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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권마-474화 (47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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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4화 8장. 피의 수레바퀴가 다시 움직인다(3)

그그극!

오랫동안 닫혀 있던 마교의 본단 정문이 활짝 열렸다.

악양 백성들은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본단의 정문을 바라봤다. 그들은 기껏해야 마교 휘하의 한두 개 조직 정도만이 출전할 줄 알았다. 하지만 그들의 예상을 뛰어넘어 끝이 보이지 않는 행렬이 이어졌다. 그제야 사람들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했다.

소림사와 무림맹마저 무너트린 마교였다. 그런 그들이 다시 대규모 병력을 움직일 이유는 단 한 가지밖에 없었다.

“마교가 다시 정복 전쟁을 시작했구나.”

언제고 일어날 일이었지만, 막상 현실로 닥치니 사람들은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사람들의 관심은 하나였다.

과연 마교의 제물이 될 불쌍한 문파가 어느 곳인지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사람들이 알고 있기로 마교에 대항할 만한 커다란 문파는 남아 있지 않았다.

구대문파 중 종남파, 화산파, 소림사, 무당파, 청성파, 아미파가 이미 마교에 크고 작은 화를 입었고, 나머지 문파인 곤륜파나 점창파, 공동파 등은 중원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마교에 큰 위협이 되지 않았다.

오대세가도 마찬가지였다. 남궁세가와 제갈세가가 이미 화를 당했고, 나머지 세가들은 봉문을 택한 지 오래였다.

그런 상황에서 과연 마교의 전력이 움직일 만큼 큰 문파가 어느 곳인지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마교가 움직였다는 소식은 인근의 문파들에도 들어갔다. 그들은 혹시 마교의 칼날이 자신들을 향할지 몰라 전전긍긍했다.

하북팽가도 그렇게 전전긍긍해하는 가문 중 하나였다.

한때 중원 오대세가로 위명을 날렸던 하북팽가였다. 하지만 근래 들어 하북팽가의 위명과 위세는 예전만 못했다. 쪼그라들다 못해 아예 비난까지 받는 수준이었다.

사실 하북팽가로서는 억울한 면이 없지 않았다.

그들은 무림맹에 엄청난 양의 금자와 인적 자원을 지원했다. 그야말로 기둥이 뿌리째 흔들릴 정도로 통 크게 지원한 것이다. 하지만 무림맹이 멸문하면서 그들 역시 엄청난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무림맹에 파견 보냈던 제자들은 대부분이 죽었고, 지원금은 회수할 수 없게 됐다. 가문의 무인 수는 확연히 줄어들었고, 금전 또한 부족했다.

그런 상황에서 가문을 지키기 위해서 그들은 봉문을 택했지만 세상 사람들은 연일 그들을 비난하고 있었다.

하북팽가로서는 억울한 면이 없지 않았지만, 누구도 그들의 변명을 들어 주지 않았다. 그 때문에 하북팽가 내부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문을 걸어 잠그고 힘을 기른다고 하지만 혈족으로만 이뤄진 세가의 한계는 뚜렷했다. 바로 외부에서 제자들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최소한 한 세대가 지나 혈족이 늘어나기만 기다릴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워낙 많은 욕을 얻어먹자 하북팽가 내부에서도 불만이 팽배했다. 혈기 왕성한 젊은 무인들은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밖으로 나가서 마교와 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하북팽가의 가주 팽우열은 그런 내부의 목소리를 억지로 짓눌렀다.

팽우열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팽가의 안위였다. 수백 년을 이어 온 소중한 가문을 후대에 온전히 물려주는 일이 그의 가장 큰 의무였다.

그의 속을 모르고 오늘도 젊은 제자들이 찾아왔었다. 그에겐 조카뻘 되는 무인들이었다.

“가주님, 봉문을 풀고 마교와 싸워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이대로라면 명맥을 유지할 수 있을진 모르지만, 하북팽가의 명예는 땅에 떨어져 짓밟히고 말 겁니다.”

그들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말했지만 팽우열은 가주의 권위로 그들의 제안을 묵살했다.

“후!”

팽우열이 한숨을 내쉬며 술잔을 들었다.

자신의 거처에서 홀로 술잔을 기울이는 팽우열의 속마음도 편하지는 않았다.

그라고 외부의 비난이 신경 쓰이지 않을까? 하지만 자신은 팽씨 혈족의 안위를 책임진 자였다. 사소한 비난 따위에 흔들려서는 안 됐다.

그렇게 자위하며 팽우열은 술을 홀짝였다. 한 잔, 두 잔, 술병이 쌓였다. 하지만 아무리 많은 술을 마셔도 취하지 않았다.

팽우열은 이럴 때는 강한 내공이 거추장스럽다고 생각했다. 쉽게 취하지 않기 때문이다.

“쯧!”

결국 팽우열이 혀를 차며 술잔을 내려놓을 때였다.

갑자기 팽우열의 안색이 차갑게 변했다. 은밀히 움직이는 인기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간이 큰 놈이구나. 감히 팽가의 심처에 침입하다니.”

인기척의 주인은 간덩이가 붓기라도 한 것처럼 똑바로 그가 있는 곳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의 눈에서 번갯불이 쏟아져 나오는 듯했다.

그가 허공으로 손을 뻗자 벽에 걸려 있던 도가 쭉 빨려 들어왔다. 허공섭물의 묘기였다.

그렇지 않아도 기분이 우울하던 차였다. 팽우열은 단숨에 침입자를 두 동강 내리라 작정했다.

그가 도에 공력을 주입할 때였다.

“가주님, 잠시 고정하시옵소서. 저는 창천맹에서 나온 사자입니다.”

조곤조곤한 목소리와 함께 침입자가 팽우열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머리를 파르르 민 삼십 대 초반의 승려였다.

팽우열의 눈썹이 하늘로 치켜 올라갔다.

“창천맹?”

“그렇습니다. 소승 자천이라고 합니다. 지금은 창천맹에 몸을 의탁하고 있지요.”

“자천? 소림의 제자인가?”

“아미타불! 그렇습니다.”

승려 자천이 팽우열에게 반장을 취했다. 소림 특유의 인사법이었다.

팽우열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자천을 노려봤다.

“제아무리 소림의 제자라고 할지라도 본가의 담을 몰래 넘은 죄는 크다네.”

“벌은 차후에 달게 받겠습니다.”

팽우열이 코웃음을 쳤다.

“흥! 무엇을 원하는지 뻔하군. 창천맹에 협조하라 이 말이겠군. 이 자리에서 분명히 말하겠네. 거절하겠네. 팽가는 어떤 경우에도 움직이지 않을 걸세.”

창천맹의 사자는 이전에도 몇 번이나 팽가를 방문했었다. 그때마다 팽우열은 단칼에 무를 베듯 거절했었다.

무림맹과 소림사의 패잔병들이 모여 만든 낙오자들의 단체, 그에게 있어 창천맹은 그런 곳이었다.

하북팽가가 앞장서 싸움을 이끌지 못할망정 그런 낙오자들과 애송이들에게 휩쓸려 싸움을 하고 싶지는 않은 것이 그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자천은 잠시 팽우열을 빤히 바라봤다. 팽우열은 그런 자천의 모습이 불쾌하게 느껴졌다. 왠지 도전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만 물러가게. 옛정을 생각해서 죄는 묻지 않을 테니.”

“부끄럽지 않으십니까?”

“뭐라?”

“그렇게까지 해서 팽가의 명맥을 이어 나가고 싶으신 겁니까?”

“닥치게!”

“저희 소림은 적어도 그러지 않았습니다. 마교가 두려워 문을 걸어 잠근 채 꼭꼭 숨어 있지만은 않았습니다.”

자천의 말에 팽우열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자천의 말이 비수가 되어 그의 심장을 찌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음 같아서는 자천에게 일장을 날리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자천의 담담한 눈빛이 인이 되어 가슴에 박혔기 때문이다.

자천이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어쨌거나 가주의 결정이니 더 이상 왈가왈부하지 않겠습니다. 대신 이것을 받아 주십시오.”

“그게 뭔가?”

“저희 맹주님께서 가주님께 전해 드리면 알게 될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으음!”

그가 팽우열에게 건네준 것은 천으로 곱게 싼 물건이었다.

“그럼…….”

자천이 팽우열에게 반장을 취한 후 물러났다.

혼자 남은 팽우열이 우두커니 서서 손에 쥔 천을 바라봤다.

분명 가벼웠다. 그런데 이상하게 무겁게 느껴졌다.

팽우열이 조심스럽게 천을 풀었다. 하지만 천 안엔 그 어떤 물건도 보이지 않았다.

“장난인가?”

팽우열이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그는 처음으로 자천을 고이 보낸 것을 후회했다.

그때였다. 갑자기 천 위에 새겨진 기묘한 문양이 보인 것은. 문양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팽우열의 차가운 얼굴에 균열이 갔다.

“이건?”

그것은 문양이 아니었다. 글자였다.

하북팽가(河北彭家).

이젠 색이 바랜 금색 수실로 분명 그렇게 쓰여 있었다.

그제야 깨달았다.

자천이 그에게 건네 준 것은 천 안에 숨겨진 어떤 물건이 아니라 천, 그 자체라는 것을.

그제야 그는 손에 들린 천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백……전전승기.”

일차 정마대전 당시 큰 공을 세웠던 장일산에게 강호 전체가 문파의 이름을 적어 바쳤던 상징이었다.

팽우열의 손에 들린 것은 바로 ‘하북팽가’라는 글자가 적힌 귀퉁이였다. 그의 조부가 손수 쓴 글자에 수실로 수를 놓은 부분이었다.

“허……허!”

그의 입에서 허탈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수많은 이들의 피가 묻은 붉은 천이 감당 못 할 무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비단 백전전승기의 일부를 받은 이는 팽우열만이 아니었다. 진주언가의 가주도, 형산파의 문주도, 저 멀리 장백파의 문주도 백전전승기의 일부를 돌려받았다.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고, 만인 앞에서 빛나던 시대의 유산을.

***

담호가 물었다.

“괜찮나?”

“홀가분해!”

초연운은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담호가 빤히 바라보자 초연운이 투덜거렸다.

“정말이라니까. 사부의 유산이라서 얼마나 신경이 쓰였는지 몰라. 기우고 또 기워서 누더기나 다름없는 것을 갖고 다니느라 얼마나 쪽팔렸는데.”

“…….”

“이제야 편히 다닐 수 있겠어. 정말이야.”

“그래!”

“정말이라고!”

“그래!”

담호가 큰 손으로 말없이 친구의 어깨를 두들겼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먼저 침묵을 깬 이는 초연운이었다.

“자네가 있어 다행이야.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어. 고마워!”

“아니, 이 모든 것은 오롯이 자네의 힘으로 한 일이야.”

“자네가 없었다면 불가능했던 일이었어. 자네가 든든한 보호벽이 되어 주었기에 안심하고 이제까지 전력 질주할 수 있었어.”

이번에는 초연운이 담호의 어깨를 두들겼다.

손길을 받는 어깨에 묵직한 느낌이 전해졌다.

지난 일 년 동안 초연운이 짊어지고 온 삶의 무게가 손길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는 것 같았다.

담호가 묵묵히 초연운을 바라보았다.

그의 친구는 정말 한시의 시간도 낭비하지 않고 숨 가쁘게 이 길을 달려왔다. 창천맹에 만연했던 무력함과 패배감을 씻어 준 것도 그였고, 새로운 목적을 심어 준 것도 그였다. 그렇게 바쁜 와중에 자신의 수련 또한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초인적인 행보였다.

담호는 그런 초연운을 존경했다. 자신은 결코 할 수 없는 행보를 걷고 있기에.

담호가 말했다.

“자네는 분명 마교를 물리칠 수 있을 거야.”

“거참, 남의 일인 것처럼 말하네. 자네도 마교와 싸워야지.”

“마교는 자네가 물리쳐.”

“무슨?”

초연운이 놀라 고개를 들었다.

담호의 무심한 얼굴이 눈에 가득 들어왔다.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초연운은 알아차렸다.

“혼자…… 천사교를 상대할 생각인가?”

“…….”

“하! 그럴 생각이군. 망할!”

초연운이 담호를 노려봤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내공이 실린 그의 눈빛을 감히 감당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런 초연운의 강렬한 눈빛조차 담호의 얼굴에 그 어떤 균열을 낼 수는 없었다.

먼저 한숨을 내쉰 이는 초연운이었다.

“제기랄! 하아!”

“…….”

“천사교와의 싸움은 역사에 기록되지 않을 거야. 존재조차 아는 이가 거의 없으니까.”

“…….”

“그러니까 자네의 싸움도 역사에 기록되지 않을 거야. 그렇게 외롭고 고독한 싸움이야. 알겠나? 자네가 하려는 싸움은 말이야.”

“상관없어.”

“망할! 난 상관있어. 그냥 제발 이번 한 번만 고집을 꺾어 주면 안 되겠나? 내가 이렇게 부탁할게.”

“그럴 시간이 없어.”

“시간?”

“그래! 시간!”

“제발! 속 시원히 말해 보라니까. 시간이라니?”

“아직은 내 추측일 뿐이야. 그래서 말할 수 없어.”

“왜?”

“잘못 말했다가는 자네의 판단에 영향을 끼치게 되니까.”

초연운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담호가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자넨 나와 달라. 수많은 이들의 목숨을 책임져야 하지. 누구보다 냉철한 판단력과 이성을 갖고 있어야 해. 잘못된 정보를 가지고 있으면 감정에 영향을 받게 돼.”

“그래서 혼자 싸우겠다?”

“그래!”

“미친놈! 예전부터 생각했는데, 자네는 제대로 미친 게 틀림없어.”

“알고 있어.”

담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로서는 드물게 말을 많이 하는 날이었다.

상대가 초연운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만큼 초연운은 그가 각별하게 생각하는 몇 안 되는 인물 중 한 명이었다.

초연운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럼 약속 하나 해.”

“말해!”

“힘들면 언제든 말해. 모든 것을 다 버리고서라도 도우러 갈 테니까.”

“그래!”

“약속한 거야.”

“그래!”

담호가 무심히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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