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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권마-476화 (476/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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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6화 1장. 시대가 움직인다(1)

형문산장(荊門山莊)은 호북성 남단 형문산 중턱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형문산장의 주인은 한때 강호에서 팔비검객(八批劍客)이라는 별호로 위명을 날렸던 구중학이었다.

구중학은 불의를 극도로 싫어해서 강호에서 활동하는 내내 수많은 사마외도를 척살했다. 그 때문에 그의 주 활동 지역이었던 호북성과 호남성 일대에서는 사신으로 통할 정도였다.

그런 구중학이 강호에서 은퇴하고 세운 곳이 바로 형문산장이었다. 본래 은퇴를 했으면 강호에서 완전히 손을 떼는 것이 관례였지만, 구중학은 특이하게도 강호에서 은퇴한 후 더욱 영향력이 커졌다.

그는 팔비검객이라는 별호를 흠모해 찾아온 이들을 제자로 받아들였다. 특히 고관대작의 자제 등을 많이 받아들여 영향력을 확대했다. 말이 산장이었지, 사실은 돈을 받고 무공을 가르치는 무관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구중학은 그렇게 가르친 제자들 중 일부를 인근의 상단에 파견 보냈다. 제자들을 상단의 호위무사로 취직시킨 것이다. 상단에서 자리를 잡은 제자들은 다시 다른 제자들을 불러들였고, 그렇게 형문산장은 호북성에서 세를 불려 갔다.

비록 전통의 강호인 무당파와 제갈세가에 비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빠른 시간 안에 호북성에서 탄탄하게 기반을 다질 수 있었다. 그런 형문산장이 강호에서의 활동을 완전히 멈춘 것은 바로 마교가 무당파와 제갈세가를 무너트린 것을 본 후였다.

구중학은 외부로 파견 보냈던 제자들을 모두 불러들인 후 외부의 활동을 완전히 금지했다. 말은 형문산장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겠다는 것이었지만, 알 만한 사람들은 모두 알았다. 마교가 두려워 몸을 바싹 엎드린 것이란 사실을.

호북성의 맹주인 무당파와 제갈세가마저 마교의 광풍에 쓸려 나간 마당이었다. 괜히 고개를 빳빳이 들고 있다가는 마교의 서슬 퍼런 칼날에 모가지가 날아가기 십상이었다.

구중학은 자신의 거처에서 홀로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의 나이 일흔이 넘었지만 젊은 사람들 못지않게 건장한 체구와 혈색을 유지하고 있었다. 정력은 어찌나 좋은지 처첩만 다섯 명이 넘었다.

탁!

구중학이 거칠게 술잔을 내려놨다.

“빌어먹을!”

벌써 일 년째 형문산장 안에서만 생활하다 보니 갑갑함이 최고조에 달했다. 처첩과 관계를 하는 것도 어디 하루 이틀 일이지, 이렇게 매일같이 형문산장 안에서만 생활하다 보니 마치 새장 안에 갇힌 새 같았다.

“더러운 마교 새끼들! 무당파와 제갈세가를 쓸어버렸으면 그냥 호북성에서 물러날 것이지, 지부는 또 왜 차린단 말인가?”

마교가 호북성에 지부를 차린 후 형문산장이 설 곳은 더더욱 좁아졌다. 그가 제자들을 형문산장으로 불러들인 것은 제자들의 안전 때문이 아니라, 상단이 더 이상 형문산장의 제자들을 고용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다.

누구보다 시류에 민감한 상인들이었다. 그들은 대세를 따라 마교와 계약을 하고 무인들을 공급받았다. 당연히 형문산장과 같은 중견 문파와는 거래를 끊을 수밖에 없었다.

구중학은 그 사실이 못내 분하고 수치스러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교에 대항해 싸울 엄두는 낼 수조차 없었다.

그가 강호에서 은퇴를 하고 형문산장을 만든 것은 더 이상 혈기 왕성한 젊은 무인들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은퇴 형식으로 강호에서 물러나 제자들을 키워 치부를 했던 것이다.

강호에서 팔비검객으로 활동할 때보다 제자들을 보내 벌어들이는 이득이 몇 배나 더 컸다. 그렇게 벌어들인 돈으로 황제와 같은 생활을 했었는데, 마교 때문에 그마저도 더 이상 향유하지 못하게 된 것이 그저 분하기만 했다.

그때 밖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부님, 제자 정주명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들어오너라.”

잠시 후 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구중학의 둘째 제자인 정주명이었다. 정주명은 들어오자마자 사부에게 머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하지만 구중학은 본체만체하며 술잔을 기울였다.

“사부님.”

“무슨 일이냐? 또 형문산장이 그 무슨 맹과 손을 잡아야 한다는 소리를 하려고 온 것은 아니겠지?”

“죄송합니다.”

“너?”

순간 구중학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정주명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창천맹에서 또다시 사자가 왔었습니다. 더 늦기 전에 그들과 손을 잡아야 합니다.”

“시끄럽다. 그 말은 꺼내지 말라고 내가 몇 번이나 말을 했더냐? 그런 애송이들과 손을 잡을 이유가 없다.”

“하지만 이대로 가다가는 우리 형문산장은 서서히 고사하고 말 겁니다. 다시 한 번 생각해 주십시오, 사부님.”

정주명의 목소리는 절절했다. 하지만 그를 바라보는 구중학의 눈빛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네가 한 번 더 그따위 소리를 한다면 형문산장에서 쫓아내겠다.”

“사부님!”

“어허! 그래도? 네가 정녕 형문산장을 나가고 싶은 것이냐? 그렇다면 나에게 배운 모든 무공을 폐하고 나가거라.”

구중학의 차가운 목소리가 실내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결국 정주명은 그 이상 어떤 말도 하지 못하고 쓸쓸히 밖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형문산장을 설립하기 이전의 구중학은 강호의 대협이었다. 불의에 대항해 일벌백계를 행하던 그의 모습에 반해 제자가 되었건만, 산장에서 칩거한 이후 구중학은 백팔십도 돌변했다.

예전의 의기는 사라지고 부귀영화만 밝히는 속물적인 모습만 부각됐다. 그 사실이 못내 안타까운 정주명이었다.

“휴우!”

그가 문을 열며 나직이 한숨을 내쉴 때였다.

“으헉!”

“습격이다.”

갑자기 비명성과 고함성이 밖에서 들려왔다.

“무슨?”

정주명과 구중학의 안색이 동시에 돌변했다.

“마교다! 마교 놈들이 쳐들어왔다.”

그 순간 누군가의 비명과도 같은 목소리가 유독 크게 들려왔다.

“마교라니? 마교가 왜?”

구중학이 이해를 못 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마교의 심기를 거슬리지 않기 위해 전 제자들을 불러들인 그였다. 때문에 마교가 형문산장에 쳐들어왔다는 사실을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 순간에도 제자들의 비명 소리가 형문산장 안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더 이상 생각하고 자시고 할 여유가 없었다.

두 사람은 급히 밖으로 나왔다. 그런 그들의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온 풍경은 마치 해일처럼 밀려오는 마교의 무인들이었다. 끝이 어디인지 보이지도 않았다.

형문산장의 무인들은 나름 최선을 다해 저항을 했지만, 파도처럼 끝없이 밀려오는 마교 무인들에게 휩쓸려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모든 것이 무너지고 있었다.

구중학이 평생을 경주해 쌓아온 모든 것이.

“이게 무슨? 왜 마……교가?”

그는 너무 놀라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머릿속이 하얘져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는 것이다.

“크아악!”

“아악!”

그 순간에도 형문산장 무인들의 처절한 비명성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멈춰랏!”

정주명은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이 검을 빼 들고 마교의 무인들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 순간 마교의 무인들 사이에서 네 명의 무인들이 정주명을 향해 튀어나갔다.

그들의 검이 무심하게 허공을 갈랐다. 마치 자로 잰 것처럼 절묘한 합공이었다.

슈가각!

단 일 합에 정주명의 팔이 날아가고, 이 검에 두 다리가 잘렸다. 삼 검에 머리가 목에서 떨어졌다.

정주명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절명했다.

구중학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머리로는 검을 꺼내 휘둘러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타닥!

그사이 정주명을 죽인 무인들이 그를 향해 달려왔다.

그들의 살기 어린 눈이 구중학의 눈동자와 마주쳤다.

“으아아!”

그제야 구중학은 비명과 같은 기합성을 내뱉으며 검을 꺼내 들었다.

캉!

하지만 검을 채 휘두르기 전에 선두에서 달려오던 무인이 그의 검을 튕겨 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뒤에서 달려오던 무인들이 구중학의 양다리에 검을 찔러 넣었다.

“크악!”

구중학이 비명과 함께 무릎을 꿇었다.

푸욱!

그 순간 마지막 무인이 그의 오른쪽 어깨에 검을 찔러 넣었다. 순식간에 검이 구중학의 어깨를 관통했다.

구중학은 더 이상 비명을 지르지 못했다. 맨 처음 그의 검을 튕겨 냈던 무인이 어느새 검으로 목을 겨누고 있었기 때문이다.

꿀꺽!

구중학은 목구멍까지 치솟아 올라왔던 비명을 억지로 눌러 삼켰다.

‘무슨?’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네 명은 마치 하나의 사고(思考)를 공유한 것처럼 움직임에 일말의 군더더기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적을 제압하고 죽이는 데 최적화된 살인 병기들이었다.

그때였다.

쿠우우!

갑자기 대기가 일렁였다.

그와 동시에 메뚜기 떼처럼 형문산장을 장악하고 있던 마교의 무인들이 양쪽으로 쫙 갈라졌다. 그 사이로 그가 걸어왔다.

“아!”

‘그’를 본 순간 구중학이 자신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말았다. 그를 본 순간 머릿속이 새까맣게 변했다.

몸이 제멋대로 덜덜 떨렸다. 떨리는 두 다리 사이로 누런 물이 흘러나왔다. 오줌을 지리고 만 것이다.

비록 무인으로서의 투쟁심을 버린 지 오래지만, 그래도 일문의 주인인 구중학이었다. 그런 구중학이 공포에 질려 오줌을 싸고 마는 추태를 보인 것이다. 하지만 형문산장의 제자들 중 누구도 구중학을 비난하지 못했다.

그들의 온 신경은 그에게 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마치 인간이 아닌 것 같았다.

세상 모든 악(惡)과 마(魔)가 집약된 결정체 같았다.

그는 바로 마교의 교주 척관혈이었다.

척관혈의 몸에서 흘러나온 마기가 하늘을 가렸다. 그런 광경은 난생처음이었다. 마치 인간이 아니라 마신을 보는 것 같았다.

구중학은 본능적으로 그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마교의 교……주?”

구중학의 짐작은 사실이었다.

그는 바로 마교의 교주인 척관혈이었다.

그가 발산하는 가공할 마기에 대기가 비명을 지르며 요동쳤고, 만인이 숨을 죽였다.

척관혈의 등 뒤로 마교의 수뇌부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만큼 척관혈의 가공할 존재감이 구중학의 시선을 잡고 놓아주지 않는 것이다.

척관혈이 마침내 지척까지 다가오자 구중학은 숨을 쉬는 것조차 힘들어했다. 하지만 꼭 묻고 싶은 것이 있었다.

“왜? 형문……산장은 마교에 어떤 위해도 끼치지 않았는데.”

진심으로 억울했다.

괜히 마교의 오해를 살까 봐 외부의 활동을 모두 금지시킨 구중학이었다. 마교와는 일말의 충돌도 없었는데, 왜 이런 화를 당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척관혈의 무심한 눈동자가 그의 얼굴을 향했다.

“끄으으!”

구중학은 두 눈동자가 타는 듯한 통증을 느끼고 비명을 질렀다.

척관혈은 그런 구중학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러게 왜 내가 가는 길목에 산장 따위를 세운 것이냐?”

“겨우…… 그런 이유로?”

“그보다 못한 이유로도 얼마든지 죽을 수 있는 곳이 강호다.”

“하지만 나는…….”

“쯧! 일문의 주인이 혀가 길구나.”

“컥!”

순간 구중학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얼굴이 시꺼멓게 죽어 가더니, 이내 팔과 다리까지 검게 물들었다.

푸쉬쉬!

이어 그의 몸이 가루가 되어 바람에 흩날렸다.

구중학이라는 인간이 존재했던 흔적조차 남기지 못하고 가루가 되어 사라진 것이다.

천포마공(天包魔功).

하늘까지 감쌀 수 있다는 공포의 마공이 드디어 그 본 위력을 발휘한 것이다. 완성된 천포마공의 위력은 그야말로 끔찍하기 그지없었다. 같은 마교의 무인들마저도 공포에 떨 정도로 말이다.

‘교주님께서는 이미 인간의 한계를 벗어났구나.’

‘누가 감히 교주님을 당할 수 있을까? 교주님께서는 인간이 아니라 신이시다.’

쿠쿠쿵!

형문산장을 점령한 마교의 무인들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일제히 한쪽 무릎을 꿇고 척관혈을 경배했다.

그들 중에는 상한천과 사대군장 같은 절대고수도 있었다. 그들조차도 척관혈이 발산하는 기세에 절로 경외심이 드는 것이다.

형문산장까지 오는 동안 십여 개의 문파가 개미처럼 짓밟혔다. 그들 대부분은 마교의 위세에 짓눌려 활동을 멈춘 문파들이었다. 하지만 척관혈은 그들 문파가 자신의 앞길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완전히 멸문시켜 두 번 다시 일어날 수 없게 만들었다.

형문산장 이백오십 명 무인들이 죽었지만, 척관혈은 별 감흥이 없는 얼굴이었다.

그의 시선은 북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북쪽 소화산이 있는 곳. 창천맹이 그의 목적지였다.

항복 따윈 받아 주지 않겠다. 꼬리를 말고 납작 엎드려도 소용없다. 창천맹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모든 문파들을 멸문시킬 것이다.

그것이 척관혈의 의지였다.

실제로 척관혈은 이곳까지 오는 동안 발에 걸린 모든 문파를 멸문시켜 자신의 의지를 증명했다.

그의 의지는 적들뿐 아니라 마교의 무인들까지도 두렵게 만들었다. 실제로 몇몇 무인들은 우려 섞인 눈빛으로 척관혈을 바라보기도 했다.

‘정말 교주께서는 전 무림을 적으로 돌리려는 건가?’

‘이렇게 가다가는 돌아올 수 없는 은원의 강을 건너고 말 것이다.’

하지만 척관혈의 위세에 짓눌린 그들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때였다.

“군사.”

“예! 교주님.”

척관혈이 상한천을 불렀다.

“운향은 어떻게 되었느냐?”

“죄송합니다.”

“여전히 찾지 못한 것이냐?”

“죽여 주시옵소서.”

상한천이 척관혈 앞에 무릎을 꿇었다.

숭산에서 제를 지낸 직후 마모 단운향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상한천은 최선을 다해 단운향을 추적하고 있었지만 아직까지 찾아내지 못했다.

“최대한 빨리 그녀를 찾아내라. 그녀에게 친히 물어볼 것이 있으니.”

“알겠습니다.”

쿵!

상한천이 머리를 바닥에 찧었다. 이마가 찢겨져 나가 피가 사방으로 튀었지만 상한천은 고통조차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척관혈에게서 흘러나오는 마기가 냉철한 상한천의 이성마저도 뒤흔들었기 때문이다.

척관혈이 걸음을 옮겼다.

그의 걸음은 북쪽으로 향했다. 이제 창천맹이 있는 섬서성이 그리 멀지 않았다.

척관혈의 마기가 더욱 거세게 일렁였다.

‘권마!’

그곳에 그가 있었다.

이제 곧 그를 볼 수 있을 것이다.

‘너는 이런 쭉정이들과 다르길 기대하마.’

그가 걷는 길에 죽음이 쌓였다.

그의 앞길에 존재하는 그 어떤 문파도, 그 어떤 무인도 죽음을 피하지 못했다.

척관혈이 몰고 온 죽음이 온 대지를 뒤덮었다.

죽음을 몰고 온 마의 화신.

사람들은 언제부턴가 그를 사신(死神)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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