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5
475화 8장. 피의 수레바퀴가 다시 움직인다(4)
“신교가 움직였습니다.”
“음!”
“흑백사자, 삼대군장, 칠대마인 가릴 것 없이 거의 전부가 동원됐습니다.”
“역시 예상대로군.”
“교주가 이번 기회에 정파를 아예 박멸하려 단단히 마음먹은 것 같습니다.”
검율천에게 보고를 하는 명천의 표정은 어두웠다.
명천은 신마련의 두뇌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뛰어난 두뇌와 식견으로 신마련을 조직해 지금까지 끌고 왔다. 물론 검율천이라는 거목이 없었다면 그 모든 것이 불가능했겠지만, 그래도 그가 큰 역할을 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검율천이 명천의 어깨를 두들겼다.
“어차피 예상했던 일이야.”
“하지만 이 정도까지 병력을 싹싹 긁어모아 출전할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교주도 알고 있겠지. 지금이 정파의 싹을 완전히 짓밟을 절호의 기회라는 것을.”
검율천이 담담히 대답했다.
아마 자신이 교주 입장이었어도 똑같이 했을 것이다.
기회라는 놈은 미꾸라지 같아서 손안에 들어왔을 때 힘껏 움켜잡아야지, 그렇지 않으면 빠져나가서 두 번 다시 잡기 힘들게 된다.
검율천은 교주 척관혈을 높게 평가했다.
그가 아는 척관혈은 승부사였다.
일차 정마대전에서 패한 후 그의 행보를 보면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는 불같은 지도력으로 패망한 마교를 단시간에 최강의 전력을 갖춘 무력 집단으로 키워 냈다. 그 과정에서 많은 부당한 일들과 예상치 못한 피해자들이 나왔지만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밀어붙였다.
반발하는 이들도 많이 나왔고, 실제로 대항하는 이들도 나왔다. 하지만 척관혈은 압도적인 무력으로 그들을 제압했고, 본보기로 수많은 이들을 죽였다. 그 후부터는 감히 그 누구도 척관혈에게 대항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때 척관혈의 나이가 겨우 약관에 불과했다. 그 젊은 나이에 마교를 완전히 장악하고 자신의 뜻대로 운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결과가 지금 마교의 모습이었다.
마교는 역대 최고의 전성기를 보내고 있었다. 역대 그 어떤 교주도 해내지 못한 위업이었다. 당연히 척관혈의 위세 또한 최고조에 달해 있었다.
그 누구도 감히 척관혈의 명령에 토를 달수 없었다. 그가 명령을 내리면 스스로 목숨을 바칠 교도만 수천 명이 넘었다.
척관혈은 그렇게 마교의 유일무이한 절대자로서 오롯한 존재감을 발산하고 있었다.
문제는 척관혈이 언제부턴가 폐관에 몰두하며 때때로 광증을 보였다는 것이다. 그때마다 수많은 교도들이 죽어 나갔다.
다행히 상한천이 잘 수습해서 외부에 거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이 일로 인해 척관혈은 마교 내에서도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광증을 치료하기 위해 오랜 폐관에 들어간 척관혈을 대신한 자가 바로 군사 상한천이었다.
상한천은 교주의 총애를 등에 업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했다. 사대군장이나 칠대마인조차도 상한천의 명에 휘둘려야 했으니 다른 무인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상한천은 엄격한 규율을 내세워 휘하의 무인들을 통제하려 했다. 교의 율법을 지킴에 예외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상한천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규율을 어긴 자는 더욱 단호히 처벌했다.
모두가 상한천의 공을 인정했다. 그가 없었다면 마교가 지금과 같은 위세를 누릴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교주처럼 무소불위의 권한을 행사하는 것이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었다.
대놓고 반발할 수는 없었지만, 상한천의 행사에 불만을 가진 이들은 꽤 많았다. 명천은 그들 중 특히 불만이 심한 자들과 접촉해 신마련으로 끌어들였다.
덕분에 마교 내부의 사정을 손금 보듯 훤히 알 수 있게 되었다.
검율천이 말했다.
“일단 명천 너는 그들과의 연결 고리를 더욱 강화해 둬. 기회가 왔을 때 그들을 활용해야 해.”
“알고 있어요.”
“그래! 힘들겠지만 조금만 더 고생해다오.”
“네!”
명천이 힘껏 대답했다.
검율천은 그를 남겨 두고 밖으로 나왔다.
문을 열자마자 찬바람이 그의 전신을 휘감고 지나갔다.
문득 그의 눈이 빛났다. 대전 밖에 홀로 서 있는 음유경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부서지는 달빛 아래 고고히 서 있는 음유경의 모습은 월궁에서 내려온 항아 같았다.
“유경.”
“아!”
자신을 부르는 검율천의 목소리에 음유경이 뒤돌아봤다. 잠시 놀란 표정을 짓던 그녀가 이내 배시시 웃었다.
“명천과 이야기는 잘했어요?”
검율천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다가왔다. 달빛을 받으며 걸어오는 그녀의 모습은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문득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자신이 아니었으면 그녀는 여전히 신교의 성녀로서 화려한 삶을 살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후회하지 않아?”
“뭘요?”
“나와 함께하는 것 말이야. 나만 아니었으면…….”
“그런 말 하지 마요. 당신과 함께하는 것을 절대 후회하지 않으니까.”
음유경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미소를 보자 이상하게 안심이 됐다.
음유경이 있어 이곳까지 올 수 있었다. 그녀가 없었다면 그 험하고 고된 길을 걸어올 엄두를 절대 낼 수 없었을 것이다.
“고맙다.”
“나야말로 당신과 함께할 수 있어 고마울 뿐이에요. 고마워요, 율천. 신교를 위해 나서 줘서. 나만 아니었어도 당신은 야인으로 자유로운 삶을 살았을 텐데.”
검율천은 본래 욕망이 큰 사람이 아니었다. 무에 대한 열정은 있어도 권력에 대한 욕구는 거의 없는 천생 무인이었다. 그런 그가 이런 진흙탕에 몸을 담게 된 것은 바로 그녀 자신 때문이었다.
그래서 미안하고, 또 고마웠다.
이렇게 거칠고 험난한 세계로 끌어들여서.
“이제 결말의 순간이 머지않았어. 우린 반드시 신교를 정상화시킬 수 있을 거야.”
“율천!”
“모든 것을 정상화시킨 후 그와 진정한 자웅을 겨룰 거야. 아마 그 순간이 내 인생 최대의 도전이 되겠지.”
검율천이 음유경을 품에 안은 채 하늘을 올려다봤다.
***
노인은 산 정상에 홀로 서 있었다. 온 세상이 그의 발밑에 놓여 있었지만, 그의 시선은 발아래가 아닌 하늘을 향해 있었다.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은 청명하다 못해 시려 보이기까지 했다. 노인의 눈엔 푸른 하늘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노인은 푸른 하늘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한참이나 바라봤다. 만일 누군가 그를 부르지 않았다면 해가 질 때까지 하늘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을 것이다.
“주군!”
조심스럽게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있었다.
그제야 노인은 아쉬운 표정으로 푸른 하늘에서 시선을 떼고 뒤를 돌아봤다.
안개가 낀 것처럼 흐릿한 이목구비를 가진 남자가 허리를 숙인채 노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문득 노인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귀사(鬼邪).”
“또 보고 계셨던 겁니까?”
“한번 보면 눈을 뗄 수 없으니 큰일일세. 그래, 무슨 일인가?”
“드디어 마교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가? 생각보다 많이 늦었군.”
“죄송합니다.”
“그게 어찌 자네 잘못이겠는가? 그쪽에도 똑똑한 이들이 많으니 신중을 기하는 게 정상이겠지. 특히 상한천, 그 아이는 날카로운 통찰력의 소유자라네. 멋대로 휘두르는 게 가능했으면 이미 예전에 그랬겠지.”
노인의 입가에 빙그레 미소가 떠올랐다.
귀사는 그런 노인을 보며 더욱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노인은 꽤나 많은 신분의 소유자였다. 마교에서는 혈노라는 이명으로 불렸었고, 천사교에서는 교주라고 불렸다. 한때 사신제의 일원으로 활동한 적도 있었고, 그 외에도 이루 셀 수 없을 만큼 다양한 이름과 신분으로 세상을 누비고 다녔다.
그 모든 것이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해서였다.
자신이 원하는 단 한 가지를 억기 위해 평생을 투자할 만큼 그는 집요했다. 하지만 그 외의 것들에는 초연한 면모를 보였다.
노인이 다시 하늘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제야 겨우 기본 조건을 갖추게 됐군. 참으로 오래 걸렸어.”
“감축드립니다, 주군.”
“이 늙은이의 고집 때문에 자네와 다른 친구들이 고생이 많았군.”
“아닙니다.”
“약속한 대로 이번 일만 끝나면 자네들은 자유일세. 무엇을 하든 상관없으니 마음대로 살아가게나.”
“저는 주군을 따르는 것이 유일한 낙입니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말이라도 고맙군.”
노인의 입가에 어린 미소가 짙어졌다.
그때 귀사의 얼굴에 주저하는 빛이 떠올랐다. 노인은 그런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왜 그러는가? 다른 할 말이 있는 모양이군.”
“사실은…….”
“말하게나.”
“제 눈으로 직접 보지 못해 확신할 수는 없지만, 담호라는 아이 곁에 저희 측 인물이 있는 것 같습니다.”
“무슨 말인가? 우리 측 인물이 그 아이 곁에 있다니.”
처음으로 노인의 얼굴에 흥미롭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그러자 귀사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혹시 제가 권마를 무간지옥에 가뒀었다는 것은 아십니까?”
“그래! 이야기 들었지. 혼술사들을 모조리 동원했다고 했었지, 아마.”
“맞습니다. 그렇게 힘들게 가뒀던 권마가 무간지옥을 빠져나왔습니다. 그때 제가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그렇겠지. 인간의 힘으로는 그곳에서 빠져나온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니까.”
“그렇습니다. 누구도 빠져나온 예가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무간지옥이라는 이름도 붙인 것 아니겠습니까?”
“말이 길어지는군.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가?”
“기억하실 겁니다. 일전에 무간지옥에 들여보냈던 혼술사가 있던 것을.”
“호!”
처음으로 노인이 호기심을 드러냈다. 그러자 귀사가 더욱 송구스러운 얼굴을 했다.
“최근에 파악한 바로는 담호의 곁에 당시 무간지옥에 들어갔던 혼술사가 있는 것 같습니다.”
“같이 나왔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그것 참 재밌는 일이군. 그렇다면 그 후로도 쭉 그곳에서 살아남았다는 뜻이 아닌가?”
“맞습니다.”
“어쩌면 그 아이도 벽 너머를 봤을지 모르겠군. 그렇지 않나?”
귀사는 대답하지 못했다. 아니, 할 수가 없었다. 그 혼술사가 무엇을 봤는지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인은 확신하는 듯했다.
“허허허! 정말 재밌군. 재밌어. 이래서 세상일이 참 알 수 없는 거야. 누구는 평생을 경주해 벽을 무너트리려고 하는데, 누구는 자신의 뜻과 상관없이 벽 너머를 보고 왔으니.”
노인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후웅!
순간 일대의 대기가 불안하게 요동쳤다. 대기의 떨림은 곧 폭풍이 되었고, 칼바람이 휘몰아쳐 산천초목을 떨게 만들었다.
도저히 인간이 만들어 낸 현상이라고 볼 수 없는 재해와도 같은 광경에도 귀사는 놀라지 않았다. 그가 아는 노인이라면 이 정도는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노인이 웃음을 멈추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산에 휘몰아치던 바람도 멎었다. 하지만 그의 얼굴엔 여전히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귀사.”
“예!”
“그 아이가 보고 싶군.”
“데려오겠습니다.”
“제단으로 데려오게. 그곳으로 가 있을 테니까.”
“알겠습니다.”
귀사의 대답에 노인이 가볍게 손을 휘저었다. 물러나라는 뜻이었다.
귀사는 노인에게 깊숙이 고개를 숙여 보인 후 조심스럽게 물러났다.
혼자 남은 노인은 다시 하늘을 바라봤다.
“정말 녹록지 않군. 나를 견제하기 위해 그와 같은 아이를 세상에 내보내다니.”
말은 그렇게 했지만 노인은 하나도 걱정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그때였다.
“응?”
노인의 눈에 갑자기 이채가 떠올랐다.
저 먼 하늘에서 조그만 점이 급속히 확대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오늘따라 손님이 많이 찾아오는군.”
급속히 확대되는 조그만 점은 바로 사람이었다.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 누군가 하늘을 날아서 노인이 있는 산 정상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전설로만 전해지는 어풍비행(御風飛行)의 경공술이었다. 한 줄기 바람을 이용해 허공을 날아오는 전설상의 경지였다.
노인은 미소 진 얼굴로 날아오는 이를 바라봤다.
가볍게 산 정상에 내려서는 이는 그도 잘 아는 인물이었다.
“오랜만이구려. 서왕모.”
선자처럼 하얀 옷을 표표히 흩날리며 착지한 인물은 바로 사신제의 일원인 서왕모 용화설이었다.
용화설의 얼굴엔 북풍한설과 같은 냉기가 풀풀 흩날리고 있었다. 그녀가 무서운 눈으로 노인을 노려보았다.
“왜 그랬나요?”
“뭐가 말이오?”
“꼭 그래야 했나요? 내가 원했던 것은 단지 그의 무사 안위뿐이었는데. 그래서 당신의 뜻대로 강호에 대한 뜻을 접었는데. 왜 그랬어요?”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남궁인후를 만났어요.”
“흠!”
남궁인후가 거론되는 순간 노인의 눈썹이 잔뜩 찌푸렸다. 불편한 심기가 처음으로 표출되는 순간이었다.
“그는 어떻게 되었소?”
“어떻게 되었을 것 같아요?”
“죽었겠지. 내가 참으로 멍청한 질문을 했군.”
노인이 탄식을 내뱉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용화설의 눈에 원독이 가득 담겨 있었다.
눈빛만으로 사람을 찢어 죽일 수 있다면 바로 그녀와 같은 눈빛일 것이다. 그녀의 눈동자엔 살기의 폭풍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그런 용화설의 얼굴을 보며 노인이 혀를 찼다.
“쯧! 결국 알아냈나 보군. 그래서 그렇게 조심하라고 일렀거늘.”
“왜 그랬어요? 그래도 그는 당신의 친구였잖아요.”
“나는 지금도 그를 친구라고 생각하오.”
“거짓말! 친구라면서 어떻게 그를…….”
“당신은 믿지 않겠지만, 그 스스로가 원한 것이라오. 나는 단지 그 친구의 선택에 도움을 줬을 뿐.”
“난 절대로 당신을 용서할 수 없어요. 그가 용서해도 나는 당신을 용서하지 못해.”
쿠우우!
순간 용화설의 전신에서 가공할 기세가 피어올랐다. 그런 용화설을 보며 노인이 나지막이 탄식을 내뱉었다.
“하! 그래도 같은 시대의 추억을 공유했기에 당신을 죽이고 싶진 않았는데.”
“당신과 공유할 추억 따윈 내게 없어요. 당신과 함께했던 그 모든 것이 악몽으로 기억될 뿐. 호천명, 이젠 내 손으로 당신의 목숨을 거두겠어요.”
“쯧!”
노인, 호천명이 혀를 차는 순간 용화설이 달려들었다.
콰르르!
두 사람의 싸움에 산이 비명과 같은 울음을 토해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