제나 살가운 초연운이었다.
담호는 현소 진인과 어깨를 나란히 한 채 걸음을 옮겼다.
그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오히려 일 년 전보다 더 과묵해진 것 같기도 했다. 현소 진인은 그런 제자가 믿음직하면서도 안타까웠다.
남들은 권마나 마선과 같은 불길한 단어로 지칭했지만 현소 진인에게는 단 하나뿐인 제자였다. 비록 가르쳐 준 것은 몇 되지 않았고, 스스로 이만큼 성장했지만 그래도 그에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물이었다.
다른 사람들처럼 말도 많이 하고, 자유를 즐겼으면 좋겠는데, 그의 제자의 어깨를 짓누르는 삶의 무게가 너무 무거웠다. 그래서 갈수록 말이 없어지는 것이 그저 안타까울 뿐이었다.
“몸은 좀 어떻느냐?”
“좋습니다.”
“다행이구나. 한데 산월은 보이지 않더구나. 밖에 나간 것이냐?”
“예!”
“참, 내가 이번에 새로운 제자를 받았다.”
그제야 담호가 고개를 돌려 현소 진인을 바라봤다. 그만큼 뜻밖의 말이었기 때문이다.
“제자입니까?”
“다행히 학도사 재목이 있더구나. 딴마음 먹기 전에 제자로 삼았다.”
“다행이군요.”
“너에게도 사제가 되니 나중에 보게 되면 부디 잘해 주거라.”
“그러겠습니다.”
“고맙구나.”
“늦게라도 제대로 된 제자가 생겨서 다행입니다.”
“너도 제대로 된 제자다. 비록 사부가 못나서 가르쳐 준 것 없이 혼자서 컸지만. 그러니 그런 말 하지 말거라. 남들이 뭐라 하든 넌 내 제자이자 나의 가장 큰 자부심이다. 너에게 항상 큰 짐만 지워 주는 것 같아 미안할 뿐이구나.”
“아닙니다.”
담호의 덤덤한 대답에 현소 진인이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 대화를 끝으로 두 사람은 말없이 걷기만 했다.
굳이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사제는 서로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 제자는 사부를 존경하고, 사부는 제자를 진심으로 아끼고 위했다. 비록 성향은 극과 극으로 다르지만 말이다.
문득 현소 진인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어느새 어둠이 내리고 하늘엔 별들이 빛나고 있었다. 하늘의 별빛이 현소 진인의 두 눈에서 빛나고 있었다. 담호는 그 모습을 말없이 바라봤다.
현소 진인이 입을 연 것은 그 후로부터 한참 후였다.
“휴우! 천기가 너무나 불안하구나. 어찌 이리 불안하게 흔들린단 말인가? 아무래도 천하대란이 천기에 악영향을 준 것이 분명하구나. 너무 많은 이들이 죽어 온 천하에 원념(怨念)이 가득하니 천기가 흔들리는 것도 당연하지.”
그의 음성엔 불안한 마음이 고스란히 묻어 나오고 있었다.
언제부턴가 자연스럽게 천기를 읽게 된 이래 이렇게 불안했던 적은 처음이었다. 뭐라고 확실히 꼭 짚어 말할 순 없었지만, 그가 보는 천기는 정상이 아니었다. 이제는 하늘을 보는 것이 두렵게 느껴질 정도였다.
현소 진인의 어깨가 가늘게 떨리자 담호가 입을 열었다.
“괜찮을 겁니다.”
“호야!”
“괜찮을 겁니다, 사부.”
“그래!”
담호의 담담한 말 한마디에 안정을 찾는 자신을 느끼며 현소 진인은 사부로서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이럴 때는 꼭 사부와 제자가 뒤바뀐 것 같았다.
“못난 꼴을 보였구나. 미안하다.”
“아닙니다.”
“천기가 이리 불안하니 내 마음 또한 불안하구나. 무언가 분명 잘못되었는데 이유를 확실히 알 수 없으니 쉽게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가 없었다.”
현소 진인이 느끼는 불안한 감정은 하루 이틀 사이에 생긴 것이 아니었다. 대재앙이 발생한 일 년 전부터 그는 때때로 원인을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시달리곤 했다. 그래서 굳이 종남파의 장문인인 고일원을 따라 이곳까지 왔다. 염치없는 말이지만 제자인 담호를 보면 날카롭게 곤두섰던 신경이 조금은 편해졌기 때문이다.
“너도 짐작은 하겠지만 종남파와 협력을 하기로 했다. 종남파의 고 장문인이 그러더구나. 마교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대재앙이 어느 정도 수습되어 가니 마교가 다시 세상을 지옥으로 몰아넣는구나. 도대체 언제 이 악순환의 고리가 끊어질지.”
“사부!”
“그래, 언제 세상에 다시 나갈 생각이냐?”
“…….”
담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현소 진인이 다시 물어보려고 하는데 담호의 시선이 산 아래로 향했다.
“왜 그러느냐?”
투웅!
무언가 이질적인 감각이 느껴졌다.
담호의 눈매가 좁아지는 순간 소화산의 공기가 변했다. 그리고 소화산에 있던 무인들이 분주해졌다.
“아래다.”
“움직여!”
창천맹이 움직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