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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2화 8장. 피의 수레바퀴가 다시 움직인다(1)
한 나라의 도읍은 지배하는 자가 누구냐에 따라 색깔이 달라지기 마련이었다. 마찬가지로 패주가 누구냐에 따라 지역의 성격 또한 달라졌다.
악양 역시 지배자가 바뀌면서 색깔이 달라진 곳이었다.
무림맹의 본단이 이곳에 있었을 때는 주민들의 성향 또한 정파에 가까웠다. 하지만 마교가 이곳을 지배하게 된 이후부터는 알게 모르게 그들의 성향 또한 마도에 가까워졌다.
지난 일 년 동안 마교는 차근히 그들의 교리를 주민들에게 전파했다. 어떤 이들은 강한 거부감을 보이기도 했지만 많은 이들이 자연스럽게 마교의 교리를 받아들였다.
마교는 결코 서두르지 않았다. 너무 강하게 마교의 교리를 강요하다 보면 백성들이 반발할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마치 솜이 물을 흡수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마교의 교리가 백성들에게 녹아들기를 원했고, 그렇게 되도록 모든 것을 유도했다.
이제 악양은 더 이상 정파의 영역이 아니었다. 마교를 믿는 자들에겐 악양이 성지나 마찬가지였다.
마교의 본단에서는 드넓은 악양 시내가 한눈에 들어왔다. 특히 군사부에서 바라보는 악양 풍경은 그야말로 일품이었다. 하지만 악양 시내를 바라보는 상한천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이 그의 공이었다. 무림맹을 쫓아내고, 그 자리에 마교의 본단을 세운 일. 호북성의 제갈세가를 무너뜨리고 무당파를 봉문시킨 일, 심지어는 소림사와 무림맹을 멸문시킨 것도 그가 없었으면 불가능했던 일이었다.
비록 중원 전역을 마교의 발아래 놓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소기의 목적은 이룬 셈이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마음이 불안했다.
‘역시 대재앙 때문이겠지?’
중원 전역을 강타한 지진은 악양에도 큰 타격을 줬다. 수많은 건물이 파괴되었고,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죽었다. 그나마 악양은 마교가 많은 자금을 지원해 금방 사태를 수습할 수 있었지만 인근 지역은 거의 초토화가 되어서 다시 회복하기까지 거의 일 년여의 시간이 걸렸다.
그렇게 되기까지 상한천이 기울인 노력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문제는 지진 그 자체가 아니었다. 지진이 일어난 시점이었다.
지진은 하필 마교가 소림사에서 제를 지낸 후 일어났다.
‘정말 우연이었을까?’
따로 생각하면 별거 아닌 일이었지만, 상한천은 이상하게 신경이 쓰였다.
그때였다.
“군사님.”
심복이 달려와 그의 앞에 부복했다.
“무슨 일이냐?”
“교주님께서 출관하십니다.”
“교주님이?”
상한천이 놀라 벌떡 일어났다.
지난 일 년 동안 교주 척관혈은 금지에만 처박혀 있었다. 원래 나오기로 했던 시간보다 더 길어진 것이다. 그 때문에 마교의 대내외 모든 일들을 상한천이 처리할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마교 내의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이들은 상한천이 교주인 줄 착각하기도 했다.
실제로 상한천은 교주만큼 큰 권한을 갖고 있었다. 물론 그 자신은 교주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바치고 있었지만 말이다.
상한천은 급히 교주전으로 달려갔다.
교주전 안에는 소식을 듣고 달려온 수뇌부들이 벌써 대기하고 있었다.
“오셨습니까? 군사.”
“군사님.”
그들이 포권을 취하며 상한천을 맞이했다.
요사란, 임학, 장무경 같은 삼대군장은 물론이고, 새로운 칠대마인까지 마교의 중추 무인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였다.
대재앙이 중원을 강타한 이후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이는 셈이니 무려 일 년 만의 회합이었다.
요사란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밝은 표정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이제 명실상부한 중원의 패자였다. 소림사와 무림맹의 멸망 이후 그들에게 감히 반기를 들 문파는 존재하지 않았다.
비록 중원을 강타한 대재앙 때문에 예상치 못하게 활동이 위축되긴 했지만, 그들의 아성에 감히 도전할 문파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모르지만 그들의 얼굴엔 어딘지 모르게 여유가 넘쳐흘렀다. 하지만 그들을 바라보는 상한천의 얼굴엔 그늘이 내려앉아 있었다.
‘기회가 왔을 때 끝을 봤어야 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대재앙 때문에 중원 정벌을 마무리 짓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비록 무당파와 소림사 같은 거대 문파들을 짓누르고 중원의 패권을 장악했다고 하지만 아직도 잠재적인 위협은 많이 남아 있었다.
구대문파에서도 아직 건재한 곳이 있었고, 해남파와 같은 거대 문파나 세가 들도 있었다. 당장이야 마교의 위세에 짓눌려 숨을 죽이고 있지만, 언제든 반격의 날을 세울 수 있는 곳들이었다.
원래 상한천은 지진을 비롯한 대재앙 가운데서도 그들을 정벌할 계획을 세웠었다. 하지만 그와 달리 삼대군장이나 칠대마인 등은 크게 열정을 보이지 않았다.
이전의 그들은 배고픈 호랑이였지만, 지금의 그들은 배부른 늑대 같았다. 정열도, 갈망도 모두 사라진 느낌이었다.
상한천은 그 점이 못내 아쉬웠다.
그때였다.
끼이익!
갑자기 대전의 문이 열리고 가공할 마기가 쏟아져 들어왔다. 대전 안에 있는 자들 중 절대고수라 불리지 않는 자가 없었지만, 대전 밖에서 흘러나오는 마기를 접하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며 무릎을 꿇었다.
“속하 상한천이 만마의 종주이신 위대하신 교주님을 뵙습니다.”
“속하 요사란이…….”
“속하 장문경이…….”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들 모두 한마음 한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대전 밖에서 흘러 들어온 마기가 그렇게 만든 것이다.
숨이 턱 막혀 질식할 것만 같았다. 대전 안에 있는 자들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려 갔다.
‘교주께서는 한계를 또다시 뛰어넘었구나.’
‘마신의 현신이로구나.’
마기는 순식간에 사라졌지만 그들은 감히 굽힌 허리를 펴지 못했다.
저벅!
그 순간 대전 밖에서 나직한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마침내 일렁이는 어둠을 장포처럼 휘감은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마교의 수뇌부들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그가 바로 마교의 주인이자 인간의 몸으로 마신지경(魔神之境)에 이른 교주 척관혈이었다. 그의 등장에 모두가 감격 어린 표정을 지었다.
그때 그들의 귓속에 선명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두 고개를 들라.”
입으로 내는 소리가 아니었다. 불문의 혜광심어처럼 마음으로 말하는 마도의 지고한 공부인 마령진음(魔靈眞音)이었다.
상한천을 비롯한 수뇌부들이 모두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남자의 몸에 어려 있던 어둠이 아침 햇살의 안개처럼 서서히 사라져 가고 마침내 본모습이 드러났다.
겨우 이십 대 후반으로 보이는 남자였다. 마치 평생 단 한 번도 햇빛을 보지 못한 것처럼 창백한 피부와 옥을 깎아 놓은 것처럼 반듯한 이목구비가 인상적이었다.
무엇보다 가장 큰 특징은 그의 두 눈이었다. 마치 푸른 옥을 잘 다듬어 밖아 놓은 것 같은 벽안은 신비하다 못해 기묘한 공포심을 안겨 주었다.
그들이 알고 있는 척관혈의 모습과 전혀 다른 외모였다. 그들이 알고 있는 척관혈은 중년의 외모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수뇌부는 놀라지 않았다.
‘교주께서 반노환동(返老還童)을 하셨구나.’
척관혈의 경지라면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외모는 변했지만 척관혈 특유의 벽안은 변하지 않았다. 그 무심한 눈빛 속에 담긴 광포한 기질과 위압감도.
천하를 오시할 만한 무력을 가진 자들이 척관혈의 벽안에 짓눌려 감히 숨조차 크게 쉬지 못하고 있는 광경은 무척이나 이질적이면서 두려운 것이었다. 하지만 이 자리에 있는 그 어느 누구도 그 광경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이야 세상 모두가 신교를 마교라 폄하하고 두려워하고 있었지만, 불과 수십 년 전만 하더라도 마교는 명맥을 잇는 것을 걱정해야 할 정도로 크게 몰락해 있었다. 그런 마교를 다시 부활시킨 이가 바로 척관혈이었다.
마교 역사상 그 누구도 척관혈 같은 강력한 지도력을 가진 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특유의 지도력으로 난파선 같은 마교를 대양(大洋)으로 이끌었고, 오늘과 같은 영광을 누리게 했다.
강력한 무력이 뒷받침되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비록 나이는 어렸지만 당시에도 그는 강했었다. 또한 무섭도록 뛰어난 재능과 가공할 집념의 소유자였다.
그는 하루가 다르게 강해졌다.
괄목상대(刮目相對)라는 표현도 그에겐 모자랐다. 그는 그야말로 불세출(不世出)의 무인이었다.
척관혈이 잠시 수뇌부들을 둘러보다 입을 열었다.
“그동안 모두 고생 많았다. 본좌가 없는 동안 강호를 평정한 그대들의 노고를 치하한다. 특히 군사.”
“예! 교주님.”
“그대의 공이 매우 크다는 것을 내가 잘 알고 있다. 무당과 소림을 멸한 그대의 공을 치하한다.”
“감사합니다.”
“허나 그것만으로는 모자라다는 것을 잘 알고 있겠지?”
“물론입니다. 그래서 교주께서 나오시기만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제 교주님께서 출관하셨으니 진정한 강호일통의 전쟁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준비는?”
“모두 끝내 놨습니다. 교주님께서 명령만 내리시면 수만 교도들이 언제든 진군할 것입니다.”
상한천의 머리를 바닥에 찧으며 대답했다.
지난 일 년 동안 그가 놀고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무림맹과 소림사의 잔당이 화산파의 보호하에 세력을 키우고 있다는 정보를 은밀히 입수해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는 것이다.
“훌륭하다.”
척관혈이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곧 강호일통을 위해 출진할 터이니 그대들은 군사의 말을 내 말처럼 따르거라.”
“존명!”
쿵!
마교의 수뇌부들이 한 목소리로 대답하며 머리로 바닥을 찧었다.
머리를 바닥에 찧은 요사란이 눈을 질끈 감았다.
‘기어이…….’
그녀를 비롯한 몇몇 사람들은 이 정도로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중원의 대부분을 점령했는데 이 이상 교도들의 피를 흘리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대재앙을 핑계로 병력을 움직이는 것을 주저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척관혈의 명이 떨어졌으니 신교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할 것이고, 중원은 전쟁의 수레바퀴에 깔려 다시금 피를 흘리게 될 것이다.
요사란의 눈에는 피바다에 잠긴 중원의 모습이 훤히 보이는 듯했다.
그때 척관혈이 명령을 내렸다.
“요 군장만 남기고 모두 물러가도록.”
“존명!”
수뇌부들은 이유도 묻지 않고 대답했다.
요사란만 남긴 채 그들은 대전을 나갔다. 홀로 남은 요사란은 그 이유를 짐작했다.
척관혈의 푸른 눈이 그녀의 전신을 훑었다.
“벗어라. 그대의 육체로 그동안의 피로를 씻으려니.”
“존……명!”
요사란의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옷고름을 푸는 그녀의 손길도 떨렸다. 하지만 망설이지는 않았다. 그녀가 제아무리 삼대군장의 일원이라고 하지만 교주의 명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툭!
옷이 모두 바닥에 떨어지고 그녀의 눈부신 나신이 햇살 아래 드러났다.
척관혈은 그녀의 나신을 감상이라도 하듯이 찬찬히 훑었다. 순간 요사란은 전신에 수많은 개미가 기어가는 듯한 느낌을 받고 몸을 움츠렸다.
요사란의 나신을 살피던 척관혈의 시선이 문득 그녀의 오른쪽 옆구리에서 멈췄다. 다른 곳과 달리 오른쪽 옆구리에만 흉측한 흉터가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커다란 새의 발톱에 뜯겨져나간 것 같은 흉터였다.
“어떻게 된 건가? 권마에게 당했다는 그 상처인가?”
“그……렇습니다.”
척관혈이 손을 뻗어 요사란의 상처에 댔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느낌에 순간 요사란이 움찔했지만 척관혈은 개의치 않았다.
그는 요사란의 상처를 통해 담호의 무력을 가늠이라도 하는 것처럼 눈을 감았다.
잠시 후 눈을 떴을 때 그의 입가에 섬뜩하도록 차가운 미소가 떠올랐다.
“권마, 제법이군.”
“예?”
“아니다.”
척관혈이 무심히 말하며 요사란의 하얀 나신 위에 몸을 실어 왔다. 요사란은 눈을 감은 채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였다.
대전 안에는 한바탕 열풍이 지나갔다.
척관혈은 녹초가 된 요사란을 남겨 둔 채 밖으로 나갔다. 대전의 문을 열고 나서자 잘 가꿔진 화원과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광활한 본단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그가 폐관을 하고 있는 동안에도 마교의 본단은 끝없이 확장을 했고, 이제는 그 끝이 보이지도 않을 만큼 엄청난 규모를 자랑했다.
일반적인 무인이라면 자신이 이룬 업적에 감격해했을 테지만, 그는 아무런 감흥이 없는 얼굴로 무심히 바라볼 뿐이었다.
그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따로 있었다.
그 사실을 아는 이는 단 한 명뿐이었다.
척관혈의 붉은 입술이 열렸다.
“멸왕!”
“예! 교주님.”
순간 기척도 없이 하얀 그림자가 나타났다.
새하얀 피풍의를 날개처럼 흩날리며 나타난 이는 흑백사자 중 백익멸왕(白翼滅王) 노군상이었다.
그는 나타나자마자 척관혈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순간 척관혈의 눈에 섬뜩한 광망이 터져 나왔다.
노군상마저도 숨을 ‘헉’ 들이켤 만큼 광포한 눈빛이었다.
“늙은이가 본교에 숨어 있었단 것이 사실인가?”
“제가 재차 확인했습니다. 확실합니다.”
“크흐흐! 도대체 어디까지 본좌를 기만한 것이냐? 늙은이. 감히 본교에 숨어 있었다니. 내 그늘 아래서 나를 이제까지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냐? 그것도 내 계집을 이용해서.”
“죄송합니다. 속하가 불민하여 미처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노군상이 바닥에 머리를 찧었다. 이마가 찢겨져 나가며 피가 사방으로 튀어 그의 새하얀 피풍의가 붉게 물들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늙은이의 행방은?”
“추적하고 있습니다.”
“반드시 찾아내라. 강호를 일통하는 대로 그 늙은이를 응징할 터이니.”
척관혈의 눈에서 불이 쏟아져 나오는 듯했다. 노군상은 감히 그의 눈빛을 직시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
“존명!”
노군상이 대답과 함께 사라졌다.
혼자 남은 척관혈이 입술을 깨물었다.
“감히! 감히!”
츠츠츠!
순간 화원의 식물들이 검은색으로 물드는가 싶더니 이내 말라 비틀어졌다.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싱그러운 녹음을 자랑하던 화원이 순식간에 죽음의 대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