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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3화 8장. 피의 수레바퀴가 다시 움직인다(2)
교주가 출관한 마교는 활력을 되찾았다.
상한천이 이미 출진할 만반의 준비를 갖춰 놓았기에 전쟁을 시작하는 그들의 움직임엔 거침이 없었다.
교주가 출관하고 마교가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첩보는 창천맹에도 전해졌다. 당장 창천맹의 수뇌부 회의가 소집됐다.
초연운과 소천, 해소월, 청운 등이 모두 모였다. 밖에서는 그들이 치열하게 대책 수립을 위해 토론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실상 안의 분위기는 그리 급박하지 않았다. 오히려 느긋하기까지 했다.
그들은 한가하게 차를 마시고 있었다.
대재앙 이후 구하기 힘들어진 용정차는 그들의 지친 심신에 활력이 돌게 만들었다. 실로 오랜만에 부려 보는 사치였다.
마교가 중원 남부를 장악한 이후 질 좋은 차의 유입이 딱 끊겼기에 싸구려 차만 마셔야 했던 그들에겐 지금 이 순간이 무엇보다 소중했다.
“휴! 좋네. 좋아도 너무 좋아.”
“은가보의 소단주께서 특별히 신경을 써 준 것 같군요.”
“왜 아니겠습니까? 연인이 이곳에 있으니 차의 품질도 달라지는군요.”
“두 사람은 언제 혼인을 올린답니까?”
“전란이 끝나면 올린다더군요.”
“그럼 진보와 소청을 위해서라도 전란을 빨리 종식시켜야겠군요.”
탁!
초연운이 찻잔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그러자 다른 사람들도 남은 차를 입에 털어 넣고 잔을 내려놓았다.
그들은 잠시 말없이 서로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런 그들의 얼굴엔 신뢰의 빛이 가득했다.
지난 일 년 동안 그들은 정말 필사적으로 준비했다.
철혈지옥수련관을 만들어 개개인의 무력을 높이고, 중원 각지의 문파들과 연락망과 긴밀한 협조 관계를 구축해 놓았다. 거기에 예상치 못하게 신마련의 협조까지.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모조리 했다. 전쟁의 결과야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지만 그들 선에서 준비할 수 있는 것들은 모조리 완료한 것이다.
어차피 그 모든 것들이 마교와의 전쟁을 상정하고 준비한 것이기에 이제 와 마교가 쳐들어온다고 새삼스럽게 준비하고 분주하게 움직일 이유가 없었다.
그냥 평상시 하던 대로만 하면 된다.
그것이 그들의 마음이었다.
수뇌부 회의를 수집한 것도 특별히 비상 대책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 아닌 단지 여유를 갖기 위한 시간에 불과했다. 지난 일 년을 정말 숨 돌릴 틈 없이 급박하게 달려왔기에 그들에겐 이런 시간이 정말 소중했다.
그들은 한동안 잡담을 나누며 낄낄대고 웃었다.
평소라면 절대 웃지 않을 신변잡기 수준의 언변에도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그중에서도 초연운은 정말 눈에 물기가 맺힐 만큼 원 없이 웃었다.
웃으면서도 그는 창천맹의 수뇌부들 얼굴을 자세히 바라봤다. 지난 일 년 동안 그들이 있었기에 이만큼 준비하고 달려올 수 있었다.
전란이 끝난 후 몇 명이나 살아남을지 모르겠지만, 초연운에겐 그들의 얼굴을 기억해 둬야 할 이유가 분명히 있었다.
한바탕 웃음 폭풍이 지나간 이후 장내에는 침묵이 찾아왔다. 이제 꿈결 같은 시간은 지나갔다. 다시 냉혹한 현실로 돌아올 시간이었다.
대부분의 준비를 끝마쳤지만 아직 해결하지 못한 일이 하나 있었다.
소천이 그 점을 물었다.
“아미타불! 그나저나 진주언가나 하북팽가 같은 곳은 어떻게 하시렵니까? 맹주.”
진주언가와 하북팽가 모두 오대세가에 들어갈 만큼 강력한 무력과 재력을 소유한 가문들이었다.
같은 오대세가의 일원이었던 남궁세가가 마교의 거친 파도에 멸문한 직후 그들은 문을 걸어 잠그고 외부의 출입을 엄금했다. 봉문을 택한 것이다.
봉문은 곧 무림 문파로서의 외부 활동을 금지한다고 대외적으로 천명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무림 문파로서의 자격과 활동을 포기하는 셈이니 마교와 충돌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많은 무인들이 그들의 비겁함을 욕했다.
무당파처럼 마교에 큰 피해를 입어서 어쩔 수 없이 봉문을 택한 것은 이해할 수 있었지만, 아예 마교가 두려워서 봉문을 택한 것은 어떤 이유를 대더라도 용서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게 비겁한 봉문을 택한 문파는 비단 진주언가와 하북팽가뿐만이 아니었다. 중원의 유수 문파들 중에서도 마교와 싸우기를 포기한 문파가 한둘이 아니었다.
특히 중견 문파에서 그런 경향이 많이 나타났다. 차라리 조그만 문파의 무인들은 죽기 살기로 싸우는데, 지킬 것이 많은 자들이 아예 싸움을 포기하고 봉문이란 편법으로 현재의 부와 전력을 유지하려는 것이다.
개중에는 아예 마교의 편으로 전향하는 문파도 있었다. 그렇게 시류에 편승해 마교의 편에 서서 적으로 돌아선 문파들 역시 적지 않았다.
창천맹에서는 그동안 봉문을 택한 문파들에 은밀히 사자를 보내 협조를 구했다. 하지만 많은 문파들이 아직까지 그 어떤 대답도 보내오지 않고 있었다.
무언의 거절인 셈이었다. 하지만 소천을 비롯한 창천맹의 수뇌부들은 아직도 포기하지 않았다.
비록 창천맹이 지난 일 년 동안 전력을 많이 끌어올렸다고 하지만 그들의 도움 없이 마교와의 대전에서 승리를 거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초연운은 간단하게 대답했다.
“그건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이미 생각해 놓은 방법이 있습니다.
“그게 어떤?”
초연운이 대답 대신 막사 안에 걸려 있는 커다란 깃발을 바라봤다.
백전전승기.
수없이 찢어지고, 헤진 것을 바느질해 기우고 자투리 천을 덧대 만든 초라한 깃발이었다.
백전문의 마지막 자존심이었고, 초연운의 상징과도 같은 물건이었다. 초연운은 이제까지 단 하루도 백전전승기를 곁에서 떼어 놓았던 적이 없었다.
백전전승기를 바라보는 초연운의 눈에 만감이 교차하고 있었다.
‘사부.’
초연운은 홀로 밖으로 나왔다.
발아래 어둠에 잠겨 있는 창천맹이 보였다.
맹이라고 부르기엔 너무나 초라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초연운은 그 모습이 부끄럽지 않았다.
다른 이들의 시선엔 어떻게 보일지 모르지만 지난 일 년 동안 그는 정말로 열심히 달려왔다. 이곳엔 그의 피와 땀, 열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출세했구나, 초연운. 창천맹의 맹주라니. 제기랄!”
그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들 앞에선 여유로운 것처럼 미소를 보이지만 사실 그는 엄청난 중압감에 짓눌려 쓰러질 것만 같았다. 그런 그를 버티게 하는 것은 사람들의 기대 어린 시선과 사문인 백전문의 유훈을 이어 가야 한다는 책임감이었다.
“휴우!”
“그러다 땅 꺼지겠어요. 무슨 한숨을 그렇게 무겁게 내쉬세요?”
초연운이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는 순간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초연운은 놀라지도 않고 말했다.
“진보 왔구나.”
“어휴! 무슨 한숨이 그리 커요. 주방에서도 다 들려서 집중할 수 없잖아요.”
초연운의 뒤에 나타난 이는 바로 방진보였다.
지난 일 년 동안 방진보는 더욱 성숙해진 모습이었다. 이제는 소년이 아니라 어른이라고 봐도 무방할 만큼 방진보는 성장해 있었다. 그래도 요리를 좋아하는 것은 여전한지 앞치마를 입고 있는 모습이었다.
초연운이 피식 웃었다.
“내 한숨이 거기까지 들리냐?”
“네! 아주 크게요.”
“지랄이네.”
“그러게 지랄이네요.”
“휴우! 미안하다.”
“그렇게 힘들어요?”
“힘들다기보다는 그냥 조금 지친 것 같다고나 할까? 나 같은 놈이 창천맹의 맹주라니. 정말 웃기지 않냐? 난 스스로가 취운룡이라고 생각하는데, 남들은 창룡신협이라고 부르니. 어쩔 때는 내 스스로가 부끄러워 쥐구멍에 들어가고 싶다니까.”
“그만큼 형이 성장한 거잖아요. 부끄럽게 생각하실 것 하나 없어요. 난 또 뭘 그렇게 심각한 고민을 하나 했네.”
방진보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순간 초연운의 눈썹이 하늘로 치켜 올라갔다.
“인마, 남은 심각한데.”
“형은 형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모르죠?”
“뭐?”
“남들이 형을 창룡신협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냥 듣기 좋으라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그만큼 형이 대단하기 때문이죠. 저도 어쩔 땐 그런 형이 낯설게 보여요. 형이 그런 책임감과 지도력을 갖고 있다니. 때로는 예전의 형이 더 자유롭고 좋았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지금의 모습도 좋아요.”
“그만해! 낯간지러우니까.”
“나도 낯간지럽거든요. 하여튼 지금 그대로만 해요. 결과야 어떻든 형은 최선을 다했으니까요.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고 하잖아요.”
“시끄럿!”
“마지막 말은 그럴싸하지 않았어요?”
“하나도 안 그럴싸하거든. 뭐, 덕분에 긴장감은 풀렸다마는.”
“헤헤!”
방진보가 특유의 웃음을 터트렸다. 그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피식 웃음이 났다. 그래서 웃고 말았다.
한바탕 웃고 났더니 속이 후련했다.
방진보를 처음 만났을 때가 생각났다.
그때의 방진보는 아비를 잃은 데다 외모 또한 뚱뚱해서 자신감이 결여되어 있었다. 당연히 소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아이가 어느새 이 정도로 성장해서 자신을 오히려 위로하다니 세상일은 정말 한 치 앞을 알 수가 없는 것 같았다.
초연운이 방진보의 어깨에 턱하니 팔을 걸쳤다. 그리고 조용히 속삭였다.
“오늘밤 특식은 없냐?”
“없어요.”
“야! 너, 맹주를 그따위로 무시하기야?”
“에이! 선심 썼다. 뭐가 드시고 싶은데요?”
“갑자기 오향장육이 먹고 싶네.”
“이 밤에요?”
“안 돼?”
“알았어요. 조금만 기다려요.”
“고맙다.”
“쳇!”
방진보가 또다시 입술을 삐죽거렸다. 하지만 전혀 기분 나쁜 표정이 아니었다.
그때 문득 초연운이 갑자기 생각난 것이 있어서 물었다.
“참, 호는?”
“아까 산 정상으로 올라갔어요.”
“혼자?”
“예!”
방진보의 대답에 초연운이 소화산 정상을 바라봤다.
***
담호는 만월에 가장 가까운 소화산 정상에 홀로 서 있었다.
만월이 온 세상을 비추고 있었다. 하지만 달빛만으로는 어둠을 온전히 거둬 낼 수 없었다. 때문에 밝게 보이는 것보다 어둡게 보이는 곳이 훨씬 많았다.
담호는 그 어둠을 눈에 담은 채 천하를 굽어보았다.
그는 현소 진인처럼 천기를 읽을 줄 몰랐다. 그가 할 줄 아는 것은 오로지 두 주먹으로 적을 쓰러트리는 것뿐, 그렇게 현묘한 공부와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천하를 잠식하고 있는 어두운 기운만큼은 그도 느낄 수 있었다.
근래 들어 천하를 잠식하고 있는 어둠은 더욱 폭발적으로 세를 확장해 가고 있었다. 어둠에 잠식되기 전의 천하는 마치 꺼지기 직전의 촛불처럼 위태롭게만 보였다.
그때 담호의 뒤쪽으로 소리도 없이 나타나는 남자가 있었다. 마치 공간 이동을 한 것처럼 홀연히 나타난 남자는 담호를 향해 한쪽 무릎을 꿇었다.
“주군!”
그는 바로 기산월이었다.
기산월은 조용히 담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담호의 체구는 평범했다. 체구가 엄청난 것도, 키가 크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거대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광활한 바다가 그의 등에 가득 차 있는 듯한 그런 느낌이었다. 그래서 쉽게 눈을 뗄 수 없었다.
담호가 뒤돌아서서 기산월을 바라봤다. 그러자 기산월이 더욱 깊이 고개를 숙였다.
처음 담호를 만나고 충성을 맹세했을 때만 하더라도 어느 정도는 이기적인 계산이 담겨 있었다. 무간지옥에서 꺼내 준 빚만 갚으면 떠나도 된다는 생각도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일 년 동안 담호와 함께하면서 그는 진심으로 담호란 남자에게 감복한 상태였다. 그래서 끝까지 그와 함께 가리라 맹세했다.
담호가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무심히 입을 열었다.
“그는?”
“예상대로입니다.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확실한가?”
“확실합니다, 주군.”
기산월이 목소리에 힘을 주어 대답했다. 그에 담호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담호의 눈빛이 더욱 깊이 가라앉았다.
그 모습을 본 기산월은 입술이 바싹바싹 타는 것을 느꼈다. 담호와 지난 일 년을 함께 했지만 아직도 저런 모습엔 영 익숙해지지 않았다.
문득 일 년 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시간의 흐름도 느껴지지 않는 그 지옥 같은 공간에서 담호를 처음 만났을 때가.
보통 사람이었다면 벌써 미쳐서 자살했어도 이상하지 않았을 그런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기산월이 이를 악물고 버틴 것은 천사교에 대한 복수심 때문이었다.
세상에 나온 후 그는 천사교의 종적을 찾아 움직였다.
다른 사람들은 꼬리를 자르고 잠적한 천사교를 찾을 수 없었지만, 그는 달랐다.
그는 천사교에서 키운 혼술사였다. 때문에 누구보다 그들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기산월은 지난 일 년 동안 천사교를 추적했고, 결국은 그 흔적을 찾아낼 수 있었다.
마교가 움직이자 그들 역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그들은…….”
조용히 말을 하던 기산월이 자신도 모르게 눈을 치떴다.
담호의 어깨 위로 쏟아지는 달빛이 마치 거대한 날개처럼 보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