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1
471화 7장. 창천(蒼天)의 깃발 아래 영웅이 모인다(3)
“미안해. 내가 너무 흥분했었네.”
초연운이 검율천에게 사과했다.
그는 모든 것을 자신의 탓으로 돌렸다. 실제로도 그랬기에 더 할 말이 없었다.
“아닐세! 정말 대단했네.”
검율천이 고개를 저었다.
아직도 피부의 소름이 가시지 않고 있었다. 그만큼 초연운이 펼쳤던 수법은 그에게 큰 위기감을 느끼게 했다. 근래 들어 이 정도로 위기감을 느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대로 성장하면 초연운은 분명 자신의 훌륭한 적수가 될 것이다. 하지만 그는 초연운에게 더 신경을 쓸 수 없었다. 그보다 그의 곁에 있는 담호가 더 신경이 쓰였기 때문이다.
담호를 본 순간 이번에는 그의 피가 끓어오르고 시작했다. 무인으로서의 본능과 승부욕이 발동한 것이다.
온몸이 저릿저릿했다. 근육이 움찔하는 것이 당장이라도 담호와 승부를 겨루고 싶었다. 하지만 참아야 했다.
오늘 그는 검율천이라는 무인의 자격으로 온 것이 아니라 신마련의 련주 자격으로 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주먹을 내미는 대신 담호에게 인사를 했다.
“오랜만이군.”
“음!”
“이렇게 보니 반갑군. 한 일 년 만인가?”
“그런 것 같군.”
“훨씬 보기 좋아 보이는군. 역시 사문 근처에 있는 것이 좋은 모양이야.”
“그런 한가한 이야기나 하려고 온 것은 아니겠지?”
“맞네! 우리가 한가하게 안부나 물을 사이는 아니지.”
검율천이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리를 옮기지. 이곳은 너무 번잡하니까.”
초연운이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들은 곧 자리를 옮겼다.
한 명, 한 명이 천하를 오시할 수 있는 절대고수였다. 그런 고수 세 명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자 소화산이 꽉 차는 것 같았다. 거기에 음유경과 신무월이라는 고수까지 더해지니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숨을 쉬는 것이 힘들 정도였다.
창천맹의 무인들은 그들의 존재감에 압도됐다.
초연운은 그들을 소화산에 있는 가장 큰 막사로 안내했다. 평소 창천맹의 수뇌부들이 회의실로 이용하는 곳이었다.
초연운과 검율천이 긴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고, 담호가 중앙의 자리를 차지했다. 음유경과 신무월은 마치 무력시위라도 하듯이 검율천의 뒤에 섰다.
그때 막사의 문이 열리며 두 사람이 더 들어왔다. 해소월과 소천이었다. 그들이 뒤늦게 달려온 것이다.
두 사람은 당연하다는 듯이 초연의 뒤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자 균형이 잡혔다.
먼저 입을 연 이는 초연운이었다.
“자네가 창천맹과 연합하고 싶다고?”
“그렇네! 정확히는 창천맹과 신마련의 연합이지.”
검율천의 대답에 초연운이 문득 담호를 봤다. 담호는 입을 꾹 다문 채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두 사람의 결정에 어떤 개입도 하지 않겠다는 의지였다.
“좋네! 연합을 하는 것은 이쪽도 바라마지 않는 바일세. 하지만 그 전에 한 가지 확인할 것이 있네. 솔직히 대답해 주게.”
“얼마든지.”
“호에게 자네들은 천사교를 추적한다고 들었네. 어찌 되었는지 알고 싶네.”
“천사교는 완전히 잠적했네.”
“완전히?”
“그래! 외부의 모든 흔적을 지우고 세상에서 사라졌네.”
“무슨?”
“믿기지 않겠지만 내 말은 사실일세. 천사교를 가장 오래 추적해 온 게 우리일세. 믿어도 좋네.”
검율천의 말은 사실이었다.
혈노, 호천명은 그날 이후 완전히 세상에서 사라졌다. 뿐만 아니라 그가 세상에 은밀히 내놓았던 천사교의 모든 인물들도 안개처럼 사라졌다. 마치 처음부터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천사교의 목적은 중원과 마교를 충돌시켜 혼란을 조장하는 것 아니었던가?”
“맞네!”
“그런데 그들이 사라졌다고?”
“쉽게 이해가 되지 않겠지만 그들은 세상에서 완전히 모습을 감췄네.”
“이제 와 그들이 왜?”
“아마 소기의 목적을 이뤘기 때문이겠지. 중원의 혼돈은 목표에 다다르기 위한 수단에 불과할 뿐이겠지. 아마 진정한 목적은 따로 있을 것이네.”
“진정한 목적?”
초연운의 미간에 깊은 골이 패였다. 그는 검율천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들이 소림사와 무림맹을 짓밟고 한 일은 소림사의 터전에서 하늘에 제를 지내는 것이었네.”
“그게 어떻다는 건가? 제를 지내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던가? 특히 마교와 같은 종교 집단이라면.”
“그렇긴 하지. 허나 신교의 오랜 역사 어디에도 적의 목숨을 빼앗고 난 후 바로 제를 올리는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네. 제는 신성한 것이라네. 몸과 마음을 경건히 하고 명존께 앞으로도 깨끗이 살아가겠다고 맹세하는 행위, 때문에 제를 올리기 백 일 전부터는 절대 피를 보지 않는 것이 우리의 오랜 전통이라네.”
“으음!”
“제를 주관한 이는 성녀였던 여자라네. 지금이야 마모라고 불리고 있지만 오랫동안 제를 주관해 온 그녀가 그런 사실을 모를 리 없지. 그런데도 그녀는 제를 지냈네. 숭산에서 죽은 수많은 이들의 피가 채 마르기도 전에. 그것은 인신 공양과 다르지 않는 잔혹한 행위일세.”
검율천의 말이 이어질수록 초연운의 표정 또한 일그러졌다. 그 역시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끼고 있는 것이다.
초연운 뒤에서 침묵을 지키고 있던 소천이 입을 열었다.
“아미타불! 그렇다면 그녀는 왜 소림사에서 그렇게 잔혹한 행위를 한 겁니까?”
소천의 목소리에는 은은한 분노가 담겨 있었다.
숭산과 소림사는 그가 평생을 살아온 곳이었다. 단순히 사문을 넘어서 고향이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마교는 그의 고향을 유린한 것도 모자라 수많은 이들의 피를 제물 삼아 제를 지내는 천인공노할 짓을 저질렀다.
그가 제아무리 불심이 깊은 불자라고 하지만 마교의 그와 같은 만행만큼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
소천이 마교가 소림사가 있던 자리에서 제를 지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이곳에 들어온 이후였다. 그때 얼마나 울었는지 몰랐다. 그리고 결심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설령 그 때문에 수많은 이들을 죽이는 한이 있어도 반드시 소림사를 되찾겠다고.
검율천이 소천을 바라봤다.
“그녀는 천사심마공이란 사법에 지배를 당하는 것 같소. 그 때문에 제대로 된 판단을 할 수 없는 것으로 보이오.”
“천사심마공?”
의문을 표하는 소천에게 검율천은 천사심마공이 적힌 서책이 실은 마음에 심마의 씨앗을 심는 매개체라는 것을 알려 줬다.
모든 사정을 들은 소천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천사교에 대해 언뜻 듣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사악한 사술을 쓸 줄은 정말 몰랐다.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 설령 이 몸이 지옥의 불길에 떨어져 억겁을 고통받는다고 해도 절대로 그들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진정하게, 소천.”
초연운은 분노하는 소천을 진정시켰다.
잠시 후 소천이 어느 정도 감정을 삭이자 초연운이 말을 꺼냈다.
“자네 말을 정리하자면 소림사에서 제를 주관한 단운향이 천사교의 뜻대로 조종당한 것이라는 거군.”
“맞네!”
“그리고 제를 지낸 것은 무언가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란 것이고.”
“그것도 맞네!”
검율천의 대답에 초연운이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머리가 지끈지끈했다.
마교 하나만으로도 천하가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리고 있는데 천사교까지 생각하자니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
그가 충혈된 눈으로 검율천을 바라봤다. 그러자 검율천이 담담히 말을 이어 갔다.
“우리 단순하게 생각하세.”
“어떻게?”
“어차피 천사교는 잠적했네. 그들이 스스로 모습을 보이기 전에 그들을 찾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거야. 그렇다면 차라리 그들은 신경 쓰지 말고 현안에 집중하세.”
“마교 말이군.”
“그렇다네. 신교만 정상화시키면 천사교가 어떤 음모를 꾸미더라도 충분히 대응할 수 있지. 그래서 나는 자네를 찾아온 것이네. 내가 신교를 장악할 수 있도록 도와주게.”
“음!”
초연운이 침음성을 흘렸다.
검율천과 손을 잡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둘 다 마교와 천사교라는 공통의 적을 갖고 있었으니까. 문제는 검율천이 마교를 장악한 이후의 일이었다.
검율천이 마교를 장악한 이후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그때는 오히려 검율천이 더 큰 재앙이 될 수 있었다.
검율천은 젊고 강했다. 무엇보다 그는 마도종사(魔道宗師)가 될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 말은 곧 그가 마교를 장악하면 수십 년 이상을 능히 지배할 거란 뜻이었다.
초연운의 눈에 갈등의 빛이 일렁이자 검율천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검율천의 시선이 담호를 향했다.
여전히 담호는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얼굴만 봐서는 도저히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자네에게 부탁을 하겠네.”
“…….”
“창천맹과 신마련이 연합하는 데 공증인이 되어 주게.”
순간 모두의 시선이 담호에게 집중됐다.
강호에서 공증인이 가지는 의미는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다.
약속의 증인임과 동시에 이행되지 않았을 시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자리이기도 했다. 즉 검율천 자신의 약속이 지켜지지 않았을 시 담호가 책임을 물을 수 있다는 뜻이었다.
다른 무인이 공증을 해 봐야 검율천에게 감히 책임을 물을 수 없겠지만, 담호라면 달랐다.
이 자리에 있는 이들 중에 담호의 성격과 무위를 모르는 자는 없었다. 담호는 일단 한 번 말을 내뱉으면 반드시 지키는 자였다. 그에게 공증을 부탁해 놓고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얼마나 큰 후환이 닥쳐올지 몰랐다. 담호라면 반드시 책임을 물을 테니까.
담호에게 공증을 해 달라는 것은 검율천이 반드시 약속을 지키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검율천이 다시 한 번 물었다.
“공증인이 되어 주겠는가?”
초연운의 시선이 담호를 향했다.
그의 눈이 말하고 있었다. 담호가 공증인이 되어 준다면 믿을 수 있다고. 그것은 소천이나 해소월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담호가 대답해 주기만을 기다렸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담호는 침묵을 지켰다.
여전히 그의 얼굴엔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그래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끈기 있게 그의 대답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담호는 눈을 감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침묵을 지킨 채 그가 어서 빨리 대답하기를 기다렸다. 그가 거절하는 순간 양측의 협력도 물 건너간다. 때문에 그들의 얼굴엔 지대한 긴장감이 흐를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한참 지나고 마침내 담호가 눈을 떴다. 그리고 대답했다.
“그러지.”
순간 장내의 공기가 바뀌었다.
담호가 공증을 선다고 대답한 이상 창천맹과 신마련의 연합은 이뤄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제부터는 실무자들의 영역이었다.
제아무리 공통의 적을 상대하기 위해 손을 잡는 것이지만, 그래도 하나라도 이득이 되는 것을 더 얻어내야 했다.
“그럼…….”
신마련에서는 음유경이 대표로 나섰다. 창천맹에서는 해소월이 나왔다.
여인들의 눈에서 불똥이 튀는 듯했다.
이제부터 그녀들이 기본 뼈대를 잡아 갈 것이다.
“그럼…….”
“시작하죠.”
그녀들의 날 선 목소리를 뒤로 하고 담호와 검율천 등은 밖으로 나왔다.
“휴!”
밖에 나오자마자 초연운이 이제까지 억눌러 두었던 숨을 크게 내쉬었다.
모두가 원해서 창천맹의 맹주가 되었지만, 이렇게 큰일을 결정하는 것은 정말 쉽지가 않았다. 자신이 잘못 판단하면 수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는 자리였다. 그 때문에 그가 느끼는 부담감은 무척이나 클 수밖에 없었다.
“이 짓도 두 번 다시 할 것이 못 돼.”
“잘하던데, 왜?”
“내 주제에 맹주는 무슨? 할 사람이 없으니까 하는 거지.”
“자네는 꽤 오랫동안 맹주직을 하게 될 거야.”
“아예 저주를 하시지?”
“두고 보게. 내 말이 맞을 테니까.”
검율천이 미소를 지었다.
비록 진영은 다르지만 그는 초연운이 꽤 마음에 들었다. 이런 경쟁자라면 얼마든지 환영이었다.
초연운이 담호를 바라봤다.
“손님도 왔으니 오늘은 진보에게 거하게 얻어먹을 수 있겠지?”
그의 얼굴엔 기대감이 가득했다.
담호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초연운의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폈다.
“하하!”
협력을 결정하기 전에야 신중할 수밖에 없었지만, 이왕 결정한 이상 뒷일 따윈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문득 검율천이 물었다.
“자네는 나를 믿는가? 내가 끝까지 약속을 지킬 거라고.”
“아니!”
초연운이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그가 담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하지만 이 친구는 믿지. 이 친구의 판단도.”
창천맹과 신마련.
그들은 담호의 공증 아래 그렇게 한시적으로 손을 잡았다.
창룡과 불굴이 손을 잡고, 권마가 증인이 된 날.
훗날 사가들은 이날의 일을 세상의 역사가 바뀌는 분기점이라 평가했다.
세상을 움직이는 세 사내가 처음으로 손을 맞잡은 날.
이날을 기점으로 세상은 새로운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